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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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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수 목사 |
참고 : | 말씀의샘물교회 http://www.wordspring.neT |
有神論者(하나님이 있다 하는 사람들)
본문/ 시10:4, 시42:1-2
1. 들어가는 이야기
우리는 지난 주일 “하나님이 없다 하는 사상을 가진 사람들(무신론자)”에 대하여 묵상하였고, 오늘은 우리들 처럼 “하나님이 있다 하는 사상을 가진 사람들(유신론자)”에 대하여 묵상하는 가운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무신론과 유신론을 구별하는 결정적 기준점은 히브리서1장 1절의 말씀대로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각 사람이 지적-정적-의지적으로 분명히 믿느냐? 믿지 않느냐? 에 달려 있습니다. 무신론자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고, 유신론자는 보이지 아니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 기준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바로 여기가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수학-물리학적으로 하나님 존재 유무에 대한 객관적 증거가 없음으로 “나는 믿지 못 하겠다” 하는 무신론자의 주장은 사실 정당합니다. 객관적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믿는다” 하는 유신론자의 주장은 오히려 부당합니다.
그런데 유신론자의 이런 고백은 “그래, 내 눈에도 하나님은 안 보여, 그렇지만 하나님이 없다는 것보다 있다 치고 사는 것이 더 좋은 거 아냐?” 하는 평면적 차원에서 혹은 무신론자에 대한 거부 반응-반대를 위한 반대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내 눈에도 분명히 하나님은 보이지 않아,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속에 하나님이 느껴지고, 내 마음속에 감동이 일고, 내 마음속에 하나님이 생존하여 계시는구나 하는 믿음” 이 실제로 생겨남으로 “보이지 아니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의 실존적 깨달음-느낌-인식은 일반적-객관적-자연적 앎-지식-깨달음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기 때문에 이를 신학적으로 “啓示(계시-The revelation)” 라고 합니다.
2. 계시와 요한 칼빈의 5대 교리(TULIP)
요한 칼빈은 그의 신학교리 5대강령(Total Depravity-전적 타락, Unconditional Election-무조건적 선택, Limited Atonement -제한적 속죄, Irresistible Grace-불가항력의 은혜, Perseverance Saints-성도의 견인)에서 이런 계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하게 평등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무신론자는 아무나 될 수 있으나, 유신론자는 아무나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TULIP)이 있어야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참고: 하인리히 오트, 김광식 역, 신학해제, 한국신학연구소, 271-287쪽.
3. 유신론자(하나님이 있다 하는 사람)가 받는 보응
첫째.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은 것을 보는 기쁨이 있습니다. 한자에 본다는 뜻을 가진 글자로 見(볼 견), 視(볼 시), 觀(볼 관) 등이 있습니다. <見>은 객관적으로 드러난 것을 그냥 보는 것, 見物生心(견물생심). <視>는 사람이 주관적으로 의도적으로 살펴 보는 것, 視察(시찰). <觀>은 見이나 視로는 보이지 아니하는 사물의 갚은 속을 통찰하여 보는 것, 마음으로 보는 것, 觀照(관조), 靜觀(정관).
유신론자는 하나님이 자연 속에 펼쳐놓으신 깊은 뜻을 <觀> 하는 기쁨을 누립니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산에 부는 바람과 잔잔한 시냇물 그 소리 가운데 주 음성 들리니 주 하나님의 큰 뜻을 나 알 듯 하도다(찬송가478) 할 때, 하나님의 큰 뜻을 觀하는 기쁨입니다. 또한 사람의 깊은 마음을 깊이 觀하여 적절하게 대처하는 지혜를 발휘하는 기쁨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인생에서 고난을 당하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 받고 절망-불안-좌절-낙심-원망 하지 아니합니다. 끝내 견디어 승리하고 감사 찬송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그들은 나보다 힘이 세기 때문이로다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심으로 나를 구원 하셨도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뒤어 넘나이다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띄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하게 하시니 내 팔이 놋활을 당기도다(시118)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 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40:27-31).....
셋째. 하나님이 있다 하는 사람들은 성전에 올라가는 특권과 예배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립니다. 성전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이 있다 하는 사람만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항상 임재하여 계신 곳입니다(왕상9:3). 이 특권을 소홀히 하거나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면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야곱에게 장자권을 팔고 약속의 땅에서 좇겨나 평생 이방 땅에서 통한의 세월을 보낸 것과 같습니다. 왜? 하나님의 축복은 성전 예배를 통하여 공급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말씀을 지갑 속에 넣어 가지고 다니시기 바랍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Humility and the fear of the Lord bring wealth and honor and life 잠22:4).
