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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의 출생과 하갈과 이스마엘의 추방

창세기 복음............... 조회 수 3993 추천 수 0 2011.05.30 10:07:53
.........
성경본문 : 창21:1-34 
설교자 : 한태완 목사 
참고 :  

이삭의 출생과 하갈과 이스마엘의 추방

본문: 창21: 1- 34

 

증자의 아내가 장을 보러 가려고 할 때 어린 아들이 자꾸 따라오려고 울며 보챘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달래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집에 가면 돼지를 잡아 삶아 줄태니."라고 말했습니다. 장을 보고 난후 아내가 집에 돌아와 보니 증자는 돼지를 잡고 있었습니다. 황급해진 아내는 그를 말리며 말했습니다.

"애를 달래기 위해서 한마디 해 보았을 뿐인데...

그러자 증자는 말하기를 "어린아이에게는 실없는 말을 해선 안되는 것이라오. 애들은 무지해 부모가 가르쳐서 배우게 하는 것이거늘 그런데 당신이 어린애에게 한 말을 지키지 않고 속인다고 하면 애에게 사기를 가르치는 것이 되오 모친이 애를 속이고 그래서 아이가 모친을 믿지 않게 된다면 앞으로 어떻게 교육을 시키겠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약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히6:17)

요즘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믿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특히 정치가들이 하는 말은 거의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언제 그들이 그 말을 뒤집어버릴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불리해지면 자기가 한 말도 바꾸어버리거나 묵살해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치하는 사람들의 말은 곧이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일반적인 경우에까지 확대되어서 우리 사회에는 불신풍조가 심해졌습니다. 심지어는 아이들이 부모의 말도 잘 믿질 못하게 되었습니다. 부모가 말을 하면 아이들은 몇 번이고 정말이냐고 묻습니다. 때로는 성도들도 목사가 하는 말이 믿기지 않을 때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저에게 정말이냐고 묻는 성도들도 간혹 있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진실되지 못하며, 때로는 본의 아니게 자신의 말도 책임지지 못합니다. 사람은 믿을만한 존재가 못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말을 믿고 있다가는 낭패를 당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전능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지키시지 않는 법은 절대로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23: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사는 성도는 실망치 않게 됩니다.

오늘 창세기 21장에서는 3가지의 사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삭의 출생과 하갈과 이스마엘의 추방과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동맹입니다. 이 세가지중에서 첫 번째 이삭의 출생 이야기와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동맹의 이야기는 즐거운 이야기입니다. 자손에 대한 약속이 25년만에 이루어진 일이니 얼마나 반갑고도 즐거운 일이겠습니까?

