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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시대를 사는 의인

마태복음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879 추천 수 0 2011.04.30 23:51:29
.........
성경본문 : 마1:18-25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07.12.16 “분노의 시대를 사는 의인”
(Righteous Person Living in the Age of Anger)
--마태복음 1:18-25
1.

분노가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마음에 분노 한 두 조각 품지 않은 사람을 찾기 어려워 보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문명이 발전했고 가장 교육 수준도 높은 우리 시대에, 분노의 수준도 제일 높고 강하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분노가 얼마나 크던지, 한 번 터져 버리면 통제할 수 없습니다. 지난 4월에 버지니아 텍에서 일어난 총기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마음 속에 이글이글 타고 있는 분노가 누구룰 향한 것인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분노를 쌓아놓고 있다가 그만 더 이상 억압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면, 수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사고로 번집니다. 우리는 지금 가장 위험한 시대, 분노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분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 중 하나입니다. 우리 각자를 한 번 정직하게 돌아 보십시다. 나는 어떻습니까? 나의 마음 안에도 분노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혹시 없는 체하는 것은 아닙니까? 대면하기 싫어서 외면하고 무시해 온 분노가 마음 한 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혹은, 분노로 인해 마음 편한 날이 하루도 없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마치, 마음 속에 화로를 들여 놓고 사는 듯한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이제는 불씨가 꺼질만도 한데, 혹은 이미 꺼진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에 다시 불길이 살아올라, 열기를 주체할 수 없는 고통을 몇 년째 겪고 있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오늘, 강림절 셋째 주일, 강림의 소식 앞에서 분노의 문제로 인해 번민했던 한 사람을 만나심으로, 저와 여러분의 분노의 문제를 대면해 보기를 기원합니다.

2.

나사렛의 요셉, 그는 메시야를 아들로 받아들여 양육하는 영예와 특권을 얻기 전, 먼저 분노의 문제에 직면했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임신하게 된다는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시간이 지나면서 몸에 변화가 생기는 것을 느꼈습니다. 가브리엘의 말이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임신한 것이 확실해지자, 마리아는 가장 먼저 요셉을 찾아갑니다.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요셉이 믿어줄까? 요셉이 의심하고 나를 간음한 여자라고 폭로하면 어쩌지?” 앞 일이 어찌될지 알 수 없었으나, 그것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미 죽기를 결심한 몸,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리라고 믿고, 두렵고 떨리지만 요셉을 마주합니다.

마리아는 요셉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합니다. 얼마 전,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은 이야기와, 천사가 전해 준 소식과, 그리고 자기 몸에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해 줍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 마리아는 차마 요셉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설명을 다 끝내고, 마리아는 내면의 모든 힘을 끌어 모아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요셉, 모든 것을 당신에게 맡기겠어요. 제 말을 믿어도 좋고, 믿지 않아도 어쩔 수 없어요. 당신의 처분에 맡기겠어요. 저는 이미 죽을 각오를 했으니까요.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저도 어쩔 수 없는 일이예요. 그러니 당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원망하지 않겠어요.”

집으로 돌아온 요셉은 마음에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의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이런 저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음을 믿지만, 세상에,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가 임신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것을 믿겠습니까? 마리아가 꾸며대도 분수 없이 꾸며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것일까? 누구에게 성폭행을 당했나? 사실, 기독교를 비방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마리아가 로마 군인에게 성폭행을 당해서 임신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그런 일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참혹한 일을 당했다고 보기에는 마리아가 너무나도 침착하고 평온해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만나는 애인이 있었고, 그 애인과 정을 통하여 임신한 것이란 말인가? 그리고는 막상 문제가 될 것 같으니까 성령을 끌어 들여 나를 속이려는 것인가? 자기가 아는 마리아는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지금의 현상을 설명할 아무런 방도가 없습니다.

3.

