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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49: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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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세상 부귀영화와 물질을 좇지 말라
본문: 시편 49편 1- 20
1. 뭇 백성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모두 귀를 기울이라
2.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3.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로다
4.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
5.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6.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7.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8.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9.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10. 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
11. 그러나 그들의 속 생각에 그들의 집은 영원히 있고 그들의 거처는 대대에 이르리라 하여 그들의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부르도다
12.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13.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
14. 그들은 양 같이 스올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그들의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들이 아침에 그들을 다스리리니 그들의 아름다움은 소멸하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되리라
15.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 (셀라)
16. 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17.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18. 그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19. 그들은 그들의 역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20.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옛날 중국 당나라에 노생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큰 부자가 되는 것이 소원이요, 출세하여 이름을 날리는 것이 원이요, 예쁜 아내를 얻어 아들 딸 낳고 영화롭게 사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어느 날 노생은 한단지방으로 가던 중 신선도를 닦는 여옹을 만나 자기의 소원을 하소연하였습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그 할아버지는 바랑 속에서 목침을 꺼내주며 쉬기를 권하였습니다.
"고단할테니 이 목침을 베고 잠깐 눈을 붙이게, 나는 밥을 준비할테니."
목침을 베고 누운 노생은 금세 잠이 들었고, 그 순간부터 그의 인생은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그의 소원 그대로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을 얻고 절세미모의 여인을 맞아 아들 딸 낳고 부위영화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것도 무려 80년의 세월이나....
그런데 누군가가 '밥 먹게' 하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떠보니 모두가 한바탕 꿈이 되었습니다. 80년 동안의 부귀영화가 잠깐 밥 짓는 사이에 꾸었던 꿈이었던 것입니다.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시89:47)
고라 자손의 시인 본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으로 인생의 참 행복을 삼는 신본주의적 인생관에서 떠나 세상의 부귀영화로 인생의 가치 여부를 판단하는 인본주의적 인생관을 소유한 자들의 어리석음과 그 결과에 대해 교훈하는 지혜시로서 다윗시대(B.C 1010- 971년경)의 작품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본문 1- 3절을 보겠습니다.
“뭇 백성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모두 귀를 기울이라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로다”
본 절에서 시인은 ‘너희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아 들으라 가나안의 거민들아 귀를 기울이라’ 하지 아니하고 ‘만민들아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귀를 기울이라’ 하였습니다. 누구나 다 들어야 할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은 신분의 높고 낮음이나 경제적인 빈부에 관계없이 모든 인생들에게 주어진 것임을 나타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곧 지혜의 근본(시111:10)이라 했습니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잠4:20)
본문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
인간의 눈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오묘한 일들을 비유를 통해 깨달으며 가르치고 또 수금으로 푼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말할 때 그 오묘함 때문에 결코 담담한 심정으로만 말할 수 없으며 기쁨과 놀라움의 탄성으로 하나님께 찬양하는 가운데 말할 수밖에 없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50:4)
본문 5절을 보겠습니다.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요즈음 아이티의 지진 이후와 일본 등의 재난이후의 참담한 모습을 보십시오. 말세에는 처처에 기근이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마24:6-8)
본문 6 ~ 7절을 보겠습니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미국은 여러 인종과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늘 갈등의 요소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특히 미국을 대표하는 두 인종인 백인과 오랫동안 그들의 노예였던 흑인 사이의 감정의 골은 참으로 깊은 것 같습니다. 어느 기차에서 백인과 흑인이 싸움을 벌였는데 백인이 칼을 던져 흑인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건너편에서 이 광경을 보던 한 백인 목사가 몸을 날려 그 칼을 막으려고 손을 들었습니다. 칼은 이내 목사님의 손에 꽂혔습니다. 손에서는 많은 피가 흘렀습니다. 싸움은 순식간에 멈추었고 위기에 처했던 흑인은 일생 동안 그 목사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 흑인은 종종 불평과 원망을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목사님은 자신의 칼 맞은 손을 그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면 흑인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었는데, 그 손은 바로 자기의 생명을 구원한 손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불평과 원망을 그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지불해 주신 하나님의 속전입니다. 그 어느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생명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것입니다.
풍부한 재물을 의지하며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돈이 많다 하더라도 그 형제의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한치의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재물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하나의 삶의 수단과 방편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재물은 사람의 죄를 절대로 속량하지 못합니다.
본문 8- 9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본 절에서 보는 것처럼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기' 때문에 돈이 무가치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값으로 치룰 돈은 없습니다.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청년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영생문제를 안고 고민하면서 영생의 문제를 푸실 수 있는 유일하신 구주 예수님께 찾아 올 만큼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여쭈워 보았습니다. 그는 알았습니다. 자신에게 재물도 있고 종교적인 지식이 있고, 그것을 나름대로 실천해 보았지만 자신의 영혼구원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알았습니다.
