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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씨와 도둑>은 최용우 개인 책방의 이름입니다. 이곳은 최용우가 읽은 책의 기록을 남기는 공간입니다. 최용우 책방 구경하기 클릭! |
김용택의 <한시산책1>을 읽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사랑하는 님 오시는 밤
굽이굽이 펴리라 -황진이
일년 중 가장 긴 동짓달의 밤을 잘라놓는답니다. 그러니까 홀로 보내는 겨울밤의 막막한 시간을 잘라내어 잘 간직해둔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래서 님과 함께 지내게 될 봄밤에 이어 붙여 길게 보내겠다는 애틋하고도 절실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사랑시입니다. 어느 날 이 시를 읽고 황진이 이후의 사랑시는 없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에서 ‘사랑하는 님’은 서경덕을 말하고 있습니다. 화담 서경덕, 황진이가 별별 수단을 다 써 유혹하려 했으나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고 하지요. 그 후 황진이는 서경적의 제자가 되었구요. -김용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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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과 함께 얼어 죽을지언정
겨울밤 두꺼운 얼음 위에
댓잎 자리 깔고 누워
님과 함께 얼어 죽을지언정
새벽닭아 울지 마라 -김수온
이 남자, 과부집 담을 넘어갔나봅니다. 아니면 이 여자 바람났나 봅니다. 닭이 울면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이 남녀, 정분났군요. 하하.
정분난 사람이여! 얼음 위에 댓잎이라니? 얼음 위 댓잎은 미끄럽지요. 댓잎은 얼음의 냉기를 달래지 못하지요. 사랑과 얼음, 얼음과 사랑 이 둘 다 극과 극이지요. 얼어 죽을지언정... 각오가 대단합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은 사랑. 사람 사는 세상 예나 지금이나 남녀간에 바람 잘날 없군요. 그 일 누가 말리겠습니까? -김용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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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예뻐요 제가 예뻐요?
모란꽃 이슬 머금어 진주 같은데
신부가 꺾어 들고 창가를 지나다
빙그레 웃으며 낭군에게 묻기를
꽃이 예뻐요, 제가 예뻐요?
장난기 가득한 낭군이 답하기를
꽃이 당신보다 더 예쁘구려
그 말을 듣고 토라져버린 신부
꽃을 밟아 뭉개며 말하기를
꽃이 저보다 더 예쁘다면
오늘 밤은 꽃을 안고 주무세요 -이규보
이 두 사람, 오늘 밤 절대 그냥 안 자겠군요.^^ -김용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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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가는 길
물을 건너고 또다시 물을 건너
꽃을 보고 다시 또 꽃을 보며
봄바람 불어오는 강 위 길을 가니
어느 사이 그대 집에 다 닿았네 -고청구
물을 보고
꽃을 보고
다시 물을 보고
또 다시 꽃을 보고
물과 꽃에 마음을 빼앗겼으니
그대에게 이르는 길이
눈 깜짝할 사이였다네 -김용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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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누워
부귀니 공명이니 잠시 잊어요
산 있고 물 있으면 그만이지요
한 간 집이라도 그대와 누워
가을 바람 밝은 달과 오래 살아요. -조 운
달과 산과 물과 한 간 집과 그리고 그대, 이것만 있으면 될까요? 그래요. 그것만 있으면 세상 최고의 행복이지요.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김용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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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 메고 꽃 속에 들다
호미 메고 꽃 속에 들어가
김을 매고 저물 무렵 돌아오네
발 씻기에 참 좋은 맑은 물이
숲 속 돌 틈에서 솟아나오네. -강희맹
한 줄 한 줄이 그림입니다. 시는 그림이지요. 사람들의 일상을 시는 그림으로 그립니다. 시를, 쓰지 않고 그린다는 것은 글이 삶 속에서 나온다는 말이지요. 호미 메고 꽃 속으로 들어간다니, 참으로 행복한 마음가짐이군요. 일터를 꽃에 비유하니 말입니다. 일이 꿀과 같이 단 사람은 그 모든 것이 다 행복하겠지요. 만족한 일, 만족한 삶, 만조간 사랑, 만족한 예술은 다 꽃 속의 꿀과 같겠지요. -김용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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