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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씨와 도둑>은 최용우 개인 책방의 이름입니다. 이곳은 최용우가 읽은 책의 기록을 남기는 공간입니다. 최용우 책방 구경하기 클릭! |
이현주/ 아무일 안하고 잘 산다를 읽다
다음은 읽으면서 밑줄 그은 부분입니다.
1.숨 쉬지 않는 사람이 만일 있다면,
숨 쉬지 않는 사람이 만일 있다면, 그를 두고 하나님을 벗어난 사람이라 할 수 있겠지. 숨은 곧 결이다(波動). 들고 남이요 생(生)이며 멸(滅)이다. 알고 보면 사람이 숨을 쉬는 게 아니라 숨이 사람을 통하여 들고나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살아 있는 동안 '숨'을 마음대로 끊거나 이을 수 없다. 인간이 숨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숨이 인간을 소유하는 것이다. 사실은 이 말도 틀렸다. 숨이 인간을 소유한다기 보다는 차라리 숨이 인간의 모습으로 존재한다고, 그렇게 말하는 게 옳겠다.
2.예수님은 맑은 거울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목청을 울려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물결치는 '삶'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맑은 거울이다.
예수님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허공을 울리는 소리가 아니라 살과 피를 지닌 힘(energy)이요, 하찮게 보이는 것들 속에 성스러움을 물결치게 하는 끝없는 파동(波動)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분의 입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나왔고, 그러므로 해서 그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참사람만이 참말을 하는 법.
3.나의 할 일은
사물을 쪼개고 다시 쪼개어 맨 마지막 알갱이(微粒子)에 이르고 보니 그게 마침내 보이지 않는 에너지, '공'(空)이더라는 얘기다. 생.멸.생.멸을 거듭하는 '숨'(波動)이더라는 얘기다.
'하나님'이란, 이름지어 부를 수 없는 그 어떤 실체(또는 힘)에 대하여 억지로 붙인 이름이다. 하나님이니 하느님이니 하면서 다투는 사람들, 그것도 자유니 어쩔 수 없다지만 그림자를 두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자들과 다를 바 무엇이랴?
저분이 나의 아버지인가를 의심하기 보다, 나의 할 일은 아버지이신 저분을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4.죽은 자인가 산 자인가?
아버지 장례를 치루고 따르겠노라던 제자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마8:22). 앞의 죽은 자는 송장이요 뒤의 죽은 자는 멀쩡하게 살아 움직이는 자들을 가리킨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죽은 자인가? 산 자인가? 화살처럼 두려운 질문이다.
5. 깨달음이란 눈을 뜨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눈을 뜨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눈을 떠 빛으로 충만한 우주를 보라고 한다. 저 먹구름 찢고 그 위에 찬란한 태양을 보라고 한다. 세상은 처음부터 하늘의 빛으로 가득 찬 광명천지다.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러하다. 공해가 홍수처럼 범람하고 핵무기가 지구를 수백번 파멸해도, '밝은 세상'은 여전여실(如前如實)이다. 눈 한번 번쩍 뜨면, 악몽은 사라진다.
그러나 안타깝다. 천만근 무게의 눈꺼풀을 어떻게 들어 올릴 것인가? 이 깊은 잠을 누가 흔들어 깨울 것인가?
우주에 충만한 빛도 눈꺼풀 한 장으로써 무력하구나. 어쩔 것이냐? 눈 한번 감으니 태양이 깜깜인 것을.
6. 내가 곧 하나님이라는 예수의 말씀은
내가 곧 하나님이라는 예수의 말씀은 교만 방자 무례한 신성모독이 아니다.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야! 그의 말씀은 '나'라고 하는 게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 누구의 좁디좁은 '나'속에 갇힐 수 없다. 우리는 모두 함께 얽혀 비로소 있는 존재다. 이 거룩한 연대(連帶)가 없다면, 세상도 없고 너도 없고 나도 물론 없다. 우리가 저마다 '나'를 버리면 그때 비로소 천상천하(天上天下)에 홀로 존귀한 '나'로 태어나리라. 모두가 나의 살이요, 나의 넋인데, 누구와 더불어 다투고 겨루겠는가?
7.목사는 투명할수록 좋다
목사는 투명할수록 좋다. 물상(物像)과 눈동자 사이를 이어주는 안경알은 없는 듯 있어야 한다. 유리창에 먼지와 때가 끼었거든 얼른 닦아라. 너무 오래 닦지 않아 유리창이 곧 두꺼운 먼지와 때로 둔갑했거든 사정없이 깨부수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착각하지 말라. 목사는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왜 자꾸 손가락만 바라보고 있는가?
여기에 이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질문 하나! - 오늘 저 숱한 손가락 손가락들은 과연 달을 가리키고 있기나 한 것일까?
8.영접하는 자
'영접하는 자'란 그를 '향하여' 나아가는 자다. 무엇을 영접하려면 그쪽을 향해야 한다. 등지고서는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법. 햇살은 언제나 무진장이지만 손바닥 하나로도 막을 수 있다.
빛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는 그 빛으로부터 아무리 먼 거리에 있다 해도 이미 빛 속에 있는 자요, 빛을 등진 자는 그 빛으로부터 아무리 가까운 곳에 있다 해도 이미 어둠에 속한 자다.
그런즉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그의 '방향'(方向, orientation)이다. 우주는 빛과 어둠의 공존이지만, 그러나 둘의 혼합은 결코 아니다. 우주는 빛이거나 아니면 어둠일 뿐, 두루뭉수리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어스름 회색지대는 없다. 우주가 나에게 빛이냐 어둠이냐를 결정짓는 것은 내가 선택한 '방향'이다.
