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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7:1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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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08.9.7
‘영적 여정에로의 초대’ 1:
"천국의 여행자"
(Traveler of Heaven)
마태복음7:13-14
1.
여러분에게 여쭙겠습니다. "오늘 당장 죽으면 여러분은 천국에 갈 자신이 있습니까?" 이 질문을 처음 들어 보는 분도 계시겠지만, 전도하는 사람들로부터 한 번쯤 들어 본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그럼요, 저는 분명히 천국에 갑니다."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글쎄요, 저는 자신이 없는데요."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적당한 답을 찾기 전에, 먼저 이 질문이 가지고 있는 함정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질문은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문구만큼이나 기독교의 복음을 축소시킬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이 질문만 두고 보면, 예수 믿는 것은 죽고 나서 천국에 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마치 천국 입장권을 얻는 일처럼 보입니다. 이 질문을 들이대며 전도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의심하지 말고, 담대하게 "예, 나는 지금 당장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라고 답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믿음은 옳지만, 그것이 예수 믿는 것의 전부가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노아의 방주(Noah’s ark)에 비교하여 구원을 이해하고 설명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구원의 배에 올라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든지 구원의 배에 올라타면, 그 순간 구원을 얻는다고 믿습니다. 배 안에 있는 사람은 구원을 받은 사람이고, 배 밖에 있는 사람은 구원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배에 올라탄 사람이 배 안에서 어떤 행동을 하느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배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천국 입장권을 손에 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영적인 자만심에 빠지기 쉽습니다. 구원의 배에 올라탄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듭 났다는 사실에 감격한 나머지, 계속하여 성장해 가는 것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은 매우 강한 반면, 그들의 말과 행실에서 믿음의 열매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Born Again한 날짜를 기억하고, 처음 믿었을 때의 눈물겨운 체험만을 간증합니다. 회심한 이야기를 들으면 분명히 뭔가 일어난 것 같은데, 지금 그의 말과 행실을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났나 의문이 듭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 전도의 열심이 강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말과 행실이 어떤지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구원의 배에 타고 있다는 하나의 사실에 모든 의미를 부여하고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딤후 4:2) 전도하기에 힘씁니다. 그렇게 하는 전도가 때로 열매를 맺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에 믿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도록 만들어 줍니다.
아무리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참된 신을 믿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러 이러 해야 한다"는 기대치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구원을 털끝만큼의 의심도 없이 확신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믿는 신을 믿어 보라고 권하는 사람이 그 말과 행실을 통해 아무런 차별성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전도를 받는 그 사람은 기독교에 실망하게 됩니다. 때로는 전도한다는 사람의 말과 행동이 전도를 받고 있는 사람의 그것만도 못한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속으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당신같이 될까봐 믿지 못하겠소!"
2.
전도에 열성인 사람들이 때로 얼마나 어이없는 행동을 하는지요! ‘말도 안 되는 전도 이야기’가 여러분에게도 한두 가지는 있을 것입니다. 제게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만, 책에서 읽은 이야기 하나를 예로 듭니다.
어느 백인이 가족과 모처럼 백화점에 나들이를 갔습니다. 그날따라 백화점 주차장이 만원입니다. 가까운 곳에서는 좀처럼 빈자리를 찾기 어렵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생각하여 가까운 주차장을 빙글 빙글 돌면서 빈자리가 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인내심이 거의 고갈될 즈음, 저 앞에서 차 한 대가 후진하는 것이 보입니다. 이 남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그 자리를 향해 접근해 갑니다. 그 때, 반대편에서 값비싼 스포츠카 하나가 쏜살같이 달려오더니, 이 남자가 찜한 그 자리에 쏙 들어가 주차를 합니다. 순간, 그 남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릅니다. 육중한 family van을 타고 있던 그는 이를 악물고는 액셀을 푹 밟아 그 스포츠카가 있는 방향으로 급 돌진합니다. 차에 타고 있던 온 가족들이 놀라 비명을 지를 즈음, 그는 급정거를 하여 값비싼 스포츠카의 범퍼 가까이에서 멈추었습니다.