또한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동맹은 유랑민에 불과한 아브라함이 그 당시 블레셋 땅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그랄 왕 아비멜렉과 동맹을 맺고 가나안 땅에 정착의 기초를 놓은 축제의 날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이스마엘과 그의 어머니 하갈의 추방은 참으로 슬픈 이야기입니다. 하갈과 그의 아들이 추방당한 이유가 9절 말씀에 나오는데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자식을 잉태하지 못함으로 인해 사라의 요청에 의해 하갈과 아브라함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스마엘은 적어도 이삭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는 아브라함과 하갈로 부터의 사랑은 물론이요 사라로 부터도 지극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창세기17:18에서 “이스마엘이나마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옵니다”라는 말을 한 아브라함의 마음을 두고 보건데 이스마엘을 그 당시의 법대로 양자 입양 절차를 통해 정상적인 상속자로 삼을려고도 했던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귀한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귀한 대우를 받던 이스마엘이 막상 사라의 몸에서 이삭이 태어나자 지금까지 사랑을 독차지 하던 것이 전부 이삭에게로 옮겨가 버리고 말았으니 그 배신감과 외로움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배신감과 외로움으로 인한 질투가 오늘 본문 8-9절에서 이복 동생 이삭을 희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8절에 이삭이 젖을 때고 라고 했기 때문에 이삭의 나이 3살 그리고 이스마엘의 나이 17살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 희롱하는 일로 인해 이삭의 어머니 사라가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추방하기로 마음먹고 아브라함에게 요청하고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추방했던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드디어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지 25년 만에 그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본 절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들을 낳은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된 일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된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던 약속은 이렇게 25년이 지난 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그동안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 문제로 얼마나 어려움을 당했습니까? 때로는 포기하기도 했고, 때로는 첩을 얻어서 아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럴 때마다 그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사라에게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나이는 들어가서 마침내 그들은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나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은 99세, 사라는 89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약속의 말씀을 주신 지 무려 24년이 지났습니다. 그 때까지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아들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늙어버린 부부에게 찾아오셔서 이듬해 그들이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창18:10)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는 드디어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가능성이 없어 보여도, 인간의 상식으로는 맞지 않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예언하신 말씀들 역시 다 이루어져왔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크고 놀라운 예언의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일이었습니다. 그 일 역시 하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번 말씀하셨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성경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마지막 날에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1: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 이 말씀 역시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심판을 준비해야만 합니다. 당신은 잘 준비하고 있습니까?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 아들이 태어난 것은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해줍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잡고 그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본문 2절을 읽겠습니다.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이삭의 출생에 대해서 본 절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아들을 낳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태어난 것은 어쩌다 막판에 겨우 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확히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때에 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를 정해놓고 일을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 때가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때입니다. 이삭이 태어난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로 하여금 왜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좀 더 빨리 아들을 주셨으면 좋지 않았을까요? 기다리는 동안에 그들에게 얼마나 갈등이 많았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늦게야 아들을 주셨을까요? 우리는 이미 앞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인간적으로 볼 때 도저히 자식을 낳을 수 없게 될 때가지 기다리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 아들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난 것임을 분명히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다림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음을 배워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합당하게 준비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이삭이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때를 정해놓고 일을 이루신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다가도 일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초조해지기도 합니다. 이제 내 인생의 좋은 시절이 다 지나가는데 …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때를 정해놓고 일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안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우리의 모든 일들을 가장 선하게 이루어 가시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며 믿음에 바로 서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때에 당신의 일이 가장 선하고 아름답게 이루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아들을 주시기까지 아브라함은 25년 동안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인내하며 기다려왔습니다. 때로는 믿음이 약해지기도 하고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다시금 말씀해주시고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브라함은 다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다시금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해서 당장에 일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했습니다. 당장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아들을 주실 것을 믿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은 오직 믿음이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아브라함은 믿음을 배우게 되었고, 마침내 그의 믿음이 견고히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도 이러한 믿음을 갖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눈으로 보는 것처럼 믿으라고 하십니다. 손에 잡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이미 손에 잡은 것처럼 믿으라고 하십니다. 성경은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그런데 누구나 처음부터 이러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이렇게 훈련시키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들을 얻게 된 아브라함은 다시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너무나도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어렵게 얻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도 주저하지 않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얼마든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믿음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 3절을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아브라함은 사라가 낳은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었습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미리 지어주신 이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17:19)

이삭이라는 이름은 웃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듣고 웃었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였고, 사라는 89세나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창17:17) 사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웃었습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창18:12)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웃었던 것입니다. 이 웃음에는 의심과 쓰라림과 지나간 세월동안 겪었던 아픔과 갈등이 묻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24년이나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라가 이삭을 낳았을 때는 너무나도 기쁘고 감사해서 웃었습니다. 의심과 쓰라림과 포기와 아픔의 웃음이 큰 기쁨과 감사의 웃음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6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사라는 하나님께서 웃게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던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을 때 그 약속을 믿고 기다려왔던 아브라함과 사라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자에게 이렇게 큰 기쁨의 웃음, 승리의 웃음을 주십니다.