본문 10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
어떤 사람이 자기 집의 지하실 밑에 아무도 모르는 커다란 방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그곳에 많은 금은보화를 감춰두고 매일 밤마다 혼자 내려와 그 많은 보물들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고 만져보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는 그 보물들을 만지며, “오! 사랑스런 나의 금은보화여, 세상에 너희들 외에 무엇이 내게 기쁨을 주겠느냐!”하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비밀 지하실에 들어가 있는데 문이 닫혀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문은 닫히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잠기게 되어 있는 문이었고 안에서는 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나 그 집이 헐렸을 때 한 인부가 지하실에서 많은 금은보화에 쌓여있는 한 해골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재물을 그렇게 의지했건만 도리어 그것으로 자신이 죽게 된 이 어리석은 부자,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합니까?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잠11:28)
“대저 재물은 영원히 있지 못하나니 면류관이 어찌 대대에 있으랴”(잠27: 24)
재물은 단지 내가 살았을 때만 필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단 한 푼도 가져가지를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잠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탈무드에 있는 말입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는 주먹을 불끈 쥐고서 - 마치 모든 것을 다 움켜잡으려는 듯이 그런 모습으로 태어나지만, 그러나 갈 때는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두 손을 쫙 펴고 빈손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죽을 때에 이렇게 유언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죽거든 나의 관 양쪽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으로 내 양손을 밖으로 내놓도록 하여라” 그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세계를 제패했던 알렉산더 대왕도 결국 갈 때는 이렇게 빈손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손에게 재산을 물려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로 말미암아 오히려 그 자손들은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교만입니다. 어떤 사람이 환상 중에 지옥에 잠시 가 보았더니, 웬 아버지가 지옥에 먼저 와 있었고, 그 다음에 또 그 아들이 들어오더랍니다. 말하자면 부자가 지옥에서 함께 상봉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 아버지 기가 막혀서 자기 아들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야, 이놈아, 네는 왜 이 지옥엘 왔느냐? 나는 너를 행복하게 해 주려고 부디 너만이라도 돈 걱정하지 않고 또 돈으로 인해 더 이상 죄 짓지 않고 잘 살게 해 주려고 내 살았을 때 물불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돈을 모았고, 또 그 돈을 모으느라고 못된 짓 불의한 짓 많이 했기 때문에 결국 이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지만, 그러나 너는 도대체 왜 지옥에 왔느냐? 그 많은 재산을 너에게 고스란히 다 물려 주고 왔는데, 왜 너는 그 재산으로 잘 살지 못하고, 이 지옥에 오고 말았느냐? 말이다" 그랬더니 그 아들, 무어라고 대답했는지 아십니까?
"아버지, 차라리 내가 가난했더라면 정직하게 살았을 것을, 아버지가 그 많은 재산을 내게 물려주었기 때문에 그 재산 가지고 허랑 방탕 잘못 살았고, 그래서 결국 나도 이렇게 지옥으로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결국 내가 여기 온 것도 순전히 아버지 탓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웃자고 지어낸 이야기이겠지만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참 기가 막힌 이야기지요? 결국 아버지는 아들 때문에 지옥에 갔고, 또 아들은 아버지 때문에 지옥에 갔다 하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우리에게 물질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옷도 필요하고 먹을 양식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따뜻한 집도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모든 물질을 거부하거나 물질자체를 터부시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리고 물질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질에서 돈의 가치를 빼어버릴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아주 중요한 물질주의를 벗어나는 비법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음식이 얼마짜리인지를 생각하거나 얼마짜리의 옷 얼마짜리의 집을 감사하기 보다는 맛있는 음식을 주신 하나님 따뜻한 옷을 주신 편한 집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눈으로 돈을 평가해야 합니다. 돈으로 세상 가치를 환산하는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돈과 그 실제적인 가치를 가질 것들을 구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7장에 성전세 반 세겔을 요구하는 자들에게 오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성전세를 내시면서 물고기 낚시로 물고기를 잡아서 그 뱃속에서 한 세겔짜리 동전을 꺼내 주게 하십니다. 여기서 굳이 물고기를 낚아서 동전을 꺼내 주신 특별한 예수님의 의도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물고기 뱃속에 있던 동전은 그 가치를 완전히 상실한 동전이었습니다. 그것은 물속에 완전히 화패의 가치가 사라진 쇳덩이에 불과한 무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무가치한 것을 세금을 위해서 사용하셨습니다. 돈에 절대성을 두고 계시지 않습니다. 필요를 따라 주님께서는 재물을 찾아 주심을 알게 합니다. 예수님은 두 렙돈을 연보궤에 넣은 과부를 보시며 그녀가 부자들 보다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시고 그 돈의 숫자보다는 그 돈이 의미하는 생활비 전부의 가치를 보셨습니다. 향유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의 사건에서도 예수님은 돈의 가치를 생각하는 가룟 유다와 다른 생각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돈과 돈의 가치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과 많이 다른 생각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점으로 재물을 보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본문 11 ~ 12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생각에 그들의 집은 영원히 있고 그들의 거처는 대대에 이르리라 하여 그들의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부르도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새를 파는 가게에 잘생긴 카나리아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이 카나리아는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이곳을 지나가던 마을의 부자가 그 카나리아를 샀습니다. 카나리아는 고운 소리로 노래를 불러 집안 사람과 손님들, 이웃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새 주인이 된 부자도 그 카나리아를 자랑하고 칭찬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러자 카나리아는 우쭐해졌습니다. 그래서 밤이 되어도 노래를 그칠 줄 몰랐습니다. 카나리아의 노랫소리를 칭찬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시끄럽다고 항의를 할 정도였습니다. 아무도 카나리아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부자는 카나리아를 헐값으로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그 카나리아를 사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칭찬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도 잘 한다고 칭찬을 하면 괜히 한 번 더 해보고 싶은 것이 사람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겸손해지십시오. 진정 훌륭한 일이라면 스스로 떠벌이지 않아도 다들 알게 됩니다. 우리를 높이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가진 재능이라고 해도 그것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신데 그런 하나님 앞에서 잘난 체하는 것은 꼴불견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현재 소유한 집이나 토지가 영원히 내 소유일 줄 생각합니다. 그리고 속생각까지도 그 재물이 영영히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등록해두고 대대에 미칠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재물을 신처럼 섬기면서 재물에 중독이 되어 살아갑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 않지만 재물이 삶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 있습니다. 재물에 있는 파워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은행에 있는 돈은 내 돈이 아니고 실제로 쓴 돈이 내 돈이다' 은행에 있는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거나 풍부함으로 자긍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행복할 정도로 출세의 최고봉에 오른 사람, 화려하게 보이는 사람, 그가 원하는 온갖 것을 다 얻고 누리며 거기에 둘려 싸여 있어 가장 좋은 형편에서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사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장구하지 못합니다. 그의 존귀가 지속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여관이고 우리는 거기 며칠 묵고 가는 손님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참 안식이 없습니다. 멸망하는 짐승처럼 우리는 언젠가는 죽어야 하며, 우리 육신은 땅 속에 들어가 썩어야 합니다.
