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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0: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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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509007 |
정용섭 목사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의 주
요한복음 20:1-18, 부활절, 2011년 4월24일
오늘은 2011년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은 그리스도교 교회력에서 전통적으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절기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부활절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이에 반해 성탄절은 상당히 훗날 교회 절기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부활절은 세계 모든 교회가 똑같은 날로 지키지만 성탄절은 좀 다릅니다.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는 12월25일을, 정교회는 1월6일을 성탄절로 지킵니다. 이는 곧 부활절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부활절을 맞아 한국교회는 지역마다 연합예배를 드립니다. 가장 큰 축제니까 그럴만합니다. 세례를 베풀기도 하고, 달걀을 나눠 먹으면서 부활의 의미를 새기기도 합니다. 부활절 음악예배를 드리는 교회도 있습니다. 각종 행사를 다채롭게 여는 것도 나름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행사에 머물지 말고 부활의 근본적인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선 여러분 자신에게 질문해보십시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에 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부활을 죽었다가 다시 사는 환생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나 나사로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이건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됩니다. 피부가 검은 사람은 검은 피부로, 장애인은 장애를 안고 다시 살아난다면 하나님의 정의에 위배됩니다. 부활의 세계에서도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친구와 형제 관계가 그대로 유지된다면, 그래서 가족이 없이 외롭게 살았던 사람이 그대로 외롭다면 부활의 세계는 절대적인 세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의 세계를 장가가고 시집가는 방식이 아니라 천사와 같은 삶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삶으로 회귀하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은 무엇일까요? 부활의 상태를 실증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려는 사람은 사이비 교주입니다. 부활이 무의미하다거나 부정해도 좋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실존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가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생명 사건입니다. 그 하나님의 종말론적 생명 사건은 우리의 세계 경험을 근본적으로 뛰어넘습니다. 지금의 이 세계 경험에 고착되어 있는 한 부활생명을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비유를 들어야겠군요. 부활은 씨앗으로부터 꽃으로 변화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씨앗만으로는 꽃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실험실에서 씨앗을 아무리 물리적이고 화학적으로 분해하고 힘을 가해도 거기서 꽃을 뽑아낼 수 없습니다. 씨앗은 땅에 심겨 썩어서 싹을 틔우는 과정을 거쳐서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꽃은 씨앗에서 나오는 게 분명하지만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세계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씨앗은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이 세상의 삶과 비슷합니다. 이것을 아무리 분석하고 가공해도 부활에 이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으면 부활도 없습니다. 죽는 것만으로 끝난다면 물론 끝장입니다. 모든 씨앗이 썩는다고 해서 무조건 꽃을 피울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인간의 죽음 뒤에는 창조주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고유한 권능이 개입되어서 부활의 생명이 시작됩니다.
이런 설명이 옳은지, 어떤 근거가 있는 건지 궁금하게 생각하실 분들이 있겠지요.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역사에서 일어난 부활 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종말론적 생명 사건이 역사 안으로 선취된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것입니다. 만약 그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부활을 막연하게만 생각했을 겁니다. 기껏해야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 정도로 생각했을 겁니다. 구약성서의 유대인들도 부활을 모호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죽으면 모두 게헨나, 즉 지하의 음부로 내려갈 뿐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역사 경험을 통해서 좀더 발전된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묵시사상입니다. 이런 사상들은 여전히 부활의 실체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교회는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든 종교와 사상이 미처 알지 못했던 구체적인 부활의 세계를 알고 맛보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류의 미래가 담보된 부활 사건이 예수의 운명에 발생했다는 사실에 대한 증인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역사의 한 지점에서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첫 증인은 놀랍게도 막달라 마리아라는 이름의 여자입니다. 복음서의 보도에 따르면 부활의 첫 증인들이 모두 여자들이었습니다. 고대인들은 동양이건 서양이건 큰 차이가 없이 여자들의 권위를 남자들에 비해서 낮추어보았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오히려 여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뜻밖입니다. 바울은 이와 달리 부활 증인의 목록에서 여자들을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서와 바울 서신이 서로 다른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가 지금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각각 다른 전승을 따랐을지 모르고, 아니면 바울이 복음서를 전제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지 복음서에 따르면 여자들이 예수님의 빈 무덤을 가장 처음으로 확인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매장할 때 적절한 절차를 밟지 못했습니다. 안식일이 바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시신을 수습하는 일은 당시에 여자들이 맡았습니다. 여자들은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이 매장된 무덤으로 갔다가 무덤이 빈 것을 본 것입니다. 복음서마다 이들 여자들의 명단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모든 명단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는 막달라 마리아만 나옵니다. 요한복음에는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의 중요한 제자로 취급되는데, 이 부활 전승에서만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밀립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으로 추정되는 제자에게 그 사실을 알립니다. 