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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481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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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원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
이 목사는 자신의 관상기도 사역에 대한 비판이 일자 최근 칼럼에서 “(관상기도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 표명이 필요하다고 느껴서 간단한 답과 함께 제 심경의 일단을 나누고자 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미국 워싱톤에 있는 성공회 계통의 에큐메니칼 연구소 ‘살렘 인스티튜트’(이하 살렘)에서 처음 관상기도를 접했다고 밝힌 이 목사는 “(살렘이) 다원주의적인 연구소라는 것을 알고 그런 면에서 복음주의자로 일생을 살아온 저에게 다소 불편했다”며 “그러나 프로그램의 일부였던 ‘관상’(Contemplation)에 대한 강의 중 두 가지가 관심을 끌었다. 하나는 ‘관상적인 삶’(Contemplative life)에 대한 강조였고, 또 하나는 ‘침묵기도’에 대한 강조와 실천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관상적인 삶’은 한 마디로 쉽게 표현하면 ‘느리게 사는 삶’(slow life)이다. 바쁜 한국 교회 목회자로 삶을 살아온 저에게는 충격이었다”며 “통성기도에만 익숙해온 저에게 강의 중이나 대화 중 자주 침묵 시간을 갖고 조용한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자 하는 모습들은 한국교회 영성 생활의 균형을 위해 꼭 도입이 필요한 부분으로 인식되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관상기도를 한국교회에 소개하고자 세미나를 개최하게 됐다고 밝힌 이 목사는 “살렘과 상관없이 나의 독서와 연구를 근거로 관상기도 세미나를 시작하게 된 것”이라며 “매우 일관성 있게 가톨릭이나 정통 신학권 밖에서 가르치는 관상기도 실천 중 ‘우리가 수용할 수 없는 것’을 먼저 지적했고, 많은 이들이 염려하는 관상기도와 동양 명상의 차이도 명확하게 규정해 왔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미나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은 분들의 상상과 추측에 근거한 인신 공격성 비판이 난무한데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은 저의 책임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힌 이 목사는 “저로 인한 시시비비로 오히려 영성의 진지한 탐구가 지체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느끼지 않아 제가 해야 할 다른 남은 사역들, 리더십과 설교, 전도와 셀 목회 등에 집중하고자 불필요한 오해를 초래할 관상기도는 전문신학자들의 연구 영역으로 넘기고 저는 복음 전도자의 본분으로 돌아가 한국 교회를 섬기고자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이 목사의 칼럼 전문.
지난 2년간 왜 <관상기도 세미나>를 계속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분들에게서는 인터넷이나 기독교 매체에 <관상기도에 대한 비판>이 늘고 있는데 이 목사님의 입장이 무엇이냐는 질문들도 적지 않게 받았기 때문에 저의 공식적인 입장 표명이 필요하다고 느껴서 간단한 답과 함께 제 심경의 일단을 나누고자 합니다.
저의 관상기도에 대한 구체적 관심은 2000년 여름부터 2001년 여름까지의 안식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한국 지구촌교회를 개척하고 7년이 지나면서 교회는 적어도 양적으로는 폭발적인 증가를 계속하고 우리는 4차례 이상 예배 처소를 옮겨 다니면서 성장을 경험하고 있었지만 목회자인 저 자신은 무척이나 심신이 지쳐가고 있어서 안식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저의 전 목회지였던 미국의 수도 워싱톤에 <살렘 인스티튜트>에서 안식하는 목회자들에게 좋은 프로그램이 있다는 소개를 저의 전 비서에게서 들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공식 명칭은 <성직자를 위한 영적 리더십>(Clergy Spiritual Life and Leadership)이었습니다.
