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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의 <대학중용읽기>를 읽다

책을 읽으면서 밑줄친 부분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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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문의 목적

학문에는 목적이 있다. 그러기에 학문을 길(道)이라고 하는 것이다. 학문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서울에 가려고 서울 가는 길을 걷는 것이지 서울 가는 길을 가려고 서울 가는 길을 걷는 것은 아니다.
배워서 남 주느냐는 농담이 한때 유행했지만 저 혼자서만 간직할 때 이미 그 앎은 앎이 아니라 썩은 고름 덩어리다. 지적 소유권이란 단어는 아마도 틀림없이 누군가가 악마의 사전에서 훔쳐온 것일 게다.
천지자연은 그 자체가 거대하고 세밀하여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질서다. 이 순서를 거꾸로 뒤집는 것이 작위요 인위다.
봄이 지나면 여름이다. 세월은 결코 여름에서 봄으로 흐르지 않는다. 싹이 난 뒤에 줄기가 자라고 줄기가 자란 뒤에 꽃이 피고 꽃이 핀 뒤에 열매가 맺히고 열매가 맺힌 뒤에 열매가 익는다.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다.
사람이 이 순서를 좇아서 먼저 할 일을 먼저 하고 나중에 할 일을 나중에 한다면, 그렇게 했다면, 오늘의 공해지옥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철에 따라 바뀌는 자연의 순서를 배우고 익혀 바야흐로 그 ‘철’이 몸과 하나로 되는 것을 “철든다”고 한다. 글공부란 문자를 많이 외는데 있지 않고 자연의 엄연한 순서인 ‘철’과 하나로 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2.먼저와 나중

아기가 태를 열고 세상에 나올 때에는 정수리가 먼저 나오게 되어 있다. 이 순서를 뒤집어 발바닥부터 나오게 되면 모든 것이 엉망으로 되어 자칫 생명을 잃는 수도 있다.
사람이 먼저요 돈이 나중이다. 이 순서가 뒤집어지니까 자식이 아비를 칼로 찔러 죽이고 사람들 눈이 뒤집혀 도무지 보이는 것이 없게 된다.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 세상은 날마다 난리 통이요 뒤죽박죽 아수라장이다.
하느님이 먼저요 사람이 나중이다. 이 순서를 뒤집어 놓는 바람에 곳곳마다 전쟁이요 굶주림이요 온갖 쓰레기로 강산이 썩고 있다. 일에는 시(始)와 종(終)이 있다. 씨를 뿌린 뒤에 열매를 거둔다.

3.명명덕(明明德)

현상은 언제나 가장자리 거죽에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원리인 중심은 언제나 속에 있다. 사람은 현상을 보고 곧잘 속지만 하느님은 중심을 보신다. 사람도 속지 않으려면 현상을 보지말고 중심을 보아야 한다. 바다 속 모래알을 헤아리느라고 아까운 정력 소모하지 말고, 제 몸의 거대한 철벽 은산을 꿰뚫어야 하다. 거추장스런 인사치레 집어치우고 곧장 사람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느님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인간들이 붙여 놓은 지저분한 설명들에 걸리지 말고 단도직입으로 하느님의 중심에 들어갈 일이다.

4.수신제가치국평천하

사물에 닿아 그 이치를 꿰뚫어 본 뒤에 참된 지식에 이르고
참된 지식에 이른 뒤에 뜻이 정성스러워지고
뜻을 정성스럽게 한 뒤에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을 바르게 한 뒤에 몸이 닦이고
몸을 닦은 뒤에 집안이 가지런해지고
집안을 가지런하게 한 뒤에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를 다스린 뒤에 천하가 평정된다.

아기를 낳고자 하면 먼저 배어야 한다.
아기를 배고자 하면 먼저 남자와 여자가 만나야 한다.
그래서 수신(修身)이 배꼽이다.

5.먼저 할 일

학부모들이 모여서 함께 머리를 짜낼 일은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공부를 잘해서 좋은 학교에 들어가도록 할 것이냐가 아니라, 물론 그런 궁리도 해야겠지만, 그들이 모여서 ‘먼저’ 할 일은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부끄러울 게  없는 훌륭한 부모로 살아갈 수 있을까를 함께 생각해보는 것이다. 사람들이 저마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 생각한 바를 실천코자 애쓴다면 세상이 이토록 어수선하고 살기 힘들어질 까닭이 없다.

6.안 되는 일이 없는 사람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

7.나날이 새롭게

자기를 새롭게 하는 것은 곧 세상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왕이 새로워지면 그것은 곧 나라가 새로워지는 것이요
목사가 새로워지면 교회가 새로워지고
아비가 새로워지면 집안이 새로워진다.