스포츠카에서 나온 젊은 부부는 그가 하는 행동을 놀랜 듯 지켜보더니, 씩씩거리고 있는 그 남자에게로 걸어옵니다. 그 남자는 일장 훈계를 해 주려고 창문을 내립니다. 그 때 스포츠카에서 내린 그 남자가 허리를 숙이고 운전석에 앉아있는 그 남자에게 먼저 말을 던집니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에게 분노의 문제가 있는 것 같군요.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도대체 어디서 이런 자신감이 나오는 것일까요? 어떻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때로 이토록 뻔뻔하게 행동할까요? 어떻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토록 자기를 망각하고 행동할까요? ‘전도’한다는 말은 ‘도’ 즉 ‘진리’를 전한다는 말인데, 그것을 전한다는 사람이 도대체 진리와는 상관없이 말하고 행동한다면, 그게 도를 전하는 겁니까(傳道), 아니면 도를 뒤집는 것입니까(顚道)?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 거대한 착각과 오만과 모순과 뻔뻔함은 구원을 ‘배에 올라타는 것’으로 오해한 데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을 천국 가는 티켓을 손에 쥐는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목적이 오직 죽고 나서 천국 가기 위함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선행으로도, 제 아무리 많은 공적을 쌓아도 그것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 것이라는 진리에 멈추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아무 공로 없이 우리를 구원하시지만, 성령을 통해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자라게 하신다는 사실을 망각한 까닭입니다.
3.
이 모든 것이 기독교 진리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기독교의 복음을 그렇게 축소시켜서는 안 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구원의 배’에 올라타는 것보다는 ‘구원의 길’에 들어서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배’는 올라타면 그만이지만, ‘길’은 계속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은 목숨이 다할 때까지 예수께서 이끄시는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이론이 아닙니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 7장 13절과 14절에서 보듯,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새번역> 성경에 이 본문의 표제를 ‘좁은 문’이라고 달아 놓았는데, 좋은 표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영어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NRSV는 The Narrow Gate라고 표제를 달았고, NIV는 The Narrow and Wide Gates라고 표제를 달아 놓았습니다. 이 본문의 뜻을 오도하는 표제입니다. 좁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곧바로 생명의 성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문 뒤로 난 좁고 험한 길을 걸어가야만 생명의 성에 이릅니다. 넓은 문의 유혹을 거부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좁고 험한 길을 걸어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 본문의 표제는 ‘좁은 길’이라고 달아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함으로 그 좁고 험한 길 그러나 참된 생명에 이르는 길로 들어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열어 놓으신 생명의 길에 서 있는 한,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길 위에 서 있는 한, 당장 죽어도 천국에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믿어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다가 아닙니다. 좁은 길에 들어서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길 위에 쪼그리고 앉아 죽기를 기다리면 안 됩니다. 길바닥에 자리를 펴고 마냥 놀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생명의 성에 이르기까지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아가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 점에서 예수님의 뜻을 정확히 파악했습니다. 그분은 자주 자신의 영적 생활을 ‘여행’ 혹은 ‘마라톤’에 비교합니다. 빌립보서의 저 유명한 자기 고백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빌 3:12). 인생 말년에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딤후 4:7). 그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숙한 경지에 이르는 것을 너무도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적 여정을 걷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달렸습니다. 단거리 선수(splinter)처럼 머리를 앞으로 내밀고 달렸습니다.
4.
이런 점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천국의 여행자’라 할 수 있습니다. 좁은 길을 걷는 천국의 여행자들은 이미 얻은 구원에 대해 감사하지만 그것에 대해 자만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서 감사드리지만,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바라보면서 겸손한 마음을 가집니다. 아무런 공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구원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 아직도 큰 진보를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늘 송구스러운 마음입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을 믿되 그것을 자랑하거나 장담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구원을 두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천국의 여행자들은 그러므로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 무례하거나 뻔뻔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이미 구원의 길에 서 있으나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알기에 조심스럽게 그리고 겸손히 행동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났을 때, "당신은 이미 죽은 사람이고 나는 이미 영생을 얻은 사람이다"라는 전제를 가지고 만나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나 단번에 그 사람을 녹아웃(knock-out)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먼저 자신의 걸음에 정성을 다하면서, 다른 사람과 인격적으로 사귐을 나누고, 그런 과정에서 자신이 걷고 있는 길에 초청할 기회를 찾습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길에 대해 관심을 보이면, 그 동안 그 길을 걸으면서 경험한 이야기들을 들려줍니다.