이 살렘 인스티튜트는 일종의 에큐메니칼 연구소로 주로 성공회 계통의 분들이 최고 지도자이지만 교단을 초월해서 가톨릭 사제들도 참여하여 영성을 연구하고 영성 훈련을 제공하는 곳이었습니다. 지금 이 연구소는 한국 성공회와 공식적인 관계를 맺고 교류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중에 성직자들을 위한 영성 리더십 프로그램은 일년에 두 번(1번은 1주, 또 한번은 2주) 세미나에 참여하고 나머지는 책을 읽고 소그룹으로 형성된 다른 목회자들과 그룹 토의를 갖는 식으로 진행되는 것이어서 나에게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제가 살렘 인스티튜트에 간 것 자체를 비판하고 있습니다만, 어떤 개신교 학생이 서강대에 들어갔다고 해서 서강대의 가톨릭 신학을 다 수용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난 그 정도의 자유와 분별력은 내게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공회는 가톨릭보다 개신교에 가깝기 때문에 가톨릭 세미나에 참여하는 것보다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첫 번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이 살렘이 다원주의적인 연구소라는 것을 알고 그런 면에서 복음주의자로 일생을 살아온 저에게 다소 불편했지만, 그러나 프로그램의 일부였던 “관상”(Contemplation)에 대한 강의 중 두 가지가 저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물론 관상은 한국어로 번역이 힘든 단어입니다. 사전적인 정의는 “마음의 공간을 갖고 하나에 대상을 향해 집중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어떤 분은 ‘관조’를 더 나은 번역으로 추천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이 세미나에서 인상적으로 다가온 두 가지 중 하나는 <관상적인 삶>(Contemplative life)에 대한 강조였고, 또 하나는 <침묵기도>에 대한 강조와 실천이었습니다. <관상적인 삶>은 한 마디로 쉽게 표현하면 ‘느리게 사는 삶’(slow life)입니다. 숨 쉴 여유를 갖고 천천히 생각하는 페이스로 기도하며 일상의 삶을 살자는 강조는 전형적인 바쁜 한국 교회 목회자로 삶을 살아온 저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또 하나, 통성기도에만 익숙해온 저에게 강의 중이나 대화 중 자주 잠간 잠간의 침묵 시간을 갖고 조용한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자 하는 모습들은 한국 교회 영성 생활의 균형을 위해 꼭 도입이 필요한 부분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리고 독서를 통해 관상이 사막교부시대부터 시작된 무척 오랜 교회사적 전통을 가진 경건의 실천임을 알게 되었고 개신교내에서도 리챠드 포스터나 유진 피터슨 같은 분들이 관상에 대한 글을 쓰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안식년을 마치고 일상적 목회의 장으로 돌아오며 살렘과 상관없이 나의 독서와 연구를 근거로 관상기도 세미나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저의 세미나 중 살렘의 가르침은 10%도 되지 않습니다. 주로 저의 독서와 묵상에 근거하여 종래의 저의 경건론 강의를 보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종래의 큐티에 침묵을 접목한 정도였고, 예배에 통성기도와 침묵기도를 균형 있게 활용하기와 일상의 삶에서 쉼과 짧은 기도를 적용하기 정도였습니다.(사실 통성기도는 한국교회에만 특이하게 강조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관상기도는 세계 도처에서 여러 형태로 진행되지만 제가 경험한 유일한 것은 살렘이 전부여서 저는 사실 가톨릭이나 다른 공동체의 관상기도가 어떤 형태로 진행되는지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저 나름대로 살렘의 가르침을 비판적으로 적용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세미나를 인도하는 첫 머리에 매우 일관성 있게 가톨릭이나 정통 신학권 밖에서 가르쳐지는 관상기도 실천 중 <우리가 수용할 수 없는 것>을 먼저 지적하고 주의와 함께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다섯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을 강조해 왔습니다. 1)관상 목표로서의 ‘하나님과의 일치’(연합)를 범신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우리가 적용해야 할 수준은 영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일치이어야 한다는 것) 2)관상의 목표로서의 무화(하나님도 포기한 묵상은 기독교 묵상일수 없고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의 온전한 임재로 채움 받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 3)관상 수행방법으로서의 만트라(주술은 절대로 수용할 수 없고 간절한 심정으로 하는 짧은 기도가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것) 4)이콘 기도(기도로 허용 될 수는 없고 기독인 미술가들의 신앙적인 예술 작품에 대한 감상으로 더 깊은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 5)묵주 기도(묵주기도는 허용 안되고, 집중을 위해서 라면 오히려 통성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왔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염려하는 관상기도와 동양 명상의 차이도 명확하게 규정해 왔습니다. 1)동양 명상의 대상이 자신의 사고라면 복음적 관상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 이라는 것, 2)동양 명상의 출발이 정신 집중이라면, 복음적 관상기도는 성경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 3)동양 명상의 실천이 명상이라면, 복음적 관상기도는 기도라는 것, 4)동양 명상의 비움을 강조한다면, 복음적 관상기도는 비움과 채움이어야 한다는 것 5)동양 명상의 목표가 마음의 평화라면 복음적 관상기도는 신과의 일치(영적인)이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왔습니다. 