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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의 <거룩한 삶의 실천을 위한 마음지킴>을 읽다
이 책은 목회자용과 신학생용 두 가지로 나와있다. 대전크리스챤서점에 갔다가 “혹시 김남준 목사님의 ‘마음지킴’책 들어왔나요?” 하고 물어보았더니 매장을 둘러보고는 책의 재고가 없자 “잠시만 기다리세요”하고 밖에 나갔다가 한참만에 책을 가지고 들어온다. 아마도 짐작컨대 다른 기독교서점에 가서 책을 찾아온 것 같다.(대전역 앞에는 4개의 기독교서점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렇게 구한 책을 2번 정독하였다. 미션월드에서 나온 찰스의 ‘마음전쟁’ 과 함께 읽었는데 두 책 모두 마음에 대한 책이지만 이 책은 소극적으로 ‘마음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 쓴 책이라면 ‘마음 전쟁’은 적극적으로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전쟁’도 불사하라는 도전적인 책이었다.
조금 두툼한 책이지만 긴 숨을 쉬면서 읽으면 술술 잘 읽히는 책이다. 밑줄 그은 내용들중 일부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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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음의 중요성
신자의 전 영혼을 부패와 불결로부터 순결하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운 작용인 성화는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이 마음이 영혼과 가장 밀접한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영혼의 참된 변화는 마음의 변화와 함께 시작되고, 영혼 속에 일어난 변화는 마음에 영향을 미칩니다.
신자에게 죄가 들어올 때에도 마음을 통하여 들어오고, 거기에서 벗어날 때에도 마음을 통하여 나갑니다. 불신자에게 신앙이 들어갈 때에도 마음을 통하여 들어가고, 신자가 된 후에 신앙에서 미끄러져 불신앙으로 떨어질 때도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어서 하나님을 버리는 삶으로 갑니다. 그래서 이 마음은 하나님을 잘 믿고 따르는 신앙적인 삶과 하나님을 버리고 짐승처럼 살아가는 삶 중에서 그 어느 방향으로든지 움직임으로써 삶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2.개똥참외성도, 골드마크성도
시골에서 길가에 열린 돌배나 풀섶의 개똥참외를 사람들이 거들떠봅니까? 더욱이 그것들을 따다가 시장에 내다 파는 상인들을 보셨습니까? 시장에서는 그것을 파는이도 없고 사려는 사람도 없습니다. 열매로서의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나던 걸인들 조차도, 하도 배가 고파 돌배나 개똥참외를 따서 한입 베어 물어 보고는 퉤 뱉어 버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역시 돌배는 돌배야". "역시 개똥참외라더니 맛도 이름과 같구먼..."
여러분이 구원 받고 성화를 위하여 힘쓰지 않더라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성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라고 해서 모두 같은 성도는 아닙니다. 믿는다고는 하나 짐승같이 살아서 개똥참외 같은 교인도 있고, 거룩하게 변화되어서 골드마크를 붙여주고 싶은 성도도 있습니다. 극상품의 열매가 되는 이들도 있고, 시장에서 상인들이 떨이로 주어 버리는 부실한 열매가 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모두 성화의 결과의 차이가 빚어 낸 결과입니다.
3.성화와 마음
인간의 모든 행동은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아니한 행동은 우발적이고 일관성이 없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은 항상 그의 성품을 반영하고 일관성이 있습니다. 신자가 마음을 적절히 다루지 아니하고 곧바로 삶을 고치고자 하는 것은 마치 도도히 항진하는 수십만 톤의 배의 항로를 바꾸기 위해서 뱃머리에 매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에게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신앙의 선조들은 삶을 고치기 전에 마음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게 하고 그것을 지키는 일이 급선무임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마음을 지배하는 일 없이 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4.능력있는 삶의 지속은
신자의 능력있는 삶의 지속은 단번에 주어지는 커다란 능력이나 은사에 의하여 좌우되기 보다는 매일 매일 자기 안에 있는 죄와 부패성들을 성령의 은혜로 죽이는 꾸준한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5.마음을 잘 지키지 아니하면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대적은 세상도 아니고, 마귀도 아닙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가장 큰 대적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마음을 잘 지키지 아니하면, 그에게 전해 주는 수많은 신앙적인 지식들은 마치 적과 싸울 의지가 없는 군인에게 주어지는 병기와 같습니다. 맨주먹 붉은 피밖에 없어도 나라 사랑하는 애국심 하나가 있다면 싸울 수 있지만, 수많은 병기로 무장하였다 할지라도 애국심이 없다면 전투할 수 없는 것입니다.
