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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46: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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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우리의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
본문: 시46: 1- 11
1차 세계 대전 중, 곧바로 전방으로 나가야 될 군인들을 위하여 연회가 베풀어졌습니다. 모임 행사가 끝날 즈음 한 젊은 장교가 그 환대에 대하여 감사의 표시를 하였습니다. 그의 말에는 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리에 앉기 전 앞서와는 색다른 어조로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머잖아 프랑스를 건너갑니다. 그리고 죽을 가능성도 물론 뒤따릅니다. 누구라도 우리가 어떻게 죽어야 될지 말해 주겠습니까?"
어느 누구도 어떻게 죽어야 될지를 말해 줄 사람은 없는 듯 보였을 때 연회 행사에 참석한 가수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오더니 군인들을 향하여 멘델스존의 <엘리야>에 나오는 장대한 아리아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오, 주님 안에 안식이 있나니, 그 분을 향해 인내하며 기다릴지라. 그 분께서는 당신 마음의 소원들을 주시리라 당신의 길을 그 분께 맡기고 그 분을 신뢰하라! 악행하는 자들로 인하여 스스로 초조해하지 말라. 오, 주님 안에 안식이 있나니. 그 분을 향해 인내하며 기다릴지라. 그 분께서는 당신 마음의 소원들을 주시리라."
이는 인생의 위협에 직면한 우리 모두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그 분이 이 모든 것들을 자기의 손으로 잡고 계시다는 것을 믿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 분은 우리의 피난처이시고, 안전이시며, 위로이시고 기쁨이십니다. 그리고 그 분의 영원하신 팔 안에서 완전한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후, 유럽의 대학생들과 젊은이들 중에는 삶에 대해 번민, 갈등을 느끼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프랜시스 쉐퍼 박사 부부는 1955년 스위스 알프스 산 한 계곡 웨이모라는 마을에 라브리를 개방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삶에 지친 영혼들이 라브리에서 쉼을 얻도록 도와주는 사역을 하였습니다. 여름철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내리면 원두막이나 오두막에서 잠시 머물러 비를 피하듯이 라브리에서 인생의 폭풍과 소나기를 피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이었습니다. 현대인들은 너무나 힘든 삶에 지쳐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영적으로 방황하며 갈등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영적 피난처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는 인생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 줄 피난처가 없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문화적인 욕구를 충족하며 살아가지만 더욱 갈증을 느끼며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인생의 해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고, 인생의 답을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의 영적 피난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진정한 피난처요 우리들이 쉼을 얻을 수 있는 오두막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태복음11:28-29)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시61:3)
오늘 우리가 사는 삶의 정황은 어떠합니까? 지금 현재, 세계 곳곳에서 홍수, 가뭄, 사막화 현상, 공기 오염, 물 오염, 탄저병, 에이즈, 암 등의 재난으로 엄청난 사람들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아프리카, 남미, 동부 유럽,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라에서 민족 전쟁, 인종 전쟁, 종교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굶고, 병들고, 추위와 공포 속에 떨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사는 우리 사회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부정부패의 극을 달리는 정치와 권력, 무한 경쟁의 경제 전쟁으로 인한 경제 위협,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불어나는 노숙자, 소년 소녀, 장애인, 버림받은 노인 문제, 사회적으로 만연한 도덕의식, 윤리의식의 실종, 학문을 표절하는 대학, 종교계의 타락 등등 혼미의 극치로 치닫는 사회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지금 현재, 무엇보다 나의 실존적 상황은 어떠합니까? 내 영혼이 바닷물이 흉용하고 산이 흔들리는 불안 속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내 가정이 참혹하고 비극적이고 야비한 갈등 전쟁 속에 있지 않습니까? 내 교회를 진정으로 잘 섬기고 있습니까? 뉴질랜드와 일본의 대 지진과 쓰나미, 미국의 토네이도 계속 이어지는 중동의 테러 안전한 곳이 어딥니까? '우리의 피난처는 어디 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세 번이나 반복해서 답을 주고 있습니다.
1절 첫머리에서부터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라고 합니다.
7절 끝에서도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말합니다.
11절에서도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라는 말로 마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을 통해서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을 자연과 역사의 주인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모든 자연과 나라들과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힘이 되어주시고 그 어떤 환난 가운데서도 그들을 도우심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는 1절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는 7절과 11절에서의 이스라엘의 신뢰는 바로 이 시편 46편의 요점입니다.
본문 1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스위스는 경치가 아름답고 설경이 훌륭하여 관광객이 많이 모여드는 곳입니다. 어느 날 여러 명의 등산객들이 그 곳 자리에 익숙한 안내인을 동반하고 알프스 산에 올라갔습니다. 설경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내려오는 길이었는데, 고요하던 골짜기에서 갑자기 폭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안내인은 곧 그 폭음의 정체를 깨닫고 “눈사태다, 피신해야 산다!”라고 날카로운 비명을 올렸습니다. 모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천만다행으로 안내인이 그 옆에 있는 큰 바위를 발견하여 모두 재빨리 그 바위 밑으로 기어들어갔습니다. 맨 뒷사람까지 다 들어가자 어마어마한 눈사태가 이들을 내려덮쳤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바위 밑에서 모두 안전하게 생명을 구했습니다. 하나님 역시 우리를 보호하시는 바위와도 같은 분이기에 시편 기자는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된 우리도 많은 위험과 고난 중에서 하나님만을 의뢰할 때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렘17:7)
한 소년이 엄청나게 큰 돌을 옮기려 하고 있었습니다. 땀을 흘리며 있는 갖은 애를 써보았지만 그 돌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 그것을 보고 있던 그 소년의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얘야, 네 모든 힘을 다 동원해 보려므나.’ 지금까지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아버지의 말씀에 용기를 내어서 소년은 다시 있는 힘을 다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네 모든 힘을 다 사용했니?’ 소년이 그렇다고 대답했을 때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니야. 너는 네가 쓸 수 있는 모든 힘을 다 사용하지 않았어. 넌 아직까지 이 아빠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잖아!’
