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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순교 .....

사도행전 이정원 목사............... 조회 수 4153 추천 수 0 2011.06.15 18:5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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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7:51-60 
설교자 : 이정원 목사 
참고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2010·06·18

당신은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면 오늘 우리가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흘려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양화진에 가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주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이 땅에 와서 죽은 선교사들의 가슴 뭉클한 사연들과 모습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피를 흘려가며 전해준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들입니다. 당신은 빚진 자의 심정을 어느 정도 느끼며 사십니까? 우리는 어떻게 이 빚을 갚아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복음에 빚진 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기의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도 복음에 빚진 자들로써 이 복음 전하는 일에 헌신해야만 합니다. 첫째는 이웃에게 어떻게 하든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땅끝까지 복음 전하는 데 우리의 몸과 재산을 드려야 합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가장 큰 목적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이 일에 뜨거운 사명감을 가지고 참여해야만 합니다. 내가 비록 선교사가 되어 나가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재산을 드리고 마음을 다해 기도함으로 이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주기 위해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친 사람들과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순교한 사람들을 생각할 때, 지금 우리는 너무나 안일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들은 복음을 위해 갖은 핍박과 고통을 당하고 죽기까지 했는데, 오늘 우리는 너무나 해이해진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들은 죽기까지 믿음을 지켰는데, 오늘 우리는 너무나 쉽게 믿음을 포기하거나 타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당신은 죽기까지 믿음을 지키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순교자의 정신으로 살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신약 시대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순교 당하는 모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목이 곧고 성령을 거스리는 사람들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개관해 가면서 성전에 대한 유대인들의 잘못된 사상을 지적하던 스데반은 이제 그들의 강퍅함을 신랄하게 비난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고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51-53절) 유대인들은 완악하고 강퍅하여 의인,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예언한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오시자 바로 그 분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주신 율법도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장 귀하고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특히 바리새인들은 그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기로 유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바로 그 율법이 중점적으로 증거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거절했습니다. 이처럼 율법의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거절하고서 아무리 율법을 문자적으로 철저하게 지킨다 해도 그것은 율법을 전혀 무시한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를 그들의 마음이 강퍅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심으로 그를 심판하셨습니다. 사람이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내버려두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하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데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사6:9-10).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그 악한 대로 내버려두시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악하고 추한 생각들을 그대로 다 행동으로 옮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우리의 악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도록 환경을 막아주시고, 사람을 보내시고, 양심의 찔림을 주시고, 징계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속은 추할지라도 이만한 모양으로 앉아 있는 것입니다.
  죄를 짓거나 믿음 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데도 하나님께서 벌을 주지 않으시는 것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자기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증거로 알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요 오히려 두려운 일입니다. 범죄할 때 하나님께 즉시 징계를 받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범죄하고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신 증거인 것입니다. 당신은 징계를 당할 때 기뻐하며 감사합니까?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는데도 큰 벌을 받지 않고 있다고 생각되는 분들은 더욱 두려운 마음과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회개하기 바랍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크게 치실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완악하게 갖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늘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지며, 하나님과 말씀을 향하여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에 찔림을 받음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54절)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말씀을 듣고서 아무런 감동이나 도전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마음의 찔림을 받고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하는 것이 또한 문제입니다. 말씀을 듣고 찔림을 받았으면 마땅히 회개해야합니다.
  행2:37에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는 그 때 모였던 삼천 명의 군중들에게 너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점잖은 사람들이라도 이런 말을 듣고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고 “우리가 어찌할꼬”하면서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으나 그것이 회개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그리고는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을 때 어떻게 하십니까? 분노하고 미워하며 공격합니까, 겸손하게 회개합니까? 말씀을 듣고 찔릴 때 회개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
  

이와 같이 박해자들은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고 있는데 스데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는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55상) 성령이 충만했다는 것은 성령에 완전히 사로잡혀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은 이처럼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그 얼굴이 천사와 같았습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6:15) 뿐만 아니라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떤 일이라도 기꺼이 감당하고자 합니다. 심지어는 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까지 기쁘게 감당하는데, 순교자들의 모습이 바로 이것을 보여줍니다. 
  