6.마음을 노리는 대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우리의 삶을 자기의 지배 아래 두고싶어 하는 것이 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과 마귀입니다. 그러나 세상도 마귀도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지 아니하고는 그 목적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 둘이 아무리 우리를 유혹한다고 할지라도 마음의 주인인 우리의 동의 없이는 우리의 삶을 차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배할 수도 없습니다.
생각 속에 스쳐 가는 유혹은 한번의 다짐으로 고개를 흔들며 떨어버릴 수 있지만, 그것을 마음에 품으면 점점 떼어 내기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면 범죄가 이루어지게 되고 그로 인하여 마음은 더욱 어두워져서 죄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또한 반복적인 범죄는 동일한 죄에 대하여 항거할 수 있는 마음의 저항력들을 송두리째 빼앗아갈 뿐 아니라, 그 죄를 짓지 아니하고는 살 수 없도록 패역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그의 삶에는 더 이상 하나님이 없습니다.
7. ‘마음을 지킨다’는 의미
첫째는 마음의 작은 동작에도 유의하는 것을 의미하고
둘째는 마음속에 일어난느 더러운 생각들을 버리는 것을 의미하고
셋째는 마음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고
넷째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새로워질 수 있는 수단들을 부지런히 활용하는 것을 의미하고
다섯째는 이상의 일들을 위하여 성실하게 힘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8.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어떤 생각에 반응하는 마음의 움직임, 최초의 작은 움직임에 유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적절한 대책을 세워 악한 생각에 자신의 마음이 더 이상 침노당하지 않도록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악한 생각에 마음이 공격을 받기는 해도, 아예 그 공격에 자신의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악한 생각에 잠시 마음이 공격을 받을 지언정, 그 공격에 마음의 일부라도 내어 줌으로써 그것으로 마음 전체를 공략할 수 있는 교두보를 삼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9.마음의 움직임은 항상 어떤 생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의 마음에 오가는 생각들을 객관적으로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음에 스쳐가는 생각들이 모두 마음에 품어도 되는 생각인 것처럼 마음을 개방해서는 결코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내적인 생명의 풍성함을 유지할 수 없으며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통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은 마음에 착상될 가능성도 높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어떤 생각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면 그것을 반복적으로 떠오르게 하여 마음에 착상되게 하여야 하지만, 그것이 악하고 불의한 생각일 경우에는 그것이 마음에 착상하지 못하도록 즉시 적절히 물리쳐야 합니다.
10.말하고 듣는 것에 유의하라
어떤 심리학자에 의하면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하루에 약 10만번의 생각이 스쳐 지나 간다고 합니다. 엄청난 양의 생각들이 스쳐 지나 갑니다. 그 생각들 중 대부분은 스쳐 가기만 할 뿐 우리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중의 어떤 생각은 우리의 마음에 안착합니다.
마치 여자의 몸 안에 수정란이 착상되어 아이로 자라듯이, 우리의 마음이 붙잡은 어떤 생각은 우리의 마음에 착상하여 그 마음을 태반으로 해서 자라납니다. 그리고 전에는 단지 생각으로서 마음에 영향을 끼쳤지만, 이번에는 그 생각이 어떤 마음으로 변하여 다른 생각에 영향을 끼칩니다.
11.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갈까요?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는 영적인 무감각을 지나서 도덕적인 무감각 시대를 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자기를 살피는 내적 성찰이 매우 부족하고, 교회는 그것을 일깨움에 있어서 현저히 무능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마다 자기의 의를 따라서 신앙 생활하는 가운데, 신자들의 내적 생명은 점점 더 고갈되고, 교회는 일에 분주하지만 자기의 지체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일에 대하여 점점 덜 고민하는 것 같습니다.