우리는 오늘도 우리의 삶 가운데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과 여러 사람을 통해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가운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하고서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노력과 바쁜 손놀림을 멈추고 우리가 사용하지 않은 힘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겼는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실존적 고백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방패시오.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오. 하나님은 나의 요새시오. 하나님은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하나님은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오. 하나님은 나의 빛이시오. 하나님은 내 생명의 능력이요.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시오.
시편의 이런 고백들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적 정황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회는 목축, 농경 사회로 홍수, 가뭄, 전염병 등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재앙과, 블레셋, 가나안, 암몬, 앗수르, 바벨론 등과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항상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불안과 고통 속에 살았기에,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을 당시 안전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산성, 요새, 방패, 불, 목자, 바위 등에 비유함으로 저들의 하나님에 대한 실존적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
본문 2- 3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시인은 본 절에서 땅과 산과 바다가 다 요동하고 천지가 개벽을 하는 일이 있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는 말로 그 신뢰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어떤 자연재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안전한 피난처가 되실 것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본문 4-6절에서는 이스라엘과 온 열방들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한 뭇 나라가 떠들며 위협할지라도 예루살렘 성과 이스라엘 나라는 안전할 것이라는 말로 그 신뢰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한다'는 것은 외부로는 노출되지 않고 지하수로를 통해 흘러드는 샘물 때문에 예루살렘 성이 적들에 의해 포위되는 일이 있더라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음을 말합니다.
본문 5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유명한 야구 선수였다가 전도자가 된 빌리 선데이에 관한 일화입니다. 그가 회심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에, 그 교회의 한 성도가 그의 어깨에 팔을 얹고 신앙에 대한 좋은 충고를 해주었습니다. ‘윌리엄, 나는 자네에게 세 가지 간단한 규칙을 일러 주고 싶네. 만약 이 규칙을 지킨다면 자네는 결코 신앙의 퇴보자는 되지 않을 걸세. 하루에 15분 동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하루에 15분 동안 하나님께 말하고 하루에 15분 동안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일세.’ 이것은 초신자인 빌리에게 매일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을 것과 기도할 것, 전도할 것을 알려 준 것입니다. 그날부터 빌리는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같이 하여 그는 하루를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려 했던 것입니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라'는 것은 새벽부터, 새벽에도, 다 잠을 자는 시간 그래서 기습을 당할 위험이 있는 시간에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심으로 안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정치적·군사적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안전한 피난처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루의 삶을 질서 있게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루가 새롭게 시작되는 시간,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대화하는 것만큼 복된 일은 없습니다.
본문 7절을 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어떤 목자가 언덕 위에서 양 떼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독수리 한 마리가 쏜살같이 내려와 어린 양을 채가려다가 그것을 막으려는 어미 양과 싸운 후 그냥 날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깜짝 놀란 목자는 달려가 보았습니다. 어미 양은 두 눈이 독수리에게 쪼인 채 피를 흘리며 서 있었습니다. 새끼 양들은 어미의 네 발 사이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안전했습니다. 어미는 도망가면 살 수 있었지만 자기가 없으면 새끼가 독수리의 밥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도망가지 않고 자기 새끼를 지키기 위해 두 눈을 잃고 만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수많은 위험 속에서 우리는 자주 피할 곳을 찾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위험 속에서 보호해 줄 산성을 찾습니다. 조금만 힘이 들어도 그것을 피하고 편한 것을 추구하는 시대에 누가 대신하여 희생양이 되겠습니까? 누가 자신보다 이웃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어미 양처럼 자신의 생명을 내놓은 분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며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게 된 것입니다. 그분 안에 안전과 생명이 있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여호와는 나의 산성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나의 피할 반석이시라”(시94:22)
본문 8- 9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본 절에서는 자연에 대해서든 나라들 사이의 전쟁에 대해서든 주인 되신 하나님의 주권과 그가 능력으로 행하시는 일을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다'는 것은 땅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주권자이시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신다'는 것은 전쟁의 주인도 하나님이시며 전쟁을 그치게 하시고 평화를 세우시며 나라와 백성들의 안전을 지켜주시는 이가 하나님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언제나 우리의 피난처이시라는 말입니다.
본문 10절을 읽겠습니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본 절에서는 결론적으로 사람들이 할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는 것은 칼과 창을 들고 전차를 몰며 전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것이 아니라 모든 무기를 버리고 진정한 평화와 안녕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곰곰히 생각해보라는 말입니다. 이어서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한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홀로 하나님이시고 자연과 역사와 모든 나라의 평화와 안녕의 주인이심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불안의 시기에 시편 46편에 담긴 이스라엘의 믿음과 고백이 오늘 우리의 믿음과 고백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슬람국가 터어키의 군대가 유럽 기독교 국가들에게 현실적 위협으로 닥쳐왔던 1529년 마틴 루터가 그 유명한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라는 찬송을 지은 것이 바로 이 시편 46편을 토대로 해서였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이 그의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번역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던 첫 번째 시편도 바로 이 제46편이었습니다. 이렇게 이 시편 46편은 위기의 때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귀한 위로의 말씀이 되곤 했습니다. 안팎으로 그리고 여러 가지로 위기에 처한 오늘 우리에게도 이 시편 46편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의 말씀으로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하나님을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 알아야 합니다. 온 우주와 역사가 그의 주권 안에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 어떤 환난과 위험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지키시는 우리의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전쟁을 그치게 하시고 사람들 사이에 진정한 평화와 안녕을 주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확신하며 그 앞에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찾아오는 두려움은 다섯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로 가난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두 번째는 질병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세 번째는 무지에 대한 두려움이며
네 번째는 고독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다섯 번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처럼 두려움이란 환경에서 비롯된 것도 있고 우리의 심층 깊은 곳에서 두려움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두려움의 대상이 있는 것도 있고 두려움의 대상이 없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내재된 무의식적인 두려움이 우리의 삶에 끼치는 영향을 살펴보면 사단 마귀가 우리에게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과 소망을 주려한다고 말씀하십니다.(렘29: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원수 사단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목표와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두려움은 우리의 잠재력을 마비시킵니다. 두려움은 당신의 재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묶어버려서 주저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기회를 놓치게 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기를 꺾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자포자기하게 만듭니다. 열등감이란 질병을 앓게 됩니다.