존귀한 사람이 멸망하는 짐승처럼 살지 않고 존귀하게 살기를 원하셔서 오늘 말씀을 주신 줄 압니다.
(마6;20) "너희를 위하여 보물은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벧전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이 복음이 우리 삶을 새롭게 점검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14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그들은 양 같이 스올(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그들의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들이 아침에 그들을 다스리리니 그들의 아름다움은 소멸하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되리라”
예수님께서 예화로 주신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어리석은 부자가 물질의 풍부함에 도취되어 말합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너는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라!' 이때 하나님께서 반문하셨습니다(눅12:16-21).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면 네 예비한 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 "그러면 네 모은 그 모든 재산 재물은 과연 다 뉘것이 되겠느냐?'.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느니라 (눅 12:15)."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재물 관에 대한 바른 자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가 그토록 기쁨과 소망을 둔 쌓아 둔 물질이 참으로 허무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물질을 의지하고, 물질에 소망을 두고, 물질로 교만해 져서 사는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스올(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 사망이라는 목자가 형벌의 가시로 울타리를 두르고 자기 양떼들이 도망하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으니, 이 사망의 목자를 피할 자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가져 가는 것이 없고" 부자가 하나님처럼 믿고 의지하던 가장 중요했던 재물은 사망이 그를 인도하기 시작하는 순간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재물은 안개처럼 사라져 갑니다.
본문 15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 (셀라)”
본 절은 모든 의로운 자들의 영혼을 영원히 사망에서 영생으로 인도하신다는 의미입니다.(요14: 3) 구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나라로 인간을 취해 가십니다. 그곳에서 우리 성도는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찬란한 영생의 세계에서 말입니다. 이는 음부의 권세로부터 당당히 구원을 받은 경건한 자의 축복입니다. 이는 성도의 믿음입니다. 성도의 소망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의 언약 공동체에 힘을 북돋워 주었던 소망이요, 고난의 길을 가던 신약의 교회 성도들의 소망이었습니다.
본문 16- 18절을 보겠습니다.
“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그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재물이 있을 때, 재물에 따르는 영광이란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재물이 있는 사람들을 축하하고 칭찬하고 아부합니다. 스스로도 자기가 뭔가 된 듯한 양 생각합니다. 이렇게 가진 자는 축하를 받고 아부와 칭찬을 받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재물의 축적은 성공의 한 척도로 생각됩니다. 재물은 그것을 가진 사람을 좀더 가치 있는 존재인 것처럼 보이게 해줍니다. 재물은 따라서 사람에게 힘과 자유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게 해줍니다. 재물이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까지 무가치한 것으로 자학하고 맥없이 살아가는 경우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고로 '맘모니즘(mammonism)' 이란 것이 있습니다. 맘몬 Mammon이란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서양문화지식사전>을 펼쳐보니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돈 또는 부(富)로 번역되는 아람어. 부의 신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맘몬)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눅16:13)한 데서 맘몬은 세상의 부 혹은 부라는 사악한 신의 화신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파생한 맘모니즘은 배금주의(拜金主義), 황금만능주의를 뜻합니다. 쉽게 말하면 '머니(money)를 어머니(mom)처럼 소중히 여기는 사상'입니다.