아아,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갈까요? 어떻게 우리의 형식주의적인 종교 생활이 참된 영적 생활을 대신 할 수 있겠으며, 우리가 의지하는 자기 의가 어떻게 주님 앞에서 깨어진 영혼의 아름다움을 대치할 수 있겠습니까?
12. 주의 깊은 그리스도인
자신의 작은 행동들은 물론이거니와, 아직 드러나지 않고 마음에 떨어지는 생각들까지 유의하면서 그것이 마음을 지배하게 될 때 몰고 올 결과에 대하여 살피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생각 없이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주의 깊은 그리스도인의 거룩하고 경건한 삶의 실천에 대하여 율법주의라고 얕잡아 보거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릴 줄 모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며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막 사는 사람들의 자유와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유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전자의 자유 속에는 단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자유가 있을 뿐이지만, 후자의 자유 속에는 자유케 하시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분과의 거룩한 교통이 있고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성화와 영적 성장이 있습니다.
13.깨어 있음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다’라고 할 때에 그 말의 가장 우선적인 의미는 자신의 마음과 삶의 상황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자기의 마음을 오가는 생각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자기의 마음에 떨어져서 착상되고 있는 생각이 몰고 올 마지막 결과에 대하여 진지하게 살펴야 합니다.
이 때에 어떤 악한 생각의 결과에 대한 판단은 신속할수록 마음을 지키는 데 유리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하나는 판단이 빠를수록 악한 생각에 마음이 받는 영향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악한 생각은 처음 떠올랐을 때가 가장 쉽게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4.
생각은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기도 하고, 또 밖에서 떠오른 생각들이 마음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신자의 마음이 덜 성화되었을 때에는 온갖 더러운 생각들을 잘 받아들이지만, 상당한 성화의 진전이 있고 나면 마음 자체가 그런 더러운 생각에 대하여 거부감을 갖게 되는 것은, 바로 마음이 생각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 때에는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지만, 막상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악한 상태의 마음이 되면 하나님의 사랑 없이도 살아가는 존재의 질서가 정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통해서 온갖 죄의 열매를 맺으며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15.순종과 성화
우리는 순종과 축복을 연결시키기를 좋아합니다. 마치 일상적으로 살면 신자로서 기본적인 삶이 가능하고, 그 위에 순종을 하면 추가적인 축복을 받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순종은 곧 축복의 원리이고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순종이 성화의 영역에서만큼 절실하게 필요한 경우도 없습니다. 순종없이는 성화의 어떠한 진전도 없습니다. 신자의 마음 안에 있는 죄를 죽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총체적이고 기꺼운 순종이 필요합니다.
16.신자의 마음을 재갈물리는 것
신자가 자기 안에 있는 악한 잠재력을 누르고 진실하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수적입니다. 하나는 그의 마음이 신령한 욕구로 늘 불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마음에 재갈을 물리는 것입니다. 재갈을 물린 커다란 말은 어린아이의 작은 손에 잡은 고삐로도 통제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경건의 통제력 아래 있을 때가 안전합니다.
그러면 신자의 마음은 무엇으로 재갈을 물릴 수 있을까요?
첫째로, 사랑의 정서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생각입니다.
셋째로, 악한 마음이 몰고 올 결과에 대한 진지한 예측입니다.
이것들을 통해 신자는 자신의 마음이 방종에 흐르지 않도록 경건한 통제력을 유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17.십자가 묵상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의 정서를 회복하는 가장 좋은 길은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것을 통해서도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지만, 그것들은 단지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날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의 나타남이 찬란한 정오의 햇살이라면, 그것들은 단지 희미한 촛불에 불과합니다.