여러분, 오늘 읽은 본문에서, 18절과 19절 사이에 암시되어 있는 많은 사연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18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나서,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라는 구절과, 19절,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는 구절 사이에는, 요셉의 기나긴 고민과 씨름이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안 다음, 얼마 동안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요셉은 그 문제를 두고 심하게 번민하게 되었고, 마침내 조용히 파혼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의 요셉의 심정을 한 번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19절에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오해합니다. 마치, 요셉이 마리아의 고백을 듣고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아무런 감정적인 반응도 나타내지 않고, 의연하고 태연하게 모든 일을 처리한 것처럼 오해합니다. 우리에게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너무 지나치게 이상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셉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저와 여러분과 별로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말은 그가 성인이었다는 뜻도 아니고, 비범한 신앙의 위인이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와 같은 감정과 혈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것을 처리하는 방법에 있어서 “의로왔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고백을 믿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요셉이 처음부터 마리아의 고백을 사실로 믿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럼, 마리아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메시야를 임신한 것을 믿었으면서도 요셉이 가만히 파혼하려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러면 그 사람은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요셉은, 결혼하여 같이 살다 보면,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부지불식간에 방해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파혼하려 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농담조로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신기(神氣)가 있는 여자와 살고 싶은 남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대답도 그럴 듯합니다만, 그렇게 되면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이는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니,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해라”라고 말하는 장면이 필요가 없어집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는 여러분과 저와 별로 다름 없는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가정은 마리아가 자신이 아닌 다른 애인을 가지고 있으며, 부정하게 임신해 놓고 그것을 성령의 잉태로 꾸며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마침내 조용히 파혼하기로 결정하기 전까지 요셉의 심정을 어느 정도 헤아려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에게서 분노를 읽습니다. 이렇게 반문하고 싶은 분도 계실 것입니다. “아니,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 분노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의로운 사람일수록, 바르게 살려는 사람일수록, 거룩하게 사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일수록, 불의에 대해, 부정에 대해, 죄에 대해 더 의분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가 자신을 배신한 것에 대해서도 화가 났겠지만, 하나님을 이용해서 그 부정을 덮으려는 간교한 꾀에 대해 더욱 화가 났을 것입니다. 그가 의로운만큼 그의 분노는 더욱 강했을 것입니다.

타오르는 분노로 인해 요셉은 많은 밤을 하얗게 밤을 지새우면서, 마리아를 몇 번이고 죽였다 살렸다 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부정하고 부정직한 태도를 생각해 보면, 용서할 가치도 없어 보였습니다. 자기 눈 앞에서 돌에 맞아 죽는 모습을 보아야만 분이 풀릴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반대편으로 돌아 누우면, 그 동안 마리아와 지냈던 다정한 순간들이 떠오르고 그의 순결한 모습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마리아가 그럴 리가 없는데”라는 생각과 함께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립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리아가 불쌍해져서, “그래,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보내 줄께”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려 봅니다. 하지만 금새 그의 마음에는 분노의 불길이 다시 솟아 오릅니다. “네가 어떻게 나를 배신할 수 있어! 네가 어떻게 나를!” 눈에 핏기가 돋습니다.

4.

좋은 믿음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오해가 있습니다. 화를 내는 것은 죄이며, 믿음이 좋은 사람은 화를 내서는 안된다고 오해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오해인지 모릅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감정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좋은 감정만이 아니라 나쁜 감정까지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미움을 느끼는 것, 분노를 느끼는 것, 시기심을 느끼는 것, 더 가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자연히 생기는 감정입니다. 문제는 그런 감정이 일어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감정에 둥지를 틀고 머물러 있는 것이며, 또한 그 감정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새가 내 머리 위로 지나가는 일을 막을 수는 없지만, 내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이것은 분노와 같은 나쁜 감정에 대해 비유로 한 말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막을 수 없습니다. 물론, 영적 생활이 깊어지면, 과거보다는 분노를 느끼는 빈도가 적어지기는 합니다. 또한 전에는 분노하던 일에 대해 전혀 분노를 느끼지 않게 되기도 하고, 전에는 전혀 분노를 느끼지 않던 일에 분노를 느끼기도 합니다. 영성이 깊어진다는 것은 모든 감정이 마비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감정이 정화되고, 감정의 반응의 조건이 달라지며, 그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분노가 마음에서 일어날 때, 가장 먼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일에 대해 분노를 느끼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에 대해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죄책감을 가지거나 부끄러움을 느끼지도 말아야 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누구나 다 경험하는 일입니다.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의로운 요셉과 의롭지 않은 저와 여러분의 차이는 분노를 느낀 그 다음에 생깁니다.

