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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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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1: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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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오늘은 한국 교회가 전통적으로 지키는 추수감사절입니다. 추수 감사절의 유래는 미국에 건너온 청교도들의 추수 감사절에서 온 것입니다. 청교도들이 갖은 고난을 겪으면 첫 번 수확을 거두고도 하나님께 감사한 절기였습니다. 미국에서는 11월 셋째 목요일부터 추수감사절로 정하고 학교도 쉬며 가장 큰 명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미국 교회의 영향을 받아 선교 20년 후인 1904년 제 4회 조선 예수교 공의회에서 추수감사절로 지키기로 결의했습니다. 처음에는 장로교만 11월 10일에 추수 감사절로 지키다가 1914년 각교단 선교부가 미국 선교사 최초 입국일인 11월 셋째 주 수요일을 추수 감사절로 지켰습니다. 1021년 11월 셋째 주일로 변경하여 지금까지 추수감사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키는 추수 감사절은 성경에 나온 절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감사와 관련된 3대 절기인 무교절(유월절), 칠칠절(맥추절, 오순절, 초칠절), 초막절(수장절, 장막절)이 나옵니다. 무교절은 봄의 보리 추수와 관련이 있고 칠칠절은 유월절로부터 칠 주가 지난 날로 여름철의 밀 추수와 관련이 있습니다. 초막절은 농산물뿐 아니라 올리브나 각종 과일의 추수를 포함한 가을 추수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추수 감사절은 바로 초막절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애굽의 노예 생활을 하던 백성들이 해방이 되어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살던 때를 기념하여 가을철 추수를 다 끝내어 놓고 지키는 절기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을 농경의 풍요를 주는 신으로 섬기며 바알축제를 하였는데 하나님을 섬긴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로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이 기간에 첫날과 제 8일에는 성회로 모이고 7일간 매일 감사제물을 드리고, 성경을 낭독하며 잔치를 즐겼습니다(민29:12~38) 초막절은 한 해의 추수를 하도록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였습니다. 일주일 동안 함께 모여 즐거워하며 그들의 생업에 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해서 감사의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초막절은 하나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였습니다. 백성들이 모두 초막에 거하며 애굽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몸소 체험하였습니다. 매일 하나님께 속죄의 제물을 드리고, 죄의 용서를 구할 뿐 아니라 구속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레 23장; 민 29장). 초막절은 지역과 계층을 초월한 나눔의 감사 축제였습니다. 초막절 잔치에는 빈부나 신분의 고하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참여했습니다. 소외된 사람들의 대명사인 종과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가 함께해 먹고, 나누며, 기뻐했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왔고 지역과 계층을 초월한 나눔과 배려가 있는 축제였습니다. 청교도들의 추수감사제나 성경의 초막절은 다 공통점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로 해석한 절기입니다. 무수히 많은 고난을 당했지만 지난 과거를 감사로 해석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웃과 함께 축제로 드린 절기입니다. 오늘 2009년 추수 감사절을 맞이하여 우리도 지난 세월을 감사로 해석하고 특별히 12년 만에 건축한 교회 입당을 앞에 놓고 지금까지 열린교회를 섬겼던 모든 성도와의 관계를 감사로 해석하며 감사로 드리는 추수 감사절이 되었으면 하여 설교 제목을 “감사로 해석하는 관계”라고 잡아 보았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인간관계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관계 속에서 태어나서 인간관계 속에서 살다가 인간관계 속에서 죽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관계를 형성하며 살게 됩니다. 처음에 부모와 자녀관계로부터 시작하여 형제관계, 친구관계, 사제관계, 선후배관계, 상사와 부하관계, 부부관계 교우관계 등 폭이 넓어집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성질상 필연적으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조력관계'라고 부릅니다. 이런 인간관계는 몇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독특성이 있습니다. 어떤 인간관계도 똑같을 수 없습니다. 둘째는 대체불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떠한 인간관계도 다른 인간관계에 의해 대체될 수는 없습니다. 셋째는 상호의존성입니다. 관계하는 당사자의 운명이 상호 연관되어 있습니다. 넷째는 보상성입니다. 생산적인 인간관계를 가지면 서로의 성장과 발전에 도움이 됩니다. 자기존중감을 높여주고 위로를 주며 즐거움을 줍니다. 인생을 살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힘을 주고, 정신건강에 기여하여 행복하게 하고, 자아 실현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활기를 줍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털어놓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인간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보다 병에 걸릴 확률이 배나 낮다고 합니다. 대학교의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룸메이트끼리 서로 싫어할수록 감기에 걸릴 확률이 높았고 병원에 가는 빈도가 높았다고 합니다. 타인과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은 흔히 불안, 우울, 좌절, 소외, 갈등, 긴장 등을 경험하지만 좋은 인간관계를 가지는 사람은 심리적으로 성숙하고 건강한 정신 건강을 가지고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현실적으로 정확하고 올바르게 이해하고(자기이해) 있는 그대로의 자신, 즉 자신의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까지도 용납하고 수용하며(자기수용)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남에게 개방할 수 있는 태도와 능력(자기노출)을 갖는 다고 합니다. 좋은 인간관계를 가지는 사람이 직업적으로도 성공한다고 합니다. 직장에서 효과적으로 자신이 맡은 업무를 수행하고 직업적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세 가지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세 가지 기술이란 기능적 기술(technical skill), 개념적 기술(conceptual skill) 그리고 인간관계기술이라는 것입니다. 기능적 기술이란 자기가 맡은 전문분야의 업무를 말합니다. 개념적 기술이란 거시적으로 조직 전체의 목표달성과 생산성 향상을 꾀할 수 있는 기술을 말합니다. 인간관계 기술이란 문자 그대로 일보다는 직장의 다른 동료, 상사, 부하들과 원만한 인간관계를 할 수 있는 기술을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관계 기술이 직업적 성공을 거두는데 85% 정도이고, 기술적인 지식은 15% 정도라고 밝혀지고 있답니다. 직장에서 해고된 대부분의 사람들 중 66% 정도는 대인관계의 실패 때문에 해고되었던 것이고, 단지 34% 정도가 일과 관련된 기술이라든가 지식부족 등의 원인으로 해고된답니다. 인간관계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참 만남의 희소성입니다. 사람은 평생을 살면서 온갖 종류의 인간관계를 경험하지만 그러한 관계상황 속에서 진정한 참 만남의 인간관계를 경험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얼마나 살벌합니까? 서로 적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를 고독한 전사로 만듭니다. 만인대 만인의 투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얼마신 보도를 보니까 보험을 타기 위해 어머니와 누이를 죽였답니다. 아내와 남편을 죽입니다. 직장에서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중상모략을 합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섬김의 주도권이 아니라 경영의 주도권을 갖기 위해 투쟁합니다. 왜 이런 인간관계가 이루어집니까?