9. 악마와 예수
악마는 생명에서 죽음을 보게 하고
예수는 죽음에서 생명을 보게 한다.
동일한 것을 다른 시각(視角)으로 보는 것이다.
10.은혜와 율법
'은혜'는 받는 자의 어떤 행위를 전재하지 않는다. 상대가 무슨 짓을 했기 때문에 베푸는 것은 은혜가 아니다. 다만 '은혜'는 그것을 받는 자에게 어떤 행위를 요구한다. 요구하되 그냥 요구할 뿐 그것을 강제하지 않는다.
'은혜'가 요구하는 행위란 그것을 받아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받는 자가 받지 않을 때 '은혜'는 은혜일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율법'은 그것을 지켜야 하는 자의 어떤 행위를 전재로 삼는다. 법이 있어야 비로소 지켜질 만큼 질서가 무너져 내렸기 때문에, 법으로 막지 않으면 안될 짓을 이미 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이 만들어진 것이다. 간음하는 남자와 여자가 없다면 간음을 금하는 율법이 만들어질 수 있겠는가?
11.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다. 우주와 만물과 사람을 지으시고 그 모든 피조물 따위와 상관없이 당신의 세계에 머물러 게시는 분이 아니라 바로 그것들 속에 당신 자신을 나타내시는 계시(啓示)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나타내 보이심으로써 당신을 숨기신다. 끝내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 보이지 않아서, 그 신비(神秘)가 걷히지 않아서,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여기에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은 저기로 숨으신다.
12.어느 홍수 난 강에서
어느 홍수(洪水)난 강에서 가느다란 갈대 한 줄기가, 시뻘건 흙탕물에 사나운 흐름을 거역하며 맹렬한 기세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보았지. 그런데 사실은 갈대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직 뿌리가 뽑히지 않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것일 뿐이라네.
그렇구나, 이 세상의 걷잡을 수 없는 흐름 속에서 제자리에 뿌리내려 버티고 서 있기만 해도, 그것이 곧장 반역이요 거역일 수 있겠구나! 세상과 함께 흘러 파멸의 '넓은 길'로 곤두박질하지 않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은 뿌리를 영원한 곳에 깊숙이 내리는 것이다.
13.군자(君子)는 대로행이라
군자는 대로행(大路行)이라, 꿍꿍이속이 없다. 아무리 혼자 있어도 하늘이 내려다보고 땅이 올려다보며, 언제 어디서나 열 개 눈동자가 노려보고 있으며(十目所見) 열 개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으니(十手所指) 어찌 스스로 삼가지 않겠는가? 사람이 자기를 속이는 것은 하늘을 속이는 것인데 도무지 속일 수 없는 것이 하늘이거늘 그런즉 군자는 무자기(毋自欺)라,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
자기를 이미 속이지 않을진대 무슨 연유로 남을 속이랴? 그러므로 그에게는 비밀이라는 것이 없고 따라서 드러내어 말하지 못할 것이 없다.
14.소리는 어디 있는가?
여기 '소리'가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나의 소유라고 말하지 못한다. 종소리는 종의 것이 아니다. 종을 때리는 자의 것도 아니요 그 소리를 듣는 귀의 것도 아니다. 소리결을 전달하는 공기의 것도 물론 아니다.
그러나 소리는 그 모두의 것이다. 종소리는 종의 것이요 종을 치는 자의 것이요 소리를 듣는 귀의 것이요 소리를 전달해주는 공기의 것이다. 소리를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동사에 모두의 것이다.
15.자격 운운
나야말로 이 일에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주장하면서 어떤 일을 하는 친구들을 가끔 봅니다만, 제 눈에는 그런 친구들이 사기꾼으로만 보이더군요. 겉으로는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지만 속으로는 자신이 바로 그 일에 남보다 월등한 '자격'을 갖추고 있노라는 (그 일이라는 게 무엇이든 간에) 일종의 자부심이라 할까 뭐 그런 것을 한 자락 깔고있는 친구들도 있지요. 제 눈에는 그들도 역시 사기꾼으로 보입니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해먹겠다는 자들이 나야말로 적격자라고 흰소리 질러대는 것은 그래도 귀여운 구석이 있습니다만, 엄청난 자긍(自矜)을 속에 감추고 겉으로는 한없이 겸허한 척 꾸며대는 자들을 볼라치면 구역질과 연민이 동시에 솟구쳐 오릅니다. 노자(老子)에 "자긍자(自矜者)는 부장(不長)이라"는 말이 있지요. 스스로 내로라 하는 자는 남의 윗사람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겉으로 드러내어 자신이야말로 이런 일을 할 '자격'을 남보다 더 갖추고 있노라고 선전을 하든, 아니면 겉으로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으면서 속으로 이 일에 나를 당할 자 누구냐고 당돌한 자긍심의 모가지를 곧추 세우고 있든, 특히 이른바 '성직자'의 경우에는 후자가 더욱, 불쌍하고 역겹고 지겨운 사기꾼으로 보인다는 그런 말씀이올시다.
16.하나님께 감사하거라
어머니가 본향으로 돌아가신 뒤, 한번은 평민교회에서 성경공부 인도하러 밤길 시오리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나타나시더군요.
"어딜 가느냐?"
"몰라서 물으십니까? 평민교회 가는 길이지요."
"그래."
"어머니는 어디 계십니까?"
"몰라서 묻느냐? 여기 하늘에 있지. 너와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운 곳에."
