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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하나님과 동행함

신자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입니다. 이 세상을 부당하게 사랑하는 사람들, 육신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슬픔과 고난이 많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고자 애쓰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전심으로 갈망합니다. 자신이 본향을 찾아가는 나그네일 뿐이라고 믿는 신자에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이상의 가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양보하면서까지 얻어야 할 만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음을 압니다.

2.나그네와 같은 인생 길

우리가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나그네와 같은 인생길에서 우리가 가야 할 하늘 본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이 세상의 성공과 번영, 그리고 자기사랑에 목매인 자처럼 죽음의 두려움에 매여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순례자의 정신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5-17)

3.쓸모 없는 사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전에 돌판에 새겼던 그 법을 하나님께서는 이제 당신의 백성들의 마음에 새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법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하는 삶을 살게 하시고,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순종함으로써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세상을 고치게 하십니다.
이 위대한 일은 하나님께서 신자를 이 세상에 살려두신 유일한 이유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을 누리고 어떤 지위를 얻든지, 얼마나 오래 건강을 유지하며 살든지, 그 인생이 이 목적에 기여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쓸모 없는 사람입니다.  

4.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비록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을지라도 큰사람이며, 비록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을 위해 하잘 것 없어 보이는 일을 거들고 있다 할지라도 하늘나라에서 그의 존재에 대한 평가는 이 세상 사람들의 평가와 같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주의 눈에 보시기에 큰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부귀와 가난함, 높은 지위와 낮은 지위, 긴 수명을 누리는 것과 요절하는 것, 많은 지식을 소유하는 것과 그렇지 못하는 것, 뛰어난 재능을 가진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이 모든 것들은 잠시 지나는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인생의 한 양태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자가 무엇을 하든지, 그는 죄 많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참된 가치를 삶의 양태에서 찾지 말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한 사람, 그는 비록 이 세상에서 하찮은 자일지라도 하늘나라에서는 존귀한 자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이며,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약하나 그와 동행하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크시기 때문입니다.  

5.그리스도인의 정체

자신을 이 땅에서 잠시 지나는 순례자로 자처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참된 신자가 부당하게 하나님보다 이 세상을 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이 모든 것을 다 준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바꿀 수 없고, 이세상의 자원들이 가져다 주는 행복감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좋으신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동안 누리는 그 신적인 달콤함과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영원한 나그네로 자처하며 살고 하나님과 동행해야 할 사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입니다.

6.원리적인 평화

원리적으로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된 사람입니다. 공로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중보자적인 구속에 의하여, 효과적으로는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적용적으로는 신자의 믿음을 통하여 수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평화는 결코 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가 성도답게 살지 못할 때에든지 진실하고 아름다운 헌신신의 삶을 살 때에든지, 적의와 진노의 담을 허무시고 신자와 평화로운 관계 안에 계십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을 싫어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났을 때에도,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화하게 된 것이 아니라 소원(alienation)하게 된 것입니다. 구원받고 하나님과의 평화 속으로 들어오게 된 후,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저의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7. 실제적인 평화

신자가 원리적으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다 할지라도, 실제적으로는 신자 안에 있는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어질 수 있습니다. 마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으나,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을 살게 될 때 양심의 송사와 율법의 정죄를 경험하듯이. 그리고 신자의 불순종과 죄로 인해 깨어진 하나님과의 평화는 참회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함으로 다시 회복됩니다.
누구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는 모두 이러한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함으로 그분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신자가 깨닫게 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깊이는 곧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은혜의 깊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8.공로적인 면에서 하나님과의 평화

하나님과의 평화는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인하여 옵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과 원수 된 자로 이 세상에 태어났고, 하나님을 향한 치열한 적대감이 영혼 깊은 곳에 속속들이 배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우리의 옛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중보자의 구속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보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희망 없는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그리스도께서 당신 몸을 저주받은 십자가에 바치셨기에 우리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릴 때에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려고 고결한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제일 먼저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9.신비한 복음의 방식

하나님께서 흉악한 죄인들에게 다시 화목을 허락하시는 이 신비한 복음의 방식을 보십시오. 아무 공로 없는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자기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죄인들을 도우시는 성령의 은혜로써 죄인들은 다시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부름을 받습니다. 그러한 죄인들에게 다시 화목의 약속을 주심으로 그 약속이 그들의 희망이 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은 단지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의지할 뿐입니다.
아아, 우리같이 쓸모 없는 죄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화목케 하시는 사랑을 보십시오, 우리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거스르고 그분과 원수 된 채 불순종 가운데 산다 해서 하나님께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분은 스스로 계시며 자족하시고 홀로 충만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끊임없이 가까운데 있는 죄인들뿐만 아니라, 먼데 있는 죄인들에게도 화목케 하시겠다는 약속을 베푸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모든 죄인들에게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영원한 찬송 제목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0.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진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많은 자원을 누립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이 땅의 자원들 뿐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데 필요한 영적 은사와 재능도 받습니다. 하나님께 봉사하며 살 수 있도록 이 세상에서 적절한 과업을 주시고 거기에 즐거움으로 자신을 드리게 하십니다. 하늘 은혜의 자원을 주시고 말씀의 빛과 은혜 가운데 살게 하십니다. 기도할 때마다 응답해 주셔서 당신이 살아 계신 것과 복의 근원이 되심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진수는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진수는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나타납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또 다른 세계로부터 오는 만족과 신령한 기쁨 속에 살게 하는 근원은 어떤 자원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과의 친교는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당신 자신을 누리도록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11.커다란 죄악 두 가지