분노의 감정을 만났을 때,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분노의 감정을 억압하는 것이 하나이고, 분노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또 다른 하나입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 혹은 스스로를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주로 분노의 감정을 억압하는 편을 택합니다. 반면, 분노의 감정을 파괴적인 방법으로 표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믿는다는 사람들도 이런 선택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억압도, 파괴적인 표출도 분노의 감정에 대한 해답이 아닙니다. 분노의 감정을 억압하게 되면, 잠시 없어지는 것 같지만,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게 됩니다. 그렇게 억압해서 밀어 넣은 분노가 쌓이고 쌓여 마침내 폭발하게 되면, 그 때는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형편이 되어 버립니다. 따라서 그렇게 한도 끝도 없이 억압하는 것보다는 그 때 그 때 표출시키는 것이 비교적 안전해 보입니다만, 그것도 역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더구나, 파괴적인 방법으로 분노를 표출시키다 보면, 그 표현 방법이 점점 심해집니다. 처음에는 종이 한 장 구겨서 버리는 것으로 만족하던 사람이 얼마 가지 않아 책 한 권을 북북 찢어 버려야 속이 풀립니다. 그릇 하나 깨뜨리는 것으로 시작한 사람이 나중에는 찬장 그릇을 다 깨뜨려야 분이 풀립니다. 나약한 아내나 아이에게 사소한 손찌검으로 시작한 사람이 나중에는 심각한 폭행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5.

다른 방도는 없을까요? 억압도 방법이 아니고 분출도 방법이 아니라면,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옛날부터 경건한 사람들이 분노를 해결하던 또 하나의 방법이 있습니다. 자신의 분노에 대해 하나님께 고백하고 도움을 청하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분노의 정체를 밝히고, 그 감정을 해소하며, 그 문제를 풀어갈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경건한 사람들이 분노의 문제를 이렇게 해결했다는 사실은, 시편을 읽으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 시편에 나오는 150편의 기도시편 중 하나님께 자신의 분노를 드러내놓고 한탄하며 탄원하는 기도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 기도들을 보면, 단지 나의 원통함을 알아 달라고 기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을 괴롭게 하는 사람들을 저주하기까지 합니다. 그런 대목을 읽다가 보면, “아니, 믿는다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지?”라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시편 109편에서 기도자는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악인을 시켜, 그와 맞서게 하십시오. 죄인이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고발하게 하십시오. 그가 재판을 받을 때에, 유죄 판결을 받게 하십시오. 그가 하는 기도는 죄가 되게 하십시오. 그가 살 날을 짭게 하시고 그가 하던 일도 다른 사람이 하게 하십시오. 그 자식들은 아버지 없는 자식이 되게 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게 하십시오. 그 자식들언 떠돌아다니면서 구걸하는 신세가 되고, 폐허가 된 집에서마저 쫓겨나서 밥을 빌어먹게 하십시오”(6-10절). 너무하다 싶지 않습니까? 성경에서 109장을 빼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도들은, 분노의 감정을 어찌할 수 없을 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 앞에 내어 놓고 도움을 구하는 모범을 보여줍니다. 원수들에 대한 저주의 기도들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자신의 감정에 정직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렇게 내어놓고 기도할 때, 우리는 그 분노의 감정으로부터 풀려나고, 잠잠히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얻게 됩니다.