18.노래방과 단란주점
가끔 어떤 청년들은 제게 묻습니다. 노래방에 가는 것이 죄가 되냐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한마디 더 보탭니다. “거기 가서 복음송가만 부른다면 괜찮지 않을까요?” 그것은 마치 단란주점에 가는 청년이 이렇게 묻는 것과 같습니다. “가서 콜라만 마실텐데 괜찮지 않을까요?” 그것이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환경이 유혹에 대한 저항력을 약화시키고, 죄에 쉽게 끌리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9.불신자와 신자의 마음
거듭나지 아니한 자연인의 마음은 아무리 부드럽고 온유해 보여도 하나님과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는 돌같이 ‘굳은 마음’이고, 거듭난 사람의 마음은 아무리 딱딱해 보여도 ‘마음의 굳음이 남아있는 마음’이다. 따라서 자연인의 마음이 아무리 부드러워도 그것은 성령의 역사 없이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온유함을 회복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딱딱한 마음이며, 거듭난 자의 마음은 아무리 딱딱해도 진실한 참회를 통하여 부드러움을 회복할 수 있는 상대적으로 굳음이 남아있는 마음이다. 마음의 굳어짐은 이미 행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적인 성격이 깃들여 있다. (신2:30)
20.마음이 완전히 굳은 이유
아직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견고하고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 부서져 본 적이 없는 완전히 굳은 마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에 어떤 감수성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동받을 수 있고, 감명 깊은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펑펑 흘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의 예민함은 모두 세상과 속된 것에 대한 마음의 부드러움입니다. 본질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견고하고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 부서져 본 적이 없는 딱딱한 마음입니다. 이처럼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이 완전히 굳은 이유는 첫째는 영적인 어두움 때문이고, 둘째는 사단 때문이고, 셋째는 허물과 죄로 말미암는 죽음 때문이고, 넷째는 완악함 때문입니다.
21.밀가루 반죽 같은 신자의 마음
가난하던 시절에는 수제비를 많이 끓여 먹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그 음식을 많이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시절 집집마다 부엌 찬장 한 구석에는 언제나 젖은 헝겊으로 싼 밀가루 반죽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어머님들은 찬거리가 마땅하지 않거나 쌀이 넉넉하지 않을 때면, 그 밀가루 반죽을 뜯어 넣고 수제비를 끓여 주시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 밀가루 반죽을 젖은 헝겊으로 덮어놓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겉이 바짝 마르면서 딱딱한 껍질이 생겨나게 됩니다. 처음 반죽을 해 놓았을때는 살짝 눌러도 손가락이 들어갈 만큼 부드러웠는데, 한동안 건조한 곳에 두면 딱딱하게 변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마음도 이처럼 변합니다. 거듭 나서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부드러운 마음이지만, 은혜의 영향으로부터 멀어지면 곧 굳은 마음이 됩니다. 때로는 그 굳어짐이 너무 심해서 신자의 마음이 저렇게까지 완고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길 정도로 악하게 되기도 합니다.
22.굳은 마음과 부드러운 마음의 차이
히브리어 성경의 표현대로라면 굳은 마음은 ‘돌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부드러운 마음은 살코기의 마음입니다.
돌멩이에는 칼을 꽂을 수 없을 것이지만, 고기에는 잘 꽂힐 것입니다. 부드러운 살코기는 손으로 주무르면 주물러지고, 칼로 썰면 썰립니다. 그러나 돌멩이는 주물러도 주물러지지 않고 썰어도 썰어지지 않습니다. 굳은 마음과 부드러운 마음의 차이가 바로 이렇습니다.
우리들이 지켜야 할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이라는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을 때, 지키도록 지시받고 있는 마음은 바로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셔서 은혜 안에 두심으로 부드럽게 된 살코기와 같은 마음입니다.
23.하나님의 생각에 예민한 마음
이 세상에서 신자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 무엇일까요?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는 빛의 자녀들의 참된 보람이 무엇일까요?
우리같이 천한 피조물, 한때 걸레처럼 하나님을 버리고 죄의 길에서 그분을 대적하던 우리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마음을 물려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분의 소원을 마음에 품고 그분이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살고 싶으셨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아, 이 얼마나 커다란 행복입니까? 죄인들에게 얼마나 가당치 않은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당신의 마음을 전해 주시고 우리는 그 마음을 담고 살아가는 관계가 되었다니 말입니다. 한때 낙원의 주인이던 아담과 하와도 부러워할 일이며, 하늘의 천군 천사도 시기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4.하나님의 정서에 쉽게 흔들리는 마음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하나님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건성으로 빈말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해 간절한 정서를 가지고 말씀을 통하여 당신의 성품과 의지를 보이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분투하면서도 간직할 가치가 있는 부드러운 마음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쉽게 영향을 받는 마음입니다.