설사 그 사람이 초청을 거절한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습니다. 천국의 여행자들은 사람들을 전도의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습니다. 전도할 가치가 있으면 만나고 그렇지 않으면 등을 돌리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진실로 원하시는 것은 전도가 아니라 한 영혼을 진실로 만나고 사랑하는 것임을 압니다. 사랑의 결과로써 전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십니다. 전도가 이루어지기까지 사랑하기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의 여행자들은 만나는 사람들을 모두 사랑하기 위해 힘씁니다.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합니다.
좁은 길을 걷는 천국의 여행자들은 전도하는 데 있어서 결코 조바심을 내지 않습니다. 단 번에 결실을 보려 하지 않습니다. 회심은 단 한 번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여러 단계를 거쳐 더 깊은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나서도 함께 영적 여행을 계속합니다. 내가 혹은 그 사람이 어느 단계에 이르렀든지, 정성으로 서로 만나고 좋은 영향을 주고받으려 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때로 권고도 하고, 때로 도전도 하고, 또 때로 기다리기도 합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영적 여정을 걷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위튼 대학교 전도학 교수인 릭 리차드슨(Rick Richardson)은 전도자의 이미지를 ‘영업사원’(salesperson)으로부터 ‘여행 안내원’(Travel guide)의 이미지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책 <스타벅스 세대를 위한 전도>(Reimagining Evangelism)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이 모두 이 책을 읽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전도에 대한 선입견을 내려놓고, 진실로 감화시키는 전도를 할 수 있기 바랍니다. 릭 리차드슨의 제안대로, 우리는 영업사원(salesperson)처럼 복음을 팔기 위해 전전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걷고 있는 생명의 길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고 함께 걷기를 초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5.
그러므로 전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이 기간 동안,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이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 놓으신 좁은 길,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제자로서 그분의 뒤를 따르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마 16:24).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만, "자기에게 좋아 보이는 길을 부인하라"는 뜻으로 풀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다시 태어났다’ 혹은 ‘거듭났다’, born again했다고 말할 만큼 중요한 전환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영적 체험은 실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동적으로 우리를 제자로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거듭 난 후,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후, 영적 체험을 한 후, 매일 매일 그분의 뒤를 따라 걷는 삶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 좁고 험한 길을 부단히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새로 태어날 뿐 아니라 자라나야 합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점점 더 많이 닮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 좁고 험한 길을 걷는다는 말은 매일 매일의 선택과 결정에 있어서 그분의 가르침과 인도를 찾고 그것에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는 길이 ‘좁고 험하다’고 규정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죄 많고 타락한 세상에 살면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인도를 찾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은 때로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가치관이 이 세상의 가치관과 정반대일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섬김으로써 다스리고, 짐으로써 이기고, 죽음으로서 살고, 줌으로써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악다구니로 다른 사람 위에 올라서기를 힘쓰고,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기기를 추구하며, 하나라도 더 움켜쥐려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은 자주 좁고 험한 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 길을 가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이 길에서 진보하고 있습니까? 바울처럼 숨이 차도록 달려가고 있지는 못하더라도, 멈추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가고 있습니까? 때로 힘들어 멈추어 숨을 돌리기도 하고, 때로 지쳐서 한 동안 머물러 쉬기도 하지만, 또 다시 힘을 내어 이 길을 온전히 걸어가겠다는 마음의 다짐이 있습니까? 이 길을 걸어가는 데 있어서 성령께서 함께 하심을 알고 계십니까?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할 수 있는"(찬송 427장) 비결이 있음을 아십니까? 그 신비를 경험해 보셨습니까? 처음에는 좁고 험해 보이던 길이 신비로 가득한 길임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있어야, 비로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길을 걸어 보시지 않겠습니까?"라고 초청할 용기가 생깁니다. 이것이 있어야만, "당신은 왜 그 길을 걷습니까?"라고 물을 때, 대답할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이 설득력과 감화력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있어야만, "당신처럼 될까 무서워 못 믿겠소!"