둘째, 두려움은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먼저는 하나님과 관계를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기도를 못하게 만듭니다. 말씀을 멀리하게 만듭니다. 예배를 못 드리도록 방해합니다. 뿐만 아니라 두려움은 다른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대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거절당하기를 두려워해서 가면을 쓰고 원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가장하고 정말로 느끼는 실재 감정을 부정합니다. 이래서 사람이 소심하게 되고 맙니다.
셋째, 두려움은 우리가 누리는 평안을 깨뜨립니다. 마음이 불안합니다. 마음에 평강을 빼앗아 갑니다. 불안은 심리적인 암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쉽게 전염됩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속에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을 옮겨 놓았다면 벌써 사단에게 사로잡힌 것입니다.
넷째 두려움은 우리의 성공을 방해합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새로운 일을 못하게 합니다. 윌 스트리트 저널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여러분들은 기억도 할 수 없는 수많은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처음 걸음마를 하기 위해서 일어서다가 넘어졌을 것입니다. 처음 수영을 배울 때 물 속으로 쏙 빠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홈런을 많이 치는 타자일수록 스트럭 아웃이 많습니다.”
* 메이시는 뉴욕에서 일곱 번의 실패 끝에 유명한 점포를 얻게 되었습니다.
* 영국의 소설가 존 크래시는 564권의 책을 출판하면서 출판사로부터 753번 출판 거절을 당했습니다.
* 베이브 룻은 1,330번 스트럭 아웃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714개의 홈런을 때렸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시도하지 않는 것 때문에 기회를 잃는 것을 염려하십시오.”
문제는 생활 가운데 실패가 없다면 생활 속에 위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무난하고 안심된 생활은 권태나 열등의식에 빠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생산적인 믿음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계획하셨고 위임하셨습니다.
두려움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그가 반드시 무엇인가를 해야만 된다고 느끼거나 혹은 불길한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느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바라는 일이 일어날 것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일이 발생할 것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실패를 준비합니다.
두려움은 두려워하는 일이 생기게 합니다. 두려움이 엄습해 오면 정서가 흔들리게 됩니다. 정서가 흔들리면 이성이 말을 안 듣습니다. 사람이 멍해지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무기력에 빠지는 것입니다.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 개들이 어떤 사람이 지나갈 때에는 유난히 짖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짖지 않는가에 대해 말한 심리학자의 글이 있습니다. 개들은 무엇인가 안정되지 못한 사람이 두려운 마음을 품고 개 앞을 지나가게 되면 그가 떠는 진동이 개의 촉감에까지 전달되므로 그 개가 짖는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사랑의 결핍에서 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다윗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비결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찌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셀라)' (시46: 2- 3)
첫째, 기댈만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46:1)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46:7)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시46:11)
아마 성도들이 가장 많이 암송하고 묵상하며 힘을 얻는 성경구절은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일 것입니다. 군대 입대 할 때도 시험장에 갈 때도 위기에 처했을 때도 우리에게 늘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나치 독일의 처참한 유대인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가 많이 듣고 있습니다. 이 수용소에 대한 사실을 관찰하고 기록한 프랭클 박사는 그의 저서 <의미를 찾는 인간의 탐색>에서 결론적으로 말하기를 '마음으로 포기한 사람은 몸도 곧 쇠약해졌다. 그러나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려운 처지에 상관없이 자신은 물론 절망에 허덕이는 다른 사람들까지 격려하여 몸과 마음이 함께 건강해져서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째, 생수의 근원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시46:4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한 시내가 나뉘어 흘러나오는 생명수 시냇물입니다. 그 생수를 마신 모든 성도들이 샘솟는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 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이 생수의 강이신 그리스도를 만난 수가성 여인은 거절의 두려움과 고독의 두려움 죄책의 두려움에서 기쁨을 회복하고 삶이 역전되었습니다. 삭개오도 외로움과 따돌림의 왕따의 두려움에서 영적인 갈급함을 해갈하고 회복을 하였던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요7:38)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계22:1)
이 말씀은 부활의 살리는 영으로 제자들에게 부어주실 피난처되신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수정같은 맑은 생명수의 강을 밧모섬에서 요한은 보고 있습니다. 이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새벽기도를 통하여 무장합니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그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46:5)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시34:4)
새벽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기도를 통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기도는 두려움을 이기는 강력한 무기인 것입니다.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고난이 닥쳐 앞길이 캄캄해 질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 기도는 보이지 않던 길을 보여줍니다.
1940년 제2차 대전 때 영국은 5월 26일을 기도일로 정하고 국민이 기도함으로써 승전의 기반을 잡았으며, 그 해 9월 8일에는 영. 미 양국이 함께 기도함으로써 불리했던 전세 속에 돌파구를 찾았습니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잭 뉴턴은 말했습니다. '망원경으로 평소 시계 불가능한 곳을 볼 수 있습니다. 무릎 꾼채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워싱턴에 가면 링컨이 애용하던 성경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 속에 손때에 이겨져 눌린 손가락 자국이 있습니다. 여러 번 같은 장소를 손가락으로 눌러서 생긴 자국입니다. 그곳은 시편 34편 4절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시리로다.' 링컨은 남북전쟁과 그의 평생에 걸친 그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은 반드시 대답해 주신다는 확신과 모든 두려움에서 건져주신다는 소망'을 가지고 살았음이 눌린 자국까지 나도록 되풀이 읽은 시편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 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 6- 7)
기도하는 자에게 주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붙들어 주십니다.
