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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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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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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전적 영성의 목회개발론
Ⅰ.서 론
현대교회 특히 개신교에 있어서 영성에 대한 깊은 관심은 최근의 움직임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카톨릭교회는 12세기를 전후해서 꽃을 피운 신비주의 신학을 계속 개혁하고 수정.보완하여 오늘날의 영성신학으로 발전되었고, 새로운 분야로 정립이 되었고, 현재에도 많은 수도자들과 신도들이 영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실천적인 움직임이 매우 활발하다고 볼 수 있다.
영성은 자연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관계들이 양육을 통하여 성숙하듯이 우리가 영적 삶이라고 부르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다만 점진적으로 발전될 수 있다. 다시말하면 영성은 개발되는 것이다. 영성개발이란 새사람을 만들어 나가는 인간의 훈련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우리들 속에서 새창조의 역사를 행하실 수 있도록 성령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훈련이다.
교회사적 영성에서 우리가 살펴 본 바 같이 종교 개혁자들의 경건과 영성생활의 전통은 미국의 대각성 운동이 19세기 이후 세계선교운동으로 확산되었으며 20세기에 와서는 세계선교운동의 열매라고 할 수 있는 에큐메니칼 영성운동으로 꽃피게 되었다. 특히 최근에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신.구교의 울타리를 넘어 그리스도교 영성의 공동광장에 점차로 폭이 넓어져 가고 있다. 이런 경향은 영성훈련의 다양한 에큐메니칼 운동 측면에서 즉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개신교 안에서 일고 있는 수도원 운동이 이런 방향에서 영성운동을 시도하고 있는데, 스코틀랜드의 '요나 공동체', 불란서의 '떼제 공동체', 그리고 미국의 '코이노니아 농장' 같은 데가 그 대표적인 영성훈련의 센터가 되고 있다.
본 소고는 통전적 영성의 목회개발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우선적으로 영성에 대한 교육적인 개념을 살피고, 영성훈련의 대표적 모델 세가지를 제시하며, 코이노니아적 목회형태와 제자훈련의 영성목회, 그리고 선교지향적인 영성목회를 간단히 살펴본다.
Ⅱ.영 성 교 육
A.영성교육의 목적
영성교육의 목적은 한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완전이다. 여기서 완전은 과.부족이 없는 완전한 존재를 지닐 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무엇일까? 필자는 바로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요한 웨슬레도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개념이다. 그래서 그는 설교를 통하여 완전은 곧 사랑을 뜻한다고 누차 강조하였다. 사랑의 완성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데 있다. 그리고 이것이 영성교육의 목적이기도 하다.
B.영성교육의 내용
영성교육의 내용에 있어서는 세가지 측면에서만 살펴 본다. 기도와 예배와 성서연구이다.
1.기 도
기도는 가끔 영성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욕망은 기도의 행위에 의해서 충족된다. 영성이 하나님과 관계를 지향하는 내적 성향이라면, 기도란 이것을 구하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영성적으로 성숙하게 됨에 따라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치중하게 된다. 이러한 기도는 무념적(無念的) 기도와 상념적(想念的) 기도이다. 무념적 기도는 마음에서 상을 비워 버리는데 목적을 둔 기도이다. 주로 침묵의 기도로서 고전적으로는 관상 및 신과의 합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표현된다. 한편, 기도에 있어서 보통 성서적인 이미지를 그려봄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의 전달 매체로 삼는 명상의 형태가 있다. 이것이 전형적인 상념적 기도의 형태이다. 하나님 사랑을 위한 훈련으로서의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구하기보다 하나님과의 보다 친밀한 관계성을 추구하는 기도에 역점을 두어서, 하나님의 뜻을 삶을 통하여 준행하는데 힘쓰도록 해야 할 것이다. 삶을 통한 영성 교육의 한 방법으로서의 기도는 이러한 기도의 실천적 의미를 갖는다.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특별한 만남은 일상의 삶 가운데로 확산되어야 하며, 초월적 기도의 경험이 삶의 순간 순간마다 새롭게 경험될 때,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성취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자는 기도가 삶과 유리되어 개인적 종교성의 열락을 추구하는 방편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기도의 능력은 개인적 삶과 공동체적 삶의 능력으로 연결되고, 삶의 현장에서 기도의 출발점을 찾도록 해야 할 것이다.