학자들은 몇가지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현대사회는 조직화되고 거대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거대한 조직사회 속에서 개인의 역할은 점점 더 왜소해지고 따라서 개인의 존재가치와 존재의미는 점점 미약해져가고 있습니다. 개인은 거대한 조직사회 속에 파묻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기계의 부속품처럼 갈아 끼우는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둘째, 현대사회는 효율성과 신속성을 강조하는 경쟁사회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실질적인 또는 잠재적인 경쟁대상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애정과 정성을 기울일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는 빨리 성립되면서 또 빨리 붕괴되고 있지만 전혀 아쉬움이 없습니다.
셋째, 현대사회는 다원화된 사회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관, 사회정치적 신념, 생활양식, 기호, 취미 등이 다양하다 보니 사람 간의 공통분모는 감소하고 대립되는 갈등의 요소가 증가하다는 것입니다.
넷째, 자본주의가 주도하는 현대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물질적 가치가 강조되고 따라서 정신적 가치가 경시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물질적 가치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로는 현대사회는 전자통신기술로 인한 연결망이 발전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전자통신수단은 사람 간 접촉의 양을 증가시켰지만 접촉의 질을 피상적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 시대만 인간관계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 기록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사는 어느 곳에서나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인간관계는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보십시오. 유다가 예수님을 인신 매매 했습니다. 그보다 오래 전인 다윗의 아들을 보십시오.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를 죽이려고 합니다. 사울을 보십시오. 시기심으로 자기 사위를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시대보다 더 전인 요셉의 형제들을 보십시오. 자신의 동생을 팔았습니다.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를 보십시오. 바울과 바나바를 보십시오. 동역자이지만 마가 문제로 다투고 갈라섰습니다. 바울 사도와 고린도 교회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여 1년 반쯤 섬겼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분쟁합니다. 서로 바울파, 아볼로 파, 베드로 파, 예수파라고 싸우는 것입니다. 계모와 불륜을 행하는 음행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서로 교인끼리 싸우고 법정에 고소하는 것입니다. 교인 가운데 매춘부와 함께 하는 성범죄가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시는 바울 당시에는 인구 60만을 헤아리는 대도시였다고 합니다. 상업의 도시로 번창했으나 반면에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극히 암담하고 무질서하였답니다. 이들은 다신교를 숭배했고(행 17:16-22) 그들의 생활은 음란했다고 합니다. 교인들이 세상을 닮아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마음에 맞지 않는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교인들 가운데는 바울의 사도권을 잘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하면 목회자로 인정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엉망으로 살면서 바울을 비난합니다. 자신들은 법정 고소까지 하면서 바울이 방문하기로 하고 사정이 있어 오지 못하니까 일관성이 없다고 말합니다.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이중 인격자라는 말입니다. 욕심을 부리고 있다고 합니다. 돈 욕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글은 잘쓰는데 말이 서툴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설교를 잘 못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인 바울은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이럴 때 바울은 그들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인간관계를 감사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하는 감사는 어떤 감사입니까?
첫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감사하는 감사입니다.
인간의 조건을 보고 감사하는 감사가 아닙니다. 그들이 바울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고 감사하는 감사가 아닙니다. 타인이 내게 대하는 태도를 보고 감사하는 감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시는 일을 보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부족한 그들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여 하나님 백성 삼아준 그 은혜로 말미암아 감사하는 감사입니다. 은혜란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 없이 주신 것입니다. 비록 나를 비난하고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은혜로 하나님 백성 삼아 주었기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인간 관계의 기본 요소 네 가지는 “자기이해, 타인이해, 의사소통, 자기 개방”이라고 말합니다. 건강한 인간관계, 창조적인 인간관계가 되려면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객관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타인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과 타인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인간관계의 유형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생산적 인간관계는 자기도 긍정하고 타인긍정의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나도 옳고 너도 옳다‘의 입장을 갖고 인간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나도 천국 갈 하나님의 백성이고 너도 영원한 천국에서 만날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같은 아버지를 섬기는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자신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5)”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잘 나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가 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부족하지만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라는 것입니까? 2절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별된 성도라는 것입니다. 비록 부족하지만 그들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공격적 인간관계(자기긍정, 타인부정의 투사적 태도)는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라고 합니다. 이런 관계를 가지면 타인을 매우 불신하고 강한 의혹을 품고 있으며 타인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데 시간을 많이 소비합니다. 투사적 입장을 가지고 자신의 실수를 남에게 전가시키고 자신은 희생이나 박해를 당했다는 기분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자신은 공격적인 태도와 우월감, 자만심 속에서 살면서 타인은 부정합니다.
허무적 인간관계 (자기부정, 타인긍정의 도피주의적 태도)는 ‘나는 틀렸고 너는 옳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열등감, 죄의식, 무기력, 굴복, 도피, 번민 속에 사는 우울질의 사람이 됩니다. 늘 타인에게 의존하고 항상 칭찬과 인정에 목말라합니다.
