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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3 -아버지의 아픔을 아는 자녀

누가복음 김영봉 목사............... 조회 수 3183 추천 수 0 2011.04.30 23:5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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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5:11-32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08.9.21
‘영적 여정에로의 초대’ 3
“아버지의 아픔을 아는 자녀”
( Know Your Father’s Agony?)
--누가복음 15:11-32

1.

‘돌탕’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곰탕’같은 국 이름이 아니라, ‘돌아온 탕자’를 줄여서 부르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돌탕의 비유’를 읽었습니다. 이 비유 안에는 두 형제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각각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을 비유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큰 아들은 믿는 사람에 비유할 수 있고, 믿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둘째 아들의 상황을 묘사한 단어들을 살펴 보면, 믿지 않는 사람의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하여 “제 것을 다 챙겼다”(13절)고 되어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사고 방식으로 하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유산을 요구하는 것은 아버지를 무시하는 처사였습니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제게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제게 아버지는 돌아가신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와 같다 할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은 신이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그 신이 자신에게 필요가 없다고, 혹은 그 신을 무시하고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탄탄한 인간 관계를 구축하고, 넉넉한 물질을 얻으면, 그것으로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그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을 가지고 “먼 지방으로 갔다”(13절)고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간섭할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 조건을 마련한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와 같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간섭할 수 없는 조건을 찾습니다. 하나님께 대해 신경쓰지 않고 마음대로 살만한 조건을 찾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이 ‘외면’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나면, “그런 것 없다!”고 외면합니다. 양심의 소리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면, “속지 말자!”고 무시합니다.

셋째, 그 아들은 먼 지방으로 가서 “거기서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낭비하였다”(13절)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아주 궁핍하게 되었다”(14절)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유산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재산만 허비하고 삶은 더욱 불행해졌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한, 결국 그 인생은 허비되고 낭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자신의 야망과 쾌락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나름대로의 원칙과 기준에 따라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넷째, 둘째 아들은 제 스스로 인생을 지탱할 수가 없어 마침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깁니다(15절). 하지만 그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탕자를 이용할 뿐입니다. 아버지 외에는 자신을 진실로 위해 줄 사람이 없음을 그제서야 깨닫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운명도 이와 같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홀로 살기로 선택할 때, 그들은 예외 없이 독립적인 생을 꿈 꿉니다. 하지만 독립적인 생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잠시 뿐, 결국 버티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혹은 무엇엔가에 자신을 내던져 버립니다. 이로써 생은 더 더욱 불행해집니다.

2.

지금 여러분 주변에 믿지 않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위에서 말한 단계 중 어디에 와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막 독립을 꿈꾸며 가출을 계획하는 단계에 있을 것입니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이같은 독립을 꿈꾸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외면하고 살아가는 삶을 연습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 없는 독립적인 삶의 단맛에 빠져 있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최근에 무신론을 옹호한 책을 쓴 어느 학자처럼, “한 번 나처럼 신을 무시하고 살아 보십시오.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라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독립을 위한 혁명은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독립적인 삶의 단계를 지나 질서 없고 규모도 없는 방탕한 삶에 빠져 있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관장하면 더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자신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혹은, 이제는 자신으로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은 거의 없으며 상황을 되돌이킬 수는 더 더욱 없다고 단정하고 자신의 인생을 무엇엔가 혹은 누구에겐가 내던지고 살 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파멸의 길인 줄은 알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포자기한 상태에 있는지 모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 살아감으로 인해 모든 문제가 일어났듯, 인간의 문제들은 대부분 하나님을 떠나 사는 데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문제의 해결책은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가듯, 하나님께로 돌아가 그분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서 하나님의 고귀한 자녀로 회복되어 진실로 행복한 삶, 허비되지 않는 삶, 오히려 완성되고 충족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해결책이며 그것이 구원입니다. 우리는 이 일이 가장 먼저 우리 자신에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천국의 여행자’들로서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좁고 험한 길을 신실하게 걸어 가자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 일이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물 맑은 호수’를 가꾸면서 ‘사람을 낚는 일’에 힘쓰자는 겁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할 때, 우리는 집을 떠나 살고 있는 우리의 형제 혹은 자매로 보아야 합니다. 집 나간 아들을 찾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하고 그들이 집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이 이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돌탕의 비유’를 통해 집 나간 형제 자매들의 운명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을 통렬하게 비판하십니다. 예수님은 비유에 나오는 두 형제 중 집 안에 있던 형의 잘못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동생은 ‘집을 나갔던 탕자’였지만, 형은 ‘집 안에 있던 탕자’였습니다. 이 사실은 비유 후반에서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큰 아들의 태도와 아버지의 태도를 극명하게 대조시킵니다. 아버지는 어떻게 했습니까? 둘째 아들이 집에서 아직도 먼 거리에 있을 때, 아버지는 그것이 자기 아들인 것을 한 눈에 알아보고는 “그를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20절)고 합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몸종의 하나로 받아 달라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종에게 명하여 가장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신에 신발을 신겨줍니다.

