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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읽으면서 색연필로 밑줄을 그은 부분을 쳤습니다.
하늘이 잠잠할 때
죄 없는 인간이 피를 흘릴 때, 하느님은 항상 침묵한다. 그것은
그것은, 말만 앞세우고 실행하지 않는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한 미움이었다. 무수한 공약(公約)을 공약(空約)으로 만들고 살만 찌는 후안무치들에 대한 분노였다.
그것은, 무거운 짐을 꾸려서 남의 어깨에 매어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율법학자들에 대한 미움이었다.
죄 없는 인간이 피를 흘릴 때, 하느님은 항상 침묵한다. 그것은
그것은, 잔치에 가면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회당에서는 즐겨 높은 자리를 찾으며, 길에 나서면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라는,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한 미움이었다.
그것은, 높은 자리를 위해서라면, 진리도 하루아침에 "골동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공무원에 대한 미움이었다.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서라면, 사기도 공갈도 협잡도 매수도 가리지 않고 동원하는 배짱 두둑한 교회 정치배 들에 대한 사무치는 분노였다.
죄 없는 인간이 피를 흘릴 때, 하느님은 항상 침묵한다. 그것은
그것은, 무슨 일이든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한 분노였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신뢰는 허물어져 가건만, GNP의 회칠한 담을 치장하는 데 온갖 심혈을 기울이는 정책 수립자에 대한 증오였다. 신앙의 등불은 사그라져 가건만 붉은 벽돌 흰 벽돌로 하늘을 찌르듯 높다랗게 교회당을 짓는 목사들에 대한 미움이었다.
죄 없는 인간이 피를 흘릴 때, 하느님은 항상 침묵한다. 그것은
그것은, 하늘나라의 문을 닫아 놓고 사람들을 가로막아 서서는,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는 사람 마저 못 들어가게 하고 있는 바리새파 위선자들에 대한 미움이었다. 교회의 문턱에 서서, 니코틴 냄새나는 젊은이들을 족집게로 집듯 집어내는, 예민한 코를 가진 수많은 장로들에 대한 연민 어린 분노였다. 간음하는 여자의 현장을 덮치기 위하여 어둠 속에서 차가운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은혜 받은"여자 신도들에 대한 미움이었다.
죄 없는 인간이 피를 흘릴 때, 하느님은 항상 침묵한다. 그것은
그것은, 겨우 한 사람을 개종시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지만, 개종시킨 다음에는 그 사람을 자기들 보다 갑절이나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고 있는 바리새파 위선자들에 대한 미움이었다. 생기발랄한 젊은이들을 낚아다가 교회의 그물로 얽어매어 협소하고 고집 불통인 근시안(近視眼)을 만들어, 나라와 민족에 대한 책임마저 외면하게 만드는 선교자들에 대한 미움이었다.
죄 없는 인간이 피를 흘릴 때, 하느님은 항상 침묵한다. 그것은
그것은, "누구든지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성전의 황금을 두고 한 맹세는 꼭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눈먼 인도자들에 대한 미움이었다. 그것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대단히 중요한 율법은 무시해버리는 자들에 대한 분노였다.
죄 없는 인간이 피를 흘릴 때, 하느님은 항상 침묵한다. 그것은
그것은, 파리 한 마리는 건져내고 마시면서 낙타는 그대로 삼키는 눈먼 인도자들에 대한 미움이었다. 한 청년 신자의 부정(不正)한 이성교제에는 서릿발같은 제재를 가할 줄 알면서, 나라의 커다란 부정은 눈치조차 채지 못하는 교회 지도자에 대한 미움이었다. 장발족의 머리에는 가위를 댈 줄 알면서 나라의 기둥을 갉아먹는 부정한 장사꾼들은 건드리지도 못하는 당국에 대한 미움이었다.
파리도 건져내야 한다. 물론 부정한 이성교재를 한 청년은 제재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는 아름다운 교제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낙타 또한 걸러내야 하는 것이다. 나라의 부정은 반드시 지적되어야 한다. 큰 부정일수록 그렇다.
죄 없는 인간이 피를 흘릴 때, 하느님은 항상 침묵한다. 그것은
그것은, 회칠한 무덤들에 대한 미움이었다. 속에는 썩은 시체가 가득 차 있는 그런 무덤에 대한 분노였다. 겉으로는 옳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은 불법으로 가득 차 있는 위선자들에 대한 분노였다. 겉은 충신인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날카로운 비수를 품고 왕위를 노리는 자들에 대한 분노였다. 겉은 나라사랑의 화신인 냥 하지만, 속은 나라 팔아먹을 궁리로 가득 찬 매국노에 대한 분노였다. 겉은 법을 지키는데 더 없이 철저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그 법 자체를 인정도 하지 않는 통치자들에 대한 분노였다. 겉은 공정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열심히 주판알을 퉁기고 있는 법관들에 대한 분노였다
죄 없는 인간이 피를 흘릴 때, 하느님은 항상 침묵한다. 그것은
그것은, 여우같은 헤로데에 대한 분노였다. 바른말하는 요한을 감옥에 가두고, 결국은 목을 잘라 죽인 헤로데에 대한 미움이었다, 아첨하는 입들은 10층 20층 올라가게 하고, 바른말하는 입들은 하루아침에 구걸이나 하게 하는 세계의 모든 "여우"들에 대한 미움이었다.