25.부드러운 마음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고 있는 삶의 방향을 돌이키고자 하실 때에,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보이심으로써 마음에 영향을 주신다. 신자가 부드러운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가 하나님과 꼭 같은 생각, 정서, 그리고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단지 마음의 상태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깊이와도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마음은 하나님의 생각과 정서, 그리고 의지에 쉽게 움직이는 동시에 세상에 대하여는 둔감하여 잘 영향을 받지 않는다.
26.상하고 통회하는 마음
신자의 부드러운 마음은 대체로 자기 안의 부패성과 죄로 말미암아 굳어지게 되고, 이렇게 굳어진 신자의 마음은 상하고 통회함으로써 부드러움을 회복하게 됩니다.
상한 마음은 영적으로 각성된 마음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 자각하거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 등을 생각하거나, 자신의 영혼의 비참함을 깨닫게 되거나, 혹은 이제껏 계속되던 죄에 대한 집착의 허무함을 인식하게 될 때에 상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통회하는 마음은 깨어진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 깨어짐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가 얼마나 하잘 것 없는 것인지를 알게 하고, 죄에 대한 사랑을 버리게 하는 마음입니다.
27.율법에 대한 설교
조국 교회가 정말 풍성한 생명, 복음으로 말미암는 은혜와 긍휼이 이 땅에 물 붓듯이 부어지기를 원한다면 죄에 대하여 분명하게 설교해야 합니다. 율법을 통하여 무엇이 죄이고 어떤 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지에 대하여 강력하게 설교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죄의 결국이 무엇이고 어떤 하나님의 엄위로운 심판이 예비 되어 있는지를 설교하여야 합니다.
죄인들은 그러한 진리를 깨닫고 상한 마음이 되어야 하고, 교회는 그 상한 마음을 가진 뉘우치는 죄인들에게 복음으로써 은혜의 피난처를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오늘날 조국교회에서 은혜를 갈망하는 상한 마음과 진실한 참회가 현저히 드물게 된 것은 율법을 제대로 설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28.하나님의 말씀에 예민한 마음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그릇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지적 탐구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신자의 마음이 부드러울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격적인 지각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진리는 잘 깨달아지고 풍부한 인격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분의 마음을 느끼고 의지에 굴복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예민한 마음입니다.
29.부드러운 마음과 완고한 마음
부드러운 마음도 완고한 마음도 서로 성장하려고 합니다. 말씀과 성령의 감화, 그리고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마음의 경험을 통하여 신자의 완고한 마음은 부드러움을 회복해 가고, 죄와 유혹에 대한 굴복, 은혜의 영향력으로부터 멀어짐의 경험을 통하여 부드러운 마음은 완고해져 갑니다.
30.버려야 할 마음-강퍅한 마음
신자가 마음이 강퍅해지면 가장 고통받는 것은 신자 안에 있는 영혼입니다. 마음이 걍팍해지고 나면 거룩한 기쁨이 없습니다. 생명의 근원은 마르고, 하나님과의 관게는 깨뜨려지며, 강퍅한 마음은 차갑습니다. 영혼에는 평안이 없고, 죄의 낙도 사라졌습니다. 그는 비로소 죄의 열매를 마음으로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뿌릴때의 즐거움은 사라지고 피나는 고통으로 가시와 엉겅퀴를 거두는 것입니다.
