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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매체에 실린 최용우의 글을 한 곳에 모아보았습니다. 아쉽게도 글이 실린 매체를 찾을 수 없어서 올리지 못한 글도 많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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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시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정오 12:30분 에...
<처음맨트> 차한잔 마시면서 전해드리는 [햇볕같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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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연구소와 실험소
예수님이 함께 하는 교회나 가정이나 공동체는 밝음과 기쁨과 따스함과 친절이 넘쳐야 합니다. 그래서 그 모임에 들어온 사람들은 저절로 그 안에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말씀들이 모두 실제로 실현되는 모습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나 심술궂게 남을 비난하거나 불친절하거나 시기하면서, 아무리 성경을 그럴싸하게 연구하고 해석하여 말한다 해도 그 속에 예수님은 계실 수가 없습니다.
연구소는 열심히 연구를 하는 곳입니다. 실험소는 연구한 결과가 정말 맞는지 실험해보는 곳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는 연구소는 매우 많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정말 그러한가 하여 '실험'해 보는 실험소는 아주 드문 현실입니다..
저는 말씀을 깊이 연구할 만큼 배우지도 못했고, 그런 재능도 없어서 말씀을 연구하는 연구원보다는 말씀을 실제로 그러한가 실험해보는 실험원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사람의 골수를 쪼개어 변화시키는지 실험해 보기를 원합니다. 내 머리가 쪼개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에 모신 나의 가정과, 나의 교회와, 나의 일터가 작은 천국이 되는지 안 되는지 실험해 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내가 있는 곳이 밝음과 기쁨과 따스함과 친절이 넘치는 곳으로 변화되는지 안 되는지 실험해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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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 하나님을 봅니다.
어린 소녀가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정말 하나님이 계시나요?
그럼,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나요?
그리고 하나님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할아버지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소녀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내 눈에는 하나님 외에는 아무 것도 안 보이는구나."
눈으로는 사물을 보고, 영으로는 이면을 봅니다.
산, 바다, 하늘, 구름, 나무, 꽃, 열매...
심지어 차, 집, 도로, 텔레비전, 컴퓨터도
하나님이 주신 재료로 만들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 작품을 통해 저는 하나님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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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왜 하필이면 찬송가를 부를까?
대전역 앞 중앙시장에 가끔 갑니다. 갈 때마다 만나는 사람이 있는데, 다리가 있는지 없는지 타이어 튜브로 감고 작은 리어카를 밀고 다니는 걸인입니다. 사람들 사이로 그 옹삭한 몸을 이끌고 구걸을 하러 다니는데 그 리어카에 달린 작은 카세트에서는 꼭 다 늘어진 찬송가 테잎이 돌아갑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하필이면...
아무리 보아도 교회에 다닐 것 같지도 않고, 저런 몸으로 교회에 간다면 교회당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쫒겨날 것 같은(?) 그런 사람인데, 아무리 얼굴을 들여다보아도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에 놀란 표정은 아닌데, 하필이면 찬송가를...
그러고 보니, 서울역 앞에도, 신도림역 앞에도, 전철 안에도 모두 걸인들은 하나같이 찬송가를 부르며 다닙니다. 찬불가나(불교 노래) 유행가를 부르는 경우를 본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왜 하필이면 찬송가를 부를까요.
찬송가를 불러야 그나마 '돈'이 많이 나오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무리 기독교인들이 인색하다고 탓해도 그래도 기독교인들 주머니가 더 잘 열리는 모양입니다. 찬불가를 부르거나 유행가를 불러서 수입이 더 좋다면 굳이 그들이 찬송가를 부를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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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하루의 시작은 '아침'이 아니라 '저녁'입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실 때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몇째 날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지금도 저녁부터 하루가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 시계는 해가 넘어가는 순간이 0시로써 24시간의 첫 시간인 그런 나라가 있다고 합니다.
인생에는 세 개의 문이 있습니다. 과거로 통하는 문, 현재로 통하는 문. 미래로 통하는 문입니다. 자, 잘 생각해 보세요.
지난 과거에 있었던 어떤 일을 자주 말하는 편입니까? 과거의 문을 자주 여닫는 사람은 과거에 따 놓은 훈장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현실이 고달프고 힘듭니까? 그래서 "아이고, 이놈의 세상~!" 하고 한탄하며 도무지 앞이 캄캄하여 보이지 않습니까? 현재의 문을 들락거리는 사람입니다. 과거는 실패 투성이 였고 현실은 암담해도, 미래의 문을 들락거리는 사람은 희망이 있어 얼굴에 광채가 나는 사람입니다.
"밝아져서 시작하고 어두워져서 끝내는 것보다, 어두워져서 시작하여 밝아져서 끝나는 편이 훨씬 더 좋다"는 말도 있습니다.
하루가 저녁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날이 밝으면 일어나서 할 일을 계획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무엇을 할까 망설이지 않게 됩니다.
자, 해가 넘어가는 시간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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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성경이 말하는 죄의 관념
유교적인 가르침의 분위기에서는 죄는 다분히 개인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개인을 굉장히 엄격하고 혹독하게 다룹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죄는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집단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동양적인 사고에서는 그 죄를 지은 당사자만 벌을 받지만, 성경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죄를 짓게 만든 사회나 민족전체에게 책임을 지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죄에 대한 용서를 빌 때 '나'라고 하지 않고 '우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비록 내가 물건을 훔치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훔치거나 거짓말을 하는 행위가 존재한다는 자체만으로도 나에게 어느정도 책임이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세상이 왜 이렇게 썩어버렸고, 우리나라가 왜 이렇게 이민 가버리고 싶을만큼 살기 힘든 나라가 되었는가? 라고 말할 때, 성경은 바로 나에게도 그런 현실을 만든 공동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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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맨트> 월간 [들꽃편지]발행인 최용우전도사님이 띄워드리는 [햇볕같은이야기]는 cyw.pe.kr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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