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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후7: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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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
고린도후서(29) 근심을 유익으로 만드십시오 (고후 7:9-11)
<근심의 유익 >
사람은 대개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합니다. 다급할 때는 하나님을 찾다가 형편이 나아지면 금방 하나님을 외면합니다. 그처럼 배신을 일삼는 인간을 하나님은 끊임없이 사랑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거의 일방적인 짝사랑에 가깝습니다. 왜 삶이 무겁고, 우울하고, 쓸쓸합니까? 하나님을 배반하면서 자신도 하나님을 근심하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이 가끔 어떤 사람을 징계합니까? 그를 바르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고통은 영혼을 하나님께 잡아매는 끈입니다. 고통이 없다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절실히 사모하겠습니까? 고통은 우리가 한계를 가진 인간임을 자각하게 합니다. 또한 우리가 집착하던 것들의 허망함을 일깨워줍니다. 그런 고통과 근심의 유익에 대해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잘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잘못된 길을 가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책망하는 편지를 보냅니다. 그리고 소식을 기다립니다. 마침내 디도가 돌아와 고린도 교회가 회개하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과 감사를 담아 편지하는 내용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런 선한 결과를 보면 고통과 근심이 때로는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요새 사는 것이 힘들어서 눈물 마를 날이 없습니까?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은 없고 뭔지 길이 보이지 않는 것 같으면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하나님! 지금 이 상황을 보고 계십니까? 왜 제게 이런 고통이 있어야 합니까?” 그 고통의 원인을 하나님은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성도의 시련과 고통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은 삶을 근본부터 다시 성찰하라는 초대입니다. 살면서 정당하게 살지 않고 그릇된 수단을 써서 억지로 일을 추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제 자신을 성찰하고 세상적인 길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십시오. 물론 불의하고 힘든 세상에서 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려 자신을 성찰할 기력조차 없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들의 이웃이 되어 주려고 힘쓸 때 인생의 무거운 짐이 가볍게 느껴질 것입니다.
< 창조적인 근심을 하십시오 >
살다 보면 근심거리도 필요합니다. 본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무엇입니까? ‘근심’이란 단어로 8번이나 나옵니다. 그런데 근심이란 단어가 그렇게 나쁜 어감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그처럼 근심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근심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근심에는 쓸데없는 근심도 있지만 필요한 근심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근심이든지 근심하는 기간은 되도록 짧아야 합니다(8절).
“무엇을 근심하느냐?” 하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얼마 동안 근심하느냐?” 하는 문제도 중요합니다. 근심하는 기간을 정하지 않으면 근심을 통해 창조적인 일을 이루기 힘듭니다. 그러므로 근심하는 문제에 대해 때로는 단호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즉 근심할 일은 근심하고 사소한 일은 접어두기로 그 한계를 정해야 합니다. 끝이 없이 계속되는 근심은 건강을 해치고 그 밖의 중요한 일까지 망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근심하더라고 잠깐만 근심하고 곧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려고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아픈 책망의 편지를 섰을 때 고린도 교회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습니다. 그때 두 가지 결과가 예상되었습니다. 첫째, 고린도 교인들의 감정이 상해서 사도 바울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더 멀리 하는 결과가 예상되었습니다. 둘째, 처음에는 약간 기분이 상하겠지만 곧 회개하고 하나님을 다시 가까이 하는 결과가 예상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었습니까? 두 번째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기뻐하는 마음으로 본문의 내용을 쓴 것입니다(9절).
문제는 “근심하느냐? 안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근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살면서 근심이 없기를 바라지 말고 차라리 열심히 근심하십시오. 때로는 근심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잠깐만 근심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를 생각하고 행동에 나서십시오. 그리고 마침내 근심을 유익으로 만드십시오. 창조적으로 승화시킨 근심은 결코 해가 되지 않습니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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