넷째, 영적 공격무기를 주셨습니다.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시46:6)
'저가 소라를 발하시매' 땅이 녹았던 그분의 말씀이 우리의 영적인 공격무기입니다. 우리 주님도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를 대적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되었으되' 신명기의 말씀들을 통하여 이기셨습니다.
루마니아의 공산주의 체제 밑에서 박해를 받던 범브랜트 목사는 그가 옥중에 있을 때에 성경을 읽으면서 두려워 말라 는 말씀이 수없이 기록된 것을 보고 도대체 몇 번이나 씌어 있는가를 세어 보았더니 꼭 365번이 기록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숫자는 1년 365일 매일 한 번씩에 해당되는 숫자입니다. 매일 우리에게 염려와 두려움이 침입해 옵니다, 매 순간순간마다 주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파도를 향하여 명하시며 바람을 꾸짖으심 주님의 능력의 말씀으로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다섯째, 믿음의 방패가 있습니다.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찌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시46: 8)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46:10)
우리는 믿는 구석이 있을 때 잠잠히 기다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믿기에 가만히 하나님의 행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가는 삼등 열차에, 초등학교 1학년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어린 학생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는 동행하는 어른들도 없는지 낯선 사람들 틈에 끼여 있었으나 조금도 근심스러운 기색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혼자서 가는 길이지만 즐겁기만 한지 연신 창 밖을 내다보며 기쁜 표정으로 싱글벙글하고만 있었습니다. 같이 앉았던 사람들이 그 어린 소년의 의젓하고 태연스런 태도에 커다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애의 한 가지 버릇은, 기차가 정거장에 멎을 때마다 밖으로 달려 나갔다가 돌아와 자기 자리에 앉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을 이상하게 여긴 나머지 거기 둘러앉았던 어른들이, 매번 어딜 다녀오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 어린이는 자랑스럽게 대답하기를, '아빠한테 갔다 오는 거예요'라고 하였습니다. '너희 아빠가 어디 계신데?'하고 그들은 재차 물었습니다. '우리 아빠가 이 기차의 기관사예요.' 하며 소년은 자못 의기양양하게 손님들을 둘러보았습니다. 기관사를 아버지로 가진 이 소년은 그처럼 자신만만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세상에서 '최고'라고 믿었고, 그의 아들인 자기의 신분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므로 그 기나긴 여행 중 아무런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 여정의 기차를 조종하는 기관사가 바로 우리들의 하나님 아버지라면 어째서 우리가 이 멀고 긴 여행을 괴로움과 두려움으로만 마쳐야 합니까?
성도 여러분, 세미한 소리를 들으려면 마음이 고요해야 합니다. 마음이 들떠 있어서는 듣지 못합니다. 증오와 불만과 원망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 것도 안 됩니다. 세미 하게 들리는 주님의 음성을 쟁쟁한 음성으로 들을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마음을 고요하게, 아주 고요하게 가라앉혀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에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모든 역사가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음을 역력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시요,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하나님께서는 한결같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연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능력과 사랑이 오늘의 이 현실 속에 엄연히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두려움. 그것은 영적 생활의 방해물입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사랑을 줄어들게 하며, 두려움은 정열을 식게 하며, 두려움은 믿음을 약화시키고 두려움은 하나님의 증거를 무력하게 하며, 두려움은 기도하지 않게 하며, 두려움은 성령을 슬프게 하며 두려움은 곧 복종치 않음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여러분! 오늘 지금 마음속에 모든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과 걱정을 오늘 다윗의 고백처럼 요동하지 않는 믿음의 법칙을 가지고 물리쳐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42:11)
본문 9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지난 3천 년 동안 지구상에는 3천3백 번의 전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의 역사란 싸움의 역사였다는 말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미소 간의 핵 경쟁이 한창 진행되던 때에는 실로 생각하기도 힘든 어리석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들이 가진 핵탄두만으로도 그들은 지구를 41회 파괴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지구이므로 한 번만 파괴해도 끝날 일을 41회나 파괴할 무기를 마련한다는 것은 제정신으로 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지금도 지구상에서는 날마다 3만5천 명이 식량이 없어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증오심과 싸움을 위하여 전 세계가 쓰는 돈은 연간 5천5백억 달러에 이른다고 합니다. 사회복지 사업과 교육비를 대폭 줄이면서까지 무력 경쟁에 골몰하는 것은 비극을 넘어서 큰 죄악입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국가가 경영되는 불합리한 모습인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소망을 말하라면 아마도 평화라고 입을 모을 것입니다. 오직 평화의 왕이신 주님만이 무기를 불사르고 전쟁을 그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만이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의 마음에 있는 죄와 욕심과 증오를 없애실 수 있습니다.
본문 11절을 읽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전남 고창에는 모양성이란 옛 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매년 음력 정월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자기 힘에 넘치는 돌을 머리에 이고 십리도 넘는 이 모양성 주위를 한바퀴 돈다고 합니다. 그것은 모양성 주위를 한 바퀴 돌면 평안과 행복이 온다고 믿고 그렇게 돈다는 것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인생의 삶이 말할 수 없이 고달퍼 이렇게라도 해서 그 액을 좀 면해 보려는 가냘픈 심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그 산꼭대기에는 초막 한 칸의 초라한 집이 한 채가 있습니다. 그 집에는 날마다 찬송이 흘러나오는 데 이 집은 언제나 찬송을 부르며 비록 가난하게 살지라도 기쁨과 감사와 찬송 속에 만족스럽게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진정 예수님만이 인생의 피난처요 안식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그 중에서 어떤 경우에는 직접 개입하셔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죄악과 질병과 전쟁의 불구덩이 속에 살며 슬퍼하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만 오면 이런 악한 것들이 우리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그리고 그를 의지하면 영원히 안전합니다. 우리는 암울하고 고통스런 상황에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오직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가 되신다"고 외치며 분명한 신앙을 고백합시다.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과 사랑에 대해서 확신하기만 한다면 아무리 요란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젖 땐 아이의 평안을 누리며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본문: 시46: 1- 11
1차 세계 대전 중, 곧바로 전방으로 나가야 될 군인들을 위하여 연회가 베풀어졌습니다. 모임 행사가 끝날 즈음 한 젊은 장교가 그 환대에 대하여 감사의 표시를 하였습니다. 그의 말에는 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리에 앉기 전 앞서와는 색다른 어조로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머잖아 프랑스를 건너갑니다. 그리고 죽을 가능성도 물론 뒤따릅니다. 누구라도 우리가 어떻게 죽어야 될지 말해 주겠습니까?"