31. 십자가의 사랑이 마음을 녹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마음이 이렇게 강퍅한지요. 정오의 햇빛보다 더 찬란한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났고 헤아릴 수 없는 죄가 안팎에 있는 우리들을 위해 아들을 죽이심으로 우리를 용납하셨는데, 왜 우리는 잔인하도록 무덤덤한 생을 이어가야 하는지요.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어린양의 보혈을 통해 드러났거늘 어떻게 우리가 냉랭하게 살 수 있습니까? 그 사랑을 아직 모르는 이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갈지라도 구원받은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마음이 굳어질 때마다, 참회가 어렵게 느껴질 때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32.금광보다 더 비싼 약수터
몇 해 전 잡지에서 전국의 유명한 약수터를 특집으로 다룬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중 한 기사를 보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좋은 약수가 나오는 우물 하나에 십억원에서 이십억원에 이르는 가격에 거래되었는데, 그것은 시시한 금광보다 비싼 금액이라고 합니다. 그나마 구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내놓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특별한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세월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좋은 물을 찾기 위하여 더 많은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려고 할 것입니다. 환경의 오염이 심각할수록 맑고 좋은 물을 마시고 싶은 인간의 욕구는 증대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물만큼 건강한 생명에 필수적인 것도 흔치 않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영적 생명에 대한 마음의 관계는 사람의 인체에 대한 생수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또 다른 별명은 ‘마음 지킴이’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33.삶의 근원으로서의 마음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마음 은 둘 사이에 존재하는 기능으로서 육체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하고 영혼으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마음을 통하여 자기의 인격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권을 갖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존재와 삶은 그 사람의 마음의 열매입니다.
악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악에서 악을 내며 죄 가운데서 살지만,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행하며 살아갑니다. 더욱이 그러한 마음의 방향과 삶의 지속적인 실천은 그의 인격을 형성합니다.
34.불신자의 마음
성경에서 악인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타락한 본성의 지배를 받는 사람, 더 본질적으로 마귀의 지배 하에 있는 사람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자기가 우주의 중심이고 자신의 행복이 존재의 초고 가치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마음이 바로 죄의 지배를 받는 불신자의 마음입니다.
35.두 가지 소원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죄에 대해 각성하고 상한 심령이 되고, 이어서 심령이 깨뜨려져서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 두 가지 간절한 소원을 마음에 품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싶다는 소원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구원이 완전하고 온전한 구원이기를 바라는 소원입니다.
전자는 자신의 존재와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고, 후자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를 통하여 자신의 구원받은 상태를 온전히 하고 싶은 갈망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성화에 대한 신자의 열망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성화는 신자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이루어야 할 의무인 동시에 특권입니다.
36 가슴을 따뜻하게 하라 1
완고한 마음은 단번에 깨어지지 않습니다. 상한 마음이 통회하는 마음에 이르는 길이라면, 따뜻한 마음은 상한 마음에 이르는 길입니다.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우선
자신을 신앙적인 분위기 안에 두는 것입니다. 비록 가슴을 치며 뉘우치게 하는 심오한 회개가 없다 할지라도 차가운 마음을 덥혀 줄 수 있는 신앙적인 분위기는 신자로 하여금 각성에로 가까이 다가가게 합니다.
불신앙적이고 세속적인 분위기는 신자의 굳어진 마음을 더욱 차갑게 하지만, 신앙적인 분위기는 그의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좋은 경건서적을 읽는다든지, 경건한 사람들의 전기나 일기 같은 것을 읽는 것도 따뜻한 마음을 갖게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37.가슴을 따뜻하게 하라.2
은혜로운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마음을 따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신자의 마음이 걍퍅해지면 따뜻한 은혜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마음에 어울리는 환경을 가장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 각성하고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음이 가난해지면 신자는 은혜 받은 성도들과의 아름다운 교제를 통해 자신의 영혼의 벌거벗음과 곤고함을 인하여 아파하고 그들과의 교제 속에서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얻고자 하는 갈망을 갖게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늘 거룩한 성도의 교제 안에서 생활해야 하지만, 자신의 마음이 굳어져 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에, 더욱 자신을 은혜로운 지체들과의 교제 안에 두도록 힘쓰는 한편, 세속적인 모임을 통한 마음의 굳어짐을 경계하여야 합니다.
