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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대학교 우체국 앞에서 다른 사모님들을 만나기로 한 아내를 비가 오는 날이어서 특별히 차로 데려다 주고 돌아오는 길에 평소에는 대전역 앞길로 돌아오는데, 오늘은 시간도 있고 해서 한번도 안 가본 반대 길로 가보았습니다. 서대전역이 나오고 곧이어 세이백화점이 나와 무작정 백화점 주차장에 차를 세웠습니다.
지하 주차장 바로 위 지하 1층에 대형 서점이 있었다는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엄청나게 넓더군요. 아마도 대전에서 가장 큰 서점인것 같습니다.
두시간 가까이 오랫만에 책구경 실컷 하고 책 몇 권 사서 가방에 넣고 집으로 돌아오는 대청호 한적한 길 어디쯤에서 차가 고장이 나 서버렸습니다. 엔진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범퍼를 열고 보니 엔진오일이 없는것 같았습니다. 길가에 앉아 한시간에 한대씩 있는 버스를 기다립니다. 기다리면서 아까 사 온 책중의 한권인 '지금도 쓸쓸하냐' 를 꺼내어 읽는데 참 쓸쓸합니다.  거의 반 쯤 읽었을때  버스가 와서 타고 시내로 나왔습니다. 카센타에 가서 차의 상태를 설명하고 필요한 오일과 장비를 사가지고 다시 들어오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아까 읽은 뒤에서부터 다시 책을 읽습니다. 버스를 타고 들어와 차 있는 곳에서 내려 카센타에서 알려준대로 조치를 취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차가 완전히 망가져서 페차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쩝! 차를 길가에 안전하게 옮겨 놓고 다시 집으로 들어오는 버스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다 읽고 일어서는데 딱 맞추어 버스가 옵니다.
작년에도 차를 한대 페차시켰는데, 차와 이별하는 마음이 참 쓸쓸하더군요. 그런데, 두번째 차와 이별해야 될 순간이 다가 옵니다.
그동안 정도 많이 들었는데... 그런데 문득 누군가 제게 묻네요.
"그래.. 두번째 차와 헤어지려니 쓸쓸하냐? ... 지금도 쓸쓸하냐?"
2003.4.29 최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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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기독교 서평

<지금도 쓸쓸하냐>
이아무개 지음/ 샨티 펴냄/ 262쪽/ 9,000원

참으로쓸쓸한 계절이다. 계절도 계절이거니와 아침 저녁으로 불어대는 서늘한 바람… 그리고 어디 날씨 탓뿐일까. 눈을 돌리고 귀를 열면 들려오는 “쓸쓸한 소식”―전쟁, 폭력, 갈등, 죽음 등 그 어떤 것인들 쓸쓸하지 않을까?―들이 마음 속 언저리를 더욱 쓸쓸하게 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 쓸쓸함이 비단 기자의 것만은 아닌가 보다.
“선생님, 오늘 종일토록 참 쓸쓸했습니다.”
“알고 있다. 축하한다.”
“축하한다고요? 무엇을 말입니까?”
“네가 하루종일 쓸쓸했다는 사실을. 쓸쓸함도 너에게 온 손님이다. 지극 정성으로 대접하여라.”
“어떻게 하는 것이 쓸쓸함을 대접하는 겁니까?”
“쓸쓸한 만큼 쓸쓸하되, 그것을 떨쳐버리거나 움켜잡으려고 하지 말아라. 너에게 온 손님이니 때가 되면 떠날 것이다.” ―‘쓸쓸함’중에서―

구름이 묻고 산이 답하다
이현주 목사(필명:이아무개)의 새 책 <지금도 쓸쓸하냐>는 뼛속까지 스며드는 이 가을의 쓸쓸함을 어루만지듯 선생과 나의 가볍지만 진지한, 때론 따뜻하기도 한 대화로 이뤄져 있다. 나를 성찰하는 개인적인 질문에서 세상의 전쟁, 갈등, 폭력과 같은 사회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내 삶을 둘러싼 총체적인 주제로 이뤄지는 대화는 우리를 사색의 길로 안내한다.

그 대화는 스스로가 ‘운문산답(雲問山答)’이라 했듯, 마치 이리저리 흐르는 구름과 언제나 그 자리에 한결같이 머무르는 산과의 대화와 같다. 재밌는 것은 그 ‘선생’ 또한 저자 자신이요, 질문하는 ‘나’ 또한 저자 자신이라는 것이다. 옛날 석가모니가 “네가 네 스승이다. 너한테서 배워라”라고 했듯, 예수가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했듯, 결국 ‘내’가 나의 진정한 ‘스승’이요, 결국 모든 가르침은 ‘나’를 깊이 성찰하는 데서 시작한다는 깨달음에서 기인한 것일 게다. 그러니 이 책은 그런 깨달음을 고스란히 삶 속에서 실천해 온 저자의 옹근 열매인 셈이다.