본문 17절에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했습니다. 재물 뿐 아니라 권세도 영광도 다 버리고 떠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한 부자가 원체 부자인데다가 농사가 잘되어 쌓을 곳이 없어서 창고를 더 크게 짓고, 잔뜩 쌓아놓고 큰소리치기를 누가복음 12장 19절에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고 떵떵거리며 좋아하는 모습을 하나님이 보시고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시고 그 날 밤에 그 생명을 불러 갔습니다. 그 재물은 엉뚱한 사람이 다 갖다 썼습니다.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그 재물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고 오래 살고 짧게 사는 것이 재물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에 이란의 팔레비 왕은 당시 우리나라의 3년 예산에 해당하는 돈을 가지고 있었지만 축출당한 후 미국 시카고에서 암 병을 치료 받다가 병원비도 못 내고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전에 북한에서 저의 형님과 의학을 공부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병원을 개업 했는데 돈 버느라 집사 직분까지 받은 사람이 교회를 나가지 않아 목사인 제 형님이 신앙생활 잘 하라고 권면을 했다고 합니다.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에 나가겠다고 하더니, 박사학위 받은 다음에는 병원 빌딩 하나 산 다음에 나가겠노라고 핑계를 대고, 빌딩을 산 다음에도 계속 교회에 안 나가고, 어느 날 만났는데 얼굴이 핼쑥해졌더랍니다. 어디 아프냐고 했더니 ‘소화가 잘 안 되서 그런다’ 고 하더니, 얼마쯤 후 연락이 왔는데 간 암 말기라고 심방 좀 와 달라고 해서 기도와 성찬식을 침상에서 행하고 며칠 후 사망 했는데 장례식장에서 보니 관위에 의사 면허증, 박사 학위증, 감사장, 표창장을 즐비하게 진열해 놓은 것을 보고 인생의 허무함을 느꼈답니다. 창조주 하나님, 생사화복을 주관 하시는 하나님을 먼저 잘 섬겨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재물과 생명과 권세를 영원히 자기 것으로 착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고 주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본문 19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역대 조상들(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여기서 열조는 인류 역사상 앞서간 모든 어리석은 인본주의자들을 가리킨다. 실로 인간은 아무리 많은 재산을 소유하며 부귀영화를 누린다 해도 결국은 선인(先人)들이 죽어 무덤으로 갔듯이 그도 역시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인 것입니다.
성도는 재물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심판의 날에 결코 유익되지 못할 재물을 쌓아놓고 썩고 좀먹고 녹슬도록 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재물에 좀이 먹고 녹이 쓴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 영혼도 불의한 재물 때문에 부식되어 버리게 버린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를 아시지요? 가난한 이웃을 돌보지 않고 혼자서 호의호식하는 부자가 음부에서 꺼지지 않는 불속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부르짖는 호소를 기억하시지요? 만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배받아 관리하는 것뿐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20절을 보겠습니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옛날 송나라의 어떤 사람이 아주 희귀하고 값비싼 보석 하나를 들고 나라의 재상을 찾아갔습니다. 재상에게 그 보석을 뇌물로 바치려고 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재상에게 말합니다. “재상님, 내가 이 보석을 감정해 보았더니 아주 값어치가 나가는 진품이었습니다. 이것을 재상님께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자 재상이 사양하며 말합니다. “그건 소중하고 값비싼 보석이지만, 그러나 내게도 그 못지 않은 소중한 보석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마음에 들어 있는 내 마음의 보석입니다. 곧 보석을 보고도 하나 탐나거나 갖고 싶은 욕심이 생기지 않는 마음입니다. 나는 이것을 나의 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만일 내가 당신의 보석을 받게 되면, 당신은 당신의 보석을 잃게 되고, 나는 내 마음의 귀한 보석을 잃게 될 것이니, 이는 피차간에 큰 손실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그러니 당신은 부디 당신의 그 보석을 가지고 돌아가시오. 나는 내 보석을 가지고 살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 사람을 돌려보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떤 존귀한 자리에서 어떤 보석을 가지고 있습니까? 무엇을 자랑거리로 진정한 보석으로 여기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보석을 가지고 재물을 가지고 자랑합니까? 성경에는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에서가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여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만이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여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이었습니다. 압살롬이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여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이었습니다. 헤롯과 빌라도가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여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왕들이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여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달랐습니다. 룻은 달랐습니다. 에스더는 존귀에 처하나 깨닫고 죽으면 죽으리라 나아갔습니다. 존귀한 사람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달랐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우리 영혼 깊은 곳에 하나님께서 담아두신 보석이 있습니다. 이 영혼 깊은 곳의 보석을 더 자랑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 7- 10)
이 보배를 자랑으로 삼고 살 것입니다.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가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그 귀한 것을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도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 진리를 깨닫는 사람은 여러분의 존재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채워주는 사람에게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의 존재가 세상보다 크다고 인정하는 분에게 나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이제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너는 세상보다 크다. 너는 세상보다 귀한 존재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얼마나 만나 보셨습니까?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구박이나 받지 않으셨어요? 그것도 못하냐. 이런 구박을 받으신 분이 아마도 많을 걸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구박하시는 분이 아니라 너는 세상보다 크다. 너는 세상의 것으로 채워도 채울 수 없는 귀한 사람이라고 알려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느 분에게 가야 합니까? 여러분의 생명이 세상의 것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로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세상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나와야 여러분이 세상보다 더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거예요. 피조물인 인간의 존귀함은 창조주 하나님 안에 있을 때만이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는 삶으로 우리 자신의 존재와 삶의 가치를 저하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입니다.(요일2: 15, 16)
하나님께 나오는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천하보다 귀하게 쓰임 받습니다. 간절하게 당부하시는 오늘의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셔서 존귀하게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영원히 영광 받으실 주님, 물질만능주의 시대에서 돈을 우상처럼 섬기는 죄를 범치 않도록 우리를 지켜 주시고, 온 마음을 주님께 드리게 하옵소서. 주님보다 물질에 더욱 큰 가치를 두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고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주 예수님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세상의 헛된 것을 사랑하고 헛된 세상 일을 도모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거룩하신 주님의 형상을 닮아 우리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게 하옵소서. 대속하신 주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하소서. 하나님 앞에서 마음으로부터 겸손할 수 있게 하소서. 다시 한 번 간구하오니 세상의 헛된 것을 바라보고 자랑하지 말게 하옵소서. 남은 인생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기쁨과 희망과 진리를 전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본문: 시편 49편 1- 20
1. 뭇 백성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모두 귀를 기울이라
2.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3.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로다
4.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
5.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6.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7.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8.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9.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10. 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
11. 그러나 그들의 속 생각에 그들의 집은 영원히 있고 그들의 거처는 대대에 이르리라 하여 그들의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부르도다
12.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13.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
14. 그들은 양 같이 스올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그들의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들이 아침에 그들을 다스리리니 그들의 아름다움은 소멸하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되리라
15.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 (셀라)
16. 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17.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18. 그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19. 그들은 그들의 역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20.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옛날 중국 당나라에 노생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큰 부자가 되는 것이 소원이요, 출세하여 이름을 날리는 것이 원이요, 예쁜 아내를 얻어 아들 딸 낳고 영화롭게 사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어느 날 노생은 한단지방으로 가던 중 신선도를 닦는 여옹을 만나 자기의 소원을 하소연하였습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그 할아버지는 바랑 속에서 목침을 꺼내주며 쉬기를 권하였습니다.