어느 누구도 어떻게 죽어야 될지를 말해 줄 사람은 없는 듯 보였을 때 연회 행사에 참석한 가수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오더니 군인들을 향하여 멘델스존의 <엘리야>에 나오는 장대한 아리아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오, 주님 안에 안식이 있나니, 그 분을 향해 인내하며 기다릴지라. 그 분께서는 당신 마음의 소원들을 주시리라 당신의 길을 그 분께 맡기고 그 분을 신뢰하라! 악행하는 자들로 인하여 스스로 초조해하지 말라. 오, 주님 안에 안식이 있나니. 그 분을 향해 인내하며 기다릴지라. 그 분께서는 당신 마음의 소원들을 주시리라."
이는 인생의 위협에 직면한 우리 모두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그 분이 이 모든 것들을 자기의 손으로 잡고 계시다는 것을 믿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 분은 우리의 피난처이시고, 안전이시며, 위로이시고 기쁨이십니다. 그리고 그 분의 영원하신 팔 안에서 완전한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후, 유럽의 대학생들과 젊은이들 중에는 삶에 대해 번민, 갈등을 느끼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프랜시스 쉐퍼 박사 부부는 1955년 스위스 알프스 산 한 계곡 웨이모라는 마을에 라브리를 개방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삶에 지친 영혼들이 라브리에서 쉼을 얻도록 도와주는 사역을 하였습니다. 여름철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내리면 원두막이나 오두막에서 잠시 머물러 비를 피하듯이 라브리에서 인생의 폭풍과 소나기를 피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이었습니다. 현대인들은 너무나 힘든 삶에 지쳐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영적으로 방황하며 갈등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영적 피난처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는 인생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 줄 피난처가 없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문화적인 욕구를 충족하며 살아가지만 더욱 갈증을 느끼며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인생의 해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고, 인생의 답을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의 영적 피난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진정한 피난처요 우리들이 쉼을 얻을 수 있는 오두막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태복음11:28-29)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시61:3)
오늘 우리가 사는 삶의 정황은 어떠합니까? 지금 현재, 세계 곳곳에서 홍수, 가뭄, 사막화 현상, 공기 오염, 물 오염, 탄저병, 에이즈, 암 등의 재난으로 엄청난 사람들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아프리카, 남미, 동부 유럽,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라에서 민족 전쟁, 인종 전쟁, 종교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굶고, 병들고, 추위와 공포 속에 떨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사는 우리 사회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부정부패의 극을 달리는 정치와 권력, 무한 경쟁의 경제 전쟁으로 인한 경제 위협,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불어나는 노숙자, 소년 소녀, 장애인, 버림받은 노인 문제, 사회적으로 만연한 도덕의식, 윤리의식의 실종, 학문을 표절하는 대학, 종교계의 타락 등등 혼미의 극치로 치닫는 사회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지금 현재, 무엇보다 나의 실존적 상황은 어떠합니까? 내 영혼이 바닷물이 흉용하고 산이 흔들리는 불안 속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내 가정이 참혹하고 비극적이고 야비한 갈등 전쟁 속에 있지 않습니까? 내 교회를 진정으로 잘 섬기고 있습니까? 뉴질랜드와 일본의 대 지진과 쓰나미, 미국의 토네이도 계속 이어지는 중동의 테러 안전한 곳이 어딥니까? '우리의 피난처는 어디 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세 번이나 반복해서 답을 주고 있습니다.
1절 첫머리에서부터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라고 합니다.
7절 끝에서도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말합니다.
11절에서도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라는 말로 마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을 통해서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을 자연과 역사의 주인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모든 자연과 나라들과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힘이 되어주시고 그 어떤 환난 가운데서도 그들을 도우심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는 1절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는 7절과 11절에서의 이스라엘의 신뢰는 바로 이 시편 46편의 요점입니다.
본문 1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스위스는 경치가 아름답고 설경이 훌륭하여 관광객이 많이 모여드는 곳입니다. 어느 날 여러 명의 등산객들이 그 곳 자리에 익숙한 안내인을 동반하고 알프스 산에 올라갔습니다. 설경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내려오는 길이었는데, 고요하던 골짜기에서 갑자기 폭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안내인은 곧 그 폭음의 정체를 깨닫고 “눈사태다, 피신해야 산다!”라고 날카로운 비명을 올렸습니다. 모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천만다행으로 안내인이 그 옆에 있는 큰 바위를 발견하여 모두 재빨리 그 바위 밑으로 기어들어갔습니다. 맨 뒷사람까지 다 들어가자 어마어마한 눈사태가 이들을 내려덮쳤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바위 밑에서 모두 안전하게 생명을 구했습니다. 하나님 역시 우리를 보호하시는 바위와도 같은 분이기에 시편 기자는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된 우리도 많은 위험과 고난 중에서 하나님만을 의뢰할 때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렘17:7)
한 소년이 엄청나게 큰 돌을 옮기려 하고 있었습니다. 땀을 흘리며 있는 갖은 애를 써보았지만 그 돌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 그것을 보고 있던 그 소년의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얘야, 네 모든 힘을 다 동원해 보려므나.’ 지금까지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아버지의 말씀에 용기를 내어서 소년은 다시 있는 힘을 다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네 모든 힘을 다 사용했니?’ 소년이 그렇다고 대답했을 때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니야. 너는 네가 쓸 수 있는 모든 힘을 다 사용하지 않았어. 넌 아직까지 이 아빠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잖아!’