파괴적 인간관계(자기부정, 타인부정의자기비하의 태도)는 ‘나도 틀렸고 너도 틀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인생은 무가치하고 좋은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정적이고 희망이 없는 삶을 살며, 좌절이 심하고 공격적이며 파괴적인 행동을 합니다. 바울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까? 부족하지만 자신도 긍정하고 고린도 교회 성도도 긍정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은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고 고린도 교회 교인은 그리스도의 성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보며 부족하다고 원망하고 불평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서로를 향하여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부족한 고린도 교인들이지만 바울은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이는”이라고 말씀합니다. 감사하는 이유를 말씀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언변과 지식에 풍족하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담대히 말할 수 있도록 해 주었고 예수님께서 진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증거가 견고하게 되어, 은사를 부족함없이 받아 재림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부정적인 면을 확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의 긍정적인 면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으로 가능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부어주시는 은혜를 보지 못하고 인간적인 기준으로 늘 성도를 비난하고 성도와 감사의 인간관계를 가지고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 완전한 교회 완전한 성도, 완전한 교회가 없는가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완전한 교회 완전한 성도는 없습니다. 스펄전 목사님께 어떤 날 어느 젊은이가 찾아 와 요청했답니다. "목사님 저는 교회 생활에 늘 시험을 받고 늘 지쳐 있는데 목사님 좀 문제없는 완전한 교회 하나 소개해 주세요." 그 때 스펄전 목사님은 청년을 향해서 빙그레 웃으면서 "자네가 혹시 그런 교회를 찾으면 나에게 꼭 알려주게 나도 그 교회 가서 그 교회 교인이 되고싶네 그러나 자네는 말이야 그런 교회를 찾거든 자네만은 절대로 그 교회에 속하지 말게"라고 했답니다. 청년이 "왜요?"라고 반문하자 "자네가 끼면 그 날부터 그 교회의 완전은 깨질 테니까 말이야 바로 자네 때문에 말이야" 완전한 교회를 찾는 것은 허구적 이상주의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 사는 동안 완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를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의 감사는 어떤 감사입니까? 4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문제를 감사로 푸는 감사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페리(위하여)라는 말은 “관하여, 때문에”라는 말입니다. 고린도 교인들 때문에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문제를 가지고 있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 중에는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중인격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만 좋아한다고 비난하고 설교를 못한다고 비난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대인관계를 가질 때 상대가 비난을 하면 어떻게 해결합니까? 힘이 있는 자들은 힘으로 제압을 합니다. 힘이 없는 자들은 관계를 청산하고 도피해 버립니다. 사람이 대인관계를 갖는 욕구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심리학자 Schultz의 대인적 욕구 이론를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째가 소속(inclusion)의 욕구입니다. 타인들이 자신과 함께 어울려주고 좋아해주기를 바라면서 자신도 남과 어울리기를 바라는 욕구입니다. 그런데 서로 욕구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욕구의 강도에 따라 비사교형(undersocial) 행동, 과잉 사교형(oversocial) 행동, 사교형(social) 행동이 나옵니다.
두 번째 대인욕구는 지배(control)의 욕구입니다. 이는 힘이나 권력, 그리고 권위를 행사하고자 하는 욕구와 함께 남으로부터 지배받고자 하는 욕구를 말합니다. 역시 지배의 욕구도 강도에 따라 세 가지로 구분되는데 무지배형(abdicrat), 독재형(autocrat), 민주형(democrat)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욕구는 애정(affection)의 욕구입니다. 타인을 좋아하고자 하는 욕구와 타인이 자신을 좋아해주기를 바라는 욕구를 말합니다. 이 욕구도 그 강도에 따라서 무심형(underpersonal), 과잉 관심형(overpersonal), 관심형(personal)으로 나뉘어 집니다. 의미있는 이론입니다. 사람은 서로 소속되고 싶어, 서로 지배하고 지배당하고 싶어, 서로 애정을 받고 주고 싶어 관계를 가집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힘이 있으면 이렇게 비난 받으면 관계를 끊어 버리거나 힘으로 지배해 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영적 힘이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도피하지도 힘으로 제압하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감사하는 것입니다. 왜요 너희를 인하여서입니다. 개역성경 번역으로 이해하면 너희를 위해서입니다.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을 성숙한 신앙인으로 세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고린도 교회 교인과의 교제가 소속 욕구를 위해, 지배 욕구를 위해, 애정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맺어진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를 읽으면서 고린도 교인들이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바울은 어떻게 고린도 교인들과 인간관계가 맺어졌다고 해석하고 있습니까? 9절을 읽어 보세요. 바울도 주님과 교제하고 고린도 교인들도 주님과 교제하는데 누가 이 교제를 있게 만들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미쁘시다는 것입니다. 신실하시다는 것입니다. 변함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이 맺어준 관계입니다. 애정 욕구 때문에, 소속 욕구 때문에 지배 욕구 때문에 맺은 관계가 아닙니다. 좀더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설명하면 환자가 있기 때문에 의사는 사는 것입니다. 죄인이 있기 때문에 판사, 검사는 사는 것입니다. 연약한 그들이 있기 때문에 바울이 존재할 필요가 있는 것이고 연약한 그들이 점점 성숙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연약한 사람들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화목제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감사로 해석하며 서로 도와야 합니다. 우리의 관계는 서로에게 위로해도로 맺어 준 것입니다. 서로를 사랑하도록 맺어준 것입니다. 서로 세워주도록 맺어 준 것입니다. 인간관계는 서로의 매력을 느끼고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시작은 더 이상 관계를 하지 않을 수도 있고(면식단계) 피상적인 수준에서 머물 수도 있고(접촉의 단계) 더 깊은 관계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상호의존의 단계). 우리 신앙인은 그냥 면식단계, 접촉 단계에서 끝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끝까지 세워주고 도와 주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한 번 불러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한 우리를 우리 주님은 끝까지 버리지 않습니다. 8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근본적으로 우리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끝까지 견고케 세워 주십니다.