신자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만큼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18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 시대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 시대에 커다란 죄악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우리 안에 샘솟듯 솟아나는 하나님을 향한 즐거움이 없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썩을 세상에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하나님을 거스르며 방종하게 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12.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결정적 특징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고백하고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고백은 허위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기쁨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있어서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기쁨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자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신자를 기뻐하시고 그가 이 땅에서 살아있는 것을 인하여 말할 수 없이 즐거워하신다면, 이 세상이 그를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에게는 어떤 나쁜 일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은 이 세상의 자원을 많이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사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13.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한 갈망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신의 힘에 넘치도록 애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기를 바라는 거룩한 열망이 아니라, 일 자체에 대한 성취의 즐거움 때문에 열심을 내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그 둘이 같아 보일지 모르나, 하나님께는 보석과 돌멩이만큼이나 차이가 나는 것들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실제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바라는 열망을 갖게 되는 것은, 자기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통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신자가 자기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를 맛보고 나면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깨닫게 되고, 거기에서 창조와 구속의 목적에 기여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갈망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한 갈망입니다. 이러한 내적 갈망은 자신이 속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동일하게 드러나도록 갈망하는 마음을 가져다 줍니다.

14.속기 쉬운 자신의 모습

우리는 너무나 자주 우리 자신에게 속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악한 의도를 감추기 위해 스스로를 속이기도 하지만, 죄의 속이는 작용으로 말미암아 미혹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죄에게 우리의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으니 우리가 스스로를 속이는 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시대 때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율법을 지키며 살았고,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예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처럼 율법에 충실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정죄하고 미워하였고, 그것을 자신들이 하나님 편에 선 증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며 살아간 것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자기사랑의 다른 표현이었기에, 율법을 지키며 살아갈수록 자기의만 쌓여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많은 율법을 행하는 가운데 참으로 율법을 통해 드러나야 할 주인공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뵐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자신의 내면의 모습과 그 시대를 보고 아파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열심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5.가장 처절하게 통곡할 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밭에 심겨진 한 알의 밀알입니다.  그가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그러나 죽어야 할 것은 그 사람 자신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자기사랑입니다. 세상에 대한 사랑과 육체에 대한 욕심, 원대한 계획을 가진 욕망들이 죽임을 당할 때, 죄의 경향성을 가진 신자는 아픔을 경험하게 되고, 그 통증은 죽음에 이르는 고통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러한 고통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분의 죽음이 자신의 마음과 삶 속에 실재화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받는 성령의 넘치는 위로와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은 모두 이러한 자기 죽음의 경험과 함께 찾아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가장 아플 때 가장 기쁘며, 가장 처절하게 통곡할 때 환희의 정상에 섭니다.

16.성도의 즐거움은 하나님의 영광

아아, 오늘날 조국 교회를 뒤덮은 이 영적인 냉담함을 어찌해야 할까요? 사람들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을 배우기 전에 다른 것으로 즐거움을 얻는 비결을 교회 안에서 배웁니다. 교회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라고 말하던 담대함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아아,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요. 교회의 궁극적인 사명은 자기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기쁨 때문에, 사무치는 열망으로 이 땅을 고치기 위해 어두운 세상 한복판을 흐느끼며 지나가는 신자들을 만들어 이 세상에 파송하는 것입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을 외치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사는 사람, 하나님을 높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송축하지 않는 이 세상을 인하여 아파하는 사람,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모든 은혜와 자원들을 그 일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들로 만들어 이 세상에 보내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17.죽은 영혼