"고단할테니 이 목침을 베고 잠깐 눈을 붙이게, 나는 밥을 준비할테니."
목침을 베고 누운 노생은 금세 잠이 들었고, 그 순간부터 그의 인생은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그의 소원 그대로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을 얻고 절세미모의 여인을 맞아 아들 딸 낳고 부위영화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것도 무려 80년의 세월이나....
그런데 누군가가 '밥 먹게' 하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떠보니 모두가 한바탕 꿈이 되었습니다. 80년 동안의 부귀영화가 잠깐 밥 짓는 사이에 꾸었던 꿈이었던 것입니다.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시89:47)
고라 자손의 시인 본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으로 인생의 참 행복을 삼는 신본주의적 인생관에서 떠나 세상의 부귀영화로 인생의 가치 여부를 판단하는 인본주의적 인생관을 소유한 자들의 어리석음과 그 결과에 대해 교훈하는 지혜시로서 다윗시대(B.C 1010- 971년경)의 작품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본문 1- 3절을 보겠습니다.
“뭇 백성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모두 귀를 기울이라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로다”
본 절에서 시인은 ‘너희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아 들으라 가나안의 거민들아 귀를 기울이라’ 하지 아니하고 ‘만민들아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귀를 기울이라’ 하였습니다. 누구나 다 들어야 할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은 신분의 높고 낮음이나 경제적인 빈부에 관계없이 모든 인생들에게 주어진 것임을 나타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곧 지혜의 근본(시111:10)이라 했습니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잠4:20)
본문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
인간의 눈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오묘한 일들을 비유를 통해 깨달으며 가르치고 또 수금으로 푼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말할 때 그 오묘함 때문에 결코 담담한 심정으로만 말할 수 없으며 기쁨과 놀라움의 탄성으로 하나님께 찬양하는 가운데 말할 수밖에 없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50:4)
본문 5절을 보겠습니다.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요즈음 아이티의 지진 이후와 일본 등의 재난이후의 참담한 모습을 보십시오. 말세에는 처처에 기근이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마24:6-8)
본문 6 ~ 7절을 보겠습니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미국은 여러 인종과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늘 갈등의 요소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특히 미국을 대표하는 두 인종인 백인과 오랫동안 그들의 노예였던 흑인 사이의 감정의 골은 참으로 깊은 것 같습니다. 어느 기차에서 백인과 흑인이 싸움을 벌였는데 백인이 칼을 던져 흑인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건너편에서 이 광경을 보던 한 백인 목사가 몸을 날려 그 칼을 막으려고 손을 들었습니다. 칼은 이내 목사님의 손에 꽂혔습니다. 손에서는 많은 피가 흘렀습니다. 싸움은 순식간에 멈추었고 위기에 처했던 흑인은 일생 동안 그 목사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 흑인은 종종 불평과 원망을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목사님은 자신의 칼 맞은 손을 그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면 흑인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었는데, 그 손은 바로 자기의 생명을 구원한 손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불평과 원망을 그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지불해 주신 하나님의 속전입니다. 그 어느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생명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것입니다.
풍부한 재물을 의지하며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돈이 많다 하더라도 그 형제의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한치의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재물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하나의 삶의 수단과 방편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재물은 사람의 죄를 절대로 속량하지 못합니다.
본문 8- 9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본 절에서 보는 것처럼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기' 때문에 돈이 무가치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값으로 치룰 돈은 없습니다.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청년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영생문제를 안고 고민하면서 영생의 문제를 푸실 수 있는 유일하신 구주 예수님께 찾아 올 만큼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여쭈워 보았습니다. 그는 알았습니다. 자신에게 재물도 있고 종교적인 지식이 있고, 그것을 나름대로 실천해 보았지만 자신의 영혼구원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알았습니다.