라는 ‘전도 혐오증’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영적 여정에서 진보해 나갈 때, 나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묻게 될 것입니다. "당신처럼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소?"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영적 여정에 들어선 것을 축하드립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인도를 따라 그분의 뒤를 따라 걷는 제자들입니다. 우리가 걷는 그 길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 줍니다. 우리가 걷는 그 길이 우리의 미래를 말해 줍니다. 우리는 이 길을 발견하고 그 길에 들어선 것에 대해 감사, 감격합니다. 그 놀라운 은총에 감사, 감격하여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좁고 험한 길을 따라 부단히 앞으로 나아갑니다. 마치 가을 단풍 길처럼, 이 길은 점입가경, 갈수록 신비롭고 아름답습니다. 더 가면 무엇이 있을지 마음이 설레어 멈추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길을 알리기를 원합니다. 아직 그 길을 끝까지 가 본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보고 경험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을 한 번 걸어 보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우리의 삶이 지금 이만큼이라도 행복한 이유는 이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 때문임을 압니다. 이 길 위에 서서 걸어가지 않고는 인생의 참된 방향도, 의미도, 보람도, 그리고 소명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이 이 길에 들어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공헌은 바로 이 길을 알게 해 주고 이 길을 걷도록 도와주는 일임을 압니다. 그 간절한 사랑의 마음으로 이 길을 걸으며 이 길을 전합니다. 그것이 천국의 여행자가 사는 방법입니다.
좁은 길을 걷는 천국의 여행자 여러분, 히브리서 저자가 주는 격려의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각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 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그러므로 여러분은 나른한 손과 힘 빠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똑바로 걸으십시오. 그래서 절름거리는 다리로 하여금 삐지 않게 하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히 12:1, 12, 13).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
좁고 험한 길을 여신 주님,
그 길로 우리를 부르시어
참된 생명을 누리게 하시는 주님,
저희의 걸음을 인도하여 주소서.
이 길 위에 견고히 서게 하시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가게 하소서.
좁고 험한 길을 걷지만
밤낮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을 주소서.
그 비밀을 나누는 일에
저희를 능하게 하소서.
아멘.
‘영적 여정에로의 초대’ 1:
"천국의 여행자"
(Traveler of Heaven)
마태복음7:13-14
1.
여러분에게 여쭙겠습니다. "오늘 당장 죽으면 여러분은 천국에 갈 자신이 있습니까?" 이 질문을 처음 들어 보는 분도 계시겠지만, 전도하는 사람들로부터 한 번쯤 들어 본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그럼요, 저는 분명히 천국에 갑니다."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글쎄요, 저는 자신이 없는데요."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적당한 답을 찾기 전에, 먼저 이 질문이 가지고 있는 함정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질문은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문구만큼이나 기독교의 복음을 축소시킬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이 질문만 두고 보면, 예수 믿는 것은 죽고 나서 천국에 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마치 천국 입장권을 얻는 일처럼 보입니다. 이 질문을 들이대며 전도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의심하지 말고, 담대하게 "예, 나는 지금 당장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라고 답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믿음은 옳지만, 그것이 예수 믿는 것의 전부가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노아의 방주(Noah’s ark)에 비교하여 구원을 이해하고 설명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구원의 배에 올라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든지 구원의 배에 올라타면, 그 순간 구원을 얻는다고 믿습니다. 배 안에 있는 사람은 구원을 받은 사람이고, 배 밖에 있는 사람은 구원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배에 올라탄 사람이 배 안에서 어떤 행동을 하느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배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천국 입장권을 손에 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영적인 자만심에 빠지기 쉽습니다. 구원의 배에 올라탄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듭 났다는 사실에 감격한 나머지, 계속하여 성장해 가는 것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은 매우 강한 반면, 그들의 말과 행실에서 믿음의 열매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Born Again한 날짜를 기억하고, 처음 믿었을 때의 눈물겨운 체험만을 간증합니다. 회심한 이야기를 들으면 분명히 뭔가 일어난 것 같은데, 지금 그의 말과 행실을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났나 의문이 듭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 전도의 열심이 강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말과 행실이 어떤지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구원의 배에 타고 있다는 하나의 사실에 모든 의미를 부여하고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딤후 4:2) 전도하기에 힘씁니다. 그렇게 하는 전도가 때로 열매를 맺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에 믿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도록 만들어 줍니다.