이삭의 출생은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만 기뻐서 웃은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기뻐서 웃었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동네 사람들까지도 와서 보고 기뻐하며 웃었을 것입니다. 이삭은 이렇게 웃음과 기쁨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따라 태어났으며, 하나님의 언약을 상속받을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그가 만민의 복의 근원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의 생애를 볼 때 우리는 그에게 걸었던 이러한 기대가 성취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삭의 생애는 이러한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삭의 생애에서 이렇다 할 큰일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의 생애는 매우 평범할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기대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이삭에게서 실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해결됩니다.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태어났다는 것부터가 이것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삭은 인간적으로 볼 때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백 세였고 어머니는 구십 세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처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셨던 것입니다. 이삭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예수님도 탄생하시기 전에 그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이삭의 출생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온 인류에게 기쁨과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오늘 우리의 진정한 이삭이 되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과 웃음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성도는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기쁨과 감격이 너무나도 커서 구원받은 우리는 자다가도 일어나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받은 모든 자들에게 진정한 기쁨과 웃음이 되십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당신의 삶 속에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삭을 낳기까지 아브라함과 사라의 삶은 갈등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계속해서 그들이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아들은 도통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다가 이들은 지쳐갔습니다. 그럴 때마다 인간적인 대안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가장 착실한 종 엘리에셀을 그의 상속자로 삼고자 했습니다.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창15: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4-5) 아브라함은 다시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

그러나 이런 일이 있은 후에도 사라에게는 임신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점점 늙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러다가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려고 해도 낳을 수가 없게 되겠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자기의 몸종 하갈을 첩으로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더 늙기 전에 다른 여자에게서라도 아들을 낳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정말 아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17:19) 이번에는 사라가 낳을 아들의 이름까지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시간은 일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의 아들 이삭이 사라를 통해서 태어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고 자꾸만 인간적인 것,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우리가 믿을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젊음과 지식과 학벌과 능력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것들은 믿을 것들이 못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그 말씀이 더디게 이루어진다고 해서 초조해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붙잡은 말씀이 당신의 삶 속에서 반드시 이루어지게 하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웃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는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교회생활이 즐겁습니까? 세상 어디를 가는 것보다 교회에 오는 것이 더 좋습니까? 오늘 우리가 교회 안에서 주님을 섬기며 은혜를 힘입는 성도가 된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세우신 언약의 공동체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며,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축복이 충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를 통하여 우리를 양육하시고 보호해주십니다. 이 교회 밖으로 나가면 우리는 생명을 잃게 됩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여기서 교회는 건물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본문 9, 10절을 보겠습니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하는 것을 본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과 하갈을 내어 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말을 듣고 깊이 근심했습니다. 이스마엘도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13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이스마엘과 하갈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그들의 파멸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도 한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이 언약의 가정으로부터 분리되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계속해서 돌보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안 믿는 사람들, 하나님 백성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이 세상의 불신자들은 아무도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을 일반은총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들에게도 햇빛과 비를 내려주십니다. 이러한 일반은총 가운데는 하나님의 손길이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겸손하게 하나님을 인정하며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도 이런 은혜가 함께 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하나님을 부인하면서 오히려 의기양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오지 않으면 영원한 저주를 받게 됩니다.

 