8.꾀꼬리 소리

해맑게 지저귀는 꾀꼬리 소리가 저 언덕 모퉁이에 살고 있다.
산 깊고 숲 무성하여 새들이 깃들일만한 곳이다.
새들이 비록 미물이라고 하나 제가 머물 곳을 바로 알거니와
사람이 되어서 새만도 못해서야 쓰것는가?

천하만물이 모두 조물주의 명에 화답하여 존재하는데
홀로 인간만이 그것을 거역한다.
세상에 공해물질을 만들어내는 종자는 인간뿐이다.
인간만이 저 있을 자리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다가 끝내는 자기와 세상을 함께 파멸로 이끌어간다.

9.사람 되기

개미를 연구해도 좋고 산야초(山野草)를 연구해도 좋고 하늘의 별을 연구해도 좋고 사람을 연구해도 물론 좋다. 어느 것을 택하였든 깊이 파고 들면 마침내 천리(天理)로 통하게 마련이다. 문제는 개미든 메뚜기든 산야초든 별이든 그것을 통해 무궁한 ‘깊이’로 들어가지 않고, 번잡한 거죽 현상에만 매달려 알기는 참 많이 아는데 진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도 모르는데 있다.
가장자리 거죽에서만 기어다니면, 지구를 몇백 번 돌고 돌며 유학에 유학을 거듭해도 그래서 박사 학위를 몇 개씩 딴다해도, 미안 하지만 사람 되기는 아직 멀었다. 이(理)는 물(物)마다 있되 그 중심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10.수신(修身)의 첫걸음

고약한 냄새가 나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코를 막고 상을 찡그리며, 아름다운 여인이 눈앞에 있으면 역시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한번 더 쳐다보게 되거니와 이는 뜻을 따로 품지 않으면서 뜻을 품고 있는 모습이다.
따라서 뜻을 성(誠)하게 하라는 말은 사사로운 뜻을 앞세우지 말라는 말과 같다. 자신의 뜻을 스스로 살펴 삿된 꿍꿍이속이 섞이지 않도록 삼가 조심하는 일이 수신(修身)의 첫걸음이다.

11.소인(小人)과 대인(大人)

소인은 어째서 소인인가? 제 장단에 춤추지 못하고 남의 장단에 놀아난다. 군자는 어째서 군자인가? 남의 장단에 놀아나지 않고 제 장단에 춤을 춘다.
소인은 남의 눈치를 좇아서 사는 까닭에 저 혼자 있을 적에는 온갖 못된 짓을 다 하다가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면 시치미를 떼고 자신의 불선은 감추면서 조금 있는 선은 침소봉대로 드러낸다.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선은 좋고 불선은 나쁘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알고 있으니 무슨 소용인가? 행실이 그 알고 있는 바와 상관이 없거늘, 오히려 기왕 있는 불선에 위선이라는 더 고약한 불선 하나를 보탤 따름이다.
그렇게 속 다르고 겉 다르게 처신하여 통하는 세상이라면 그런 대로 넘어갈 수 있을는지 모르겠으나 문제는 속이는 자 속는 자 모두가 뻔히 상대 속을 허파 들여다보듯 본다는데 있다.

12.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없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짓을 대낮에 광화문 네거리에서 똑같이 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노상 자신에게 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네 삶이 과연 ‘빛 가운데 걸어가는’ 밝은 삶으로 될 것이다.
그래서 누구 말인지 모르겠으나, 혼자 있을 때에는 많은 사람에 에워싸여 있다 생각하고, 많은 사람에 에워 쌓여 있을 때에는 혼자 있다 생각하라고 했다. 이는 행실을 삼가 조심하되 남의 이목에 좌우되지는 말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남이 어찌 보든 상관없이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굴어서도 안 된다는 권면이라 하겠다.

13.먼저 할 일 먼저 하고

재물이 많으면 집이 번들거리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속에 덕이 있으면 몸이 빛나게 되어 있다. 꽃은 벌, 나비를 불러야 하니까 겉으로 곱게 빛나야 한다. 그런데 만일 나무 뿌리가 썩거나 줄기에 병이 들었다면, 꽃은 피기도 전에 시들어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 꽃의 아름다움은 꽃 자체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속에 있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온다. 속에 분노가 일면 얼굴이 붉어진다. 얼굴이 붉어져서 화가 나는 법은 없다.
먼저 할 일 먼저 하고 나중 할 일 나중 하면 그 사람은 도에 가깝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몸맵시를 가꾸기 전에 반드시 먼저 마음을 다스린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먼저다.

14.얼마나 재미있는가?

모든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리로 돌아간다. 보이는 것은 말末이요 보이지 않는 것이 본本이다.
몸은 보이고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주먹질은 보이고 성난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본本을 먼저 다스려야 말末을 다스릴 수 있다. 그래서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한 뒤에 몸을 닦는다”고 했다.
그런데, 얼마나 재미있는가? 그 마음을 다스리는 수련장이 곧 우리 몸이요, 몸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마음을 닦을 수 있으니!

