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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행17:2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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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
오늘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기억합시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당신은 복음전파에 대한 비전과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까? 당신은 날마다 이 일에 대한 부담감이 있습니까? 누군가를 전도하기 위해서 기도하면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보내는 선교사임을 자각하고 선교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후원하기를 힘쓰고 있습니까?
전도의 접촉점
오늘 본문에는 바울의 세 번째 설교가 나오고 있습니다. 13장에는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에게 했던 설교가 기록되어 있고, 14장에는 루스드라에서 이방인들에게 전한 설교가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는 바울이 아테네에서 교양 있는 철학자들에게 전한 설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바울의 설교에 대하여 대조적인 두 가지 평가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행한 이 설교는 가장 훌륭한 설교라는 평가입니다. 그것은 당시 아테네 사람들의 처지와 환경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아 복음을 전한 매우 탁월한 설교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아테네의 철학자들 앞에서 자기의 철학을 자랑하고 접목하여 복음을 전하느라고 복음의 메시지가 많이 약화되었으며, 그 결과 결신자도 몇 명 얻지 못했다고 평가합니다.
때로는 전도할 사람의 처지를 잘 파악하여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아 복음을 전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항상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전하지는 못한다 해도 복음에는 그 자체에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으며,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어떤 초등학생이 자기 학교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 사영리를 읽어 드리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이가 읽어주는 사영리를 듣고 그 교장 선생님이 눈물을 흘리면서 주님을 영접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복음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전하기만 한다면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에게 바울과 같은 복음에 대한 열정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레오바고
바울이 시장에서 복음을 전하자, 에피큐로스 철학자들과 스토아 철학자들은 바울이 말하는 것을 더 자세히 듣고자 하여 바울에게 아레오바고에서 그들에게 연설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데리고 아레오바고로 갔습니다. 이 아레오바고는 로마의 軍神인 ‘마르스의 언덕’이라는 뜻을 가진 장소였습니다. 마르스는 그리스에서 아레스라고 불렸고, 거기에 언덕을 뜻하는 파고스라는 단어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이름이 바로 아레오바고였습니다. 처음에 이곳은 고대 헬라의 가장 유서 깊은 법정이 열리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레오바고라는 말은 법정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당시에는 법정이라기보다는 지방의회에 더 가까운 곳이었다.
에피쿠로스 철학자들과 스토아 철학자들은 바울에게 그의 사상을 더 자세히 말해달라고 요청했는데, 바울은 그들의 의 요청에 응하여 아레오바고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울은 아레오바고에서 설교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잡게 되었으므로 심혈을 기울여서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아테네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여 들을 만한 서론을 가지고 그의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모든 신을 다 숭배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섬겼습니다. 바울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한 단을 발견했습니다. 모든 신들을 다 섬기고자 했던 아테네인들은 신들을 섬기다가 몰라서 몇몇 신들을 빠뜨린다면 그 신들이 얼마나 서운하고 노여워하겠는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을 아테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접촉점으로 삼았습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23절)
바울은 이 말이 아테네의 모든 비극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우상숭배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곤고함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신들을 섬겼으나 만족할 수 없었고, 계속해서 더 많은 신들을 찾아 헤맸으나 결국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수준 높은 철학이나 예술도 이 문제에 대해서 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종교성이 많았고 할 수만 있으면 많은 신들을 섬기고 싶어 했지만, 참 신에 대한 지식은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자들의 한계이고 곤고함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바로 그 신을 그들에게 알려 주겠다고 하면서 그의 설교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테네 사람들의 관심과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서론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도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효과적인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이 설교는 복음 전하는 바울을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에 대한 답변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이방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에게 참 하나님을 전하기 위하여 여기에 왔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알지 못한 채 찾아 헤매는 그 신에 대해서 말하겠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첫째로 하나님은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라고 전했습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24절) 이러한 세계관은 세상은 원자들의 우연한 결합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의 무신론과 다른 것이었으며, 세상은 운명에 의하여 지배된다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범신론과도 다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창조하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만든 신전에 살고 계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각입니까?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사람에게 예속되는 분이 아니십니다. 바울은 참 신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분명하게 전함으로써 아테네 사람들의 잘못된 신관과 세계관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부족함이 없으신 만물의 유지자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은 사람이 뭔가를 해주기를 바라며, 또 그것들을 필요로 하는 신들입니다. 신들은 사람보다는 월등한 존재이지만 완전한 존재는 아닙니다. 사실 이것은 모든 이방 신들의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테네 사람들은 신들을 위하여 신전과 신상들을 만들고 제물을 바침으로 신들을 위하고 돕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마치 우리의 예배에 목말라 계시는 분이거나, 우리의 기도와 찬양을 필요로 하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뭔가 부족하여 사람들에게 섬김을 받으셔야만 하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25절) 하나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사람들의 생명을 유지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만물과 함께 우리 사람들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여 존재합니다. 이것은 신이 사람에게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한 아테네 사람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신관이었습니다.