"그렇지요"
"돈벌러 가는 길 아니니 좋다. 하나님께 감사하거라."
17. 글을 쓸 때에 저는
글을 쓸 때에 저는 언제나 이 글이 저 자신에게 재미있고 솔직한지, 쓰잘데 없는 빈말이나 군소리가 많이 들어 있지 않은지, 쥐꼬리만한 유식을 드러내려고 잔꾀를 부리지 않는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려는 잔꾀를 부리지는 않는지, 자신도 모르게 독자를 의식하여 아첨성 발언이나 지나친 비판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관계 당국을 염두에 두고 스스로 가위질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런 것들을 반성하며 쓰고 있습니다. 아니, 그런 쪽으로 마음을 쓴다고 해야겠지요.
18.잠꼬대 같은 소리
남에게 무슨 덕(德)을 베풀기 '위하여' 어떤 행위를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계획을 세우는 것은, 겉으로는 참 그럴듯한 명분도 있고 쉽게 칭찬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게 바로 큰 거짓이 될 수 있다는 얘기올시다. 요즘 교회에서 흔히 '가난한 자를 위한 선교'라느니 '민중을 위한 교회'라느니 하는 말을 듣게 되는데, 갑이 을을 '위해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갑과 을이 서로 별개라는 생각을 그 바탕에 깔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여기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겁니다. 교회가 정말 교회라면, 가난한 민중을 위하여 선교비의 액수를 올리는 것 정도로 그칠 게 아니라 교회 자체가 바로 그 시대의 '가난한 민중'이어야 하지 않겠어요? 말은 그럴 듯 하지만 도무지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잠꼬대를 한다고 비웃으십니까?
19.부녀 곡예사
소련인가 어디에 유명한 부녀(父女) 곡예사가 있었답니다. 공중에서 아슬아슬한 묘기를 부려 사람들의 갈채를 받았는데 하루는 아버지가 딸에게 말했다지요.
"마음을 다른데 빼앗기면 안 돼. 우리는 위험한 곡예를 부리고 있으니 늘 조심해야 한다. 나는 너를 보살피고 너는 나를 보살피고, 서로 보살펴주지 않으면 안 돼. 공중에서는 우리 둘밖에 아무도 없쟎니?"
그러자 딸이 대답합니다.
"알아요 아버지. 서로 보살펴야지요. 그렇지만 아버지, 저는 아버지보다 저를 먼저 보살피고 아버지는 저보다 아버지를 먼저 보살펴야 해요. 아버지를 보살펴 드리느라고 제가 할 일에 조금이라도 실수가 생기면 우리 둘이 함께 죽으니까요"
20.욕심이란
얼핏 생각할 때,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데 그걸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컬어 욕심이라고 한다면 욕심 없이는 아무것도할 수 없지 않느냐, 문제는 욕심 그 자체가 아니라 '지나친 욕심'이 문제 아니냐 하는 논리가 자못 그럴 듯하게 들립니다만 실제 생활에서는 '욕심'과 '지나친 욕심'을 구별짓기가 힘들고(어쩌면 불가능하고), 더구나 그런 논리가 지니고 있는 함정이 매우 교묘하고 깊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감(感)으로 잡게 되는 때는 약간 과장해서 모골(毛骨)이 송연( 然)하기까지 합니다.
21.아아, 하나님!
이 이름 아닌 이름, '하나님'을 발음할 때마다 저는 먹구름처럼 제 가슴을 짓누르는 절망, 세상과 인간에 대한 끝없는 절망이 걷히고 거기 태곳적부터 변함 없이 눈부신 광명이 있음을 살펴 다시금 안심하게 됩니다. 구원이 있다면 오직 하나님 그분의 이름밖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현대인'이 하나님을 죽이고 무시하고 나아가 능멸하기까지 한다해도 그따위 모든 인위(人爲)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 일획 다치지 않고 엄존하실 것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이런 믿음이 굳어지고 깊어지니 그것 또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지요. 시방 인간이 만든 원자폭탄이 지구를 열 두번도 더 박살내고 남을 만큼 쌓여 있다고 하여 많은 사람이 겁을 내고 있음니다만 저는 그다지 두렵지 않습니다.
지구는 참 아름다운 별입니다만 때가 되면 깨어질 수도 있는 물건입니다. 이게 무슨 절대 존재는 아니지요. 인종(人種)? 그것도 사라질 수 있는 겁니다. 요즘 인간들 때문에 지상(地上)의 수많은 종(種)들이 영원히 사라진다는데 인종이라 해서 사라질 운명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때가 되면 사라질 수 있는 거지요.
지구도 사라지고 인간도 사라지고 하늘도 땅도 모두 사라지고 사라지는 일조차 사라져도 '하나님'이 계시므로 우리에게는 절망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그런 말씀이올시다.
22.세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요즘 공직자들이 재산 공개하는 것 보시지 않았습니까?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이제는 돈 많은 부자를 그냥 우러르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손가락질하며 비난하는 태도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니까 저렇게들 될 수 있으면 재산의 규모를 적게 보이려고 온갖 편법을 동원하여 축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될 수 있는 대로 자신의 재물을 적게 보이려고 머리를 굴리는데 간혹 보면 목사님들 가운데는 더 큰 예배당, 더 큰 돈지갑을 마치 과시라도 하듯 자랑스레 여기는 분들이 있으니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는지요. 돈 많은 기업가도 사람들의 호감을 사지 못하는 마당에 돈 많은 목사나 승려가 되어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걸까요?