마리아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어디론가 치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제자들에게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무덤으로 달려간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에 시체는 없고 시체를 쌌던 세마포만 보았습니다. 이들은 이게 무슨 사태인지 알지 못한 채 각각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울다가 무덤 안을 들여다보다가 뜻밖의 광경을 보았습니다. 흰 옷을 입은 두 천사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왜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마리아의 대답입니다.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요 20:13) 마리아가 이 말을 하고 뒤를 돌아보자 부활의 주님이 계셨지만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천사들과 똑같은 내용으로 마리에게 왜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인줄로 착각하고 천사들에게 했던 똑같은 대답을 합니다.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요 20:15) 마리아의 진술은 예수 부활에 대한 당시의 소문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부활한 게 아니라 누군가 시체를 치워놓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 27:62절 이하에 따르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빌라도에게 와서 예수님을 속이던 자라고 비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한 뒤에 사람들에게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헛소문을 퍼트릴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이 그 이전보다 더 혼란스럽게 될 것이라고 은근히 협박을 했습니다. 시체가 도난당하지 않도록 경비를 잘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은 그들만이 아니라 마리아와 제자들에게도 당혹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무덤 부근에서 만나는 이들마다 예수님의 시체를 찾아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마리아의 마음을 헤아리셨겠지요.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습니다. 그 순간에 마리아의 눈이 밝아져서 주님을 알아보고 선생님이라는 뜻의 ‘랍오니!’ 하고 대답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지난날 일곱 귀신에 들렸다가 예수님을 통해서 치유 받은 경험이 있었습니다.(막 16:9) 주님이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에 그녀는 아주 놀랍고 특별한 경험을 한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그냥 경험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먼저 부르셔야만 합니다. 부활의 주님이 빌라도와 가야바나 이스라엘 주민들에게 나타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이 나타났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볼 수 있거나 알아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주님과의 어떤 특별한 관계에서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일상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이 느낄 수 없는 것을 서로 공유하기 마련입니다. 그 두 사람에게 어떤 공명이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세상이 돈벌이의 대상에 불과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가득한 피조물로 경험됩니다. 성경이 어떤 사람에게는 흔한 책에 불과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고 전했습니다.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교의 부활 경험의 첫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는 마리아와 똑같은 차원에서 주님의 부활을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그녀의 경험은 그녀만의 고유한 것입니다. 본문 17절에 따르면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은 아직 승천 이전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주님이 아버지라고 불렀던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곧 승천입니다. 그 주님은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분이 되셨습니다. 하나님 우편은 하나님과 동일한 권능을 행사하는 자리를 가리킵니다. 부활, 승천, 하나님 우편은 영적으로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바로 예수님의 승천 직전에 예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경험은 우리에게 반복되지 않습니다. 마리아와 그 뒤로 부활의 주님을 만난 몇몇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안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과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직접 경험한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고, 전해들은 사람들의 숫자는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리아를 비롯해서 베드로 등등, 모든 부활의 증인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유지되려면 전해들은 사람들도 직접 경험한 사람들 못지않은 부활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교의 당면한 영적 숙제였고,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마리아와 똑같은 경험은 할 수 없다 하더라도 간접적으로도 그런 경험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못 보고도 믿을 수 있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가능할까요? 어떻게 가능할까요?
마리아의 부활 경험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부활 신앙과 분리된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서의 여러 증언과 서신의 여러 증언을 통해서 초기 그리스도교의 부활 신앙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예수님을 직접 못 본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마리아처럼 부활 신앙을 경험할 수 있으며, 더 나가서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그런 경험과 증인으로서의 신앙이 아니라면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모래 위에 집을 세우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이왕 그리스도인으로 살겠다고 결단했다면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오십시오.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자리합니다.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우리의 무상한 생명이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되는 초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려는 영적 수고를 아끼지 마십시오. 어느 때가 되면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던, 그러나 지금은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자리하신 부활의 주님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여러분을 부르실 것입니다. “마리아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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