문제를 감사로 해석해야 합니다. 감사하면 미래가 달라집니다. 감사하면 감사의 열매가 맺히고 불평하면 불평의 열매가 맺힙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 앞에 5병 2어 밖에 없었지만 오히려 감사하여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누이가 늦게 왔다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 가서 감사하였습니다. 고라신과 벳세다야에서 복음을 전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감사합니다. 다니엘은 중상 모략으로 죽음 앞에 서 있었습니다. 예배드리면 죽을 수밖에 없는 위기입니다. 모든 명예와 부와 권력을 하루아침에 빼앗기도 목숨까지 위태롭습니다. 그러나 올무를 놓은 그들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결과는 감사한 대로 되었습니다. 감사로 모든 문제를 푼 것입니다. 자동차의 왕 헨리 포드에 대한 이야기 중에 이런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미국 조지아주에 말터벨이라는 여 선생님이 있었답니다. 시골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너무 가난하여 피아노가 없어 당시 미국 최고의 부자였던 자동차의 왕 헨리 포드에게 1000불만 보내달라고 간곡한 편지를 보냈답니다. 이 편지를 받고 포드는 마음이 상했답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헨리 포드에게 돈을 요구해 받아갔지만 대부분은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것으로 끝났기 때문이었답니다. 이 선생님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거절할 수 없어 10센트를 보내주게 했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것을 감사하게 받았답니다. 10센트 만큼 땅콩을 사서 학교 운동장 한 구석에다 심었답니다. 수확을 거두어 팔아 그 돈의 일부를 헨리 포드에게 감사와 함께 보내었답니다. 또 다음 해에도 더 많은 씨를 뿌리고 수확을 거두었답니다. 그 결과 5년만에 피아노를 살 수 있었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너무 감사하여 헨리 포드에게 다시 감사의 편지를 보내었답니다. 포드는 여 선생님의 편지를 받고 너무 기뻐서 선생님이 요구한 천불의 10배나 되는 만불을 보내면서 거기에 "당신이야말로 내가 미국에서 만난 유일한 사람이오. 나는 당신에게 돈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보내오, 나는 당신을 만나므로 감동을 받았소."라는 편지를 동봉했답니다. 감사는 경쟁력이 있습니다. 돈도 별로 들지 않습니다. 감사한다고 세금 내라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감사하는 사람 싫어할 사람 없고 감사하는 얼굴에 침 뱉을 사람 없습니다. 양이 양을 낳고 소가 소를 낳듯이 불평은 불평을 낳고 원망을 원망을 낳지만 감사는 감사를 낳습니다. 감사한 만큼 삶은 풍요롭고 여유 있으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오늘 이 시대는 감사가 매마른 시대입니다. 감사 불감증에 걸린 시대입니다. 감사 결핍증에 걸린 시대입니다. 이 정도 사는 것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과거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펜젤러 선교사는 한국 사람이 절간의 쥐처럼 가난하다고 했습니다. 봉건 이씨 왕조, 식민지 생활, 해방하자마자 민족상잔의 비극을 격은 나라입니다. 1900년에 한국에 교회가 840개 있었는데 지금은 교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아리스토 텔레스가 "인간의 마음 중에 가장 쉽게 늙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곧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지적했듯이 감사를 의도적으로 훈련하지 않으면 쉽게 입술에서 잊혀지게 됩니다. 문제를 의도덕으로 감사로 해석해야 합니다. 감사하면 세상이 좋아지고 이웃 복을 받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바울은 어떤 감사를 합니까?
셋째로 상황의 변화를 초월하여 항상 감사하는 감사입니다.
사람의 관계는 늘 변화합니다. 어제 좋은 관계가 오늘 지속된다고 보장할 수 없고 오늘의 좋은 관계가 2년 후에도 유지된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좋을 때는 감사했다가 나빠지면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좋은 관계가 아닌데도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는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8)"라고 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꼭지켜야할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란 잘 될 때나, 잘 못될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성공할 때나 실패할 때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죄입니다. 감사를 못하면 우리의 마음이 허망해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우둔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롬1:21,22) 감사하지 않으면 자신이 손해입니다. 늘 불평하고 원망하면 사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잘 되지 않습니다. 주어진 조건에 감사하지 못하고 사기 치고 다른 사람 이용하고 하는 사람들 결국 행복하게 살지 못합니다. 감사는 우리 삶에 능력을 가져오게 합니다.
반면에 감사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시 50:23) 기쁘시게 하고 우리가 풍요롭게 산다고 말씀합니다.(눅17:19) 감사한 만큼 삶은 풍요롭고 행복합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감사합니다. 바울이 감옥에 있으면서 쓴 편지를 옥중서신이라 합니다. 그 옥중서신은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감옥에 있으면서 쓴 모든 편지에 감사함이 있습니다.(엡1:16,5:4,5:20; 빌1:3,4:6; 몬1:4)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왜 이렇게 감사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에베소서에서(1:16)는 "너희의 믿음과 사랑을 나도 듣고 너희를 인하여"
빌립보서에서는(1:3)"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빌레몬서에서는 (1:4-5)"주예수와 성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골로새서에서는 (1:3-5) 골로새 교인들의 믿음, 사랑 소망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자신이 섬기고 있는 교인들을 보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문제가 있고 연약하고 미성숙했다고 해도 섬길 수 있는 사람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속았다고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아직은 미숙하지만 그들 마음 속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있을 것을 보면서, 성도의 신앙이 점점 성숙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감사했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교인들의 부정적인 면을 보면서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을 보면서 감사한 것입니다. 해석의 감사입니다. 모든 것을 감사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띵크(Think)', '땡크(Thank)'라는 말은 어원이 같다고 합니다. 생각의 문제입니다. 각도의 문제입니다. 어느 쪽에서 바라보냐는 것입니다. 똑같이 눈이 작지만 그것을 감사로 해석하는 사람에게는 감사의 조건이 될 수 있지만 눈이 작은 것을 불평으로 해석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불평의 조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눈이 작은 것이 바람부는 날 먼지 적게 들어오고, 늙으면 눈이 큰 사람보다 적게 쳐지고 얼마든지 감사의 조건을 찾으면 많이 있습니다. 어디에서든지 감사를 찾는 사람은 감사가 보이지만 불평을 찾는 사람에게 불평만 보입니다. 성경에서 감사를 가장 많이 고백한 사람은 다윗과 사도 바울입니다. 다윗은 수많은 환난과 역경 속에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감사를 찾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가난과, 굶주림과, 고통이 항상 떠나지 않았지만 어떤 조건에서도 감사를 찾았고 가슴으로부터 샘물처럼 흘러나오는 감사로 일평생 살았습니다. 상대적 감사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감사는 수명이 짧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하는 절대적 감사는 시간과 공간은 넓혀 범사에 항상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주변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면서 감사의 조건을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 아내, 자식, 부모 비록 내 마음에 맞지 않을 지라도 감사의 조건을 찾아보십시오. 얼마나 감사한 일이 많이 있습니까? 아직은 미숙하지만 그래도 교회에 나와 신앙 생활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일본의 테레사수녀"로 불리는 다마키 여인은 평생을 한센씨병 환자들을 돌보며 살았습니다. 요양원을 만들고 고름이 나는 환자들의 피부를 치료하다가 그만 자신도 한센씨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한센씨병에 걸린 것을 알고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제 육의 눈이 가려지고 영의 눈이 열려 감사하다. 눈썹이 빠지면서 눈썹의 고마움을 알았다. 먼지가 자꾸 눈에 들어가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은 미처 몰랐다. 하나님은 내게 병을 주어 여러가지 감사의 마음을 알게 하셨으니 얼마나 고마운가"라고 했다고 합니다.