아무리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참된 신을 믿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러 이러 해야 한다"는 기대치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구원을 털끝만큼의 의심도 없이 확신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믿는 신을 믿어 보라고 권하는 사람이 그 말과 행실을 통해 아무런 차별성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전도를 받는 그 사람은 기독교에 실망하게 됩니다. 때로는 전도한다는 사람의 말과 행동이 전도를 받고 있는 사람의 그것만도 못한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속으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당신같이 될까봐 믿지 못하겠소!"
2.
전도에 열성인 사람들이 때로 얼마나 어이없는 행동을 하는지요! ‘말도 안 되는 전도 이야기’가 여러분에게도 한두 가지는 있을 것입니다. 제게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만, 책에서 읽은 이야기 하나를 예로 듭니다.
어느 백인이 가족과 모처럼 백화점에 나들이를 갔습니다. 그날따라 백화점 주차장이 만원입니다. 가까운 곳에서는 좀처럼 빈자리를 찾기 어렵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생각하여 가까운 주차장을 빙글 빙글 돌면서 빈자리가 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인내심이 거의 고갈될 즈음, 저 앞에서 차 한 대가 후진하는 것이 보입니다. 이 남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그 자리를 향해 접근해 갑니다. 그 때, 반대편에서 값비싼 스포츠카 하나가 쏜살같이 달려오더니, 이 남자가 찜한 그 자리에 쏙 들어가 주차를 합니다. 순간, 그 남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릅니다. 육중한 family van을 타고 있던 그는 이를 악물고는 액셀을 푹 밟아 그 스포츠카가 있는 방향으로 급 돌진합니다. 차에 타고 있던 온 가족들이 놀라 비명을 지를 즈음, 그는 급정거를 하여 값비싼 스포츠카의 범퍼 가까이에서 멈추었습니다.
스포츠카에서 나온 젊은 부부는 그가 하는 행동을 놀랜 듯 지켜보더니, 씩씩거리고 있는 그 남자에게로 걸어옵니다. 그 남자는 일장 훈계를 해 주려고 창문을 내립니다. 그 때 스포츠카에서 내린 그 남자가 허리를 숙이고 운전석에 앉아있는 그 남자에게 먼저 말을 던집니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에게 분노의 문제가 있는 것 같군요.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도대체 어디서 이런 자신감이 나오는 것일까요? 어떻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때로 이토록 뻔뻔하게 행동할까요? 어떻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토록 자기를 망각하고 행동할까요? ‘전도’한다는 말은 ‘도’ 즉 ‘진리’를 전한다는 말인데, 그것을 전한다는 사람이 도대체 진리와는 상관없이 말하고 행동한다면, 그게 도를 전하는 겁니까(傳道), 아니면 도를 뒤집는 것입니까(顚道)?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 거대한 착각과 오만과 모순과 뻔뻔함은 구원을 ‘배에 올라타는 것’으로 오해한 데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을 천국 가는 티켓을 손에 쥐는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목적이 오직 죽고 나서 천국 가기 위함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선행으로도, 제 아무리 많은 공적을 쌓아도 그것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 것이라는 진리에 멈추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아무 공로 없이 우리를 구원하시지만, 성령을 통해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자라게 하신다는 사실을 망각한 까닭입니다.
3.