본문 10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
어떤 사람이 자기 집의 지하실 밑에 아무도 모르는 커다란 방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그곳에 많은 금은보화를 감춰두고 매일 밤마다 혼자 내려와 그 많은 보물들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고 만져보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는 그 보물들을 만지며, “오! 사랑스런 나의 금은보화여, 세상에 너희들 외에 무엇이 내게 기쁨을 주겠느냐!”하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비밀 지하실에 들어가 있는데 문이 닫혀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문은 닫히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잠기게 되어 있는 문이었고 안에서는 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나 그 집이 헐렸을 때 한 인부가 지하실에서 많은 금은보화에 쌓여있는 한 해골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재물을 그렇게 의지했건만 도리어 그것으로 자신이 죽게 된 이 어리석은 부자,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합니까?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잠11:28)
“대저 재물은 영원히 있지 못하나니 면류관이 어찌 대대에 있으랴”(잠27: 24)
재물은 단지 내가 살았을 때만 필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단 한 푼도 가져가지를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잠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탈무드에 있는 말입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는 주먹을 불끈 쥐고서 - 마치 모든 것을 다 움켜잡으려는 듯이 그런 모습으로 태어나지만, 그러나 갈 때는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두 손을 쫙 펴고 빈손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죽을 때에 이렇게 유언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죽거든 나의 관 양쪽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으로 내 양손을 밖으로 내놓도록 하여라” 그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세계를 제패했던 알렉산더 대왕도 결국 갈 때는 이렇게 빈손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손에게 재산을 물려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로 말미암아 오히려 그 자손들은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교만입니다. 어떤 사람이 환상 중에 지옥에 잠시 가 보았더니, 웬 아버지가 지옥에 먼저 와 있었고, 그 다음에 또 그 아들이 들어오더랍니다. 말하자면 부자가 지옥에서 함께 상봉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 아버지 기가 막혀서 자기 아들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야, 이놈아, 네는 왜 이 지옥엘 왔느냐? 나는 너를 행복하게 해 주려고 부디 너만이라도 돈 걱정하지 않고 또 돈으로 인해 더 이상 죄 짓지 않고 잘 살게 해 주려고 내 살았을 때 물불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돈을 모았고, 또 그 돈을 모으느라고 못된 짓 불의한 짓 많이 했기 때문에 결국 이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지만, 그러나 너는 도대체 왜 지옥에 왔느냐? 그 많은 재산을 너에게 고스란히 다 물려 주고 왔는데, 왜 너는 그 재산으로 잘 살지 못하고, 이 지옥에 오고 말았느냐? 말이다" 그랬더니 그 아들, 무어라고 대답했는지 아십니까?
"아버지, 차라리 내가 가난했더라면 정직하게 살았을 것을, 아버지가 그 많은 재산을 내게 물려주었기 때문에 그 재산 가지고 허랑 방탕 잘못 살았고, 그래서 결국 나도 이렇게 지옥으로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결국 내가 여기 온 것도 순전히 아버지 탓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웃자고 지어낸 이야기이겠지만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참 기가 막힌 이야기지요? 결국 아버지는 아들 때문에 지옥에 갔고, 또 아들은 아버지 때문에 지옥에 갔다 하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우리에게 물질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옷도 필요하고 먹을 양식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따뜻한 집도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모든 물질을 거부하거나 물질자체를 터부시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리고 물질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질에서 돈의 가치를 빼어버릴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아주 중요한 물질주의를 벗어나는 비법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음식이 얼마짜리인지를 생각하거나 얼마짜리의 옷 얼마짜리의 집을 감사하기 보다는 맛있는 음식을 주신 하나님 따뜻한 옷을 주신 편한 집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눈으로 돈을 평가해야 합니다. 돈으로 세상 가치를 환산하는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돈과 그 실제적인 가치를 가질 것들을 구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7장에 성전세 반 세겔을 요구하는 자들에게 오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성전세를 내시면서 물고기 낚시로 물고기를 잡아서 그 뱃속에서 한 세겔짜리 동전을 꺼내 주게 하십니다. 여기서 굳이 물고기를 낚아서 동전을 꺼내 주신 특별한 예수님의 의도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물고기 뱃속에 있던 동전은 그 가치를 완전히 상실한 동전이었습니다. 그것은 물속에 완전히 화패의 가치가 사라진 쇳덩이에 불과한 무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무가치한 것을 세금을 위해서 사용하셨습니다. 돈에 절대성을 두고 계시지 않습니다. 필요를 따라 주님께서는 재물을 찾아 주심을 알게 합니다. 예수님은 두 렙돈을 연보궤에 넣은 과부를 보시며 그녀가 부자들 보다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시고 그 돈의 숫자보다는 그 돈이 의미하는 생활비 전부의 가치를 보셨습니다. 향유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의 사건에서도 예수님은 돈의 가치를 생각하는 가룟 유다와 다른 생각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돈과 돈의 가치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과 많이 다른 생각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점으로 재물을 보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본문 11 ~ 12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생각에 그들의 집은 영원히 있고 그들의 거처는 대대에 이르리라 하여 그들의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부르도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새를 파는 가게에 잘생긴 카나리아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이 카나리아는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이곳을 지나가던 마을의 부자가 그 카나리아를 샀습니다. 카나리아는 고운 소리로 노래를 불러 집안 사람과 손님들, 이웃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새 주인이 된 부자도 그 카나리아를 자랑하고 칭찬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러자 카나리아는 우쭐해졌습니다. 그래서 밤이 되어도 노래를 그칠 줄 몰랐습니다. 카나리아의 노랫소리를 칭찬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시끄럽다고 항의를 할 정도였습니다. 아무도 카나리아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부자는 카나리아를 헐값으로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그 카나리아를 사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칭찬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도 잘 한다고 칭찬을 하면 괜히 한 번 더 해보고 싶은 것이 사람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겸손해지십시오. 진정 훌륭한 일이라면 스스로 떠벌이지 않아도 다들 알게 됩니다. 우리를 높이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가진 재능이라고 해도 그것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신데 그런 하나님 앞에서 잘난 체하는 것은 꼴불견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현재 소유한 집이나 토지가 영원히 내 소유일 줄 생각합니다. 그리고 속생각까지도 그 재물이 영영히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등록해두고 대대에 미칠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재물을 신처럼 섬기면서 재물에 중독이 되어 살아갑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 않지만 재물이 삶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 있습니다. 재물에 있는 파워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은행에 있는 돈은 내 돈이 아니고 실제로 쓴 돈이 내 돈이다' 은행에 있는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거나 풍부함으로 자긍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행복할 정도로 출세의 최고봉에 오른 사람, 화려하게 보이는 사람, 그가 원하는 온갖 것을 다 얻고 누리며 거기에 둘려 싸여 있어 가장 좋은 형편에서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사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장구하지 못합니다. 그의 존귀가 지속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여관이고 우리는 거기 며칠 묵고 가는 손님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참 안식이 없습니다. 멸망하는 짐승처럼 우리는 언젠가는 죽어야 하며, 우리 육신은 땅 속에 들어가 썩어야 합니다.