1946년 6월 공산주의자들은 일제하에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의 아들 주 영진 전도사를 잡아 갔을 때 주 목사님의 부인 오정모 여사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목사님을 제물로 받으시더니 또 그 아들까지 받으시려 합니까? 한없는 영광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린 종에게 담대한 마음을 주시사 시험에 들지 않게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다니엘의 감사, 요나의 감사, 하박국의 감사가 바로 그런 감사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감사의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를 어렵게 하는 자가 나를 성공시키는 자라고 감사함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때문에 더욱 성군으로 존경을 받습니다. 요셉은 형들 때문에 결국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자신을 괴롭히는 브닌나 때문에 기도의 어머니가 되었고 사무엘을 나아 민족을 구원하게 되었습니다.
추수 감사절입니다.
모든 인간관계를 감사로 해석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금의 상태나 조건을 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상대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감사하여야 하겠습니다. 문제를 감사로 푸는 감사생활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상황의 변화를 초월한 항상 감사하는 감사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8)”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9.11.15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인간관계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관계 속에서 태어나서 인간관계 속에서 살다가 인간관계 속에서 죽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관계를 형성하며 살게 됩니다. 처음에 부모와 자녀관계로부터 시작하여 형제관계, 친구관계, 사제관계, 선후배관계, 상사와 부하관계, 부부관계 교우관계 등 폭이 넓어집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성질상 필연적으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조력관계'라고 부릅니다. 이런 인간관계는 몇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독특성이 있습니다. 어떤 인간관계도 똑같을 수 없습니다. 둘째는 대체불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떠한 인간관계도 다른 인간관계에 의해 대체될 수는 없습니다. 셋째는 상호의존성입니다. 관계하는 당사자의 운명이 상호 연관되어 있습니다. 넷째는 보상성입니다. 생산적인 인간관계를 가지면 서로의 성장과 발전에 도움이 됩니다. 자기존중감을 높여주고 위로를 주며 즐거움을 줍니다. 인생을 살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힘을 주고, 정신건강에 기여하여 행복하게 하고, 자아 실현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활기를 줍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털어놓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인간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보다 병에 걸릴 확률이 배나 낮다고 합니다. 대학교의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룸메이트끼리 서로 싫어할수록 감기에 걸릴 확률이 높았고 병원에 가는 빈도가 높았다고 합니다. 타인과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은 흔히 불안, 우울, 좌절, 소외, 갈등, 긴장 등을 경험하지만 좋은 인간관계를 가지는 사람은 심리적으로 성숙하고 건강한 정신 건강을 가지고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현실적으로 정확하고 올바르게 이해하고(자기이해) 있는 그대로의 자신, 즉 자신의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까지도 용납하고 수용하며(자기수용)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남에게 개방할 수 있는 태도와 능력(자기노출)을 갖는 다고 합니다. 좋은 인간관계를 가지는 사람이 직업적으로도 성공한다고 합니다. 직장에서 효과적으로 자신이 맡은 업무를 수행하고 직업적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세 가지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세 가지 기술이란 기능적 기술(technical skill), 개념적 기술(conceptual skill) 그리고 인간관계기술이라는 것입니다. 기능적 기술이란 자기가 맡은 전문분야의 업무를 말합니다. 개념적 기술이란 거시적으로 조직 전체의 목표달성과 생산성 향상을 꾀할 수 있는 기술을 말합니다. 인간관계 기술이란 문자 그대로 일보다는 직장의 다른 동료, 상사, 부하들과 원만한 인간관계를 할 수 있는 기술을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관계 기술이 직업적 성공을 거두는데 85% 정도이고, 기술적인 지식은 15% 정도라고 밝혀지고 있답니다. 직장에서 해고된 대부분의 사람들 중 66% 정도는 대인관계의 실패 때문에 해고되었던 것이고, 단지 34% 정도가 일과 관련된 기술이라든가 지식부족 등의 원인으로 해고된답니다. 인간관계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참 만남의 희소성입니다. 사람은 평생을 살면서 온갖 종류의 인간관계를 경험하지만 그러한 관계상황 속에서 진정한 참 만남의 인간관계를 경험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얼마나 살벌합니까? 서로 적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를 고독한 전사로 만듭니다. 만인대 만인의 투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얼마신 보도를 보니까 보험을 타기 위해 어머니와 누이를 죽였답니다. 아내와 남편을 죽입니다. 직장에서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중상모략을 합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섬김의 주도권이 아니라 경영의 주도권을 갖기 위해 투쟁합니다. 왜 이런 인간관계가 이루어집니까?
학자들은 몇가지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현대사회는 조직화되고 거대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거대한 조직사회 속에서 개인의 역할은 점점 더 왜소해지고 따라서 개인의 존재가치와 존재의미는 점점 미약해져가고 있습니다. 개인은 거대한 조직사회 속에 파묻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기계의 부속품처럼 갈아 끼우는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둘째, 현대사회는 효율성과 신속성을 강조하는 경쟁사회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실질적인 또는 잠재적인 경쟁대상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애정과 정성을 기울일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는 빨리 성립되면서 또 빨리 붕괴되고 있지만 전혀 아쉬움이 없습니다.
셋째, 현대사회는 다원화된 사회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관, 사회정치적 신념, 생활양식, 기호, 취미 등이 다양하다 보니 사람 간의 공통분모는 감소하고 대립되는 갈등의 요소가 증가하다는 것입니다.