23.큰 교회 작은 교회
거창하고 큰 예배당을 보고 무심코 "큰 교회"라고 부르는 우리의 말버릇부터 고칩시다. 간절히 제안합니다. "크다" 또는 "작다"는 형용사를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물건만을 보고 함부로 사용하지 말자는 얘기올시다.
예배당 건물의 크기나 교인의 숫자만으로 큰 교회 작은 교회를 가르는, 더럽고 비열하고 무책임하고 같잖고 무식한 자본주의 유물론의 버르장머리를 철저히 뿌리뽑자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내친 김에 '크다' '작다'하는 형용사를 아예 치워버리고 이제부터는 '참'교회 '거짓'교회로 가려보는 게 어떨른지요? 우리 교회는 아무개 교회보다 크다, 이렇게 말하는 대신 이런 식으로 물어보는 겁니다. "우리교회는 참 교회인가? 아니면 가짜가 많이 섞여있는 교회인가?"
24.교회로 교회되게 하자
"겉사람은 날로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롭다"는 바울의 명제는 개인의 차원 뿐 아니라 교회공동체의 차원에도 에누리 없이 적용되는 것이며 적용되어야 한다. 교회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몸인 까닭에 만일 날마다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이미 교회일 수가 없다. 교회의 갱신, 이것은 교회에 내려진 지상명령이다. 따라서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거부하는 신자나 교회는 하늘의 지상명령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개혁된 교회가 아니라 개혁하는 교회여야 한다. 한번 개혁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교회가 아니라 늘 개혁하는 교회여야 한다는 말이다."-김재준 목사
그의 주장은, 한국교회가 불행하게도 '개혁된 교회' 상태에 머물러 있으며 그 상태를 보수하려는 기질을 굳히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렇다면 큰일이다. 교회의 보수성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보수성이라는 것이 교회의 자기개혁을 금하거나 가로막는 힘으로 작용한다면 이는 본(本)을 잃고 말(末)을 잡는 것으로 한국교회의 생존을 위하여 크게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5.처음으로 돌아가는 길
과학기술이 말하는 유토피아는 미래에 있다. 그러나 종교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태초, 그 까마득한 과거에 있다. 따라서 과학기술이 말하는 유토피아에 가려면 지금 있는 것에다 아직 더 많은 것을 보태고 덧입혀야 하지만 종교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오히려 지금 있는 것을 벗고 덜어야 갈 수 있는 곳이다.
교회가 날마다 새로워진다 함은 날마다 더 많은 새로운 것을 덧입는다 함이 아니요 오히려 지금 지니고 있는 것을 버리고 벗어 더욱 '알몸'이 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기에 교회의 갱신을 말할 때 초대교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교회갱신이란 언제 어디서나 초대교회로 돌아감을 말한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묘사되어 있는 예수공동체와 사도교회야말로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참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모범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거울에 먼지가 묻듯 참교회의 모습에 때가 앉았다. 갱신이란 그 때를 벗겨 다시 처음의 맑고 깨끗한 모습을 되찾는 일이다.
26.돈에서 인간으로
특히 한반도 남쪽에서, 오늘의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돈'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타락한 풍토를 물리치고 인간이 주인노릇 하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 일이 얼마나 절박하고도 절실한지, 그것을 말로 설명할 필요는 따로 없다. 우리 모두 피부로 느끼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돈이 많은 교회, 예산이 풍족하게 남아 돌아가는 교회, 그래서 달마다 해마다 축적되는 재산의 양이 커지는 교회, 부동산 투기 바람으로 가만히 앉아 재산상 이득을 보는 교회가 더 이상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지 못하는 풍도, 오히려 그것을 '수치'로 여기고 뉘우침의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풍토가 마련되어야 한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계3:17)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이 말씀을 오늘의 한국교회는 자신을 향한 그분의 질책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27.깨어나야 할 꿈, 꾸어야 할 꿈
사람이 꾸는 꿈에는 두 가지가 있다. 깨어나야 하는 꿈이 있고 꾸어야 하는 꿈이 있다. 사람이란 이 두 꿈 사이를 살아가는 존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잠자는 동안에 꾸는 꿈. 그것은 깨어야 할 꿈이다. 그 꿈속에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은 여태 잠자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맑은 정신으로 정성을 다해 꾸는 꿈.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한평생을 걸고 꿔볼 만한, 아니 꿔야만 하는 꿈이다. 그런 꿈을 꾸면서부터 그는 비로소 살아 있는 존재이다.
28.이 세상이 망하지 않은 이유
소돔과 고모라가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망했다는 이야기는, 오늘 이 세상이 아직 망하지 않은 까닭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어느 구석인가에 그 시대의 '의인'이 살고 있었기에 지금까지 세게는 없어지지 않고 존속해 있는 것이다. 누군가, 그 '의인'이란?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바로 보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순간 다시 꿈을 꾸는 사람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당신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렇게 기도한 예수, 그분이야말로 죽는 꿈에서 깨어나 사는 꿈을 꾼 영원한 '꿈장이'였다. 아니, 그분 자신이 하나의 찬란한 꿈이었다.
