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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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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http://well.hani.co.kr/?mid=media&category=102&page=5&document_srl=48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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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원로’ 이만열 교수
한기총 태생적 한계, 기독교 영성 찾기 어려워
사회의식 마비 시키는 건 되레 기독교 아니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사진)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다니기 시작한 교회가 속한 고신교단을 지금까지 벗어난 적이 없다. 고신교단은 일제하 신사참배에 가장 강하게 저항해온 교단이다. 그 저항에 민족정신이 함께 하지 않았을 리는 없지만, 순교정신의 발로는 한치도 타협할 수 없는 근본주의적 신앙이었다. 그는 보수적 기독교 신앙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요즘 보수적인 신앙인, 즉 복음주의권 목사들과 원로들에게 흔히 풍기는 배타성이나 외향성이 거의 없다. 오히려 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오늘 먹을 것이 떨어져도 기개만은 잊지 않았던 딸깍발이 선비 처럼 초심을 잃지않은 내적 강인함 속에서도 강자보다는 약자들 쪽에 귀를 열어두는 연민의 마음이다.
‘해방 이후 한국기독교역사’ 강의
숙명여대 한국사 교수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과 한국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위원장을 지낸 역사학자이지만 지금도 빼지 않고 성서읽기와 기도로 한시간 이상을 보내는 신앙인에게서 풍기는 인상이다. 그는 지난 1991년엔 김진홍 목사와 함께 공동발행인으로 개신교의 대표적인 잡지 중 하나인 <복음과 상황>을 창간하기도 했다.
그가 한국 기독교의 초심을 열었던 서울기독교청년회(YMCA)에서 2일부터 예언자적 외침을 내뿜기 시작했다. 매주 화요일 오후 7시 8차에 걸쳐 이어질 강좌는 ‘해방 이후 한국기독교역사’다. ‘한국 역사 속에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란 주제로 이준 열사와 남강 이승훈, 이동휘,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 조만식 등 초기 개신교인으로서 민족을 위해 헌신한 선구자들을 조명한 지난해 강의 후속이다. 지난달 26일 서울 종로구 사직공원 옆 빌라에서 강좌를 준비 중인 이 교수를 만났다. 과거보다는 화려한 미래의 성장에 눈길을 모은 한국 기독교에서 웬 ‘힘들었던 초기의 역사’일까.
“한국 기독교는 식민지 시대엔 독립운동을, 독재시대엔 민주화와 인권 운동 등에 앞장서며 시대적 소명을 외면하지 않았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를 감당했다. 민족을 깨운 선구자들 뿐 아니라 일제 앞잡이였던 외교고문 스티븐스를 처단한 장인환, 이토오 히로부미를 처단하려다 미수에 그치자 자결한 정재홍. 명동성당서 이완용을 가해한 이재명 의사, 친일파 일진회 이용구를 처단하려한 이학필 목사 등이 기독교인이었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명 중 16명이 기독교(개신교)인이었고, 33인에 포함되지않고 운동을 이끈 15명의 기독교인이 더 있었다. 당시 기독교(개신교)인은 20여만 명에 불과했다. 200만~300만명에 이르던 천도교인의 10분의1에도 미치지못했다. 당시 기독교(개신교)인 참여자가 전체 참여자의 17~23%였는데, 그 때 감옥에 끌려간 사람들은 천도교인보다 더 많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예수 만사형통론 풍미, 대형교회들 자기 도취 빠져”
초기 가톨릭과 조선이 극한 대립을 했던 것과 달리 초기 개신교가 비교적 쉽게 착근할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독립운동을 통해 민족과 일체감을 이룬 덕이라는 게 이 교수의 분석이다. 1885년 제중원(한국 최초의 서양병원)을 설립한 의료선교사인 알렌이 서양에서 온 복음선교사들에게 ‘함부로 예수라는 말을 떠들지 마라’고 경고할 정도로 초기엔 전도보다는 의료봉사와 교육에 주로 앞장섰다는 것이다.
또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가 유럽과 미국의 직접 식민지가 된 것과 달리 일본의 식민지가 됐고, 당시까지는 일본의 뒤에 영국과 미국이 있다는 인식을 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기독교가 제국을 앞세운 종교라는 인식은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안으로는 봉건과 부정과 부패를 척결해 인간평등과 남녀평등, 그리고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 외적으로는 외세의 침략을 물리쳐 부국강병해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 기독교를 택한 이들이 적지않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3·1운동 뒤 현실를 타개하기보다는 ‘예수 천당’이라는 내세 지향적인 신비주의가 풍미하기도 했지만, 60~80년대 군부독재 시절에도 기독교(개신교) 없이 민주화와 인권, 통일운동을 얘기할 수 없을 정도로 최전선의 최선봉에 섰다”고 했다.