38.가슴을 따뜻하게 하라 3
찬양이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합니다. 비록 찬양이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심오한 죄에 대한 각성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한 다고 할지라도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상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39.머리는 차갑게 하라
완고하게 굳어진 신자의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머리를 차갑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슴을 따듯하게 하는 것이 정서에 대한 것이라면, 머리를 차갑게 하는 것은 지성에 대한 것입니다. 영혼의 변화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깨닫는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40.무릎을 꿇으라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깊이 상하게 하시고 아프도록 통회하게 하셔서 마음의 완악함을 제거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깨어지려는 자들을 깨뜨리십니다.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짐승처럼 사는 즐거움을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 하지말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행복을 누릴 것을 기대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41.만리장성
처음 중국에 가서 만리장성을 보았을 때, 두 가지를 생각하며 새삼 놀랐습니다. 하나는 그 성의 길이가 진짜 만 리, 곧 4천 키로미터가 넘는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중국 같은 큰 나라가 변방의 야만족들을 그토록 경계하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신자의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상하고 통회함으로써 마음의 부드러움을 되찾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렇게 부드러워진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신자들보다는 굳어진 마음을 가진 교우들을 훨씬 더 많이 만나게 되는 경험도 이와 같은 사실을 잘 말해줍니다.
42.두려워 하라
신자는 자신의 마음이 지금은 부드러워도 곧 강퍅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이 두려움은 공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근신하며 살게 하는 마음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부드러운 마음이 되고 나면 그러한 영혼의 상태가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한 안전감은 자기의 마음을 지킴에 있어서 방심을 불러오고, 방심은 이미 실천하고 있는 개인 경건의 삶의 능력을 앗아가고, 영적 생활의 초점을 흐리게 합니다. 나아가서 거룩한 긴장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참여하는 은혜의 수단들을 통해서 받는 영혼의 유익을 감퇴시킵니다. 환경과 사람에 의하여 마음이 잘 나뉘게 하고 작은 일에도 금방 낙심하거나 쉽게 마음이 부요해지게 합니다.
43.종말의 가능성에 대하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강퍅한 마음 때문에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친교의 행복도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보람도 없이, 세상적인 욕심에 마음을 빼앗기며 육신만을 위하여 살다가 그분을 뵙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우리는 그렇게 부끄럽게 주님 앞에 선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인하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부끄럽고 마음 아픈 일이 될까요?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고 큰 나팔이 울려나며 영광 가운데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실 때에, 어린아이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의 그 분되심을 인하여 말할 수 없이 기뻐하지 못하고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가려야 한다면 얼마나 슬플까요?
44.어떤 경우에든 죄는
죄는 부드러운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원인입니다.
부드러움을 잃은 부드러움을 잃은 굳은 마음이 죄를 짓게 하는 원천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범죄를 통하여 신자의 마음은 부드러움을 잃어버리고 딱딱하게 굳어지기도 합니다.
그것이 큰 죄이든지 작은 죄이든지 양에 있어서는 다르다 할지라도 질적으로는 모두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과 반역이며,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며 섬기기에 모자라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죄는 우리의 마음을 강퍅하게 합니다.
45.죄와의 싸움을 포기한 그리스도인
아아, 오늘날 조국 교회는 죄와의 싸움을 포기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오늘날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교회는 다니지만 실상은 하나님 없는 것 같은 삶을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즉각적인 구원이 도 다른 점진적인 구원의 시작임을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말미암은 구원이 단지 우리를 천당 보내기 위함이라고 생각하고, 이신칭의의 교리를 죄 가운데 계속 살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잘못된 안전감을 얻는 근거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신앙의 본질이 너무나 낯설고 멀게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46.영광스러운 승리의 소식을 들으며
대낮같이 밝은 은혜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지만, 예전에 짐승처럼 살던 저같이 아직도 그렇게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만족도 없고 죄로 말미암는 만족도 없이 핏기 잃은 얼굴로 살아가는 조국 교회의 많은 그리스도인들로 인하여 이 글을 쓰는 제 마음은 아프고 뺨에는 눈물이 흐릅니다.
아아, 왜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할까요? 누가 저들에게 복음을 알게 할까요? 누가 저들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시려는 불붙는 사랑을 알게 할까요? 우리 모두가 죄를 이기도 찬란한 지식의 빛과 은혜의 불 아래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날마다 육체를 이기고 죄를 이긴 지체들의 영광스러운 승리의 소식을 들으며, 좋으신 하나님만을 찬송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47.부유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축복으로 부유하게 되었을 때 그것을 조금은 누리면서 살아가도 잘하는 것입니다. 좀 더 나은 집에서 다소간 안락한 환경을 가질 수 있고, 자녀들에게 조금 더 나은 교육환경을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경제적으로 윤택해져서 생활의 여유가 있게 되면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의복이나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축복을 누리며 사는 것은 결코 악한 것도 아니고 죄도 아닙니다.