그런데 큰 아들은 어떻습니까? 거지가 되어 돌아온 동생을 환영하기 위해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베풀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크게 화를 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큰 아들을 찾아가 설득합니다. 그러자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불평합니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29-30절). 여기, 마지막 문장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큰 아들은 동생을 가리켜 “아버지의 이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자기의 동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큰 아들은 그가 자신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형으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심산입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대답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그런데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1-32절). 아버지가 큰 아들의 의중을 읽은 것입니다. 아버지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런 것입니다. “얘야, 이 아이는 내 아들이기도 하지만 너의 동생이 아니냐? 동생이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그것을 기뻐하고 축하함이 마땅하지 않느냐?”


3.

충격이 아닙니까? 큰 아들은 집 나간 동생을 찾아올 생각은 고사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조차 반기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비유를 통해 예수께서 우리 각자의 마음에 제기하시는 질문을 들으십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너희의 태도가 집 나갔던 동생에 대한 큰 아들의 태도와 무엇이 다른가?” 실로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사람들을 전도할 열심을 내기는 커녕, 제 발로 교회를 찾아온 사람들을 환영하고 보살피는 일에조차 무관심한 것 아닙니까? 심지어, 상황과 처지가 다른 사람이 우리 교회의 문을 두드릴 때, “어떻게 저런 사람이 우리 교회를 찾아오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합니다만, 우리의 형제나 자매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믿는 사람들끼리 “형제님” 혹은 “자매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도 우리의 형제요 자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마치 집 나간 자식을 향해 매일같이 눈물로 기도하며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하나님도 그렇게 그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근심을 덜어 드리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비유에 등장하는 큰 아들이 아버지의 근심을 아는 효자였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작은 아들을 두고 겪는 아버지의 아픔을 함께 겪지 않았겠습니까? 아버지가 기도할 때 함께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가 진실로 아버지 하나님의 아픔을 아는 자식이라면, 집 나간 형제 자매를 마음에 품고 하나님 아버지의 아픔에 동참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두고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근심을 알아드려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자식된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특별히,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때까지 그들을 마음에 품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아픔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깨닫게 하고 회개하게 하고 믿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동하기 이전에 이미 성령을 통해 각 사람에게 활동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각 사람에게 전도를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기도로써 그리고 사랑의 실천으로써 하나님의 전도에 참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아픔을 아는 자녀라면 이 일을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전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로써 이미 진행되고 있는 성령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마음 속에서 끊임 없이 울려내는 음성을 우리의 기도로써 증폭시켜야 합니다. 그 사람의 딱딱한 마음이 녹아지도록 우리가 기도의 제물을 올려야 합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앞에 무릎 꿇는 것은 영적인 사건입니다. 그 사람의 영혼에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전도는 이같이 ‘영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도 또한 강력한 힘이 됩니다. 기도는 영적 사건을 일으키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4.