2.예 배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해 주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림으로서 응답하는 만남의 사건이 발생해야 한다. 한편 예배는 하나님의 일이지만 동시에 그 역사하심에 응답하는 인간의 행위에 의해 형성된다. 따라서 예배는 매일의 삶 속에서 임재하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요 응답이다. 그러나 예배는 개인이 아닌 공동행위인 것을 의미한다. 만남의 사건과 공동행위는 예배의 모든 순서를 통하여 일어나게 되며, 특히 현대 개신교회에서 뜸한 성례전을 통한 하나님의 현존과 선포되는 말씀의 역사가운데서 일어나게 된다.
1)성례전
성례전은 초대 교회 이후 종교개혁 시대까지 가장 핵심적인 예배의 요소가 되어 왔다. 종교개혁이 있기 전까지 기독교의 성례전은 7성례였다.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에 의해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한 세례와 성만찬을 성례전이라고 못박아 놓았다. 세례라는 성례전을 통하여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또 그러한 공동체의 성만찬을 통해서 위로와 용기를 얻고 믿음과 소망, 사랑을 주님 앞에서 재 다짐 하는 것이다. 성례전은 그 자체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밀접한 관계성이 전제되며, 그 초월적 관계성의 가시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성례전이 갖는 공동체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근거로 한 인간 관계의 성격을 나타내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성례전에 있어서 성만찬은 떡과 포도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와 말씀이 포함되어 있다. 회중은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받음으로서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회중 상호간의 교제를 나누게 된다. 이렇게 떡과 포도주는 행위와 말씀에 연결될 때 그리스도의 임재의 상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영성교육방법으로서의 성만찬은 예전으로 경험된 이러한 그리스도의 현존을 삶 속에서 그 의미의 실천을 통하여 실현되어야 할 것이다.
2)설 교
설교는 예배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예배를 떠나 독자적으로 성립할 수가 없다. 종교개혁과 함께 예배자들의 언어로 말씀이 선포되어진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설교는 새로운 생명의 양식으로 수많은 영혼들을 일깨웠고, 계속하여 개신교는 설교 중심의 교회로 발전되어 갔다. 그 후로 지금까지 설교는 개신교 영성개발의 중심적 수단이 되어 왔다. 설교는 기록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선포하고 그 말씀을 오늘의 언어로 바르게 해석하여 삶의 현장에 효율적으로 적용함으로써 회중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존에 참여하도록 하여야 한다. 설교는 회중이 하나님의 행위에 응답하도록 듣는 사람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선포되어야 한다. 밀러(D.G. Miller)는 '복음을 설교하는 것은 단순히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설교한다는 것은 단순히 강단에 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역동적인 사건의 일부가 되게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3.성서연구
성서를 통해 하나님은 자기를 계시하신다. 성서는 단순히 과거 경험의 보고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통로이다. 성서연구가 영성교육의 방법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인간이 참여할 때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통한 영성교육은 곧 성서에의 참여이다. 성서연구는 하나님을 만나는데 있다. 이러한 만남은 삶의 변화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성서연구에 있어서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문제는 성서가 삶과 괴리되어 지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성서는 인간들의 하나님 체험에 대한 보고서이다. 또한 그 체험은 과거의 경험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속에서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신앙의 경험이다. 성서를 연구함에 있어서 그 체험에의 참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Ⅲ.영성훈련
이 단원에서 영성훈련을 통한 새로운 교회의 성장을 예시한다.