그는 이어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예수 믿으면 영혼 구원 뿐 아니라 건강도 얻고, 부자도 된다는 만사형통론이 풍미하더니 이렇게 성장한 대형교회들이 자기 도취에 빠져 빠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할 말을 다할 수 있을 때 말하는 것은 천박한 세속주의자이며 할 말을 할 수 없을 때 말하는게 예언자라고 했던가. 그는 보수교단에 속하면서도 기독교의 원로 대접을 받는 몸이다. 하지만 상당수 기독교 목사들이 말하는 것과는 다른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다.
“진보 기독교단체도 정체성 잃어…자신과의 싸움 중요”
그는 “예수를 믿음으로써 불편해지는 게 더 많다”고 믿는 쪽이다. 그래서 만사형통을 지향하며 세상적으로 성공했다는 대형교회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에 대해 ‘세상적인 세력은 가지고 있을 지 모르지만 기독교로서 가져야 할 영성은 찾기 어렵다’고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특히 “진보적 기독교를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한기총은 그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개인의 복을 비는 이기적 종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란 등식을 인정할 수 없다. 자기 개인이나 개교회, 개교단을 위해 기독교와 사회와 세상을 도외시한 채 사회의식을 마비시키는 종교는 오히려 기독교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그렇다고 전체만을 보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 시대적 소명을 다해온 진보단체들이 예전에 비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은 기독교로서 정체성을 잃은 때문이라고 본다.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 단체로서, 종교적 영성을 확고히하면서 나아가지 않으면 본말이 전도되고 만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종교와 종교단체는 외부와의 싸움에 앞서 무엇보다 자신과의 싸움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초기 기독교인들과 달리 엄청난 세력을 갖고 있음에도 끊임 없이 성장과 성공신화에 매몰된 한국 교회가 정작 종교 본연의 영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가장 시급한 것이 회개와 정화인데, 자만과 자기도취를 부추기는 대형화는 회개와 정화와 더욱 거리를 멀게 한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수천억원대의 건물을 짓는다는 ‘사랑의교회’를 보는 그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그래서 그는 한국 기독교의 영성 회복을 위해 내가 가진 것을 나눠주자는 가난운동과 작은교회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 교수는 “모든 것을 자기 혼자, 자기 교회 혼자 다 하려하고, 연대의식이 약하다”면서 “이제 작은 교회들이 손잡고 함께 갈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작지만 컸던 이 땅의 초기 기독교 선구자들을 따르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초심을 잃지 않은 눈빛으로 그가 말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가 외풍에 흔들리지 않을만큼 단단한 것은 하나의 큰 쇠줄이 아니라 3만개의 가는 줄이 함께 엮어졌기 때문이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한기총 태생적 한계, 기독교 영성 찾기 어려워
사회의식 마비 시키는 건 되레 기독교 아니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사진)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다니기 시작한 교회가 속한 고신교단을 지금까지 벗어난 적이 없다. 고신교단은 일제하 신사참배에 가장 강하게 저항해온 교단이다. 그 저항에 민족정신이 함께 하지 않았을 리는 없지만, 순교정신의 발로는 한치도 타협할 수 없는 근본주의적 신앙이었다. 그는 보수적 기독교 신앙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요즘 보수적인 신앙인, 즉 복음주의권 목사들과 원로들에게 흔히 풍기는 배타성이나 외향성이 거의 없다. 오히려 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오늘 먹을 것이 떨어져도 기개만은 잊지 않았던 딸깍발이 선비 처럼 초심을 잃지않은 내적 강인함 속에서도 강자보다는 약자들 쪽에 귀를 열어두는 연민의 마음이다.
‘해방 이후 한국기독교역사’ 강의
숙명여대 한국사 교수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과 한국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위원장을 지낸 역사학자이지만 지금도 빼지 않고 성서읽기와 기도로 한시간 이상을 보내는 신앙인에게서 풍기는 인상이다. 그는 지난 1991년엔 김진홍 목사와 함께 공동발행인으로 개신교의 대표적인 잡지 중 하나인 <복음과 상황>을 창간하기도 했다.
그가 한국 기독교의 초심을 열었던 서울기독교청년회(YMCA)에서 2일부터 예언자적 외침을 내뿜기 시작했다. 매주 화요일 오후 7시 8차에 걸쳐 이어질 강좌는 ‘해방 이후 한국기독교역사’다. ‘한국 역사 속에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란 주제로 이준 열사와 남강 이승훈, 이동휘,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 조만식 등 초기 개신교인으로서 민족을 위해 헌신한 선구자들을 조명한 지난해 강의 후속이다. 지난달 26일 서울 종로구 사직공원 옆 빌라에서 강좌를 준비 중인 이 교수를 만났다. 과거보다는 화려한 미래의 성장에 눈길을 모은 한국 기독교에서 웬 ‘힘들었던 초기의 역사’일까.