본문 1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이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말대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보내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아마도 이 세 사람은 견딜 수 없는 아픔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정욕과 죄악을 버리는 일은 이렇게 아프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우리는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본이 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확인될 때는 언제나 이렇게 신속하게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확인되면 더 이상 따지거나 버티지 말고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심지어는 내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정반대인 경우에도 하나님의 뜻이 확인되면 주저 없이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순종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 15- 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하갈과 이스마엘은 믿음의 가정으로부터 쫒겨나 브엘세바 들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다 떨어져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하갈은 자신의 그 고통을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하갈 모자를 위로해주시고 축복해주셨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나는 일을 자초했습니다. 그들이 쫓겨난 것은 단순히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혔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삭이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되는 것에 불만을 품었습니다. 이 특권은 당연히 이스마엘의 것이었는데 이삭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낳을 이삭이 언약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17:19) 만일 이스마엘과 하갈이 하나님의 언약을 인정했더라면 그들도 이 언약의 축복에 참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언약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이렇게 내어 쫓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유 없이 부당하게 내어 쫓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기꺼이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여겨주십니다. 믿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 나라에서 내어 쫓기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과 구원받는 축복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육신의 소욕을 따르지 말고 성령의 다스리심과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집에서 내어 쫓긴 것은 단순히 아버지의 집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언약의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집은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축복이 함께 하는 공동체였습니다. 그곳이 바로 교회였던 것입니다. 오늘 교회는 아브라함의 집처럼 하나님의 언약의 공동체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이곳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이 충만합니다. 이곳에는 하늘의 신령한 은혜가 부어집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이곳에 와서 우리는 병든 영혼과 육신을 치유받습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사랑의 교제를 나눕니다. 교회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아름답고 복된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며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교회에서 생활하는 것이 세상에서의 삶보다 훨씬 즐겁고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0) 오늘 당신에게 하나님의 교회를 사모하는 이러한 마음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에 우리 자녀들이 교회에서 즐겁게 지내는 것을 봅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주일학교 아이들이나 중고등부 학생들이나 청년들이 교회를 사랑하며 좋아하는 것은 정말 귀한 일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이렇게 교회생활에 재미를 붙이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야 합니다. 교회 차원에서는 우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환경을 최대한으로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놀아도 교회에서 놀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어떤 부모들은 아이들이 공부는 하지 않고 교회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낸다고 걱정을 하고 불평을 합니다. 예배만 끝나면 빨리 와서 공부하고 학원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부모는 자녀가 교회에 너무 빠졌다고 야단을 쳐서 결국은 교회에 나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교회에 가지 못하니까 이제는 안 믿는 친구들하고 어울려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사고를 치게 되고 비뚤어지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교회에 다시 나오게 만드는 일도 어렵게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아이들이 교회에서 놀기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도사님과 선생님들은 우리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예배가 가장 귀하고 즐거운 시간이 되게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아이들이 되도록 잘 지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을 가르치고 성령을 체험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고 노는 것이 다 이런 일들로 연결되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 자녀들이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바람직한 것입니다. 교회 가는 것이 PC방 가는 것보다 재밌고 노래방 가는 것보다 훨씬 재밌도록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고 믿음이 자라게 될 것입니다. 아이들이 청소도 제대로 하지 않고 난방이나 전등도 끄지 않고 가버릴 때도 있습니다. 결국 어른들이 이 모든 것을 치우고 정리해야 합니다. 성가시고 귀찮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 불평하기보다는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어른들도 교회에 나오는 것이 가장 즐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성도들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힘써야 합니다. 모이기를 힘쓰고 기도와 찬양의 축복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낮 예배만이 아니라 저녁 예배와 심야기도회, 그리고 가정교회에도 열심히 참석해야 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하나님을 만나 뵙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에서 우리의 문제가 해결 받고 교회에서 우리의 상치가 치유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고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함께 하기 때문에 이 일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언약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더욱 사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오늘 교회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와 축복이 당신에게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17, 18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아브라함의 집에서 내어 쫓긴 하갈은 그녀의 아들 이스마엘을 데리고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다가 물이 다 떨어져 기진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에는 간단히 기록되어 있지만 그 상황은 너무나도 비참하고 절박했을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기진하여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하갈은 죽어가는 아들로부터 활의 사정거리, 약 250-300m 쯤 떨어진 곳에 털썩 주저앉아 통곡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거부하고 떨어져 나온 이 모자는 이제 죽음 앞에서 신음하며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신음과 통곡을 들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이스마엘과 하갈을 내어 보낸 것은 무책임하고 몰인정한 처사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아 주시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광야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건을 이러한 각도에서 보아서는 안됩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도 이들을 내어보내면 그들이 광야에서 죽게 될 것을 염려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그토록 고민하며 깊이 근심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인했을 때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내어보낸 이스마엘과 하갈을 돌보아주셨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순종이 이들을 살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순종하면 망할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실 때는 대안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직접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결국 이스마엘과 하갈을 살렸습니다. 우리의 순종이 우리 가정과 교회를 살리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순종하기 어려운 경우에도 주저하지 말고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본문 19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광야에서 하갈은 가까이에 있는 샘을 보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하갈이 발견한 샘물은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은혜를 이미 주셨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부족한 것이 많아서 고생하며 힘들어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미 우리 가운데 풍성한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때로 낙심하고 슬퍼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의 은혜의 샘물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목회하던 시절입니다. 탄광이 문을 닫고 성도들은 도회지로 정처 없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도시로 나갈 수도 없는 성도들도 있었고, 교회를 사랑해서 끝까지 남아 교회를 지키고 싶어 하는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도저히 먹고 살길이 없었습니다. 고민하며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정부도 엄두를 내지 못했던 그곳에서 주민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얼마나 하나님께 매달렸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눈에 보이는 것이 다 돈이었습니다. 사업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저였는데, 안목이 확 열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재벌이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눈에 보이는 것이 다 돈 되는 것이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그 말이 정말 실감이 났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이미 부족함 없이 주셨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육신의 필요를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힘들고 궁핍함을 느낍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볼 줄 아는 눈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에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볼 줄 아는 눈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사업장과 직장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축복을 볼 줄 아는 눈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교회에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충만하신 은혜를 볼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눈을 밝히사 샘물을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그 샘은 없었던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 때 새로 만드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있는 샘을 발견하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살게 되었고, 이스마엘은 광야에서 장성하여 활 쏘는 자가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마엘과 하갈을 기억해주셨을까요? 왜 하나님의 사자가 이들을 구하러 오셨을까요? 그들이 아직 언약으로부터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언약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들을 기억하시고 돌보신 것은 먼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 밖에 있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실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언약 밖에 있던 자들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큽니까?