A.떼제 공동체
떼제는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 지역 중앙 언덕들에 둘러싸인 작은 마을로서 끌루니 읍에서 그리 멀리 않은 곳에 있다. 1940년 이래로 화해와 교회일치를 위해 일하는 한 공동체 형제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공동기도를 삶의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로서 오늘날 갖가지 배경과 나이의 사람들이 찾아와 공동기도와 묵상을 하는 순례지이기도 하다. 떼제 수사중 반은 떼제에 있고, 반은 다른 대륙에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뉴욕의 무허가 정착촌, 브라질 동북부와 동아프리카 최대의 빈민가, 그리고 캘커타(인도)의 가난한 무슬렘 속에서 버림받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우애 공동체를 이루고 산다. 창립후 20년동안 이 공동체는 비교적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점차적으로 18세에서 30세 사이의 젊은이들이 떼제로 몰려들기 시작하였고, 이를 계기로 '젊은이의 공의회'가 개최되어 1974년에 4만여명이 참석하면서 해마다 온 세계의 젊은이들이 모여 자신들의 삶의 관심사를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며 공동체의 기도에 참여한다. 그 공동체의 지침서를 간단히 살펴보면, 머리말에서 공동생활지침에 대한 안내와 권고로 하며, 특히 화해를 요청하고 있다. 다음은 그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공동의 기도'인데 예배에서의 진지함과 찬미와 적극적으로 기도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식사는 기쁨이 넘치는 나눔의 식사를 하고 간혹 '침묵의 식사'를 하기도 한다. 회의는 지석적인 공동체 생활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뜻을 찾는데 목적이 있다고 하면서 평화를 추구함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침묵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인내함으로 순결을 유지하는 우정을 십자가를 통한 이웃사랑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모든 재산은 전적으로 공유하고 가난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창조의 소박한 아름다움속에 놓아두는 것이고 하루하루를 기쁨속에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고 했다. 이 지침이 자체적으로 하나의 목적이나 결말인양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는 심정을 가지라고 했다. 다음은 서원식의 서약서이다.
서원식에서 하는 서약
주여 나를 받아주소서 그러면 내가 살 것입니다.
내가 기다리며 기대하는 가운데 기뻐하게 하소서.
형제여, 당신을 부르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기억할 것이며 또한 이제 당신이 할 대답도 그분께 하는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하여 당신은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자신을 그분께 봉헌하시겠습니까?
--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당신 형제들과 일치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끝까지 수행하시겠습니까?
-- 그렇게 하겠습니다.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당신 형제들과 더불어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것까지를 공유하면서 마음을 열도록 노력하며 살아가시겠습니까?
-- 그렇게 하겠습니다.
당신 형제들과 더불어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이웃에 더 잘 봉사하기 위하여 또 그리스도의 사랑에 당신 자신을 남김없이 바치기 위하여 끝까지 독신으로 지내겠습니까?
-- 그렇게 하겠습니다.
-- 중 략 --
위의 서약은 공동체의 수사가 되기 위한 서약일 뿐이다. 떼제의 화해와 일치의 의미가 많은 젊은이들에게 호응을 얻어 함께 모여 공동기도하는 것과 또 떼제의 찬양을 기도의 후렴귀로 하는 것이라든지 묵상등을 특별나지 않게 하면서 많은 일체감을 주고 있다.
B.카톨릭의 '피정'
피정이라는 말은 한문표현에서 들어온 것이다. 즉, '피소정념(避騷靜念)' 혹은 '피세정수(避世靜修)'의 줄임말이다. 풀이해 보면, 소란함을 피해서 중요히 묵상에 잠긴다는 뜻이 된다. 영어로는 'retreat'란 단어를 쓴다. 개신교적 해석으로는 퇴수로서 평상시의 생활에서 물러나와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피정의 역사는 이렇다. 오늘날 카톨릭 신자 중 피정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14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피정은 교회안에서 수도자나 은수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개념이었다. 차츰 평신도들에게도 그 필요성이 생기던 중,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이 교회에 소개되면서 이 방법을 통하여 평신도들도 자신을 돌아보고 수련하는 기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16세기 초에는 성 빈첸치오 드 바오르가 당시의 사회적 요청에 응하여 평신도들의 단체피정을 시작했다. 이것이 평신도들의 첫 단체피정이다. 제 2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가 더욱 더 평신도의 적극적인 신앙생활, 개인적인 신앙체험 등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서 부터 피정은 평신도들에게 더욱 많이 알려지고 많은 이들이 피정에 참가하는 추세이다. 특히 주일학교 어린이들과 중.고등부 학생들, 대학.청년들 교사들의 피정이 많이 있고 30대 부부, 40대 부부 등 여러 부류의 단체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지도신부들이 다수 있다. 그들의 필수불가결한 피정장소는 각 교구별로 산재해 있고, 1990년 현재 전국에 약 35곳에 이른다. 각 '피정의 집'마다 나름 대로의 프로그램을 갖고 있으며 지도신부가 있고 지도를 요구할 때에 그들은 피정을 지도하지만 원하지 않을 시는 그 단체의 신부가 지도를 해야 한다. 학생들의 피정에는 많은 재료들이 있는데 감수성 훈련에 관한 것과 많은 피정을 위한 글귀와 기도문이 있고 피정묵상을 위한 성경구절 안내와 다양한 참회예문이 있고, 특히 상당한 양의 슬라이드 자료가 있다. 성인들을 위한 피정에는 영신수련 피정(8,10,30일), 청원자 피정(3박 4일), 첫서원자 피정(5박 6일), 종신서원자 피정(8일), 종신서원 10주년 피정(10일)과 부제서품을 앞두고 사제들이 참여하는 30일 피정이 있다.