우리는 오늘도 우리의 삶 가운데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과 여러 사람을 통해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가운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하고서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노력과 바쁜 손놀림을 멈추고 우리가 사용하지 않은 힘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겼는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실존적 고백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방패시오.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오. 하나님은 나의 요새시오. 하나님은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하나님은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오. 하나님은 나의 빛이시오. 하나님은 내 생명의 능력이요.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시오.
시편의 이런 고백들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적 정황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회는 목축, 농경 사회로 홍수, 가뭄, 전염병 등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재앙과, 블레셋, 가나안, 암몬, 앗수르, 바벨론 등과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항상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불안과 고통 속에 살았기에,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을 당시 안전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산성, 요새, 방패, 불, 목자, 바위 등에 비유함으로 저들의 하나님에 대한 실존적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
본문 2- 3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시인은 본 절에서 땅과 산과 바다가 다 요동하고 천지가 개벽을 하는 일이 있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는 말로 그 신뢰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어떤 자연재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안전한 피난처가 되실 것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본문 4-6절에서는 이스라엘과 온 열방들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한 뭇 나라가 떠들며 위협할지라도 예루살렘 성과 이스라엘 나라는 안전할 것이라는 말로 그 신뢰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한다'는 것은 외부로는 노출되지 않고 지하수로를 통해 흘러드는 샘물 때문에 예루살렘 성이 적들에 의해 포위되는 일이 있더라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음을 말합니다.
본문 5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유명한 야구 선수였다가 전도자가 된 빌리 선데이에 관한 일화입니다. 그가 회심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에, 그 교회의 한 성도가 그의 어깨에 팔을 얹고 신앙에 대한 좋은 충고를 해주었습니다. ‘윌리엄, 나는 자네에게 세 가지 간단한 규칙을 일러 주고 싶네. 만약 이 규칙을 지킨다면 자네는 결코 신앙의 퇴보자는 되지 않을 걸세. 하루에 15분 동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하루에 15분 동안 하나님께 말하고 하루에 15분 동안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일세.’ 이것은 초신자인 빌리에게 매일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을 것과 기도할 것, 전도할 것을 알려 준 것입니다. 그날부터 빌리는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같이 하여 그는 하루를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려 했던 것입니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라'는 것은 새벽부터, 새벽에도, 다 잠을 자는 시간 그래서 기습을 당할 위험이 있는 시간에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심으로 안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정치적·군사적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안전한 피난처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루의 삶을 질서 있게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루가 새롭게 시작되는 시간,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대화하는 것만큼 복된 일은 없습니다.
본문 7절을 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어떤 목자가 언덕 위에서 양 떼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독수리 한 마리가 쏜살같이 내려와 어린 양을 채가려다가 그것을 막으려는 어미 양과 싸운 후 그냥 날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깜짝 놀란 목자는 달려가 보았습니다. 어미 양은 두 눈이 독수리에게 쪼인 채 피를 흘리며 서 있었습니다. 새끼 양들은 어미의 네 발 사이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안전했습니다. 어미는 도망가면 살 수 있었지만 자기가 없으면 새끼가 독수리의 밥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도망가지 않고 자기 새끼를 지키기 위해 두 눈을 잃고 만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수많은 위험 속에서 우리는 자주 피할 곳을 찾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위험 속에서 보호해 줄 산성을 찾습니다. 조금만 힘이 들어도 그것을 피하고 편한 것을 추구하는 시대에 누가 대신하여 희생양이 되겠습니까? 누가 자신보다 이웃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어미 양처럼 자신의 생명을 내놓은 분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며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게 된 것입니다. 그분 안에 안전과 생명이 있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여호와는 나의 산성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나의 피할 반석이시라”(시94:22)
본문 8- 9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본 절에서는 자연에 대해서든 나라들 사이의 전쟁에 대해서든 주인 되신 하나님의 주권과 그가 능력으로 행하시는 일을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다'는 것은 땅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주권자이시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신다'는 것은 전쟁의 주인도 하나님이시며 전쟁을 그치게 하시고 평화를 세우시며 나라와 백성들의 안전을 지켜주시는 이가 하나님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언제나 우리의 피난처이시라는 말입니다.
본문 10절을 읽겠습니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본 절에서는 결론적으로 사람들이 할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는 것은 칼과 창을 들고 전차를 몰며 전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것이 아니라 모든 무기를 버리고 진정한 평화와 안녕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곰곰히 생각해보라는 말입니다. 이어서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한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홀로 하나님이시고 자연과 역사와 모든 나라의 평화와 안녕의 주인이심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불안의 시기에 시편 46편에 담긴 이스라엘의 믿음과 고백이 오늘 우리의 믿음과 고백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슬람국가 터어키의 군대가 유럽 기독교 국가들에게 현실적 위협으로 닥쳐왔던 1529년 마틴 루터가 그 유명한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라는 찬송을 지은 것이 바로 이 시편 46편을 토대로 해서였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이 그의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번역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던 첫 번째 시편도 바로 이 제46편이었습니다. 이렇게 이 시편 46편은 위기의 때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귀한 위로의 말씀이 되곤 했습니다. 안팎으로 그리고 여러 가지로 위기에 처한 오늘 우리에게도 이 시편 46편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의 말씀으로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하나님을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 알아야 합니다. 온 우주와 역사가 그의 주권 안에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 어떤 환난과 위험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지키시는 우리의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전쟁을 그치게 하시고 사람들 사이에 진정한 평화와 안녕을 주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확신하며 그 앞에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찾아오는 두려움은 다섯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로 가난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두 번째는 질병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세 번째는 무지에 대한 두려움이며
네 번째는 고독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다섯 번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처럼 두려움이란 환경에서 비롯된 것도 있고 우리의 심층 깊은 곳에서 두려움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두려움의 대상이 있는 것도 있고 두려움의 대상이 없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내재된 무의식적인 두려움이 우리의 삶에 끼치는 영향을 살펴보면 사단 마귀가 우리에게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과 소망을 주려한다고 말씀하십니다.(렘29: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원수 사단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목표와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두려움은 우리의 잠재력을 마비시킵니다. 두려움은 당신의 재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묶어버려서 주저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기회를 놓치게 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기를 꺾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자포자기하게 만듭니다. 열등감이란 질병을 앓게 됩니다.
