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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매체에 실린 최용우의 글을 한 곳에 모아보았습니다. 아쉽게도 글이 실린 매체를 찾을 수 없어서 올리지 못한 글도 많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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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cm 2001.10월호-(주제 열매 수확)
제목/ 나의 과수원
최용우 (월간 들꽃편지 발행인)
저는 아주 자그마한 과수원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하루의 대부분을 이 과수원에서 보냅니다. 지난 20년간 정성껏 가꾸어 온 저의 과수원에는 온갖 향기로운 꽃들과, 달콤한 열매와 시원한 나무 그늘이 있고, 언제나 샘솟는 옹달샘이 있으며, 다람쥐와 산새와 까치와 토끼 같은 동물들도 살고 있습니다. 저는 그 그늘에서 날마다 유유자적 인생을 즐기며 온갖 열매를 따며 살고 있습니다.
저의 과수원에는 신앙의 나무와, 문학, 철학, 시, 그림, 동화, 고전, 역사의 나무가 있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고, 때로는 폭풍우 치는 칠흙 같은 어두움과, 광명의 새 아침과, 감격과 감사와 기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작지만 알차고 평온한 저의 과수원을 아주 부러워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루종일 저의 과수원에서 서성이며 이 나무 저 나무, 만져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나마 과수원을 꾸미는데도 적잖은 눈물과 땀과 물질이 투자되었습니다.
행복하게도 우리 아이들은 아빠의 과수원에서 놀며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가끔씩은 나무를 꺾거나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이를 하지만,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저는 이 아이들도 아빠처럼 자신들만의 과수원을 꼭 갖기를 마음속 깊이 바라고 있습니다.
저의 과수원은 약 3천권 정도의 책이 있는 개인 서재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책을 수집하였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우표나 껌종이, 동전을 수집하였는데 저는 기를 쓰고 책을 모았습니다. 집이 가난하여 책장을 살만한 여유가 안되었기에 사과상자나 버려진 판자를 주워와 종이를 발라 책을 꽂는 책장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책은 제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평생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제가 결혼하기 전, 저의 초대를 받아 우리집에 온 아내는 자그마한 방에 출입문만 빼놓고 사면에 책이 가득한 것과, 다락문을 열자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책을 보고 입이 딱 벌어져 다물 줄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이나 이책 저책을 뽑아 보며 마음속으로 '이 남자에겐 뭐가 있다. 이 남자를 찍어야지' 하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14세기의 저명한 철학자 임마누엘은 이렇게 썼습니다.
"그대의 돈을 책을 사는데 써라. 그 대신 황금과 지성을 얻을 것이다. 만일 잉크가 책과 옷에 동시에 떨어졌다면 먼저 책에 떨어진 잉크를 닦아낸 다음에 옷에 묻은 잉크를 지워라. 만일 책과 돈을 동시에 땅에 떨어뜨렸다면 책을 먼저 집어 들어라. 책은 읽기 위한 것이지 장식해 두기 위한 것은 아니다. 책은 존경하는 생각을 품고 다루어야만 한다."
책이 있는 작은 책방은 온갖 좋은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풍성한 과수원입니다. 한 권 한 권의 책을 살 때마다 얽힌 사연이 있고, 한 권 한 권 책을 읽을 때마다 책이 준 감동과 감격과 은혜의 손때가 이끼처럼 끼어있습니다. 눈을 감고도 어느 책이 어디에 있는지 다 찾아낼 정도로 책은 저의 삶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아침에 일찍 문을 열고 책방에 들어서면 책들이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밤늦게 까지 글을 쓰다가 졸린 눈을 비비면 등뒤에서 책들이 힘내라고 열심히 응원을 합니다. 책들은 저에게 온갖 좋은 정보들을 주고, 마음을 살찌게 하고, 생각이 영글어 가게 하고, 미래를 꿈꾸게 하고, 삶을 풍성하게 합니다. 오랫동안 과수원을 잘 가꾸어 온 결과 문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글 쓰기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저는 그동안 여섯권의 책을 펴내어 풍성한 열매로 거두었고 앞으로 몇 권의 책이 더 계획되어 있습니다.
저는 제 한달 용돈은 거의 책을 사는데 다 들어간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주머니에 당장 돈이 없더라도 서점에 들러 책을 둘러보는 것은 신간 정보를 얻는 기회도 되고 견물생심이라고 자연히 책을 보면 사고 싶어지는 구입충동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일단 마음에 들고 읽어야 될 책이라는 판단이 서면 가격표는 보지말고 무조건 사는 것이 여러모로 좋습니다. 내일이야 어떻게 되든 무조건 사면 그것이 큰 힘이 됩니다. 덕분에 저는 신혼 초에 아내와 많이 다투기도 하였습니다.
목회자라면 특히 더욱 책을 사 나르는 일에 열심이어야 합니다. 풍성한 서재에서 양질의 알찬 설교가 나오고 빈약한 서재에서는 빈약한 설교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양서는 양약이고 악서는 독약입니다. 독서의 수준은 그 사람의 수준이고 베스트셀러는 그 나라의 수준이기도 합니다.
아, 책에 대한 달콤한 열매를 수확하고 있는데 제 둘째 딸내미가 아빠의 과수원 문을 다르륵 열고 들어왔습니다. 그림 그리게 종이와 연필을 달라고 보채는 딸에게 그림책과 종이와 연필을 주고 마룻바닥에 엎으려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래, 딸아. 아빠는 다른 집의 아기들처럼 온갖 좋은 것으로 네게 줄만큼 부자가 아니란다. 새 옷 한번도 못 사주고, 제대로 사진 한번 못 찍어주고, 돌잔치 백일잔치도 못해줬지만 그러나 건강하게 잘 자라는 너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한단다. 가난한 아빠 전도사가 네게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한없이 한없이 너를 위한 기도를 올려드리는 것 밖에 없구나.
아, 그래 또 한가지가 있다. 네게 만큼은 아빠의 서재에 언제든지 얼마든지 언제까지든 (네가 시집을 간 이후에라도) 들어와서 무슨 책이든 다 볼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마. 아빠의 일기장까지도 네가 본다면 기꺼이 열어주겠다.(음...아빠가 일기 쓴다는 걸 엄마가 알면 안 되는데... 분명히 훔쳐 볼 꺼야)
다행히 아기 때부터 너는 책을 찢거나 구기지 않고 한 장씩 넘겨보곤 했지... 책을 가지고 성 쌓기 놀이를 하는 너를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아빠의 서재에서 마음껏 책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어린 시절이 네게 참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며, 사랑한다 딸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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