통치자이신 하나님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유지시키시고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26절) 이것은 바울의 말을 듣고 있던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이나 스토아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신관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은 신이 너무 멀리 있어서 인간사에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실제로는 무신론을 주장했으며, 스토아 철학자들은 신은 만물 속에 있으나 비인격적이며 인생사에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그 분은 우주만물을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우리 개인의 모든 일들까지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과, 날마다 골몰하며 애쓰고 염려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선하시고 자비로우셔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의 모든 일들을 선하고 아름답게 이루십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내가 바로 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복되고 귀한 일입니까?
아버지이신 하나님
바울은 또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설명하면서 이방 시인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28절) 사실 그 시인은 제우스를 가리켜서 그렇게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정정하여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복되고 놀라운 일입니까?
바울은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서 하나님을 우상들과 같이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29절) 바울의 이 말은 수많은 우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는 아테네 사람들의 행위가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었습니다.
심판자이신 하나님
여기까지 말한 다음 바울은 이제 하나님이 심판자이심을 말했습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30절)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허물치 않으셨다’는 말은 마땅히 내리셔야 할 심판을 내리지 않으셨다는 뜻이지, 그들이 믿지 않았다 해도 몰랐기 때문에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복음을 들은 자의 책임은 더 무겁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주이십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통치자 되시며 우리의 자비로운 아버지이심을 듣고도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힘을 다하여 충성하지 않는다면,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심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의 삶이 끝나는 날이 이제 곧 올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천국에 들어가고 이 세상에서의 삶은 아무래도 상관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선악간에 심판하시고 갚아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고상하고 보람 있게 살았다 해도, 아무리 최선을 다하여 돈을 벌었다 해도,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많은 것을 즐겼다 하더라도, 내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며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살지 못했다면 심판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영원한 나라에서 별 의미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지킨 사람들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위로와 칭찬과 영광스런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헌신한 사람은 천국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우선적으로 믿음을 지키며, 복음을 위해 헌신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두 가지 반응
바울의 설교를 듣고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비웃었으며(아마도 에피쿠로스 철학자들), 어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다시 듣겠다고 했습니다(아마도 스토아 철학자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몇 사람이 믿었습니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 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34절)
결신자가 이렇게 적었던 것은 바울이 지나치게 철학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울 자신도 다음 선교지인 고린도에서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전하지 않으며,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1,2), 또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했다고 말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4-5).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지는 않았으나 성령께서는 바울의 설교를 통하여 몇 사람이 회심하게 하셨습니다. 나중에는 아테네의 교회가 크게 부흥하여 훌륭한 감독과 순교자들이 배출되었습니다(Publius, Quadratus, Aristides, Athenagoras, Basil, Gregory).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하든지 복음 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내가 비록 부족하고 연약할지라도 복음을 전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놀라운 일을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를 사랑하시고 복 주셔서 한국 교회는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부흥되었습니다. 그런데 80년대부터 한국 교회의 성장이 둔화되어 가다가 90년대에 와서는 오히려 감소하고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땅은 수많은 우상으로 가득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아테네에서 바울이 느꼈던 것과 같은 의분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며,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옛날만이 아니라 오늘도 이 땅에는 우상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차지하셔야 할 위치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이방종교만이 아니라 명예, 돈, 권력, 성, 술과 마약, 부모와 자녀, 배우자, 친구, 일, 쾌락 등이 다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우상이 가득한 아테네를 보면서 격분했으며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 우상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보면서 이러한 분노를 느끼며, 힘을 다해 복음 전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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