둘째, 두려움은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먼저는 하나님과 관계를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기도를 못하게 만듭니다. 말씀을 멀리하게 만듭니다. 예배를 못 드리도록 방해합니다. 뿐만 아니라 두려움은 다른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대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거절당하기를 두려워해서 가면을 쓰고 원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가장하고 정말로 느끼는 실재 감정을 부정합니다. 이래서 사람이 소심하게 되고 맙니다.
셋째, 두려움은 우리가 누리는 평안을 깨뜨립니다. 마음이 불안합니다. 마음에 평강을 빼앗아 갑니다. 불안은 심리적인 암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쉽게 전염됩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속에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을 옮겨 놓았다면 벌써 사단에게 사로잡힌 것입니다.
넷째 두려움은 우리의 성공을 방해합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새로운 일을 못하게 합니다. 윌 스트리트 저널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여러분들은 기억도 할 수 없는 수많은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처음 걸음마를 하기 위해서 일어서다가 넘어졌을 것입니다. 처음 수영을 배울 때 물 속으로 쏙 빠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홈런을 많이 치는 타자일수록 스트럭 아웃이 많습니다.”
* 메이시는 뉴욕에서 일곱 번의 실패 끝에 유명한 점포를 얻게 되었습니다.
* 영국의 소설가 존 크래시는 564권의 책을 출판하면서 출판사로부터 753번 출판 거절을 당했습니다.
* 베이브 룻은 1,330번 스트럭 아웃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714개의 홈런을 때렸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시도하지 않는 것 때문에 기회를 잃는 것을 염려하십시오.”
문제는 생활 가운데 실패가 없다면 생활 속에 위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무난하고 안심된 생활은 권태나 열등의식에 빠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생산적인 믿음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계획하셨고 위임하셨습니다.
두려움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그가 반드시 무엇인가를 해야만 된다고 느끼거나 혹은 불길한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느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바라는 일이 일어날 것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일이 발생할 것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실패를 준비합니다.
두려움은 두려워하는 일이 생기게 합니다. 두려움이 엄습해 오면 정서가 흔들리게 됩니다. 정서가 흔들리면 이성이 말을 안 듣습니다. 사람이 멍해지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무기력에 빠지는 것입니다.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 개들이 어떤 사람이 지나갈 때에는 유난히 짖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짖지 않는가에 대해 말한 심리학자의 글이 있습니다. 개들은 무엇인가 안정되지 못한 사람이 두려운 마음을 품고 개 앞을 지나가게 되면 그가 떠는 진동이 개의 촉감에까지 전달되므로 그 개가 짖는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사랑의 결핍에서 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다윗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비결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찌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셀라)' (시46: 2- 3)
첫째, 기댈만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46:1)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46:7)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시46:11)
아마 성도들이 가장 많이 암송하고 묵상하며 힘을 얻는 성경구절은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일 것입니다. 군대 입대 할 때도 시험장에 갈 때도 위기에 처했을 때도 우리에게 늘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나치 독일의 처참한 유대인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가 많이 듣고 있습니다. 이 수용소에 대한 사실을 관찰하고 기록한 프랭클 박사는 그의 저서 <의미를 찾는 인간의 탐색>에서 결론적으로 말하기를 '마음으로 포기한 사람은 몸도 곧 쇠약해졌다. 그러나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려운 처지에 상관없이 자신은 물론 절망에 허덕이는 다른 사람들까지 격려하여 몸과 마음이 함께 건강해져서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째, 생수의 근원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시46:4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한 시내가 나뉘어 흘러나오는 생명수 시냇물입니다. 그 생수를 마신 모든 성도들이 샘솟는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 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이 생수의 강이신 그리스도를 만난 수가성 여인은 거절의 두려움과 고독의 두려움 죄책의 두려움에서 기쁨을 회복하고 삶이 역전되었습니다. 삭개오도 외로움과 따돌림의 왕따의 두려움에서 영적인 갈급함을 해갈하고 회복을 하였던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요7:38)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계22:1)
이 말씀은 부활의 살리는 영으로 제자들에게 부어주실 피난처되신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수정같은 맑은 생명수의 강을 밧모섬에서 요한은 보고 있습니다. 이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새벽기도를 통하여 무장합니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그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46:5)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시34:4)
새벽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기도를 통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기도는 두려움을 이기는 강력한 무기인 것입니다.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고난이 닥쳐 앞길이 캄캄해 질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 기도는 보이지 않던 길을 보여줍니다.
1940년 제2차 대전 때 영국은 5월 26일을 기도일로 정하고 국민이 기도함으로써 승전의 기반을 잡았으며, 그 해 9월 8일에는 영. 미 양국이 함께 기도함으로써 불리했던 전세 속에 돌파구를 찾았습니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잭 뉴턴은 말했습니다. '망원경으로 평소 시계 불가능한 곳을 볼 수 있습니다. 무릎 꾼채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워싱턴에 가면 링컨이 애용하던 성경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 속에 손때에 이겨져 눌린 손가락 자국이 있습니다. 여러 번 같은 장소를 손가락으로 눌러서 생긴 자국입니다. 그곳은 시편 34편 4절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시리로다.' 링컨은 남북전쟁과 그의 평생에 걸친 그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은 반드시 대답해 주신다는 확신과 모든 두려움에서 건져주신다는 소망'을 가지고 살았음이 눌린 자국까지 나도록 되풀이 읽은 시편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 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 6- 7)
기도하는 자에게 주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붙들어 주십니다.