넷째, 자본주의가 주도하는 현대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물질적 가치가 강조되고 따라서 정신적 가치가 경시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물질적 가치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로는 현대사회는 전자통신기술로 인한 연결망이 발전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전자통신수단은 사람 간 접촉의 양을 증가시켰지만 접촉의 질을 피상적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 시대만 인간관계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 기록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사는 어느 곳에서나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인간관계는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보십시오. 유다가 예수님을 인신 매매 했습니다. 그보다 오래 전인 다윗의 아들을 보십시오.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를 죽이려고 합니다. 사울을 보십시오. 시기심으로 자기 사위를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시대보다 더 전인 요셉의 형제들을 보십시오. 자신의 동생을 팔았습니다.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를 보십시오. 바울과 바나바를 보십시오. 동역자이지만 마가 문제로 다투고 갈라섰습니다. 바울 사도와 고린도 교회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여 1년 반쯤 섬겼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분쟁합니다. 서로 바울파, 아볼로 파, 베드로 파, 예수파라고 싸우는 것입니다. 계모와 불륜을 행하는 음행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서로 교인끼리 싸우고 법정에 고소하는 것입니다. 교인 가운데 매춘부와 함께 하는 성범죄가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시는 바울 당시에는 인구 60만을 헤아리는 대도시였다고 합니다. 상업의 도시로 번창했으나 반면에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극히 암담하고 무질서하였답니다. 이들은 다신교를 숭배했고(행 17:16-22) 그들의 생활은 음란했다고 합니다. 교인들이 세상을 닮아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마음에 맞지 않는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교인들 가운데는 바울의 사도권을 잘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하면 목회자로 인정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엉망으로 살면서 바울을 비난합니다. 자신들은 법정 고소까지 하면서 바울이 방문하기로 하고 사정이 있어 오지 못하니까 일관성이 없다고 말합니다.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이중 인격자라는 말입니다. 욕심을 부리고 있다고 합니다. 돈 욕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글은 잘쓰는데 말이 서툴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설교를 잘 못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인 바울은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이럴 때 바울은 그들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인간관계를 감사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하는 감사는 어떤 감사입니까?
첫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감사하는 감사입니다.
인간의 조건을 보고 감사하는 감사가 아닙니다. 그들이 바울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고 감사하는 감사가 아닙니다. 타인이 내게 대하는 태도를 보고 감사하는 감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시는 일을 보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부족한 그들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여 하나님 백성 삼아준 그 은혜로 말미암아 감사하는 감사입니다. 은혜란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 없이 주신 것입니다. 비록 나를 비난하고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은혜로 하나님 백성 삼아 주었기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인간 관계의 기본 요소 네 가지는 “자기이해, 타인이해, 의사소통, 자기 개방”이라고 말합니다. 건강한 인간관계, 창조적인 인간관계가 되려면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객관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타인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과 타인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인간관계의 유형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생산적 인간관계는 자기도 긍정하고 타인긍정의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나도 옳고 너도 옳다‘의 입장을 갖고 인간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나도 천국 갈 하나님의 백성이고 너도 영원한 천국에서 만날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같은 아버지를 섬기는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자신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5)”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잘 나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가 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부족하지만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라는 것입니까? 2절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별된 성도라는 것입니다. 비록 부족하지만 그들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공격적 인간관계(자기긍정, 타인부정의 투사적 태도)는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라고 합니다. 이런 관계를 가지면 타인을 매우 불신하고 강한 의혹을 품고 있으며 타인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데 시간을 많이 소비합니다. 투사적 입장을 가지고 자신의 실수를 남에게 전가시키고 자신은 희생이나 박해를 당했다는 기분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자신은 공격적인 태도와 우월감, 자만심 속에서 살면서 타인은 부정합니다.
허무적 인간관계 (자기부정, 타인긍정의 도피주의적 태도)는 ‘나는 틀렸고 너는 옳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열등감, 죄의식, 무기력, 굴복, 도피, 번민 속에 사는 우울질의 사람이 됩니다. 늘 타인에게 의존하고 항상 칭찬과 인정에 목말라합니다.
파괴적 인간관계(자기부정, 타인부정의자기비하의 태도)는 ‘나도 틀렸고 너도 틀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인생은 무가치하고 좋은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정적이고 희망이 없는 삶을 살며, 좌절이 심하고 공격적이며 파괴적인 행동을 합니다. 바울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까? 부족하지만 자신도 긍정하고 고린도 교회 성도도 긍정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은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고 고린도 교회 교인은 그리스도의 성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보며 부족하다고 원망하고 불평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서로를 향하여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부족한 고린도 교인들이지만 바울은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이는”이라고 말씀합니다. 감사하는 이유를 말씀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언변과 지식에 풍족하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담대히 말할 수 있도록 해 주었고 예수님께서 진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증거가 견고하게 되어, 은사를 부족함없이 받아 재림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부정적인 면을 확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의 긍정적인 면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으로 가능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부어주시는 은혜를 보지 못하고 인간적인 기준으로 늘 성도를 비난하고 성도와 감사의 인간관계를 가지고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 완전한 교회 완전한 성도, 완전한 교회가 없는가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완전한 교회 완전한 성도는 없습니다. 스펄전 목사님께 어떤 날 어느 젊은이가 찾아 와 요청했답니다. "목사님 저는 교회 생활에 늘 시험을 받고 늘 지쳐 있는데 목사님 좀 문제없는 완전한 교회 하나 소개해 주세요." 그 때 스펄전 목사님은 청년을 향해서 빙그레 웃으면서 "자네가 혹시 그런 교회를 찾으면 나에게 꼭 알려주게 나도 그 교회 가서 그 교회 교인이 되고싶네 그러나 자네는 말이야 그런 교회를 찾거든 자네만은 절대로 그 교회에 속하지 말게"라고 했답니다. 청년이 "왜요?"라고 반문하자 "자네가 끼면 그 날부터 그 교회의 완전은 깨질 테니까 말이야 바로 자네 때문에 말이야" 완전한 교회를 찾는 것은 허구적 이상주의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 사는 동안 완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를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의 감사는 어떤 감사입니까? 4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문제를 감사로 푸는 감사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페리(위하여)라는 말은 “관하여, 때문에”라는 말입니다. 고린도 교인들 때문에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문제를 가지고 있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 중에는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중인격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만 좋아한다고 비난하고 설교를 못한다고 비난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대인관계를 가질 때 상대가 비난을 하면 어떻게 해결합니까? 힘이 있는 자들은 힘으로 제압을 합니다. 힘이 없는 자들은 관계를 청산하고 도피해 버립니다. 사람이 대인관계를 갖는 욕구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심리학자 Schultz의 대인적 욕구 이론를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째가 소속(inclusion)의 욕구입니다. 타인들이 자신과 함께 어울려주고 좋아해주기를 바라면서 자신도 남과 어울리기를 바라는 욕구입니다. 그런데 서로 욕구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욕구의 강도에 따라 비사교형(undersocial) 행동, 과잉 사교형(oversocial) 행동, 사교형(social) 행동이 나옵니다.