29.미몽(迷夢)속에서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게끔 되어 있는 꿈, 그런 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을 미몽(迷夢)에 갇혔다고 한다. 가끔 꿈에 신기한 보물을 손에 넣고 좋아할 때가 있다. 그러다가 잠을 깨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 만일 그때 잠을 깨지 않는다면 계속 그 좋은 보물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 즐거움을 참된 즐거움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깨고나면 아무것도 없는 세상, 그것이 바로 꿈속의 세상이요 그 세상에서 끝내 헤어나지 못하는 것을 미몽에 갇혔다고 한다면, 지금 혹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나 읽고 있는 당신이나 모두 거대한 미몽 속에서 헤엄치며 비틀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30.예수와 함께 꿈꾸려면 헛된 꿈에서 깨어야
태산같은 거짓은 바늘 끝 같은 참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예수 믿는답시고 적당히 세상과 타협도 하면서 한편으론 남한테 뒤지지 않을 정도로 헌금도 하고 가끔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 될 만큼 선심도 쓰며 그래서 복이나 좀 더 많이 챙겨 받아 한평생 평안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우선 그 사람잡는 '꿈'부터 깰 일이다. 누군가를 억누르고 누군가를 눈멀게 하고 누군가를 가두지 않고서는, 그 감옥과 억울한 신음에 처하지 않고서는 한순간도 지탱할 수 없는 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어떻게 감히 예수의 이름을 들먹일 수 있다는 말인가?
성직자와 교회가 "쓰고 쓰고 또 써도 남을 만큼"(어떤 부흥사의 말) 많은 재물이 쌓인다는 사실에서 '축복'을 보고 감사를 느낀다면, 알몸으로 와서 참새의 둥지도 여우의 소굴도 없이 맨몸으로 살다가 다시 속옷까지 벗어놓고 가버린 예수의 그 '꿈'은 어떡하란 말인가? 미몽에 사로잡힌 자들의 눈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눈부시게 장엄했지만 예수의 눈에는 그것들이 다만 먼지일 따름이었다.
31.우상숭배
북한의 체제를 말할 때 기독교인들이 가장 민감하게 지적하고 고개를 젓는 것은 김일성 개인숭배다. 김일성이라는 한 지도자를 '어버이 수령'으로 모시고 신격으로까지 받들어 올리는 것은 명백한 우상숭배이다.
그러나 북쪽의 우상숭배에 대하여는 바늘 끝 하나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비판하고 방어하면서 과연 남쪽에서 아주 합법으로 자행되고 있는 재물숭배에 대하여는 너그럽다 못해 오히려 무감각하기까지 한 것은 무슨 말로 변명할 참인가?
한 개인을 숭배하든 돈을 숭배하든 우상숭배인 점에서는 다를 바가 전혀 없다. 오히려 인간된 자존심을 건드리는 쪽으로 볼작시면 인간숭배보다 돈 숭배가 더 지독한 우상숭배이다.
32.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언젠가 고 박정희 씨, 스스로 법을 고쳐가면서 대통령에 출마할 적에 "십자가를 지겠다"고 자못 비장한 투로 말하는 것을 보면서 십자가가 뭔지도 모르는 무식한 놈이 십자가 운운하는 참 우스운 세상이 돼가는구나 한심한 마음이면서도 대수롭게 여기지는 않았으나, 얼마 뒤에 감독에 출마한 어느 감리교 목사가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운운하며 감독출마의 변을 공개하는 것을 보았을 때에는 한심하다 못해 속이 부글거리는 것을 참기 힘들었다.
십자가가 무엇이더냐? 예수님조차도 될 수 있으면 피해가고자 한 쓴 잔이다. 세상에 그것이 어떤 십자간데, 목사가 제 입으로 십자가를 지겠노라 말하면서 그래 그 십자가를 지려고 돈을 쓰고 있더란 말이냐. 그것 무식(無識)이 아니라 탐욕에 눈이 먼 뻔뻔스러움이었다. 올해는 행여나 십자가를 스스로 지겠노라 나서는 철면피들이 없기를 바라고 한국의 교회가 그런 거짓 지도자들의 허울에 넘어가지 않을 만큼 속으로 성숙되어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
33.수염
잘라도 잘라도 살아 있으매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수염의 거룩한 항거를 한사코 짓눌러 뭉개려는 자 누구냐?
수염을 기르고 거리에 나서면 사람들이 한번 볼 걸 두 번 본다.
"수염을 왜 기르십니까?"
"그냥 두었을 뿐입니다."
34.그런 식으로 교회를 '운영'해도 되는 건가?
나를 포함하여 오늘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모든 목사에게 정색으로 묻고 싶다. "당신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이쯤 되면 나로서는 대답할 말이 없어 다만 얼굴을 붉힐 뿐이지만, 만일 그래도 '그렇노라' 대답하는 이가 있다면 이렇게 묻고 싶다. "그러면 그런 식으로 교회를 '운영'해도 되는 건가?"
지금도 여기저기에서 맹활약으로 목회 성공의 비결, 교회 성장의 비결, 배가전도의 비결, 속회운영의 비결, 이런 비결 저런 비결 신비스런 온갖 비결을 파는 이들에게 관심이 많은가?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비결(비결도 아니지만)에 관심이 많은가?
만일 그래도 '예수님의 말씀 따라 살아가는 비결'에 관심이 많다고 대답하는 이가 있다면 이렇게 묻고 싶다. "그러면 그런 식으로 교회를 '운영'해도 되는 건가?"
35.시골에 와서
시골에 와서 맨 처음으로 곤란을 느낀 것이 쓰레기처리 문제였다. 여기는 하루에 한번은커녕 일년에 한번도 쓰레기차가 오지 않는다. 아예 쓰레기차라는 게 없다. 그러니 제 집에서 나오는 쓰레기는 천상 제가 치워야 한다. 이사 와서 보니 그동안 뒤란 한구석이 쓰레기 매립장으로 사용되었던 모양인데 어찌나 많은 콜라병과 이른바 드링크제 병이 쏟아져 나오던지 처음에는 놀랐고 그 다음에는 분통이 치밀어 올랐다.