여기서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말의 뜻을 밝혀야 하겠습니다. 유대적인 배경에서 ‘의롭다’는 말은 율법에 따라 곧이 곧대로 산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만일 요셉이 율법을 곧이 곧대로 순종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마리아가 투석형으로 처형 당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헬라적인 배경에서 ‘의롭다’는 말은 ‘정의롭다’는 뜻입니다. 요셉이 이런 의미에서 정의로운 사람이었다면, 그는 의분을 참지 못하고 마리아를 법의 심판대 앞에 세웠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의롭다’는 말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안에서 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되 형식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분으로 믿으며, 그분과의 사귐을 통해 매사를 결정해 가는 것을 말합니다. 요셉이 그렇게 살았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6.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말의 뜻이 그런 것이라면, 저는 이렇게 상상해 봅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 밤마다 혹은 기도할 때마다, 자신의 복잡한 심경과 마리아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하나님 앞에 털어놓고, 질문하기도 하고, 항의하기도 하고, 또한 통곡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착한 사람’으로 행동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옛날, 하나님 앞에서 저주의 기도를 드리기에 주저하지 않았던 시편의 기도자들처럼, 그도 역시 정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 놓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천사가 그의 꿈에 나타나 응답을 준 것은 이렇게 기도하며 씨름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지, 갑자기 그냥 불쑥 나타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조 만나스라는 영성가가 쓴 시 한 편은 분노의 감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사람의 심정을 잘 그려줍니다. 요셉의 기도가 이러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분노가 솟구쳐 오릅니다.
거의 제어할 수 없을 만큼.
제가 무슨 일을 저지를까 두렵습니다.

이토록 화가 치밀 줄은
예전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저의 감정의 골이 이토록 깊음에 놀랍니다.
저의 온몸이 분노로 끓어오름을 느낍니다.
땀이 흐르고, 사지가 부들거리고, 목소리가 떨립니다.

부드러운 언어 뒤로 저를 숨길 수가 없습니다.
온화한 미소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분노를 삭힐 수 있으면 좋으련만.
몸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마음 깊은 속에서 절규할 수 있다면!

여기 당신 앞에
제가 내놓을 수 있는 것은 분노,
타오르는 격정뿐입니다.
이 격분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나 적어도 당신에게는
평온을 가장할 필요도,
머리에 일고 있는 뜨거운 감정의 언어들을
부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부드럽고 경건한 언어로
감명을 주려고 애쓸 필요도,
"화내지 말아라"라는 말을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표현할 수 없으리만큼
언어에 담을 수 없으리만큼
화가 솟구치고 분노가 밀려옵니다.

저를 받아 주십시오
있는 그대로의 저를.
당신께 분노를 퍼부었던 사람들을 받아들이셨듯이.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고 치유해 주십시오
제가 타인과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보호해 주시고,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지 않도록 살펴 주십시오.
당신의 사랑의 손길을 제게 얹어 주십시오.
제가 거부의 몸짓을 할 때조차도
저를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평온과 고요를 되찾을 때까지.

제가 머무르는 곳에서
저를 만나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모든 것을,
저의 분노, 저의 혼돈,
저의 눈물, 저의 죄의식을
받아들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크신 연민 안에
저를 안아 주시고 저를 치유해 주십시오
저의 마음을 부드럽고 고요하게 가다듬어 주십시오
마치 당신의 마음처럼.
(조 만나스, <햇살처럼 비껴오시는 당신> 중에서)


7.

지난 해의 일입니다. 어느 교우께서 병원에 다녀 와 제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분의 허락을 받고 여러분과 나눕니다.) 그분은 어릴 때부터 홀로 미국으로 유학을 와서 공부하여 성공을 이룬 음악가입니다. 어느 정도의 명성도 얻었고, 다복한 가정을 꾸려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몸이 좋지 않아서 여러 가지의 검사를 했는데, 의사의 최종 판결이 청천 벽력과 같았습니다. 그의 질환은 완치될 수 없으며, 유일한 방책은 악화되지 않게 하는 것이며, 따라서 미래의 언젠가는 연주를 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판정이었습니다.