 

본문 22- 2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아비멜렉이 이르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에야 들었노라”

아비멜렉이 나그네와 같았던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려 한 까닭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드러낼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존경하며 칭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인정과 존경이 있을 때, 비로소 세상을 향한 우리의 책망이 효력을 가지게 됩니다. 만일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와 같은 태도를 가지지 못했다면, 아브라함의 책망은 오히려 분쟁의 빌미가 되었을 것입니다. 책망 들을 이유를 알면서도 책망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것은 교만 때문입니다. 하지만 존경하는 사람의 올바른 책망이라면 우리는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책망은 성령님의 사역입니다(요 16:7-11). 성령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바르게 책망할 수 있도록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증거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본문 27- 34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냐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갔고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더라”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에게 선물을 줌으로 그에게 예를 표하며 우물에 대한 권리를 확보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장차 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내다보며 이 일을 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나무를 심은 것은 이제 그의 생활이 안정되고 오랫동안 정착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그는 나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은 예배를 드린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평안한 생활 속에서 나태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을 섬겼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실천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에 어려움이 있을 때는 물론이지만 하나님이 평안을 주실 때도 더욱 주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본문이 주는 교훈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행7:6)과 인간의 생각으로는 비록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치 아니하고 믿는 자에게는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것(막9:23)을 알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미래의 약속을 주신 사실을 통해 하나님은 택한 백성뿐만 아니라 택함 받지 못한 자들에게도 은총을 베푸신다는 것과 또한 하나님은 택한 자와 택함 받지 못한 자 모두를 통치하시는 만유의 주이심을 알 수 있으며,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더불어 평화조약을 맺은 사실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을 바라보며 역사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신실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언약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어 주신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어려운 가운데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위험한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내 평생에 주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며, 찬양하고, 의지하며 살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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