그러나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이 신자의 인생의 목적일 수 없다는 것과, 그 ‘누림’이 결코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48.위선
신자의 마음을 굳어지게 하는 위선은 마음 드림이 없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외식에서 오는 것입니다.
원래 외식이란 ‘그 신자 안에는 없는 신앙적인 정서에 어울리는 종교적인 행동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좋은 평판이나 비난에 대한 기대 때문에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위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범위가 더 넓습니다. 그리고 이 위선의 악은 신앙의 초보자들보다는 오래된 신자들이 범하기 쉽습니다.
49.위선적인 신앙인의 5가지 어려움
위선을 통해서 마음 바침이 없는 신앙생활이 일상화된 사람들의 어려움은 크게 다섯 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의 삶이 진실함과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위선이 일상화된 사람들에게는 참회와 거기에서 비롯되는 자기 깨어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의 결과로서 그의 내면에는 거룩함에 대한 욕구가 없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따라서 자기의(自己義)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50. 힘쓰라
강퍅해진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치 않지만, 부드러운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가 필요합니다.
부드러운 마음을 유지하기 위하여 십자가 특별히 힘써야 할 것은
첫째로 순종학기를 힘서야 하고
둘째로 정사(精査)의 실천을 힘써야 하고
셋째로 거룩한 교제를 우지하기를 힘써야 하며
넷째로 은혜의 방편에 참여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51.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합니다.
순종하면서 살기 위해 힘쓰는 사람도 불순종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불순종을 인하여 마음 아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백한 뜻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아파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허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더욱 간절히 구합니다. 그래서 그 실패가 오히려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진실한 참회를 통하여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는 기회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신자의 마음을 쇄신시키고 부드러운 마음을 유지해 나가게 하십니다.
52.영성일기 쓰기
여러분들은 기라성 같은 위대한 영적 인물들이 신앙 일기를 쓰는 일에 그토록 열심을 내었던 것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일기나 잡다한 신변의 기록들, 주고받은 편지, 혹은 참회록 등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바는 그들은 자기의 삶을 가혹하리 만치 철저히 살핀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살기 위함이었습니다. 삶에 공들이지 않는 뛰어난 영성은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신의 삶에 대한 엄격함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풍성히 누릴 수 있었습니다. 마음의 죄와 정욕들은 발전하기 전에 발견되었고, 자기 안에 있는 성령의 은혜로 효과적으로 그것들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아침저녁으로 깨끗이 소재 되는 작은 방과 같았습니다.
53.신자의 소명은 거룩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아무리 세월이 많이 흐르고 세상의 풍조가 바뀌어도 신자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은 어제나 오늘이나 항상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닮기를 원하십니다.
성화의 은혜, 수많은 신앙의 선진들이 그 안에서 거룩한 안식을 누렸고 하나님께 사랑 받는 삶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그 성화의 은혜 안에서,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불꽃같은 삶에 대한 소명을 느꼈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이제껏 거룩한 삶을 살아보려고 애를 쓴 사람들도 있지만, 무지와 게으름으로 성화에 대한 소명을 심각하게 느끼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의 영혼에는 어두움이 찾아왔고, 신앙생활의 패배는 숙명처럼 받아들여져야 했습니다.
54.하나님의 소원
지금도 우리 안에서 예수의 생명이 넘쳐서 강물과 같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 흐르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가득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 아닐까요? 이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은 우리의 작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신자의 가장 힘써야 할 가장 큰 의무가 마음 지킴인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오직 그 마음을 주님만이 홀로 점령하셔서 이 어두운 세상에서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치 당신의 마음에 우리 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우리 마음에 주님 밖에 없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온 세상보다도 우리의 한 사람이 드리는 순전한 마음을 더 기뻐하시는 주님이시기에... ⓒ김남준 (열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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