그는 이 판결을 듣고 와서 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는 우시면서 이렇게 따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뭐 때문에 나에게 이러시는 거예요?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구요? 어떻게 저로부터 음악을 빼앗아 가실 수가 있어요? 그것은 제게 생명과 같은 거예요. 저는 지금까지 이것 때문에 살았어요. 그런데 다른 거 다 놔 두고, 왜 이것을 빼앗아 가겠다는 거예요? 어쩜 이러실 수 있어요? 왜 이러시는 거냐구요?” 저는 그 항의를 듣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사들이 이런 때 흔히 하는 말,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로, 그 자매를 위해 기도하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는 치유의 과정이라는 사실입니다. 너무나도 억울한 어려움을 당했을 때, 그 원통함과 억울함과 분노를 털어놓아야 하는데, 하나님이 아니고 누가 그것을 받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멀리 있는 것 같고 보이지 않으니, 그 대신 목사에게 그 분노의 감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픔을 당한 사람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멱살을 잡히는 것도 참 의미 있는 일이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한 사람의 아픔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제게 맡겨진 짐이 참 고귀하게 느껴졌습니다.

제 믿음이 적중했음을, 얼마 지나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매는 얼마 후에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지금도 계속 치료를 받고 있고, 앞으로 어찌될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다시 활기차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게는 여러 번, 그 때 죄송했다고 말했지만, 저는 오히려 그렇게 저를 찾아준 것에 대해 그리고 그렇게 정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에 대해 감사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 자매께서도, 나중에 하시는 말씀이, 그 때 목사님이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라는 식으로 변호하려 하지 않고, “저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분노를 흡수해 주어서 신속히 회복된 것 같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자매는 자신의 분노를,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가져가지는 않았지만, 대신 목사에게 가져와 털어 놓음으로써 가슴 속에 타오르는 불길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분노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조차 good girl 혹은 good boy가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오십시오. 여러분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토해 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차마 할 수 없는 말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차마 할 수 없는 행동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할 사람이 필요하시다면, 저를 찾아 오시기 바랍니다. 제 멱살이라도 잡아 흔드시고, 제 옷자락이라도 찢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대신해 당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중에 분노의 불길은 가라앉고, 상황에 대한 바른 시각을 얻을 것이며,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와 영감이 주어질 것입니다.

8.

강림절 혹은 대림절 셋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오늘 우리는 세 번째 강림절 양초, 기쁨을 상징하는 분홍색 양초에 불을 붙였습니다. 강림절의 기쁨을 생각하면서, 혼란과 좌절과 분노에 휩싸여 있던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다. 동시에 그의 의로움을 생각해 보십시다. 그는 하나님과 살아있는 사귐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분노의 감정까지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가 그것을 털어놓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결국 메시야를 양육한 아버지로서 우리에게 기억되었습니다. 만일 그가 법대로 하기로 선택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에 그가 섣불리 단정하고는 자신의 의분에 따라 행동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가룟 유다보다도 더 심각한 죄를 범할 뻔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잘 못 다룬 분노는 이렇게 크게 일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분노라도 하찮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작은 불씨 하나가 거대한 삼림을 먹어 삼키듯, 작은 분노가 인생 전체를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강림절에, 조용히 물러 앉아,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분노를 보십시다. 꺼진 불도 다시 보는 심정으로 우리 마음 속을 들여다 보십시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십시다.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상처와 분노와 증오심을 하나님 앞에 토해 내시기 바랍니다. 요셉의 경우도, 한 번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음의 분노의 불이 꺼질 때까지,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실 때까지, 그분 앞에 계속 머물러 계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치료하시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기도