이 모든 것이 기독교 진리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기독교의 복음을 그렇게 축소시켜서는 안 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구원의 배’에 올라타는 것보다는 ‘구원의 길’에 들어서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배’는 올라타면 그만이지만, ‘길’은 계속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은 목숨이 다할 때까지 예수께서 이끄시는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이론이 아닙니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 7장 13절과 14절에서 보듯,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새번역> 성경에 이 본문의 표제를 ‘좁은 문’이라고 달아 놓았는데, 좋은 표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영어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NRSV는 The Narrow Gate라고 표제를 달았고, NIV는 The Narrow and Wide Gates라고 표제를 달아 놓았습니다. 이 본문의 뜻을 오도하는 표제입니다. 좁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곧바로 생명의 성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문 뒤로 난 좁고 험한 길을 걸어가야만 생명의 성에 이릅니다. 넓은 문의 유혹을 거부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좁고 험한 길을 걸어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 본문의 표제는 ‘좁은 길’이라고 달아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함으로 그 좁고 험한 길 그러나 참된 생명에 이르는 길로 들어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열어 놓으신 생명의 길에 서 있는 한,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길 위에 서 있는 한, 당장 죽어도 천국에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믿어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다가 아닙니다. 좁은 길에 들어서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길 위에 쪼그리고 앉아 죽기를 기다리면 안 됩니다. 길바닥에 자리를 펴고 마냥 놀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생명의 성에 이르기까지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아가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 점에서 예수님의 뜻을 정확히 파악했습니다. 그분은 자주 자신의 영적 생활을 ‘여행’ 혹은 ‘마라톤’에 비교합니다. 빌립보서의 저 유명한 자기 고백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빌 3:12). 인생 말년에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딤후 4:7). 그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숙한 경지에 이르는 것을 너무도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적 여정을 걷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달렸습니다. 단거리 선수(splinter)처럼 머리를 앞으로 내밀고 달렸습니다.
4.
이런 점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천국의 여행자’라 할 수 있습니다. 좁은 길을 걷는 천국의 여행자들은 이미 얻은 구원에 대해 감사하지만 그것에 대해 자만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서 감사드리지만,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바라보면서 겸손한 마음을 가집니다. 아무런 공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구원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 아직도 큰 진보를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늘 송구스러운 마음입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을 믿되 그것을 자랑하거나 장담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구원을 두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천국의 여행자들은 그러므로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 무례하거나 뻔뻔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이미 구원의 길에 서 있으나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알기에 조심스럽게 그리고 겸손히 행동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났을 때, "당신은 이미 죽은 사람이고 나는 이미 영생을 얻은 사람이다"라는 전제를 가지고 만나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나 단번에 그 사람을 녹아웃(knock-out)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먼저 자신의 걸음에 정성을 다하면서, 다른 사람과 인격적으로 사귐을 나누고, 그런 과정에서 자신이 걷고 있는 길에 초청할 기회를 찾습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길에 대해 관심을 보이면, 그 동안 그 길을 걸으면서 경험한 이야기들을 들려줍니다.
설사 그 사람이 초청을 거절한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습니다. 천국의 여행자들은 사람들을 전도의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습니다. 전도할 가치가 있으면 만나고 그렇지 않으면 등을 돌리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진실로 원하시는 것은 전도가 아니라 한 영혼을 진실로 만나고 사랑하는 것임을 압니다. 사랑의 결과로써 전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십니다. 전도가 이루어지기까지 사랑하기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의 여행자들은 만나는 사람들을 모두 사랑하기 위해 힘씁니다.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합니다.
좁은 길을 걷는 천국의 여행자들은 전도하는 데 있어서 결코 조바심을 내지 않습니다. 단 번에 결실을 보려 하지 않습니다. 회심은 단 한 번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여러 단계를 거쳐 더 깊은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나서도 함께 영적 여행을 계속합니다. 내가 혹은 그 사람이 어느 단계에 이르렀든지, 정성으로 서로 만나고 좋은 영향을 주고받으려 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때로 권고도 하고, 때로 도전도 하고, 또 때로 기다리기도 합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영적 여정을 걷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위튼 대학교 전도학 교수인 릭 리차드슨(Rick Richardson)은 전도자의 이미지를 ‘영업사원’(salesperson)으로부터 ‘여행 안내원’(Travel guide)의 이미지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책 <스타벅스 세대를 위한 전도>(Reimagining Evangelism)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이 모두 이 책을 읽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전도에 대한 선입견을 내려놓고, 진실로 감화시키는 전도를 할 수 있기 바랍니다. 릭 리차드슨의 제안대로, 우리는 영업사원(salesperson)처럼 복음을 팔기 위해 전전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걷고 있는 생명의 길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고 함께 걷기를 초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5.