“한국 기독교는 식민지 시대엔 독립운동을, 독재시대엔 민주화와 인권 운동 등에 앞장서며 시대적 소명을 외면하지 않았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를 감당했다. 민족을 깨운 선구자들 뿐 아니라 일제 앞잡이였던 외교고문 스티븐스를 처단한 장인환, 이토오 히로부미를 처단하려다 미수에 그치자 자결한 정재홍. 명동성당서 이완용을 가해한 이재명 의사, 친일파 일진회 이용구를 처단하려한 이학필 목사 등이 기독교인이었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명 중 16명이 기독교(개신교)인이었고, 33인에 포함되지않고 운동을 이끈 15명의 기독교인이 더 있었다. 당시 기독교(개신교)인은 20여만 명에 불과했다. 200만~300만명에 이르던 천도교인의 10분의1에도 미치지못했다. 당시 기독교(개신교)인 참여자가 전체 참여자의 17~23%였는데, 그 때 감옥에 끌려간 사람들은 천도교인보다 더 많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예수 만사형통론 풍미, 대형교회들 자기 도취 빠져”
초기 가톨릭과 조선이 극한 대립을 했던 것과 달리 초기 개신교가 비교적 쉽게 착근할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독립운동을 통해 민족과 일체감을 이룬 덕이라는 게 이 교수의 분석이다. 1885년 제중원(한국 최초의 서양병원)을 설립한 의료선교사인 알렌이 서양에서 온 복음선교사들에게 ‘함부로 예수라는 말을 떠들지 마라’고 경고할 정도로 초기엔 전도보다는 의료봉사와 교육에 주로 앞장섰다는 것이다.
또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가 유럽과 미국의 직접 식민지가 된 것과 달리 일본의 식민지가 됐고, 당시까지는 일본의 뒤에 영국과 미국이 있다는 인식을 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기독교가 제국을 앞세운 종교라는 인식은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안으로는 봉건과 부정과 부패를 척결해 인간평등과 남녀평등, 그리고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 외적으로는 외세의 침략을 물리쳐 부국강병해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 기독교를 택한 이들이 적지않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3·1운동 뒤 현실를 타개하기보다는 ‘예수 천당’이라는 내세 지향적인 신비주의가 풍미하기도 했지만, 60~80년대 군부독재 시절에도 기독교(개신교) 없이 민주화와 인권, 통일운동을 얘기할 수 없을 정도로 최전선의 최선봉에 섰다”고 했다.
그는 이어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예수 믿으면 영혼 구원 뿐 아니라 건강도 얻고, 부자도 된다는 만사형통론이 풍미하더니 이렇게 성장한 대형교회들이 자기 도취에 빠져 빠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할 말을 다할 수 있을 때 말하는 것은 천박한 세속주의자이며 할 말을 할 수 없을 때 말하는게 예언자라고 했던가. 그는 보수교단에 속하면서도 기독교의 원로 대접을 받는 몸이다. 하지만 상당수 기독교 목사들이 말하는 것과는 다른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다.
“진보 기독교단체도 정체성 잃어…자신과의 싸움 중요”
그는 “예수를 믿음으로써 불편해지는 게 더 많다”고 믿는 쪽이다. 그래서 만사형통을 지향하며 세상적으로 성공했다는 대형교회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에 대해 ‘세상적인 세력은 가지고 있을 지 모르지만 기독교로서 가져야 할 영성은 찾기 어렵다’고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특히 “진보적 기독교를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한기총은 그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개인의 복을 비는 이기적 종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란 등식을 인정할 수 없다. 자기 개인이나 개교회, 개교단을 위해 기독교와 사회와 세상을 도외시한 채 사회의식을 마비시키는 종교는 오히려 기독교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그렇다고 전체만을 보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 시대적 소명을 다해온 진보단체들이 예전에 비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은 기독교로서 정체성을 잃은 때문이라고 본다.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 단체로서, 종교적 영성을 확고히하면서 나아가지 않으면 본말이 전도되고 만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종교와 종교단체는 외부와의 싸움에 앞서 무엇보다 자신과의 싸움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초기 기독교인들과 달리 엄청난 세력을 갖고 있음에도 끊임 없이 성장과 성공신화에 매몰된 한국 교회가 정작 종교 본연의 영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가장 시급한 것이 회개와 정화인데, 자만과 자기도취를 부추기는 대형화는 회개와 정화와 더욱 거리를 멀게 한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수천억원대의 건물을 짓는다는 ‘사랑의교회’를 보는 그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그래서 그는 한국 기독교의 영성 회복을 위해 내가 가진 것을 나눠주자는 가난운동과 작은교회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 교수는 “모든 것을 자기 혼자, 자기 교회 혼자 다 하려하고, 연대의식이 약하다”면서 “이제 작은 교회들이 손잡고 함께 갈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작지만 컸던 이 땅의 초기 기독교 선구자들을 따르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초심을 잃지 않은 눈빛으로 그가 말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가 외풍에 흔들리지 않을만큼 단단한 것은 하나의 큰 쇠줄이 아니라 3만개의 가는 줄이 함께 엮어졌기 때문이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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