15.중심

내가 얼굴에게 묻는다.
“내 중심은 배꼽이다. 얼굴아, 네 중심은 어디냐?”
“코올시다.”
“너는 내 몸 아니더냐? 다시 묻는다. 얼굴아, 네 중심은 어디냐?”
“배꼽이올시다.”  

16.열매를 맺으려면 뿌리에 거름을 주어라

나라가 어지러우냐? 국회의사당을 쳐다보지 말고 눈을 돌려 네 집안을 들여다 보라. 집안이 어지러우냐? 식구들 쳐다보지 말고 눈을 돌려 네 자신을 들여다보아라. 몸이 병들었느냐? 눈을 돌려 마음을 들여다보아라.
예수님 비유에서, 포도나무에 몇 년 동안 열매가 달리지 않자 주인이 포도원지기에게 나무를 베어버리라고 했을 때 포도원지기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열매는 가지 끝에 달린다. 그러나 나무에서 열매를 맺고자 할진대, 가지 끝이 아니라 그 뿌리에 거름을 주어야 한다. 모든 열매가 뿌리에서 비롯되어 가지에 맺히기 때문이다

17.옆집 할머니보다 새댁이 낫다

새댁이 처음 아기를 낳으면 모든 것이 낯설고 그래서 서툴 수밖에 없다. 아기 기르는 법을 모두 배워 익히고 나서 시집가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기는 서투른 엄마가 기르는 것이 아이를 많이 길러봐서 육아법에 익숙한 옆집 할머니가 돈 받고 길러주는 것보다 훨씬 낫다. 왜 그런가? 엄마에게는 자식에 대한 지극 정성이 있고, 옆집 할머니에게는 그것이 없거나 모자라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이 아니라 중심에 무엇이 담겨 있느냐다. 새댁이라도 성심을 품고 기르면 아기가 잘 자라듯, 성심으로 정치를 하면 정치학 따위 강의를 못 들었어도 백성을 평안히 살게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18.너나 잘해라

요순이 어짊(仁)으로 세상을 다스리니 백성이 모두 어질게 살았고
걸주가 사나움으로 세상을 다스리니 백성이 모두 사납게 살았다.
위에서 명령을 내리는데 스스로 좋아하지 않는 것을 명하면 백성이 그 명을 따르지 않는다. 예컨대, 저는 불의하거나 말거나 이득을 탐하면서(좋아하면서) 백성에게 손해를 보더라도 공의롭기를 명한다면, 누가 그 명령에 복종하겠는가? 그런 까닭에 군자는 먼저 자기한테 착한 마음과 행실이 있은 뒤에 남한테 착하게 살기를 요구하며, 먼저 자기한테서 포악함을 없이 한 뒤에 남의 포악함을 나무라는 것이다.

19.황금률과 충서(忠恕)

나에게 싫은 것은 남에게도 싫고
나에게 좋은 것은 남에게도 좋다.
진리는 이렇게 단순 소박하다.
바로 이것이 예수의 황금률이며 공자의 충서(忠恕)이다.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복음7:12)

20.혈구지도(?矩之道)

윗사람한테서 싫은 것으로써 아랫사람을 부리지 말고
아랫사람한테서 싫은 것으로 윗사람을 모시지 말고,
앞사람한테서 싫은 것으로써 뒷사람을 앞서지 말고,
뒷사람한테서 싫은 것으로써 앞사람을 따르지 말고,
오른편사람한테서 싫은 것으로써 왼편 사람을 사귀지 말고,
왼편사람한테서 싫은 것으로써 오른편 사람을 사귀지 말라.
이렇게 하는 것을 일컬어 혈구지도(?矩之道)라 한다.

21.재물이 없어서 가난한 것이 아니다

나라에 재물이 없어 가난한 것이 아니다. 덕(德)이 없어서, 덕 있는 사람의 다스림이 없어서, 그래서 가난하다.
공자도 말한다.
“재물 적은 것을 걱정하지 말고 고르게 쓰이지 않은 것을 걱정하라”
지구에 먹을 것이 없어서 하루 4만 명씩 오늘도 굶어 죽는 게 아니다. 그것을 함께 나누는 덕행이 사람들한테서 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대통령 된 자가 수덕은 나 몰라라 던져두고 틈나는 대로 재물 긁어모으는 데 혈안인데 나라꼴이 잘 될 까닭이 없다. 그래도 옛날 중국에서는 임금이 재산을 긁어모으면 백성이 흩어져 다른 나라로 갈 수 있었지만, 요새는 나라 돌아가는 꼴 보기 싫어 어디 다른 데로 떠나고 싶어도 그조차  맘대로 되지 않는다.