오하이오 주에 있는 Covington United Church of Christ의 담임 목사인 하워드 스톰(Howard Storm)은 Northern Kentucky University에서 studio art를 담당했던 교수였습니다. 그는 무신론자였으며, 자신의 고집과 혈기와 충동에 따라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1985년 6월 1일, 그의 나이 38세가 되었을 때,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여했다가 급격한 위장 통증으로 인해 응급실로 실려갑니다. 연휴로 인해 의사와 간호사들의 손이 딸렸고, 그들의 부주의로 장시간 방치되는 바람에 하워드는 나중에 의식을 잃습니다. 의학적으로 사망의 상태에서 몇 시간 동안 있다가 깨어났는데, 그 기간 동안 그는 소위 ‘임사 체험”(Near Death Experience)을 겪습니다. 그 체험을 통해 하워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으며, 나중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임사 체험을 적은 책이 (Doubleday, 2005)입니다. 임사 체험을 한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그가 그 체험을 통해서 보고 들은 것은 참으로 특별해 보입니다. 그 체험 후에 그는 스스로 질문합니다.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토록 특별한 경험을 주셨을까?” 불신앙적이고 부도덕하고 악하게 살고 있던 자신을 하나님은 그냥 죽게 내버려 두실 수도 있었는데, 예수님을 만나게 하시고 다시 살아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겪은 체험을 나눌만한 사람을 생각하던 중에 오래 전에 대학에서 가르쳤던 수녀 제자가 생각났습니다. 너무도 지독하게 무신론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의 주변에는 그 체험을 들어줄만한 신자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Notre Dame Academy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던 돌로레스 수녀(Dolores)에게 연락합니다. 한 번 방문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얼마 후, 돌로레스 수녀가 찾아옵니다. 하워드는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서 겪은 이야기를 그에게 털어 놓습니다. 하워드는 자신이 한 말들이 보통 사람들이 믿기 어려운 것이었기에 돌로레스 수녀에게 묻습니다.

“내 말을 믿을 수 있겠어요?” 그러자 돌로레스 수녀는 대답합니다.
“물론입니다. 저는 교수님의 말을 믿습니다. 다만,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는지 궁금하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만난 처음 날을 기억하시나요?”
“기억하지 못합니다.”
“첫 날, 강의가 끝나자 교수님은 저를 따로 불러내셨지요. 그리고는 저에게 말씀하셨어요. 나는 무신론자이니, 강의 시간에 그 어떤 종교 얘기도 꺼내지 말라구요.”
“오, 그래요. 기억합니다.”

“그 때로부터 저는 당신을 위해 매일 기도했어요. 다른 수녀들에게도 당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13년 전의 일입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는지 궁금하다는 것입니다.”
하워드 스톰은 돌로레스 수녀의 사랑의 기도 덕분에 자신에게 그같은 특별한 은총이 주어졌음을 그제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지치지 않는 기도는 비록 13년이 걸렸지만 마침내 신비스러운 방법을 통해 그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전도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며, 전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믿음과 사랑으로 드리는 기도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5.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을 하나라도 우리의 마음에 품고 하나님과 함께 아파하며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까지 지치지 않고 기도할 믿음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등지고 생을 허비하며 살고 있는데도, “그것은 그의 선택이니 나는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이미 그 사람을 회복하기 위해 눈물 어린 노력을 해 오신 것을 아십니까?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한다면, 마땅히 그 사람을 마음에 품고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 교우 중에 열 세 살난 아들이 뇌종양에 걸려 어려움을 당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 아이가 뇌종양 판정을 받고, 병원에서 뚜렷한 수술이나 치료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그 교우는 새벽기도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절망적인 진단을 받고 절박한 심정으로, 때로는 조금 안심되는 소식에 감사함으로, 거의 매일같이, 벌써 1년도 넘는 기간 동안, 새벽기도회에 나오고 계십니다. 기도회가 끝나면 곧바로 강단 계단 밑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고 돌아가십니다. 아들을 살려내는 일이라면 그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는 결의로 거의 매일 새벽을 깨우시는 그 교우를 뵈면서, 저도 함께 기도합니다. “주님, 저 아버지의 정성을 보아서라도 꼭 치료해 주옵소서.”