본문/ 시10:4, 시42:1-2
1. 들어가는 이야기
우리는 지난 주일 “하나님이 없다 하는 사상을 가진 사람들(무신론자)”에 대하여 묵상하였고, 오늘은 우리들 처럼 “하나님이 있다 하는 사상을 가진 사람들(유신론자)”에 대하여 묵상하는 가운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무신론과 유신론을 구별하는 결정적 기준점은 히브리서1장 1절의 말씀대로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각 사람이 지적-정적-의지적으로 분명히 믿느냐? 믿지 않느냐? 에 달려 있습니다. 무신론자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고, 유신론자는 보이지 아니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 기준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바로 여기가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수학-물리학적으로 하나님 존재 유무에 대한 객관적 증거가 없음으로 “나는 믿지 못 하겠다” 하는 무신론자의 주장은 사실 정당합니다. 객관적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믿는다” 하는 유신론자의 주장은 오히려 부당합니다.
그런데 유신론자의 이런 고백은 “그래, 내 눈에도 하나님은 안 보여, 그렇지만 하나님이 없다는 것보다 있다 치고 사는 것이 더 좋은 거 아냐?” 하는 평면적 차원에서 혹은 무신론자에 대한 거부 반응-반대를 위한 반대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내 눈에도 분명히 하나님은 보이지 않아,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속에 하나님이 느껴지고, 내 마음속에 감동이 일고, 내 마음속에 하나님이 생존하여 계시는구나 하는 믿음” 이 실제로 생겨남으로 “보이지 아니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의 실존적 깨달음-느낌-인식은 일반적-객관적-자연적 앎-지식-깨달음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기 때문에 이를 신학적으로 “啓示(계시-The revelation)” 라고 합니다.
2. 계시와 요한 칼빈의 5대 교리(TULIP)
요한 칼빈은 그의 신학교리 5대강령(Total Depravity-전적 타락, Unconditional Election-무조건적 선택, Limited Atonement -제한적 속죄, Irresistible Grace-불가항력의 은혜, Perseverance Saints-성도의 견인)에서 이런 계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하게 평등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무신론자는 아무나 될 수 있으나, 유신론자는 아무나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TULIP)이 있어야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참고: 하인리히 오트, 김광식 역, 신학해제, 한국신학연구소, 271-287쪽.
3. 유신론자(하나님이 있다 하는 사람)가 받는 보응
첫째.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은 것을 보는 기쁨이 있습니다. 한자에 본다는 뜻을 가진 글자로 見(볼 견), 視(볼 시), 觀(볼 관) 등이 있습니다. <見>은 객관적으로 드러난 것을 그냥 보는 것, 見物生心(견물생심). <視>는 사람이 주관적으로 의도적으로 살펴 보는 것, 視察(시찰). <觀>은 見이나 視로는 보이지 아니하는 사물의 갚은 속을 통찰하여 보는 것, 마음으로 보는 것, 觀照(관조), 靜觀(정관).
유신론자는 하나님이 자연 속에 펼쳐놓으신 깊은 뜻을 <觀> 하는 기쁨을 누립니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산에 부는 바람과 잔잔한 시냇물 그 소리 가운데 주 음성 들리니 주 하나님의 큰 뜻을 나 알 듯 하도다(찬송가478) 할 때, 하나님의 큰 뜻을 觀하는 기쁨입니다. 또한 사람의 깊은 마음을 깊이 觀하여 적절하게 대처하는 지혜를 발휘하는 기쁨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인생에서 고난을 당하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 받고 절망-불안-좌절-낙심-원망 하지 아니합니다. 끝내 견디어 승리하고 감사 찬송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그들은 나보다 힘이 세기 때문이로다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심으로 나를 구원 하셨도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뒤어 넘나이다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띄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하게 하시니 내 팔이 놋활을 당기도다(시118)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 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40:27-31).....
셋째. 하나님이 있다 하는 사람들은 성전에 올라가는 특권과 예배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립니다. 성전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이 있다 하는 사람만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항상 임재하여 계신 곳입니다(왕상9:3). 이 특권을 소홀히 하거나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면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야곱에게 장자권을 팔고 약속의 땅에서 좇겨나 평생 이방 땅에서 통한의 세월을 보낸 것과 같습니다. 왜? 하나님의 축복은 성전 예배를 통하여 공급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말씀을 지갑 속에 넣어 가지고 다니시기 바랍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Humility and the fear of the Lord bring wealth and honor and life 잠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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