하늘을 우러러 봄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늘을 우러러봅니다. 그가 아무리 세상에 살고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하늘을 보기 때문에 초라하거나 시시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넓은 마음을 가지고 용서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을 뵙고 그 크신 사랑과 은혜를 알며 그 영광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조국이 멸망해 가는 암울한 상황에서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하고 경고했던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당했던 고통과 슬픔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끝까지 그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들이 그렇게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경험들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심으로 그들을 불굴의 선지자들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55-56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는 지금 악랄하게 이를 갈며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들 앞에 서 있습니다. 이러한 순간을 그 어느 누가 평온하게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하늘을 보며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사람이라야 가능합니다. 당신은 무엇을 보면서 사십니까? 무엇을 추구하며 사모하십니까? 땅의 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달려가도 실망과 허무함만 남게 되며, 결코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그 무엇도 당신을 만족시킬 수 없고, 당신에게 참 평안을 줄 수 없습니다. 골3:2에 보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보았고,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그는 이미 승리자였습니다. 당신은 이 주님을 늘 보십니까? 요일1:1에는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당신은 날마다 주님을 이렇게 만나고 그 음성을 들으며 그 분을 손으로 만지듯 가까이 교제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모습과는 좀 다릅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에 대하여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사도신경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본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왜 앉아 계시는 예수님께서 일어서셨을까요? 우리가 그 이유를 짐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순교하는 스데반을 환영하시며 받으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보좌에서 일어서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럽고 가슴이 뜨거운 장면입니까?

돌로 치는 자들과 돌에 맞는 스데반
  

스데반이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고 말했을 때, 듣고 있던 사람들은 맹렬한 분노에 사로잡혀 스데반을 돌로 쳤습니다.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58절)
  그들은 스데반이 신성모독죄를 범했다고 생각했으므로 돌로 쳐 죽였습니다. 모세 율법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이 말이 왜 그들을 이렇게 자극했을까요? ‘너희가 예수를 죽였다’는 말에 대해서는 기분 나쁘지만 그런대로 들어줄 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다’는 것은 자기들이 죽인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이며, 그가 바로 메시야라는 말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분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순교하는 스데반의 모습은 이를 갈며 돌로 치는 사람들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었습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어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59-60절) 스데반은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의 악의와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돌에 맞아 순교하는 순간에 자기의 영혼을 주님께 부탁했으며,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거룩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은 기도였습니다.
  순교자 스데반의 이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고 응답되었습니다. 58절에 사울이 처음 등장하고 있는데, 그는 나중에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울을 생각할 때 우리는 스데반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스데반은 이렇게 빨리 순교하고 말았지만 그는 가장 훌륭한 제자를 남겼다고 말했는데, 참 적절한 설명입니다. 사울은 스데반이 기도와 순교로 얻은 제자였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순교 장면을 결코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대부분의 기록을 바울의 진술에 의존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스데반이 순교하는 이 장면도 바울이 누가에게 기술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자니라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했던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스데반의 죽음을 ‘자니라’라는 한 마디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한 마디는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말입니다. 이 말은 그처럼 잔인한 죽음에 어울리지 않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표현입니다. 그러나 순교를 달게 받아들인 스데반의 영혼에 너무나도 알맞은 표현입니다. 벵겔이라는 주석가는 이 말을 ‘애처로우나 감미로운 단어’라고 설명했습니다.
  성도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자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비록 비참하게 돌아 맞아 죽었지만 그는 타살된 것이 아니라 고요히 잠든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영혼을 이미 받으셨으며, 주님께서 오실 때 그의 육체도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의 죽음은 언제 어떻게 죽더라도 죽음이 아니라 잠든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일생동안의 슬픔과 수고로부터의 안식입니다. 그리고 성도의 죽음은 부활을 전제하기 때문에, 그것은 파멸이 아니라 영생의 시작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은 폭풍과도 같은 분노와 폭력에 의하여 죽었지만 그토록 평온한 얼굴(천사와 같은 얼굴)로 잠들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이 귀한 것은 그가 주님께 대한 충성을 다하기 위해 순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순교는 세계 선교를 촉진시키는 위대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결국 오늘 우리는 순교자 스데반의 피 위에 서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복음이 전해지기까지 스데반을 비롯하여 대동강변에서 이슬로 사라진 토마스 선교사, 그리고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흘려졌습니다. 이 사실은 이 복음이 얼마나 값지고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의 순교를 보면서 우리는 마땅히 복음의 빚을 갚기로 다짐해야 하며, 우리도 순교자의 정신을 가지고 믿음을 지키며 살기로 결단해야만 합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복음에 빚진 자의 사명을 감당하며, 목숨을 바쳐 믿음을 지키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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