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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6:31-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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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수 목사 |
참고 : | 말씀의샘물교회 http://www.wordspring.net |
사순절 묵상(4)-꼬-끼-요!
본문/ 마26:31-35, 69-75
1. 들어가는 이야기
오늘은 “사순절 묵상(4)-새벽닭에 대하여” 묵상하는 가운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순절 마지막 주간인 고난주간(3월 29일-4월 3일)입니다. 아직 캄캄하고 추운 새벽 5시, 옷 챙겨 입고, 세수하고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았는데 어둠을 가르고 “꼬-끼-요!” 앞집 수탉이 맑고 투명한 소리로 새벽 黎明(여명)을 알립니다.
나는 새벽닭 소리를 들고, 문득 한국교회와는 달리 특이하게도 유럽 교회 첨탑에 십자가 대신 동편 하늘을 향하여 높이 고개를 쳐들고 “꼬-끼-요!” 하는 수탉이 서 있는 풍경사진이 생각났습니다. 그 수탉은 저 무섭고 어둡던 고통의 날 새벽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맹세하여 부인하며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 한다” 고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한 베드로를 위하여 울었던 그 수탉입니다.
유럽 교회 첨탑에 서 있는 그 수탉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2-33)” 하신 말씀을 기억나게 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라 생각합니다.
2.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26:31-35)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이 사람이 예수와 함께 있었다 하니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 하니라(마26:69-75)
3. 꼬-끼-요! 새벽닭이 울 때마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첫째. 정체성(Identity) 문제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은 물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물음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대답을 듣고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 예수님이 “나는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대제사장-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날 것이다. 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는 것” 이라는 믿음의 정체성을 밝히셨을 때, 베드로의 고백은 “실존적 內實(내실)이 없는 虛構(허구)”임이 드러났습니다(마16:13-27).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음(The Lord turned and looked straight at Peter 눅22:61)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나는 저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세 번 부인한 것도 “실존적 내실이 없는 허구”의 연장이었습니다. 즉, 베드로의 믿음의 정체성은 “십자가 없는 영광의 예수” 였습니다. 새벽닭이 울 때마다 오늘 우리들 믿음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깊이 되돌아보아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둘째. 왜, 베드로는 “꼬-끼-요!” 새벽닭이 울었을 때 심히 통곡하였는가?
기찌지로는 울먹이며 말했다. “로드리꼬 신부님, 저는 신부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聖畵(성화)를 밟고 배교 하였습니다(이것을 후미에라고 한다). 이 세상에는 약한 자와 강한 자가 있습니다. 강한 자는 어떤 고통이라도 극복하고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만 나 같이 천성이 약한 자는 성화를 밟으라는 관리의 고문을 받으면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로드리고 신부는 말했다. “이 세상에는 강한 자도 약한 자도 없는 겁니다. 약하기 때문에 배교하고 살아남은 자가 강하여 고통 속에 죽은 자보다 보다 더 고통스럽지 않았다고 누가 단언 하겠소? 이 나라에 이미 당신의 고해성사를 들어 줄 신부가 없다면 내가 모든 고해성사의 마지막에 올리는 기도를 드릴 테니 안심하고 가시오” 기찌지로는 소리를 죽여 가며 울고 있다가 이윽고 몸을 돌려 사라졌다.
<참고: 엔도 슈사꾸, 공문혜역, 침묵, 홍성사, 226-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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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왜, 낮닭이 아니라, 새벽닭의 “꼬-끼-요!” 인가?
내가 다른 사람이 아니니 다른 사람의 속은 모르겠지만, 나는 성경의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고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는 베드로와 예수님의 성화를 밟고 배교하고 로드리꼬 신부 앞에 고해성사를 드리는 기찌지로와 나 자신의 모습이 클로즈 업-오버랩 됩니다.
그러나
“오고 오는 세월, 새벽닭이 울 때마다, 내 통곡의 눈물방울 속에, 그 분이 언제나 부활하고 있음을” 믿기에 심히 부끄럽고-민망하나 다시 십자가 앞에 엎드려 가슴 두드리며 기도합니다(참고: 권택명, 첼로를 들으며 중 베드로전2, 모아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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