22.나무를 옮겨 심을 때

나무를 옮겨 심을 때 사람들은 가지를 친다.  약해진 뿌리를 살리고자 가지를 희생하는 것이다. 가지를 살리려고 뿌리를 자르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이 나무 옮기는 일은 제법으로 하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데는 온통 거꾸로들 하고 있으니, 이러고도 과연 인간을 만물지장이라 할 수 있을까?
돈이 먼저냐 사람이 먼저냐? 종로통을 막고 물어보면 입 달린 사람마다, 그야 사람이 먼저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시방 이 나라는 돈보다 사람이 먼저인가?
민망스럽기 짝 없는 일이지만 “아아 우리의 자랑 대한민국”은 문자 그대로 자본주의 세상이다. 물자가 나라의 근본으로 된 세상이란 말이다. ‘자본주의’는 우리의 경제,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머물지 않고, 문화. 예술. 종교. 사회. 교육 등 삶의 모든 내용을 지배하는 총체적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23.참으로 어진 사람은

참으로 어진 사람은 사람을 가려서 사랑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하늘이 사람을 가려서 덮어주지 않고 땅이 사람을 가려서 실어주지 않으며 해와 달이 사물을 가려서 비추지 않는 것과 같다. 그는 다만 그렇게 자신의 참모습을 지키며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 그 존재가 누구에게는 ‘사랑’이 되고 누구에게는 ‘미움’이 되는 것이다. 같은 햇빛이 소나무에게는 생기가 되고 버섯에게는 살기로 되듯이. 그리스도 예수는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다만 자신의 길을 그렇게 갔을 뿐이다. 그런데 그 ‘길’이 누구에게는 구원의 사다리가 되고, 누구에게는 죽음의 함정이 되었다.

24.긴 말이 필요 없다

똥 있는데 구더기 끓고
꽃밭에 나비 모인다.  

25. 도道는 길이다

길이란 사람이나 짐승이 밟고 다니는 것이다.
길을 따라서 다니면 잘 다닐 수 있거니와 길을 잃으면 고생만 하다가 생명을 잃는 수도 있다. 길을 찾으면 살고 잃으면 죽는다. 길이 곧 생명인 까닭이다. 그래서 예수는 ‘길’이요 ‘생명’이라고 하셨다. 생각건대 참 대단한 선언이다.

26.내가 여기 있음은

내가 여기 있음은 이미 하늘로부터 받은 바 명命이 있기 때문이요, 아직 죽지 않은 것은 아직 그 명命을 좇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밥먹듯이 하늘의 명(天命)을 어기고 있지만, 내 ‘몸’은 아직까지 한순간도 그것을 어긴 바 없다.
붉은 피는 끊임없이 생성 소멸되면서 혈관을 따라 돌고 있으며 염통과 허파는 한번도 스스로 멈추지 않았다. 썩은 음식을 먹으면 위장은 어김없이 통증을 일으켰고 수염은 아무리 잘라도 지치는 법 없이 자랐다. 염통도 위장도 수염도 저마다 하늘의 명(天命)을 어기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만일 내가 내 ‘몸’이 복종하는 것만큼 하늘의 명命을 복종하며 산다면, 나는 이미 하늘님과 영생永生을 살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나도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늘의 명을 거스른 결과로 오는 죽음은 아니다. 숨이 멎고 맥박이 그치고 열이 떨어지는 것을 ‘죽음’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 자체가 하늘의 명命에 대한 복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르기를,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요11:25)이라고 하셨다.

27.그러니까 도道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느님의 명命을 어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먹으면 죽는다는 법까지 어기지는 못했다. 사람이 자연의 법을 거슬러 함부로 숲을 까뭉갤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홍수가 나서 재앙이 닥친다는 법까지 어길 수는 없다. 실로 하늘의 도道는 인간이 그것을 좇든지 말든지 한 순간의 멈춤도 틈도 없이 엄정하게 존속한다. 그러니까 도道다. 만일 인간의 어떤 행위에 따라서 있다 없다 한다면 그것은 도道가 아니다.

28. 좋은 나무

나무를 아는 사람은 가지 가꾸는 일에 우선하여 뿌리를 돌본다. 슬기로운 이는 하느님을 보려고 사방을 살피는 대신에, 자기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데 힘쓴다. 예수 이르시기를, 마음이 깨끗하면 하느님을 본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죽어 천당 가기를 소원하기 전에 지금 여기서 제대로 살고자 한다. 오늘의 삶이 내일의 죽음-이후를 결정짓는 줄 알기 때문이다.
군자君子는 행동거지를 삼가는 일에 우선하여 마음가짐을 살핀다. 좋은 열매 맺는 일에 신경 쓰기 보다 좋은 나무가 되려고 애를 쓴다. ⓒ이현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