존귀한 사람이 멸망하는 짐승처럼 살지 않고 존귀하게 살기를 원하셔서 오늘 말씀을 주신 줄 압니다.
(마6;20) "너희를 위하여 보물은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벧전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이 복음이 우리 삶을 새롭게 점검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14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그들은 양 같이 스올(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그들의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들이 아침에 그들을 다스리리니 그들의 아름다움은 소멸하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되리라”
예수님께서 예화로 주신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어리석은 부자가 물질의 풍부함에 도취되어 말합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너는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라!' 이때 하나님께서 반문하셨습니다(눅12:16-21).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면 네 예비한 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 "그러면 네 모은 그 모든 재산 재물은 과연 다 뉘것이 되겠느냐?'.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느니라 (눅 12:15)."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재물 관에 대한 바른 자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가 그토록 기쁨과 소망을 둔 쌓아 둔 물질이 참으로 허무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물질을 의지하고, 물질에 소망을 두고, 물질로 교만해 져서 사는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스올(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 사망이라는 목자가 형벌의 가시로 울타리를 두르고 자기 양떼들이 도망하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으니, 이 사망의 목자를 피할 자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가져 가는 것이 없고" 부자가 하나님처럼 믿고 의지하던 가장 중요했던 재물은 사망이 그를 인도하기 시작하는 순간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재물은 안개처럼 사라져 갑니다.
본문 15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 (셀라)”
본 절은 모든 의로운 자들의 영혼을 영원히 사망에서 영생으로 인도하신다는 의미입니다.(요14: 3) 구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나라로 인간을 취해 가십니다. 그곳에서 우리 성도는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찬란한 영생의 세계에서 말입니다. 이는 음부의 권세로부터 당당히 구원을 받은 경건한 자의 축복입니다. 이는 성도의 믿음입니다. 성도의 소망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의 언약 공동체에 힘을 북돋워 주었던 소망이요, 고난의 길을 가던 신약의 교회 성도들의 소망이었습니다.
본문 16- 18절을 보겠습니다.
“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그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재물이 있을 때, 재물에 따르는 영광이란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재물이 있는 사람들을 축하하고 칭찬하고 아부합니다. 스스로도 자기가 뭔가 된 듯한 양 생각합니다. 이렇게 가진 자는 축하를 받고 아부와 칭찬을 받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재물의 축적은 성공의 한 척도로 생각됩니다. 재물은 그것을 가진 사람을 좀더 가치 있는 존재인 것처럼 보이게 해줍니다. 재물은 따라서 사람에게 힘과 자유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게 해줍니다. 재물이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까지 무가치한 것으로 자학하고 맥없이 살아가는 경우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고로 '맘모니즘(mammonism)' 이란 것이 있습니다. 맘몬 Mammon이란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서양문화지식사전>을 펼쳐보니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돈 또는 부(富)로 번역되는 아람어. 부의 신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맘몬)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눅16:13)한 데서 맘몬은 세상의 부 혹은 부라는 사악한 신의 화신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파생한 맘모니즘은 배금주의(拜金主義), 황금만능주의를 뜻합니다. 쉽게 말하면 '머니(money)를 어머니(mom)처럼 소중히 여기는 사상'입니다.