다윗의 분노를 들어 주셨던 주님,
요셉의 분노를 돌보셨던 주님,
저희에게도 분노가 있습니다.
저희로 하여금
저희 감정에 진실해지게 하시고,
그 감정을 주님께 가지고 나아가게 하소서.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시고
속에서 타오르는 분노의 불길에 소멸되지 않게 하소서.
그 불길을 잡아
주님의 뜻을 이루는 데 사용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분노의 시대를 사는 의인들로 만들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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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0 사사기 끝까지 같은 걸음으로 삿8:22-35  김영봉 목사  2011-04-30 2629
5159 사사기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 삿7:1-8  김영봉 목사  2011-04-30 4140
5158 사사기 우리 안에 있는 우상 삿6:25-32  김영봉 목사  2011-04-30 2923
5157 사사기 너에게 있는 그 힘을 가지고 가라 삿6:11-16  김영봉 목사  2011-04-30 2916
5156 골로새서 성경에는 성공이 없다 골3:22-25  김영봉 목사  2011-04-30 2737
» 마태복음 분노의 시대를 사는 의인 마1:18-25  김영봉 목사  2011-04-30 2879
5154 누가복음 반가운, 그러나 불편한, 그러나 복된 소식 눅1:26-38  김영봉 목사  2011-04-30 3056
5153 마태복음 영화4-밀양으로 가라 마6:5-6  김영봉 목사  2011-04-30 2104
5152 누가복음 영화3-거울을 들어 주라 눅15:11-24  김영봉 목사  2011-04-30 2290
5151 시편 영화2-값을 지불하라 시51:1-17  김영봉 목사  2011-04-30 2165
5150 마태복음 영화1-연극을 끝내라 마19:16-22  김영봉 목사  2011-04-30 2130
5149 창세기 하나님께서 주실 안식 창2:1-3  김영봉 목사  2011-04-30 2380
5148 마태복음 교회가 살아야 세상이 산다. 마18:18-20  김영봉 목사  2011-04-30 2750
5147 신명기 작은 교회, 큰 목회”(Small Church, Big Ministry) 신4:5-8  김영봉 목사  2011-04-30 2686
5146 에배소서 가정5-약속 있는 첫 계명 엡6:1-4  도건일 목사  2011-04-30 2897
5145 누가복음 가정4-믿는 사람만이 보낼 수 있다 눅2:25-35  김영봉 목사  2011-04-30 2404
5144 창세기 가정3-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이 함께 창26:26-33  김영봉 목사  2011-04-30 2253
5143 창세기 가정2-포기할 때 사랑은 시작된다 창22:1-19  김영봉 목사  2011-04-30 2748
5142 마태복음 가정1-태초에 가정이 있었다 마10:34-39  김영봉 목사  2011-04-30 2888
5141 디모데전 앞 날을 위한 든든한 기초 딤전6:17-19  김영봉 목사  2011-04-30 2483
5140 디모데전 가장 수지 맞는 일"(The Most Profitable Thing) 딤전4:6-10  김영봉 목사  2011-04-30 2787
5139 디모데전 푹 절여진 배추처럼" (Like Cabbage Completely Salted)" 딤전3:1-7  김영봉 목사  2011-04-30 2375
5138 디모데전 아름다움은 장식품이 아닙니다"(Beauty Is Not A Decoration)" 딤전4:11-16  김영봉 목사  2011-04-30 2094
5137 디모데전 나의 나 된 것"(He Made Me What I Am)" 딤전1:12-17  김영봉 목사  2011-04-30 2842
5136 마가복음 겨자씨의 믿음 막4:30∼32  류두현 목사  2011-04-29 3395
5135 시편 왕의 결혼을 축하하는 노래 시45:1-17  한태완 목사  2011-04-28 2761
5134 창세기 어디든지 예수 나를 이끌면 창28:10-19  김동호 목사  2011-04-28 2744
5133 민수기 미션 임파시블. 민13:25-33  김동호 목사  2011-04-28 2413
5132 시편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하나님. 시23:1-6  김동호 목사  2011-04-28 2709
5131 누가복음 쟁기를 잡았으면. 눅9:57-62.  김동호 목사  2011-04-28 3080
5130 레위기 왜 안식년인가? 레25:1-7  김동호 목사  2011-04-28 1864
5129 히브리서 복 주시는 하나님. 히11:1-6.  김동호 목사  2011-04-28 2427
5128 시편 구원의 하나님 시3:1-3  김동호 목사  2011-04-28 2106
5127 마태복음 크리스천의 선교적 사명 마28:16-20  김동호 목사  2011-04-28 2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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