이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품고 있는 뜨거운 사랑, 결코 지치지 않는 사랑,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보면서, 저는 생각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마음도 똑 같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등지고 살면서 생을 허비하고 있는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의 마음 안에는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아픔이 담겨 있습니까? 한 사람이라도 다른 영혼을 품고 그가 구원받을 때까지 기도할 사랑과 열정과 헌신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우리는 과연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 형과 얼마나 다릅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혹시 우리의 마음에 아직 한 영혼도 담겨 있지 않다면, 이번 기회에 한 영혼씩 품어 보심이 어떨지요? 혹시 그동안 몇몇 영혼들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고 있었다면, 이번 기회에 한 두 영혼을 더 품어 보심이 어떨지요? 그렇게 하여 내 기도와 헌신이 작은 도구로 사용되어 한 영혼이라도 구원 받는 감격을 기대해 보면 어떨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 노력과 기도를 보시고 “잘 했다. 너는 내 자식이로구나!”라고 인정하신다면, 그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이겠습니까?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큰 아들이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 거리고 있을 때, 아버지가 나와서 그를 타이릅니다.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아버지의 자비로운 배려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자신의 허물을 발견하고 마음을 고쳐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그 아들이 계속하여 고집을 부리고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한다면, 아버지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인내심이 고갈되고 나면 아버지는 진노하여 큰 아들을 징계할 것입니다.

협박하거나 위협하려는 뜻은 아닙니다. 경각심을 새롭게 하는 뜻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정의의 하나님 아닙니까? 불같이 뜨거운 사랑을 품고 계시지만, 또한 불같이 진노하시는 분이 아닙니까? 인내하고 기다리며 거듭 거듭 기회를 주시지만, 마침내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는 미련 없이 버리는 것이 우리의 하나님 아니던가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만만한 분이 아니라 엄위하신 분임을 안다면, 그분이 아직 자비와 긍휼과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시는 동안, 정신을 차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6.

그러니, 아직 여유가 있을 때 시작하십시다. 언제나 기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붙여주신 사람이 누구인지 찾으십시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이미 전도의 사역을 시작하신 그 사람, 그 영혼을 품고 기도하십시다. 기도처럼 강력한 전도의 도구는 없습니다. 때로는 5년, 때로는 10년, 또 때로는 50년이 걸려도 결국 그 열매를 맺는 것이 기도입니다. 다른 기도는 몰라도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한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전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추수하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하실 터이니 걱정하지 말고, 우리는 그저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을 품고 기도하며 사랑하는 일에 신실하십시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마침내 하나님 안에서 참된 생명을 발견하고 감사할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며,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값지게 사용된 것에 대해 또한 감사할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하늘에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춤을 추실 것입니다. 이 은총과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한 생명도 잃지 않기 위해
오늘도 각 사람의 마음 속에서 전도하시는 하나님,
저희가 큰 아들과 같았음을 고백합니다.
집 나간 형제 자매에게 관심도 없었고
집에 돌아온 형제 자매에게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염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집 나간 형제 자매를 사랑하게 하시고
그들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게 하소서.
집에 돌아온 형제 자매를 따뜻하게 맞이하게 하소서.
오, 아버지!
저희를 도와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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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9 요한복음 희망4 -그래도 믿을 데가 있다 요1:1-5  김영봉 목사  2011-04-30 2634
5168 빌립보서 희망3 -그래도 방법은 있다 빌4:10-14  김영봉 목사  2011-04-30 2254
5167 이사야 희망2 -그래도 출구는 있다 사40:27-31  김영봉 목사  2011-04-30 2720
5166 누가복음 희망1- 그래도 희망은 있다 눅12:13-21  김영봉 목사  2011-04-30 2999
5165 베드로전 초대4 -말만으로는 안 된다 벧전3:1-4  김영봉 목사  2011-04-30 1915
» 누가복음 초대3 -아버지의 아픔을 아는 자녀 눅15:11-32  김영봉 목사  2011-04-30 3183
5163 사도행전 초대2 -물 맑은 호수 행2:43-47  김영봉 목사  2011-04-30 2134
5162 마태복음 초대1 -천국의 여행자 마7:13-14  김영봉 목사  2011-04-30 2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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