그러므로 전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이 기간 동안,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이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 놓으신 좁은 길,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제자로서 그분의 뒤를 따르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마 16:24).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만, "자기에게 좋아 보이는 길을 부인하라"는 뜻으로 풀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다시 태어났다’ 혹은 ‘거듭났다’, born again했다고 말할 만큼 중요한 전환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영적 체험은 실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동적으로 우리를 제자로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거듭 난 후,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후, 영적 체험을 한 후, 매일 매일 그분의 뒤를 따라 걷는 삶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 좁고 험한 길을 부단히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새로 태어날 뿐 아니라 자라나야 합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점점 더 많이 닮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 좁고 험한 길을 걷는다는 말은 매일 매일의 선택과 결정에 있어서 그분의 가르침과 인도를 찾고 그것에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는 길이 ‘좁고 험하다’고 규정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죄 많고 타락한 세상에 살면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인도를 찾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은 때로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가치관이 이 세상의 가치관과 정반대일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섬김으로써 다스리고, 짐으로써 이기고, 죽음으로서 살고, 줌으로써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악다구니로 다른 사람 위에 올라서기를 힘쓰고,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기기를 추구하며, 하나라도 더 움켜쥐려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은 자주 좁고 험한 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 길을 가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이 길에서 진보하고 있습니까? 바울처럼 숨이 차도록 달려가고 있지는 못하더라도, 멈추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가고 있습니까? 때로 힘들어 멈추어 숨을 돌리기도 하고, 때로 지쳐서 한 동안 머물러 쉬기도 하지만, 또 다시 힘을 내어 이 길을 온전히 걸어가겠다는 마음의 다짐이 있습니까? 이 길을 걸어가는 데 있어서 성령께서 함께 하심을 알고 계십니까?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할 수 있는"(찬송 427장) 비결이 있음을 아십니까? 그 신비를 경험해 보셨습니까? 처음에는 좁고 험해 보이던 길이 신비로 가득한 길임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있어야, 비로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길을 걸어 보시지 않겠습니까?"라고 초청할 용기가 생깁니다. 이것이 있어야만, "당신은 왜 그 길을 걷습니까?"라고 물을 때, 대답할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이 설득력과 감화력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있어야만, "당신처럼 될까 무서워 못 믿겠소!"라는 ‘전도 혐오증’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영적 여정에서 진보해 나갈 때, 나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묻게 될 것입니다. "당신처럼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소?"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영적 여정에 들어선 것을 축하드립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인도를 따라 그분의 뒤를 따라 걷는 제자들입니다. 우리가 걷는 그 길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 줍니다. 우리가 걷는 그 길이 우리의 미래를 말해 줍니다. 우리는 이 길을 발견하고 그 길에 들어선 것에 대해 감사, 감격합니다. 그 놀라운 은총에 감사, 감격하여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좁고 험한 길을 따라 부단히 앞으로 나아갑니다. 마치 가을 단풍 길처럼, 이 길은 점입가경, 갈수록 신비롭고 아름답습니다. 더 가면 무엇이 있을지 마음이 설레어 멈추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길을 알리기를 원합니다. 아직 그 길을 끝까지 가 본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보고 경험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을 한 번 걸어 보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우리의 삶이 지금 이만큼이라도 행복한 이유는 이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 때문임을 압니다. 이 길 위에 서서 걸어가지 않고는 인생의 참된 방향도, 의미도, 보람도, 그리고 소명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이 이 길에 들어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공헌은 바로 이 길을 알게 해 주고 이 길을 걷도록 도와주는 일임을 압니다. 그 간절한 사랑의 마음으로 이 길을 걸으며 이 길을 전합니다. 그것이 천국의 여행자가 사는 방법입니다.
좁은 길을 걷는 천국의 여행자 여러분, 히브리서 저자가 주는 격려의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각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 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그러므로 여러분은 나른한 손과 힘 빠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똑바로 걸으십시오. 그래서 절름거리는 다리로 하여금 삐지 않게 하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히 12:1, 12, 13).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
좁고 험한 길을 여신 주님,
그 길로 우리를 부르시어
참된 생명을 누리게 하시는 주님,
저희의 걸음을 인도하여 주소서.
이 길 위에 견고히 서게 하시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가게 하소서.
좁고 험한 길을 걷지만
밤낮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을 주소서.
그 비밀을 나누는 일에
저희를 능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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