우리 마을은 앞산에서 나오는 샘물을 끌어다가 먹는데 물맛이 정말로 기가 막힐 정도로 좋다.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면 맨 처음으로 하는 일이 우리 집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것이다. 이렇게 좋은 물을 두고 왜 콜라를 마셨을까? 그것도 저렇게 무지무지하게 마셨을까? 게다가 종류도 다양한 드링크제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리도 무식하게 마셔댔을까? 처음에는 놀랐고 이어서 콜라를 마시지 않을 수 없도록 유인하고 협박하고 보이지 않는 끈으로 옭아맨 서양놈들이 미웠다. 거기에 속아넘어간 조선 놈들이 미웠고 여태 속고 있는 우리가 한심했고 그래서 분통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그뿐이었으니 나는 그냥 한숨만 쉬고 조금 파내다가 그냥 도로 묻어버렸다. 캐도 캐도 끝이 없을 듯했고 어차피 농사지을 터도 못될 바에야(커다란 앵두나무 그늘 때문에) 그냥 묻어두는 것이 좋겠다는 계산 속으로 그랬다. 그런데 아내는 달랐다. 어느 날 작은 호미로 쓰레기 발굴을 시작하더니 몇날 며칠 매달려 마침내 그놈을 죄다 캐내는 것이었다. 지금 거기는 호박줄기가 기세 좋게 뻗어 있다.
36.아내의 집안 일
나는 내가 밖에서 하는 일이 아내의 집안 일보다 가치 있고 보람 있고 사회와 역사에 더 유익한 일이라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기야 수 천년 내려온 가부장제의 관습이 골수에 베어 있어서 몸이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것을 번번이 느끼고 그럴 때마다 난감하기도 하지만, 나는 시방 내 몸을 생각에 맞추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리고 나의 이런 자세가 다른 남자들한테도 전염되기를 바란다. 이렇게 말하면 그것은 아내를 계속해서 집안 일에 묶어두려는 수작이 아니냐고 반문하는데, 남의 말을 그런 식으로 비틀어 가지고 듣는 건 참 곤란하다.
37.오늘의 시골은 옛날 시골이 아니다
얼마 전에 서울 자가용 한 대가 운전 부주의로 이웃 마을의 길 옆 논에 머리를 박았다. 논 임자는 자녀를 모두 도시로 내보낸 할머니였는데, 사방 1.5미터쯤에 모를 새로 심는데 드는 비용 6만원에 휘발류가 떠다녀서 벼에 미칠 손해의 배상까지 합하여 20만원을 받아냈고 옆 논 임자는 자동차를 꺼낼 때에 망가진 논두렁 고치는 비용 10만원을 받았다. 혹시 도시에서 농촌으로 이사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은 사람은 오늘의 농촌 인심이 대개 이러함을 염두에 두는 것이 좋다.
그리고 반드시 잊지 말 것은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바로 자가용 임자인 도시사람들이고, 따라서 저도 모르게 저지른 범죄에 대한 뉘우침과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마음이 철저하지 않은 상태라면 시골에 오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이다.
38.도대체 맨 처음 상(賞)을 만든 사람은 누굴까?
동물이나 식물의 세계에서 상을 주고받는 일이 없는 것을 보면 누군가 그것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이 있을 터인데, 그 사람에 대해서 나는 유감이 많다. 상을 주면 그것을 받는 사람은 기분이 좋고 즐겁겠지만, 받지 못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샘도 나고 위축감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받아봤자 사실은 별것도 아닌데 괜히 사람들 사이에 차별의식 따위만 일으키고, 나아가 경쟁과 시샘을 조장하여 불편한 관계로 발전시키는 게 상이다. 상을 받은 자는 우쭐하여 교만한 마음을 품게 되니 그것 또한 고약한 일이다. 그래서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묘도(妙道)로 삼은 노자는 "잘난 놈을 떠받들지 말아라.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다툼이 없게 하라"고 위정자들에게 권하고 있다.
39.사슴과 하마가 달리기를 하면
만일에 조물주가 어느 날 자기가 만든 모든 짐승들을 모아 '대운동회'를 열어 사슴과 하마를 경주시켜 당연히 일등 한 사슴에게 상을 주고 하마에게는 "너도 열심히 달리기 연습을 하면 사슴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런 코미디가 어디 있겠는가? 또 고래와 코끼리에게 헤엄치기 경주를 시킨 다음, 고래에게 1등상을 주고 코끼리에게 "너는 언제 고래처럼 헤엄을 잘 칠 수 있겠느냐?"고 나무란다면 그렇게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타고난 기질이 남보다 달리기에 능한 탓으로 좀 더 빨리 달린다 해서 그에게 '일등상'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 같지만 따져보면 터무니없는 짓이다. 일년에 수 백명 어린 학생들이 자살을 하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가 '성적'때문이라고 하니 이런 엉터리 같은 세상이 어디 있는가?
40.판단 기준
나는 유식한 자들보다 무식한 사람이 이 세상에 대하여 못된 짓을 훨씬 덜 한다고 믿습니다. 나는 얼마나 더 좋은 일을 많이 했느냐보다 얼마나 나쁜 짓을 덜 했느냐가 사람을 판단하는 데 오히려 적합한 잣대라고 생각합니다.