넷째, 영적 공격무기를 주셨습니다.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시46:6)
'저가 소라를 발하시매' 땅이 녹았던 그분의 말씀이 우리의 영적인 공격무기입니다. 우리 주님도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를 대적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되었으되' 신명기의 말씀들을 통하여 이기셨습니다.
루마니아의 공산주의 체제 밑에서 박해를 받던 범브랜트 목사는 그가 옥중에 있을 때에 성경을 읽으면서 두려워 말라 는 말씀이 수없이 기록된 것을 보고 도대체 몇 번이나 씌어 있는가를 세어 보았더니 꼭 365번이 기록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숫자는 1년 365일 매일 한 번씩에 해당되는 숫자입니다. 매일 우리에게 염려와 두려움이 침입해 옵니다, 매 순간순간마다 주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파도를 향하여 명하시며 바람을 꾸짖으심 주님의 능력의 말씀으로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다섯째, 믿음의 방패가 있습니다.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찌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시46: 8)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46:10)
우리는 믿는 구석이 있을 때 잠잠히 기다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믿기에 가만히 하나님의 행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가는 삼등 열차에, 초등학교 1학년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어린 학생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는 동행하는 어른들도 없는지 낯선 사람들 틈에 끼여 있었으나 조금도 근심스러운 기색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혼자서 가는 길이지만 즐겁기만 한지 연신 창 밖을 내다보며 기쁜 표정으로 싱글벙글하고만 있었습니다. 같이 앉았던 사람들이 그 어린 소년의 의젓하고 태연스런 태도에 커다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애의 한 가지 버릇은, 기차가 정거장에 멎을 때마다 밖으로 달려 나갔다가 돌아와 자기 자리에 앉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을 이상하게 여긴 나머지 거기 둘러앉았던 어른들이, 매번 어딜 다녀오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 어린이는 자랑스럽게 대답하기를, '아빠한테 갔다 오는 거예요'라고 하였습니다. '너희 아빠가 어디 계신데?'하고 그들은 재차 물었습니다. '우리 아빠가 이 기차의 기관사예요.' 하며 소년은 자못 의기양양하게 손님들을 둘러보았습니다. 기관사를 아버지로 가진 이 소년은 그처럼 자신만만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세상에서 '최고'라고 믿었고, 그의 아들인 자기의 신분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므로 그 기나긴 여행 중 아무런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 여정의 기차를 조종하는 기관사가 바로 우리들의 하나님 아버지라면 어째서 우리가 이 멀고 긴 여행을 괴로움과 두려움으로만 마쳐야 합니까?
성도 여러분, 세미한 소리를 들으려면 마음이 고요해야 합니다. 마음이 들떠 있어서는 듣지 못합니다. 증오와 불만과 원망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 것도 안 됩니다. 세미 하게 들리는 주님의 음성을 쟁쟁한 음성으로 들을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마음을 고요하게, 아주 고요하게 가라앉혀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에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모든 역사가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음을 역력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시요,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하나님께서는 한결같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연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능력과 사랑이 오늘의 이 현실 속에 엄연히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두려움. 그것은 영적 생활의 방해물입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사랑을 줄어들게 하며, 두려움은 정열을 식게 하며, 두려움은 믿음을 약화시키고 두려움은 하나님의 증거를 무력하게 하며, 두려움은 기도하지 않게 하며, 두려움은 성령을 슬프게 하며 두려움은 곧 복종치 않음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여러분! 오늘 지금 마음속에 모든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과 걱정을 오늘 다윗의 고백처럼 요동하지 않는 믿음의 법칙을 가지고 물리쳐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42:11)
본문 9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지난 3천 년 동안 지구상에는 3천3백 번의 전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의 역사란 싸움의 역사였다는 말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미소 간의 핵 경쟁이 한창 진행되던 때에는 실로 생각하기도 힘든 어리석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들이 가진 핵탄두만으로도 그들은 지구를 41회 파괴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지구이므로 한 번만 파괴해도 끝날 일을 41회나 파괴할 무기를 마련한다는 것은 제정신으로 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지금도 지구상에서는 날마다 3만5천 명이 식량이 없어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증오심과 싸움을 위하여 전 세계가 쓰는 돈은 연간 5천5백억 달러에 이른다고 합니다. 사회복지 사업과 교육비를 대폭 줄이면서까지 무력 경쟁에 골몰하는 것은 비극을 넘어서 큰 죄악입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국가가 경영되는 불합리한 모습인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소망을 말하라면 아마도 평화라고 입을 모을 것입니다. 오직 평화의 왕이신 주님만이 무기를 불사르고 전쟁을 그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만이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의 마음에 있는 죄와 욕심과 증오를 없애실 수 있습니다.
본문 11절을 읽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전남 고창에는 모양성이란 옛 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매년 음력 정월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자기 힘에 넘치는 돌을 머리에 이고 십리도 넘는 이 모양성 주위를 한바퀴 돈다고 합니다. 그것은 모양성 주위를 한 바퀴 돌면 평안과 행복이 온다고 믿고 그렇게 돈다는 것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인생의 삶이 말할 수 없이 고달퍼 이렇게라도 해서 그 액을 좀 면해 보려는 가냘픈 심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그 산꼭대기에는 초막 한 칸의 초라한 집이 한 채가 있습니다. 그 집에는 날마다 찬송이 흘러나오는 데 이 집은 언제나 찬송을 부르며 비록 가난하게 살지라도 기쁨과 감사와 찬송 속에 만족스럽게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진정 예수님만이 인생의 피난처요 안식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그 중에서 어떤 경우에는 직접 개입하셔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죄악과 질병과 전쟁의 불구덩이 속에 살며 슬퍼하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만 오면 이런 악한 것들이 우리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그리고 그를 의지하면 영원히 안전합니다. 우리는 암울하고 고통스런 상황에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오직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가 되신다"고 외치며 분명한 신앙을 고백합시다.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과 사랑에 대해서 확신하기만 한다면 아무리 요란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젖 땐 아이의 평안을 누리며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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