영혼이 죽어 있다는 것은 최소한 다음 세 가지 사실을 내포합니다.
첫째는 영적 생명의 요소가 결핍되어 있거나 제거된 상태입니다.
둘째는 모든 영적인 것과 신령한 작용에 대해 배타적이거나 그러한 작용들이 결핍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셋째는 영적인 활동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 속에는 영적인 생명의 요소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는 능력도 없고 그 영광을 위하여 주어진 의무를 감당할 힘도 없습니다. 그래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죄에 대해서는 살아있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죽어있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거듭나게 하시고 새 생명의 원리와 경향을 그 사람 안에 심으셔야만,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실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18.은혜살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신자 안에 주시는 영적 은혜는 그가 창조의 목적을 따라 하나님의 선을 추구하며 살게 만들어줍니다. 은혜의 경향성과 창조의 목적은 일치를 이룹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미덕의 삶은 바로 하나님께서 신자 안에 주신 은혜로써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모든 신자들은 자기 안에 주신 새 생명의 원리가 더욱 풍성하게 되도록 자기 안에 있는 은혜의 증진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중생한 신자 안에 두신 영적인 은혜는 세상 끝날까지 결코 완전히 작용을 멈추거나 소멸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는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과 영적 생명의 본성을 따라 살 때 성장하고 번성하게 됩니다.

19.죄 죽임

오늘날 우리는 자신의 죄를 단지 어쩔 수 없는 인간적인 연약함의 자연스러운 결과이거나,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자기 안에 있는 악한 경향성 때문에 입게 된 피해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원죄와 신자 자신 안에 있는 죄를 부인하고 인간의 육욕에 대한 하나님의 율법의 정신을 희석시킴으로써 죄 죽임의 필요성을 실제적으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아아, 이 사람들은 모두 신자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대하여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신자가 죄를 죽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실제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의가 아닌 또 다른 인간적인 의를 고안해 내고 그것으로써 인생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을 행하며 살든지, 그로 인하여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을 어떻게 감동시키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신자가 끊임없이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고 그분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죄 죽임이 끊임없이 실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의 실천을 통해 신자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롭게 됩니다.

20.거룩한 삶의 열매로서의 도덕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밀에 대해 한탄스러울 정도로 무지합니다. 인간의 본성에 호소함으로 말미암아 영혼의 진정한 변화 없이 나타나는 생활과, 신자 안에 성령께서 은혜로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열매 사이를 분간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기대하는 삶이 아닙니다.
인간 본성을 길들여 하나님의 계명에 부합하는 삶을 산다 할지라도, 그것은 기껏해야 성공하면 외식하는 바리새인의 삶을 산출할 뿐입니다. 그들이 본성에 호소된 종교적 촉구를 통해 모든 도덕적 의무를 수행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없을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는 사람들은 영혼의 본질적인 변화를 통해 내면세계가 바뀐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던 사람들이 하나님만 사랑하게 되고, 자기사랑을 인생의 목표로 생각했던 사람들이 십자가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자는 단순한 도덕적 의무감에서 비롯된 복종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 그분의 모든 계명에 순종합니다.  

21.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비밀

오늘날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함을 추구한 결과로서의 도덕적인 삶을, 도덕 자체를 추구하면 얻을 수 있게 되는 도덕적인 삶과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자의 모든 도덕적인 삶은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추구한 거룩한 생활의 열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진정한 내적 변화가 없는 성도들을 도덕적 의무로 내몰고, 심지어 거듭나지도 않은 교인들을 도덕적인 삶을 살도록 떠밂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들을 단지 이념의 머슴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비밀이 있을 수 없습니다.

22.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두 가지 방식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개념적이고 일반적인 방식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의 체험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혹은 이성적 추론에 의해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그 사랑을 받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둘째는 체험적이고 개인적인 방식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이 직접 체험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이성적 추론을 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분의 선하심과 자기를 향한 사랑에 대해 피 어린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23.하나의 원천

하나님과의 평화의 핵심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경험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원천적인 사랑이고, 하나님께 대한 신자의 사랑은 그에 대한 반응적 사랑입니다. 따라서 두 사랑은 하나의 원천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신자는 비로소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는데, 이 사랑은 하나님뿐 아니라 하나님과 애정적 관계에 있는 모든 대상을 포함합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단지 고통스러운 형편 때문에, 혹은 그들을 사랑함으로 자신에게 돌아올지도 모를 어떤 이익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과 애정적 관계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사랑하게 됩니다.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24.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비천한 생명을 위해 당신의 아들을 주셨고, 그 피로 구속하신 후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하늘의 은혜와 성령의 기쁨과 하늘의 자원과 이 세상의 모든 자원을 공급받으며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하게 하셨고, 하나님을 섬기는 보람을 얻을 수 있도록 섬길 자리를 주셨습니다. 어느 때에든지 믿음으로 나아가 그분의 얼굴을 구할 때,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잠시 우리의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고통스러운 침묵의 시간들이 그분과 우리 사이에 흘렀을지라도, 결국은 다시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과 친교를 보이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아아, 하나님의 선하심은 어찌 그리 큰지요. 당신이 사랑하는 백성들 뿐 아니라 당신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과 긍휼을 무엇으로 다 말할 수 있을까요? ⓒ김남준 (열린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