41.'선생'이 없는 나라
'선생'이 없는 나라, 우러러 그 앞에 공손히 귀기울이면 난마 같은 현실을 풀어낼 실마리를 찾아주는 그런 '어른'이 없는 나라는 불행하다. 그런 나라에 사는 백성은 하릴없이 더욱 불행하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불행한 나라에 사는 불행한 백성이다. 그러나 어찌 이 땅에 옛적의 퇴계만한 스승이 없겠는가? 올곧게 사람의 길을 홀로 걸어가는 어른이 아니 계시랴? 어디엔가 있으련만 세상이 저를 힘써 찾지 아니하니 그것이 다만 가슴 아플 따름이다.
42. 과소비에 대한 생각
이 정부가 제대로 가는 정부라면 국민의 최저생계비를 계산하기 전에 소유 또는 소득 상한선을 긋고 그것을 놋천장처럼 굳게 지켜야 마땅하다. 도대체 한 사람이 일년에 수백억씩 벌어들이는 일이 가능한 세상을 만들어놓고 무슨 근거로 과소비를 걱정하고 경계할 참인가? 배고픈이들의 조직과 시위는 원천봉쇄하면서 가진 자의 탐욕을 미리 막는 일에는 도무지 무관심에 속수무책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자본주의 시장경제 원칙'에 충실한 것이라 해도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정부라고는 할 수 없다. 사람들이 과소비하는 것을 걱정하기 전에 과소비할 돈을 못 가지게 하는 것이 더 급하고 옳은 일이다. 막무가내로 제 욕심만 차리는 자에게는 매질이라도 해서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사는 법을 가르쳐야 그게 사람 사는 세상의 도리이다. 사람들이 저마다 스스로 검소하게 살아간다면 더 바랄게 없겠지만 그것이 안 된다면 강제로라도 배고픈 이웃을 곁에 두고 기르진 음식을 먹는 '짐승만도 못한 짓'은 아무튼 막아야 할 게 아닌가?
43.어처구니없고 분한 일
전 세계 인구의 6퍼센트에 지나지 않는 미국인이 지구 에너지의 40퍼센트를 쓰고 있답니다. 백 사람에게 하나님이 빵 백 개를 주셨는데 힘쎈 놈 여섯이 그중 사십 개를 먹고 있는 셈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과연 "잘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올시다. 그건 결코 우리 삶의 모범이 될 수 없는, 예수의 비유에 따르면 죽어서 지옥에 갈 범죄올시다. 그런 미국을, 미국이 앞장 선 이른바 자칭 '선진국'을 '개발'의 모델로 삼고 허둥지둥 달려온 것이 한 백년 지난 세월 우리의 모습이었으니 생각할수록 어처구니없고 분한 노릇입니다.
44.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토끼와 거북이는 빠른 짐승과 느린 짐승의 대명사 아닙니까? 같은 조건 아래에서 '경주'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와 한국이라는 나라는 그 자원의 매장량이나 국토의 크기나 인구의 숫자나 어느 모로 봐도 동일한 조건 아래서 이루어지는 자유시장경제원리에 따르는 그런 '무역'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란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알량한 FTA (자유무역협정 Free Trade Agreement)을 체결해서 평등하고 자유로운 교역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합니다.
간교한 속임수 자체인 이야기 속에서는 토끼가 계속 잠을 자고 그 사이에 거북이가 결승점에 도달하여 만세를 부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결코 토끼가 잠을 자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사악함이 끝이 없어서 거북이가 경주를 포기할 낌새가 보이면 얼른 실눈을 감고 자는 척하여 다시 한번 거북이로 하여금 토끼를 앞지를 수도 있겠다는 환상 속에 빠지도록 유도하기까지 합니다. 결국 영국이 인도의 피를 빨아먹고, 프랑스가 베트남의 피를 빨아먹고 떠났던 것처럼, 미국은 한국의 피를 다 빨아먹고 떠나가겠지요. 가진 놈이 언제나 앞장을 서고 못 가진 놈이 그 뒤를 따라가느라고 허덕이는 이 망할 놈의 세계질서를 둘러엎어야 합니다.
45.어려운 일은 서로 지혜를 모으라
백인들이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소탕하고 난 다음 인디언 아이들을 모아놓고 미개한 그들에게 소위 문명교육이라는 것을 시켰습니다. 교육을 시켰으니 당연히 '시험'을 치루어 등수놀이를 해야지요?
"이제부터 너희들은 문명인이다. 문명인답게 옆 사람의 답안지를 본다든가 하는 미개인이나 하는 짓을 하지 말 것!"
시험지가 나누어지고 시험을 치루기 시작하면서 한 두 학생이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모든 학생들이 한 자리에 모여 시험문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의견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선생님. 우리는 어렸을 때 할아버지로부터 인생을 살다보면 어려운 일을 만나기 마련인데 그때마다 혼자 해결하려고 끙끙대지 말고 여럿이 함께 지혜를 모아 해결하라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시험문제 중 어려운 문제가 나와서 여럿이 지혜를 모으고 있는 중입니다."
46.생명이 유지되게 하는 바탕
보아라, 나무 한 그루가 살기 위하여 맨 처음 땅 속에서 그 싹을 틔울 때부터 뿌리는 아래로 아래로만 내려간다. 떡잎이 나오고 줄기가 서고 가지가 뻗고 꽃이 피어 마침내 열매를 맺는 나무의 성장과 성숙 이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둠과 싸우며 쉬지 않고 섭취한 물과 양분을 공급해주는 뿌리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겠느냐? 어찌 나무만 그러하랴. 한 아기가 태어나 살아가는 것도, 값없이 오히려 잘 먹어주는 것이 고마워 주고 주고 또 주는 어미의 젖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이렇게 조건 없이 자기를 내어주는 생명의 희생이야말로 이 땅에 생명이 죽지 않고 유지되게 하는 바탕이라 하겠다.
