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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행13:42-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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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
2010·11·27
어떻게 하는 것이 복음을 가장 잘 전하는 것일까요? 많은 성도들이 전도할 때 복음을 제시하지 못하고 그저 교회에 데리고 나오기에 급급합니다. 사실 그것만 해도 고맙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보다는 할 수만 있으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좋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는 그 사람의 관심사에서 시작하여 인생의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문제를 진지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인생의 목적과 내세에 관해서 도전을 받게 되면 사람이 심각해지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럴 때 확신 있는 태도로 복음을 제시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항상 좋은 결과만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감동을 받아 믿게 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마음에 도전을 받았으면서도 더욱 반감을 가지고 거절하거나 대적하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두 가지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인생의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를 다룸
바나바와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안식일에 유대인의 회당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전하라 하더라”(42절) 바울의 설교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는 다음 안식일에 일어난 사건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였던 것입니다.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44절) 당시에는 매스컴도 발달되어 있지 못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지난 안식일에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나가서 열심히 소문을 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힌트를 하나 얻게 되는데, 그것은 모든 성도들이 동네마다 다니면서 좋은 소문내는 것이 얼마나 큰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하려면 성도들이 이렇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도대체 그 교회에 가면 무엇이 있기에 저렇게 난리들일까?” 하고 궁금해 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을 그렇게 떠들썩하게 만든 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개관하면서, 인간들의 끊임없는 실패와 하나님의 은혜를 대조하여 설명함으로써 유일신 하나님을 강하게 증거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한 주제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설교에는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만든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인생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문제, 즉 하나님에 관한 진리와 영생의 문제, 그리고 죄와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문제들은 언제나 인류의 가장 큰 관심사였습니다. 그것은 유행과 상관없이 늘 인간이 추구하고 고민하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을 통하여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분명하게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그 도시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들으려고 몰려왔던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이렇게 중대하고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며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 많이 하는 가운데 복음을 잘 준비하여 갈급한 심령들에게 분명하고 확신 있게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는 이렇게 영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전해야 가장 효과적입니다.
시기하여 반대하고 핍박하는 유대인들
복음을 전할 때 이렇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반대와 핍박도 일어납니다. 바울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편에서는 유대인들이 바울의 설교를 변박하고 비방했습니다. 나중에 이들은 유대교로 개종한 귀부인들과 그 성의 유력한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여 그 성에서 쫓아내고 말았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유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50절)
유대인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그토록 핍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45절은 시기가 가득하여 그렇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그들이 시기하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유대교가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였습니다. 로마의 축소판과도 같았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다른 로마의 지역과 마찬가지로 세 가지 두드러진 요소가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요소는 로마의 것이었고, 문화적인 것은 헬라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나 헬라는 종교적으로는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많은 우상을 섬겼으며, 도덕적으로 대단히 문란한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엄격하고 도덕적으로 깨끗한 유대교는 양식 있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종교에 관한 한 유대인들이 주도권을 가지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상당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과 바나바가 나타나 복음을 전하자 그 성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몰려들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사도들을 시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시기하게 된 또 하나의 원인은 바울의 메시지에 들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항상 자기들이 가장 우월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을 멸시하고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상당수의 이방인들이 개종하고 할례를 받아 유대교로 들어왔지만, 그들은 본래의 유대인보다는 한 단계 아래로 취급당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설교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을 완전히 철폐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도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었다고 말했으며, 이제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굉장한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유대인들이 얼마나 시기하게 되었겠습니까?
유대인들의 시기는 바울과 바나바를 반대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성의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그들을 핍박하고 성에서 추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바로 이 시기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도 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자기보다 늦게 들어 온 사람이 자기보다 더 열심을 내고 믿음이 좋아지고 인정을 받게 되면 질투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부끄러운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바나바의 겸손과 성숙된 신앙을 다시 본받아야겠습니다. 그는 자기가 발탁한 사울이 그렇게 두각을 나타내고, 반면에 자기는 사울의 조력자가 되는 것을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일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임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반대하고 핍박한 유대인들과는 대조되는 이방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과 달리 그들은 진리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열고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48절) 사람은 누구나 정직하고 열린 마음으로 진리를 듣게 되면 구주를 영접하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열린 마음을 갖게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시면 우리가 반드시 전도의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당할 때, 믿음을 지키다가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실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난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고난은 그것이 어떤 고난이든지간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거기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낙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당하고 쫓겨난 것도 오히려 선한 결과들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 몇 가지를 살펴봅시다.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하고 사도들을 핍박한 것은 바울이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46절) 그리고 그는 주님께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것을 다시금 기억했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47절) 결국 유대인들의 거절은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그 선하신 뜻대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아주 버리셨을까요? 우리는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자세히 논하고 있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9-11장).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 구원을 주심으로 유대인들을 시기 나게 하시고, 그들도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실 작정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핍박과 고난 때문에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널리 전해지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난은 복음 전파를 좌절시키고 교회 부흥을 위축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거절을 당하는 일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된 다는 결국 다 믿게 됩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48절)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큰 용기와 격려가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복음을 전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자들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구원하실 것인지를 작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사람들이 저절로 예수 믿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전도를 통해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사람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사람들 중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하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특히 우리의 전도를 통하여 구원하실 자들을 부르십니다.
임종 직전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임종하기 직전, 그 사람의 아들이 목사님을 불렀습니다. 목사님은 임종을 앞둔 그 사람에게 복음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순순히 예수를 믿더랍니다. 그 사람 말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친구 따라 교회에 몇 번 나간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이상하게 언젠가는 교회에 나가야지 하는 생각으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교회에 가서 무엇을 배웠겠습니까? 아마도 ‘예수 사랑하심은’ 같은 찬송가나 몇 번 따라서 불러봤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평생 안 믿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임종을 앞두고 그렇게 주님을 영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자는 언젠가 이렇게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쉬지 말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기쁨과 성령이 충만함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핍박을 받아 결국 그곳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51절) 그런데 핍박을 받아 그곳을 떠나는 두 사람은 성령과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52절)
핍박을 받고 그곳에서는 복음을 더 이상 전하지 못하고 쫓겨났는데 어떻게 기쁨이 충만할 수 있단 말입니까?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핍박을 견디어 낼 때 언제나 이러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없다면 복음 전하는 자들이 쉽게 좌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복음을 전해야 할 이유가 또 여기에 있습니다. 전도하는 사람은 반대와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실망시키고 좌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성령으로 더욱 충만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더욱 힘과 용기를 내어 전도하기를 힘쓰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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