처음부터 제가 의도한 것은 가톨릭적 관상기도가 아니라 복음주의적으로 재해석된 관상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책을 추천할 때도 가톨릭 저자의 책들에 대해서는 *표를 달아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렇게 교재에도 표기를 했습니다. 제가 추구한 복음주의적 관상기도는 유진 피터슨의 <묵상하는 목회자>(이 책의 원저 제목은 ‘관상적 목회자’ 'Contemplative Pastor')와 <이 책을 먹어라>에 기술된 관상의 수준을 넘어서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세미나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은 분들의 상상과 추측에 근거한 인신 공격성 비판이 난무한데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은 저의 책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류의 글들을 읽어보면 대개가 극단적 근본주의의 입장에 선 무례하고 난폭한 글들이 대부분이어서 과연 이런 글들에 대해서 까지 대답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언제나 저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일예를 들어 제가 세미나를 시작하며 촛불을 켜고 이 촛불은 “빛 되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강의하고 기도를 시작하겠습니다” 한 것과 강의 중간 중간에 너무 빠른 강의나 너무 중요해서 함께 생각할 말들이 있으면 작은 종을 울려 잠시의 침묵 시간을 가지게 한 것을 가지고 제가 뉴에이지에 빠졌다는 비판을 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성탄 이브에 촛불 예배를 드리는 교회들이나, 과거와 현재에도 “묵도로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하는 한국 교회의 관습은 다 뉴에이지의 영향인지 묻고 싶은 마음입니다.
사실 관상에 대한 관심은 저 혼자만의 관심은 아니고 이미 미국의 여러 신학교(복음주의 신학교를 포함)등에서 ‘Spiritual Formation'(영적 형성)을 개설한 모든 신학교에서는 침묵, 독거, 관상 등은 의례껏 포함되는 과목들이 되었고 풀러 신학교, 탈보트 신학교, 덴버 신학교 등도 이런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장신에서는 유해룡 교수와 주선애 교수님들이 졸업생들을 은성수도원에 데리고 가서 침묵기도(관상기도)를 훈련시켜 오고 있습니다. 잘 알려진 다일공동체 최일도 목사와 감신(권희순 교수)과 한신(권명수 교수), 그리고 성공회는 이미 교단적으로 이런 실천을 하고 있음에도 유독 저에게 비판이 집중된 이유는 아마 제가 알려진 사람인 듯 싶어 더 큰 마음의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저의 관심은 관상기도의 전체적 접목이 아닌 선택적인 적용에 불과했고 이런 노력으로 복음주의 경건의 실천이 더 확장되기를 기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이단 시비로 까지 비화되는 것을 보고 나의 기대가 순진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주의적 관상’이라는 화두는 후학들의 과제로 넘길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관상기도 세미나를 지난 2년간 유보해 왔고 이제 공식으로 이 세미나를 접고자 합니다. 그러나 종래의 제가 해오던 경건론 강의에 침묵훈련을 가미한 부분만은 지속하려고 합니다. 어떤 분은 다양한 관상기도의 별명들이 관상 세미나를 숨기려는 간교함이라고 비판한 분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은 전적인 무지의 소치라고 생각합니다. 관상의 영역은 너무나 넓고 다양한 것이어서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워 교회사를 통해 처음부터 ‘마음의 기도’ ‘묵상 기도’ ‘사귐의 기도’ ‘경청 기도’(듣는 기도)등, 여러 이름으로 다양하게 불리워 왔습니다. 지금에 와서 관상 기도를 숨기기 위한 노력이 아닌 것입니다. 저는 제발 중세기의 이단 마녀 재판이 부활되어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한국 교회를 어지럽히는 일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복음주의 신학의 명문 트리니티 신학교에서 공부하며 느낀 감동은 성경의 절대권위를 수용하는 한 칼빈주의, 웨슬리 알미니안 주의, 세대주의 신학자들이 한 캠퍼스에서 서로 존중하고 강의하며 복음주의를 일깨우는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는 한국 교회가 그렇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저로 인한 시시비비로 오히려 영성의 진지한 탐구가 지체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느끼지 않아 제가 해야 할 다른 남은 사역들, 리더십과 설교, 전도와 셀 목회 등에 집중하고자 불필요한 오해를 초래할 관상기도는 전문신학자들의 연구 영역으로 넘기고 저는 복음 전도자의 본분으로 돌아가 한국 교회를 섬기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동원 지구촌교회 원로목사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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