47.누가 뿌리인가?
뿌리 없는 개인, 가정, 사회, 민족은 생존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어떤 모양으로든 '뿌리'가 있다는 것,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 내가 살아 있음은 지금도 나에게 뿌리 구실을 하는 그 어떤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나라, 이 민족이 아직 지상에서 멸망하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음은 이 민족의 뿌리 노릇을 한 숨은 존재들, 이름 드날리는 것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이들이 지하에 뿌리로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하지 않고는 설명될 수가 없다. 그 뿌리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48.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신비요 불가사의다. 물론 여러 가지 이론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고 또 백인 백색의 인간론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알 수 없는 구석'이 인간의 삶에 남아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손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존재이기 때문일 게다. 그 만드신 분이 신비 자체인데 어찌 그 만들어진 바가 신비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즉 이제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 신비를 알고자 애쓰는 것보다 더욱 먼저 그 신비를 좇아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49.아내를 먹고 산다
글을 쓴다는 것, 그림을 그린다는 것, 노래를 부른다는 것... 모두 인간의 소중한 행위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사람의 양식인 열매를 짓는 일(農事)보다 더 성스럽고 더 근본적인 것일 수는 없다.
쓰레기를 치우고 빨래를 하고 밥을 짓고 사람과 짐승의 치다꺼리를 하는 일, 그런 일을 두고 '살림'이라 한다. 살리는 일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내가 이 여자의 '살림' 덕분에 살기 때문에, 나는 지금 아내를 뜯어먹고 산다고 볼 수 있다. 약간 거친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어찌 빈말일 수야 있겠는가?
50.어디 미안해서 살 수가 있어야 말이지.
땅 속에 묻힌 뿌리처럼 그렇게 이름 없이 말 없이 일하는 여자의 노동을 가장 성스러운 것으로 알아 존경하고 받드는 그런 가정과 사회를 만들기. 이것이 내 삶의 목표라면 목표다. 여기서 말한 '여자'를 좀 더 키워 이 시대의 육체 노동자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사회주의가 뭔지 잘 모르지만, 정신노동자에 비하여 육체 노동자가 우월한 대접을 받는, 아니 적어도 동등한 대접을 받는 그런 세상을 만들자는 주장이라면 기꺼이 '사회주의자'가 될 용의가 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디 미안해서 살 수가 있어야 말이지.
51.무엇을 먹고사는가?
초식동물은 도망칠 염려도 없고 저항할 수단도 별반 없는 풀을 마음놓고 뜯어먹을 수 있다. 그러니 시간에 쫓길 것도 없고 양식을 놓칠 염려도 없다. 그러나 육식동물은 살아서 도망치거나 저항을 하는 다른 동물을 잡아서 먹어야 한다. 일단 먹은 다음에는 쉽지만 그것을 입에 넣기까지는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자연 잽싸고 사납고 난폭해지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 풀도 먹고 고기도 먹는다. 소위 잡식동물이다. 그래서 성격도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을 함께 닮는다. 양이나 소처럼 한가하고 평화롭기도 하지만 때로는 살쾡이나 호랑이처럼 잔인하고 난폭하기도 하다.
무엇을 먹느냐? 그것이 그의 성격을 좌우한다. 풀을 많이 먹는 사람은 소를 많이 닮을 것이고 짐승의 살코기를 많이 먹는 사람은 승냥이를 많이 닮을 것이다.
52.음식 쓰레기
사람이란 물건이 흔하면 귀한 줄을 모르게 돼 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픈 시절에는 음식 귀한 줄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지만, 먹을 것이 남아돌면 아무리 음식을 소중히 여기라고 해도 그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백보를 양보해서 먹고 남을 만큼 양식이 쌓여 있다 하자. 그래도 음식을 마구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직도 우주 지구촌에는 매일 수 만명이 굶어서 죽어가고 있다. 음식을 쓰레기로 버리는 것은 경제적 낭비일 뿐 아니라 사람의 사람됨을 병들게 하는 천하에 몹쓸 짓임을 명심할 일이다.
53.사람다움과 기계다움
기계는 이제 어쩔 수 없이 우리 모두의 '환경'이 되었다. 누구도 기계 돌아가는 소리 없는 곳에서 살수가 없게 되었다.
기계와 함께 무리 없이 살려면 기계를 닮는 수밖에 없다. 기계가 인간을 닮을 수는 없으니 천상 인간이 기계를 닮을 수밖에. 이미 그런 조짐은 충분히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인간을 평가하는데 그의 성품이나 마음 상태보다 어느 학교를 나와 무슨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지 하는 그의 기능(機能)을 먼저 보는 것이 상식이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일을 처리해 내는 사람은 '유능한 인재'라는 딱지와 함께 어디서나 환영을 받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유능한 학생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쓴다. 이제 어디서나 '성능'이 좋지 못한 인간은 천대를 받는다.
이런 사회는 앞으로 계속 될 것이다. 신속, 정확, 편리한 '기계적인' 인간이 대접을 받고 '인간적인' 사람은 퇴출 될 것이다.
엄청난 능력을 갖추었지만 '감정'이 없는 것이 기계이다. 능력에서는 기계를 따라갈 수 없지만 그러나 인간에게는 '감정'이 있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사람답다. 아직 철 모르는 아이들에게 '사람다움'을 확실하게 가르치기도 전에 '기계다움'을 강요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이현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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