두 번째 대인욕구는 지배(control)의 욕구입니다. 이는 힘이나 권력, 그리고 권위를 행사하고자 하는 욕구와 함께 남으로부터 지배받고자 하는 욕구를 말합니다. 역시 지배의 욕구도 강도에 따라 세 가지로 구분되는데 무지배형(abdicrat), 독재형(autocrat), 민주형(democrat)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욕구는 애정(affection)의 욕구입니다. 타인을 좋아하고자 하는 욕구와 타인이 자신을 좋아해주기를 바라는 욕구를 말합니다. 이 욕구도 그 강도에 따라서 무심형(underpersonal), 과잉 관심형(overpersonal), 관심형(personal)으로 나뉘어 집니다. 의미있는 이론입니다. 사람은 서로 소속되고 싶어, 서로 지배하고 지배당하고 싶어, 서로 애정을 받고 주고 싶어 관계를 가집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힘이 있으면 이렇게 비난 받으면 관계를 끊어 버리거나 힘으로 지배해 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영적 힘이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도피하지도 힘으로 제압하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감사하는 것입니다. 왜요 너희를 인하여서입니다. 개역성경 번역으로 이해하면 너희를 위해서입니다.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을 성숙한 신앙인으로 세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고린도 교회 교인과의 교제가 소속 욕구를 위해, 지배 욕구를 위해, 애정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맺어진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를 읽으면서 고린도 교인들이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바울은 어떻게 고린도 교인들과 인간관계가 맺어졌다고 해석하고 있습니까? 9절을 읽어 보세요. 바울도 주님과 교제하고 고린도 교인들도 주님과 교제하는데 누가 이 교제를 있게 만들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미쁘시다는 것입니다. 신실하시다는 것입니다. 변함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이 맺어준 관계입니다. 애정 욕구 때문에, 소속 욕구 때문에 지배 욕구 때문에 맺은 관계가 아닙니다. 좀더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설명하면 환자가 있기 때문에 의사는 사는 것입니다. 죄인이 있기 때문에 판사, 검사는 사는 것입니다. 연약한 그들이 있기 때문에 바울이 존재할 필요가 있는 것이고 연약한 그들이 점점 성숙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연약한 사람들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화목제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감사로 해석하며 서로 도와야 합니다. 우리의 관계는 서로에게 위로해도로 맺어 준 것입니다. 서로를 사랑하도록 맺어준 것입니다. 서로 세워주도록 맺어 준 것입니다. 인간관계는 서로의 매력을 느끼고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시작은 더 이상 관계를 하지 않을 수도 있고(면식단계) 피상적인 수준에서 머물 수도 있고(접촉의 단계) 더 깊은 관계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상호의존의 단계). 우리 신앙인은 그냥 면식단계, 접촉 단계에서 끝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끝까지 세워주고 도와 주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한 번 불러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한 우리를 우리 주님은 끝까지 버리지 않습니다. 8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근본적으로 우리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끝까지 견고케 세워 주십니다.
문제를 감사로 해석해야 합니다. 감사하면 미래가 달라집니다. 감사하면 감사의 열매가 맺히고 불평하면 불평의 열매가 맺힙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 앞에 5병 2어 밖에 없었지만 오히려 감사하여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누이가 늦게 왔다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 가서 감사하였습니다. 고라신과 벳세다야에서 복음을 전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감사합니다. 다니엘은 중상 모략으로 죽음 앞에 서 있었습니다. 예배드리면 죽을 수밖에 없는 위기입니다. 모든 명예와 부와 권력을 하루아침에 빼앗기도 목숨까지 위태롭습니다. 그러나 올무를 놓은 그들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결과는 감사한 대로 되었습니다. 감사로 모든 문제를 푼 것입니다. 자동차의 왕 헨리 포드에 대한 이야기 중에 이런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미국 조지아주에 말터벨이라는 여 선생님이 있었답니다. 시골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너무 가난하여 피아노가 없어 당시 미국 최고의 부자였던 자동차의 왕 헨리 포드에게 1000불만 보내달라고 간곡한 편지를 보냈답니다. 이 편지를 받고 포드는 마음이 상했답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헨리 포드에게 돈을 요구해 받아갔지만 대부분은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것으로 끝났기 때문이었답니다. 이 선생님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거절할 수 없어 10센트를 보내주게 했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것을 감사하게 받았답니다. 10센트 만큼 땅콩을 사서 학교 운동장 한 구석에다 심었답니다. 수확을 거두어 팔아 그 돈의 일부를 헨리 포드에게 감사와 함께 보내었답니다. 또 다음 해에도 더 많은 씨를 뿌리고 수확을 거두었답니다. 그 결과 5년만에 피아노를 살 수 있었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너무 감사하여 헨리 포드에게 다시 감사의 편지를 보내었답니다. 포드는 여 선생님의 편지를 받고 너무 기뻐서 선생님이 요구한 천불의 10배나 되는 만불을 보내면서 거기에 "당신이야말로 내가 미국에서 만난 유일한 사람이오. 나는 당신에게 돈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보내오, 나는 당신을 만나므로 감동을 받았소."라는 편지를 동봉했답니다. 감사는 경쟁력이 있습니다. 돈도 별로 들지 않습니다. 감사한다고 세금 내라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감사하는 사람 싫어할 사람 없고 감사하는 얼굴에 침 뱉을 사람 없습니다. 양이 양을 낳고 소가 소를 낳듯이 불평은 불평을 낳고 원망을 원망을 낳지만 감사는 감사를 낳습니다. 감사한 만큼 삶은 풍요롭고 여유 있으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오늘 이 시대는 감사가 매마른 시대입니다. 감사 불감증에 걸린 시대입니다. 감사 결핍증에 걸린 시대입니다. 이 정도 사는 것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과거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펜젤러 선교사는 한국 사람이 절간의 쥐처럼 가난하다고 했습니다. 봉건 이씨 왕조, 식민지 생활, 해방하자마자 민족상잔의 비극을 격은 나라입니다. 1900년에 한국에 교회가 840개 있었는데 지금은 교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아리스토 텔레스가 "인간의 마음 중에 가장 쉽게 늙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곧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지적했듯이 감사를 의도적으로 훈련하지 않으면 쉽게 입술에서 잊혀지게 됩니다. 문제를 의도덕으로 감사로 해석해야 합니다. 감사하면 세상이 좋아지고 이웃 복을 받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바울은 어떤 감사를 합니까?