죄 없는 인간이 피를 흘릴 때, 하느님은 항상 침묵한다. 그것은
그것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못 본 척 지나친 레위인과 제사장에 대한 미움이었다. 헐벗어 죽어 가는 형제를 외면하는 모든 부유한 자들에 대한 분노였다. 하루에 5만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는, 그 같은 지구 위에서 아침저녁 배터지게 먹어 치우는 모든 인간들에 대한 미움이었다. 문 앞의 거지 라자로에게 식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 정도 주는 것으로 만족했던 부자에 대한 분노였다. 크리스마스 때 고아원이나 양로원 방문하는 것으로 모든 책임을 벗는다고 생각하는 "있는 자"들에 대한 미움이었다.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경제 풍토를 오히려 즐기던 모든 유산 계급에 대한 미움이었다.
죄 없는 인간이 피를 흘릴 때, 하느님은 항상 침묵한다. 그것은
그것은, 남을 정죄하는 자들에 대한 미움이었다. 자기 눈의 대들보는 버려 두고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겠다는 자들에 대한 분노였다. 제 의견에 맞지 않는 자는 무조건 죄인이라고 판결을 내리는 무법자에 대한 미움이었다. 길은 오직 하나뿐이라고 주장하는 안내자에 대한 분노였다.
죄 없는 인간이 피를 흘릴 때, 하느님은 항상 침묵한다. 그것은
그것은, 거짓 목자에 대한 미움이었다. 거짓 선생에 대한 미움이었다. 거짓 종교인에 대한 미움이었다. 거짓 노동조합 지도자에 대한 미움이었다. 거짓 장관에 대한 믿음이었다. 거짓 그 자체에 대한 사무치는 미움이었다.
열매는 맺지 않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에 대한 미움이었다. 터무니 없는 말을 전하고, 악한 생각으로 가득 찬 독사의 자식들에 대한 미움이었다. 눈에 보이는 기적만 요구하는 악한 세대에 대한 미움이었다. 자기의 받은 바 시간과 재능을 땅 속에 묻어 둔 악하고 게으른 종에 대한 분노였다. 일하지 않고 먹고사는 기생충들에 대한 분노였다.
죄 없는 인간이 피를 흘릴 때, 하느님은 항상 침묵한다. 그것은
그것은, 성전을 시장 바닥으로 만든 장사꾼들에 대한 미움이었다. 인간의 양심을 황금으로 마비시키는 경제 동물에 대한 분노였다. 교회를 기업화하는 최신식 목회자들에 대한 분노였다.
죄 없는 인간이 피를 흘릴 때, 하느님은 항상 침묵한다. 그것은
그것은, 회개하지 않는 도시에 대한 분노였다. 거대한 물질문명에 대한 분노였다. 비인간화에 대한 분노였다. 제동장치를 잃어버린 기계처럼, 멈출 줄 모르고 달리고 있는 고라신과 뱃세다와 가버나움의 무질서와 음란과 퇴폐와 방종과 그 잿빛 삭막함과 살생에 대한 분노였다. 이웃을 상실한 도시생활에 대한 미움이었다. 단단한 열쇠가 훈장처럼 진열된 아파트에 대한 분노였다.
죄 없는 인간이 피를 흘릴 때, 하느님은 항상 침묵한다. 그것은
그것은, 포도원을 가로채기 위하여, 주인이 보낸 사자(使者)들을 모두 쫓아 보내고, 마지막엔 그 아들을 죽이기까지 한 소작인들에 대한 미움과 분노였다. 예레미야를 옥에 가두고, 엘리야를 추방시키고, 다니엘을 사자 굴에 넣은 모든 집권자들에 대한 미움이었다. 아- 그것은, 여기 이 해골산 언덕에 서서 네 죽음을 지켜보고 있는 이 무리들에 대한 분노였다. 그것은, 인류에 대한 우주적인 분노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용서하지 못하는 자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다. 형제의 잘못에 대하여, 우리에게는 "용서"하는 길 말고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이 모든 분노와 미움을 저렇게 침묵 속에서 삭이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현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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