“모든 것이 돈으로 바뀌는 세상”에서 더없이 “외로움”을 느꼈던 그가 “참 종교 거짓 종교”가 무엇인지, “깨달음의 길”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스승에게 물었을 때, 스승은 “무엇을 묻고 있느냐”며 “에고(ego) 뭉치”인 자신을 버리라고 그를 꾸짖기도 하지만, 스승은 언제나 산이 그 자리를 지키듯 한결같은 목소리로 “아무것도 하지 말아라” 너는 “이미 완벽하다”며 위로하기도 한다. 그리고 모든 있어 보이는 것들이 “흐름이 있을 뿐” 어떤 것도 고착화돼 있지 않다며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집착마저도 버려야 한다고 얘기한다. 오직 변치 않는 것, 분명한 것은 “하느님은 사랑만 보신다”는 자명한 진리뿐이라고 말이다. (큰 따옴표 안의 것들은 책의 소제목들.)

모든 것이 흐름만 있을 뿐
총 64편에 이르는 이야기들의 주제는 우리 삶을 총망라해 놓은 것 같다. 아마도 일상 속에서 저자가 오랫동안 느끼고 고민해 온 내용을 주제로 삼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에고(ego) 뭉치인 ‘나’를 극복해야 할지 하루에도 수없이 고민하고, 세상 속에서 겪게 되는 여러 궁금증을 선생에게 털어놓고 조언을 구한다. 선생은 ‘나’의 질문에 따라 모양새가 다른 대답을 주지만 그 대답 속에는 언제나 한결같은 진리가 관통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바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흐름이 있을 뿐” 언제나 변치 않는 것도, 고착화된 것도, 영원한 것도 없다는 진리다.

“왜 사람의 힘이 폭력으로 바뀝니까?”
“사람이 억지를 부리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결코 억지를 부리시지 않는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꽃이 억지로 피어나는 것을 보았느냐? 구름이 억지로 흘러가는 것을 보았느냐? 물이 억지로 얼어붙은 것을 보았느냐? 얼음이 억지로 녹는 것을 보았느냐? 그런 일은 없다. 그것들한테서 인간의 힘이 조금도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폭력’중에서―
구름이 언제나 흐르고 있듯, 물이 자연스레 얼고 녹듯, 사람이 나고 죽듯, 계절이 흘러가듯,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언제나 움직이고 변화한다는 진리, 오직 그것만이 확실할 뿐이라는 것이다. 밥벌이에 집착하고 먹을 것에 집착하고 내 욕심을 채우는 데 집착하는 ‘에고 덩어리’인 인간의 모습은 더없이 쓸데없는 일일뿐이다. 그러니 오직 세상의 흐름을 보는 눈만을 갖기 위해 책 속의 나와 더불어 ‘우리’들은 끊임없는 “착각”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사랑뿐
그러나 흐름만 있을 뿐,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은 이 세상에서도 유일하게 명확한 진리가 있다.
“오늘, 존 디어 신부의 글을 읽다가 ‘하느님은 사랑만 보신다(God sees only love)’는 문장을 만났습니다. 마더 테레사가 한 말이라는데, 그 말 뒤에 다음 말이 이어집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하는 일 속에 담아놓은 사랑만을 보신다(God sees only the love that we put into what we do)’”
“참말이다.”
“그 말 한 마디를 만났을 때 제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럴 때가 되었다. 참으로 있는 것은 사랑뿐이다. 나머지는 모두가 허상이다.” ―‘하느님은 사랑만 보신’중에서―
바로 사랑이다. 하느님은 오직 사랑만 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야 할 유일한 지표가 되는 것은, 오직 진리라고 믿어도 되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다. 다만 우리가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아 아는 것은 우리 몫으로 남아 있다.
“사랑을 보려고 애쓰지 말고, 눈에 보이는 것에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어떻게 하면 속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림자를 그림자로 보고 꿈을 꿈으로 알면, 그것이 속지 않는 것이 아니냐?”
“일체를 그림자로 보는 것과 테레사처럼 자기가 하는 일에 사랑을 담는 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테레사가 일에 사랑을 담은 것이 아니라 사랑이 테레사로 하여금 일을 하게 한 것이다. 이 비밀을 알았기에 테레사는 자신이 무명이요, 무공이요, 무기임을 알았다.”
―‘하느님은 사랑만 보신’중에서―

바르게 사는 것이 쉽지 않다. 더욱이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고 흐르는 데로 내버려 두며 사는 삶은 인간에게 더없이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책에서 말하듯 오직 유일한 진리인 사랑만이 유일무이한 가치임을 몸으로 깨달아 사는 일은 더더욱이 어려운 일 같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은, 우리가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온 존재로 받고 있는데서 일 것이다. 이 쓸쓸한 계절에 더 이상 쓸쓸함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것도 말이다.

김진아 기자 tokki@cnew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