본문 17절에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했습니다. 재물 뿐 아니라 권세도 영광도 다 버리고 떠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한 부자가 원체 부자인데다가 농사가 잘되어 쌓을 곳이 없어서 창고를 더 크게 짓고, 잔뜩 쌓아놓고 큰소리치기를 누가복음 12장 19절에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고 떵떵거리며 좋아하는 모습을 하나님이 보시고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시고 그 날 밤에 그 생명을 불러 갔습니다. 그 재물은 엉뚱한 사람이 다 갖다 썼습니다.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그 재물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고 오래 살고 짧게 사는 것이 재물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에 이란의 팔레비 왕은 당시 우리나라의 3년 예산에 해당하는 돈을 가지고 있었지만 축출당한 후 미국 시카고에서 암 병을 치료 받다가 병원비도 못 내고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전에 북한에서 저의 형님과 의학을 공부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병원을 개업 했는데 돈 버느라 집사 직분까지 받은 사람이 교회를 나가지 않아 목사인 제 형님이 신앙생활 잘 하라고 권면을 했다고 합니다.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에 나가겠다고 하더니, 박사학위 받은 다음에는 병원 빌딩 하나 산 다음에 나가겠노라고 핑계를 대고, 빌딩을 산 다음에도 계속 교회에 안 나가고, 어느 날 만났는데 얼굴이 핼쑥해졌더랍니다. 어디 아프냐고 했더니 ‘소화가 잘 안 되서 그런다’ 고 하더니, 얼마쯤 후 연락이 왔는데 간 암 말기라고 심방 좀 와 달라고 해서 기도와 성찬식을 침상에서 행하고 며칠 후 사망 했는데 장례식장에서 보니 관위에 의사 면허증, 박사 학위증, 감사장, 표창장을 즐비하게 진열해 놓은 것을 보고 인생의 허무함을 느꼈답니다. 창조주 하나님, 생사화복을 주관 하시는 하나님을 먼저 잘 섬겨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재물과 생명과 권세를 영원히 자기 것으로 착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고 주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본문 19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역대 조상들(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여기서 열조는 인류 역사상 앞서간 모든 어리석은 인본주의자들을 가리킨다. 실로 인간은 아무리 많은 재산을 소유하며 부귀영화를 누린다 해도 결국은 선인(先人)들이 죽어 무덤으로 갔듯이 그도 역시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인 것입니다.
성도는 재물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심판의 날에 결코 유익되지 못할 재물을 쌓아놓고 썩고 좀먹고 녹슬도록 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재물에 좀이 먹고 녹이 쓴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 영혼도 불의한 재물 때문에 부식되어 버리게 버린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를 아시지요? 가난한 이웃을 돌보지 않고 혼자서 호의호식하는 부자가 음부에서 꺼지지 않는 불속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부르짖는 호소를 기억하시지요? 만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배받아 관리하는 것뿐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20절을 보겠습니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옛날 송나라의 어떤 사람이 아주 희귀하고 값비싼 보석 하나를 들고 나라의 재상을 찾아갔습니다. 재상에게 그 보석을 뇌물로 바치려고 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재상에게 말합니다. “재상님, 내가 이 보석을 감정해 보았더니 아주 값어치가 나가는 진품이었습니다. 이것을 재상님께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자 재상이 사양하며 말합니다. “그건 소중하고 값비싼 보석이지만, 그러나 내게도 그 못지 않은 소중한 보석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마음에 들어 있는 내 마음의 보석입니다. 곧 보석을 보고도 하나 탐나거나 갖고 싶은 욕심이 생기지 않는 마음입니다. 나는 이것을 나의 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만일 내가 당신의 보석을 받게 되면, 당신은 당신의 보석을 잃게 되고, 나는 내 마음의 귀한 보석을 잃게 될 것이니, 이는 피차간에 큰 손실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그러니 당신은 부디 당신의 그 보석을 가지고 돌아가시오. 나는 내 보석을 가지고 살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 사람을 돌려보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떤 존귀한 자리에서 어떤 보석을 가지고 있습니까? 무엇을 자랑거리로 진정한 보석으로 여기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보석을 가지고 재물을 가지고 자랑합니까? 성경에는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에서가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여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만이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여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이었습니다. 압살롬이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여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이었습니다. 헤롯과 빌라도가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여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왕들이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여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달랐습니다. 룻은 달랐습니다. 에스더는 존귀에 처하나 깨닫고 죽으면 죽으리라 나아갔습니다. 존귀한 사람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달랐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우리 영혼 깊은 곳에 하나님께서 담아두신 보석이 있습니다. 이 영혼 깊은 곳의 보석을 더 자랑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 7- 10)
이 보배를 자랑으로 삼고 살 것입니다.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가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그 귀한 것을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도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 진리를 깨닫는 사람은 여러분의 존재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채워주는 사람에게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의 존재가 세상보다 크다고 인정하는 분에게 나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이제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너는 세상보다 크다. 너는 세상보다 귀한 존재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얼마나 만나 보셨습니까?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구박이나 받지 않으셨어요? 그것도 못하냐. 이런 구박을 받으신 분이 아마도 많을 걸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구박하시는 분이 아니라 너는 세상보다 크다. 너는 세상의 것으로 채워도 채울 수 없는 귀한 사람이라고 알려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느 분에게 가야 합니까? 여러분의 생명이 세상의 것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로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세상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나와야 여러분이 세상보다 더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거예요. 피조물인 인간의 존귀함은 창조주 하나님 안에 있을 때만이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는 삶으로 우리 자신의 존재와 삶의 가치를 저하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입니다.(요일2: 15, 16)
하나님께 나오는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천하보다 귀하게 쓰임 받습니다. 간절하게 당부하시는 오늘의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셔서 존귀하게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영원히 영광 받으실 주님, 물질만능주의 시대에서 돈을 우상처럼 섬기는 죄를 범치 않도록 우리를 지켜 주시고, 온 마음을 주님께 드리게 하옵소서. 주님보다 물질에 더욱 큰 가치를 두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고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주 예수님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세상의 헛된 것을 사랑하고 헛된 세상 일을 도모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거룩하신 주님의 형상을 닮아 우리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게 하옵소서. 대속하신 주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하소서. 하나님 앞에서 마음으로부터 겸손할 수 있게 하소서. 다시 한 번 간구하오니 세상의 헛된 것을 바라보고 자랑하지 말게 하옵소서. 남은 인생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기쁨과 희망과 진리를 전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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