셋째로 상황의 변화를 초월하여 항상 감사하는 감사입니다.
사람의 관계는 늘 변화합니다. 어제 좋은 관계가 오늘 지속된다고 보장할 수 없고 오늘의 좋은 관계가 2년 후에도 유지된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좋을 때는 감사했다가 나빠지면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좋은 관계가 아닌데도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는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8)"라고 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꼭지켜야할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란 잘 될 때나, 잘 못될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성공할 때나 실패할 때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죄입니다. 감사를 못하면 우리의 마음이 허망해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우둔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롬1:21,22) 감사하지 않으면 자신이 손해입니다. 늘 불평하고 원망하면 사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잘 되지 않습니다. 주어진 조건에 감사하지 못하고 사기 치고 다른 사람 이용하고 하는 사람들 결국 행복하게 살지 못합니다. 감사는 우리 삶에 능력을 가져오게 합니다.
반면에 감사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시 50:23) 기쁘시게 하고 우리가 풍요롭게 산다고 말씀합니다.(눅17:19) 감사한 만큼 삶은 풍요롭고 행복합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감사합니다. 바울이 감옥에 있으면서 쓴 편지를 옥중서신이라 합니다. 그 옥중서신은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감옥에 있으면서 쓴 모든 편지에 감사함이 있습니다.(엡1:16,5:4,5:20; 빌1:3,4:6; 몬1:4)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왜 이렇게 감사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에베소서에서(1:16)는 "너희의 믿음과 사랑을 나도 듣고 너희를 인하여"
빌립보서에서는(1:3)"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빌레몬서에서는 (1:4-5)"주예수와 성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골로새서에서는 (1:3-5) 골로새 교인들의 믿음, 사랑 소망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자신이 섬기고 있는 교인들을 보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문제가 있고 연약하고 미성숙했다고 해도 섬길 수 있는 사람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속았다고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아직은 미숙하지만 그들 마음 속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있을 것을 보면서, 성도의 신앙이 점점 성숙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감사했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교인들의 부정적인 면을 보면서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을 보면서 감사한 것입니다. 해석의 감사입니다. 모든 것을 감사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띵크(Think)', '땡크(Thank)'라는 말은 어원이 같다고 합니다. 생각의 문제입니다. 각도의 문제입니다. 어느 쪽에서 바라보냐는 것입니다. 똑같이 눈이 작지만 그것을 감사로 해석하는 사람에게는 감사의 조건이 될 수 있지만 눈이 작은 것을 불평으로 해석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불평의 조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눈이 작은 것이 바람부는 날 먼지 적게 들어오고, 늙으면 눈이 큰 사람보다 적게 쳐지고 얼마든지 감사의 조건을 찾으면 많이 있습니다. 어디에서든지 감사를 찾는 사람은 감사가 보이지만 불평을 찾는 사람에게 불평만 보입니다. 성경에서 감사를 가장 많이 고백한 사람은 다윗과 사도 바울입니다. 다윗은 수많은 환난과 역경 속에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감사를 찾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가난과, 굶주림과, 고통이 항상 떠나지 않았지만 어떤 조건에서도 감사를 찾았고 가슴으로부터 샘물처럼 흘러나오는 감사로 일평생 살았습니다. 상대적 감사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감사는 수명이 짧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하는 절대적 감사는 시간과 공간은 넓혀 범사에 항상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주변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면서 감사의 조건을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 아내, 자식, 부모 비록 내 마음에 맞지 않을 지라도 감사의 조건을 찾아보십시오. 얼마나 감사한 일이 많이 있습니까? 아직은 미숙하지만 그래도 교회에 나와 신앙 생활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일본의 테레사수녀"로 불리는 다마키 여인은 평생을 한센씨병 환자들을 돌보며 살았습니다. 요양원을 만들고 고름이 나는 환자들의 피부를 치료하다가 그만 자신도 한센씨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한센씨병에 걸린 것을 알고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제 육의 눈이 가려지고 영의 눈이 열려 감사하다. 눈썹이 빠지면서 눈썹의 고마움을 알았다. 먼지가 자꾸 눈에 들어가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은 미처 몰랐다. 하나님은 내게 병을 주어 여러가지 감사의 마음을 알게 하셨으니 얼마나 고마운가"라고 했다고 합니다.
1946년 6월 공산주의자들은 일제하에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의 아들 주 영진 전도사를 잡아 갔을 때 주 목사님의 부인 오정모 여사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목사님을 제물로 받으시더니 또 그 아들까지 받으시려 합니까? 한없는 영광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린 종에게 담대한 마음을 주시사 시험에 들지 않게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다니엘의 감사, 요나의 감사, 하박국의 감사가 바로 그런 감사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감사의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를 어렵게 하는 자가 나를 성공시키는 자라고 감사함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때문에 더욱 성군으로 존경을 받습니다. 요셉은 형들 때문에 결국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자신을 괴롭히는 브닌나 때문에 기도의 어머니가 되었고 사무엘을 나아 민족을 구원하게 되었습니다.
추수 감사절입니다.
모든 인간관계를 감사로 해석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금의 상태나 조건을 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상대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감사하여야 하겠습니다. 문제를 감사로 푸는 감사생활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상황의 변화를 초월한 항상 감사하는 감사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8)”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9.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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