C.그룹 다이나믹스
그룹역학에 대한 이론은 미국 마이네주 베델에 있는 국립교육연구원에서 1947년에 사회심리학자 쿠르트 레윈(Kurt Lewin)을 중심으로 인간관계훈련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면서 정립되기 시작했다. 현재 이 국립교육연구원은 산업계, 교육계, 사회사업계, 정긴의학계와 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대인관계 개선과 조직개발을 위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인간관계 훈련을 실시하고 있는 대표적 기관이라 할 수 있다. 이 인간관계 훈련이 구미 여러나라에서는 이미 소개되어 실시된지 오래이고 일본에서는 1960년도부터 이것이 소개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대에 소개된 이래 교회, 청소년단체, 일반사회단체, 직장, 병원, 학교 등지에서 여러가지 형태로 실시되지만 대부분이 종교적인 단체, 즉 카톨릭과 개신교의 수련회 등에서 활발하게 실시되고 있다. 이런 그룹방법이 종교적인 차원에서 실시되기는 17-18세기의 중세 카톨릭이나 경건주의 운동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현재 우리가 실시하고 있는 그룹방법의 원형은 1905년 이후의 미국 성공회 교육 지도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시도된 것으로 본다.
최근 우리나라에 이 그룹방법이 도입되어 매우 활발히 실시되면서 그 명칭도 다양하게 지어졌다. 공동체 훈련, 공동체의식 훈련, 구조화된 체험, 지도력 개발, 심성개발, 체험학습, 감수성훈련, T-그룹(Training), D-그룹(D-evelopment Group)등의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 교회에서는 소그룹 성서연구의 붐을 일으켰고, 처음에는 젊은이들 층에서 시작한 이 소그룹 성서연구는 성인들에게고 제자훈련이란 이름으로 알려진바 되고 있다. 홈즈는 교회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이런 일련의 훈련들이 교회안의 갈등을 제거해주고 교인 상호간의 관계성을 강화해 줌으로써 교회의 목적을 효과적으로 성취하게 해 준다면 참으로 바람직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Ⅳ.코이노니아적 목회
A.정 의
코이노니아(koinonia)의 핵심적인 의미는 기본 단어인 코이노스(koinos:공통)에 있으며, 명사 코이노니아(koinonia:교제)와 코이노노스(koinonos:동료), 그리고 동사 코이노네요(koinoneo:나눈다)는 모두 우리가 무엇을 공통으로 소유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어떤 사람이나 사물과의 나눔 혹은 친교를 뜻하며, 그로 말미암은 관계와 사랑을 의미한다. 신약성서에 사용된 단어들은 그리스도인의 코이노니아를 세가지 형태로 묘사하고 있다. 첫째, 성도가 함께 물려받은 공통된 유산으로서 복음과 그 축복을 공유함을 의미하는 것과 둘째로는 성도가 복음을 나누어 줌과 동시에 소유한 물질도 서로 나누어주는 코이노니아를 누리는 것이다. 셋째는 서로 주고 받는 것으로 물질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돌아보는 모든 면을 다 포함하는 것이다.
이에 따른 코이노니아적 교회는 어떤 것인가? 외형적으로 보이는 건물이나 조직으로서의 교회를 가리켜 '보이는 교회'라고 한다면, 이에 반하여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하나님과 인간의 코이노니아 및 인간 상호간의 코이노니아를 가리켜 '보이지 않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는 곳이며, 그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설 교제를 나누는 코이노니아이다.
B.코이노니아적 목회형태
공동체가 결핍되어 있고 또 이를 양육할 사역의 구조가 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는 그 누룩이 제 구실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의 흩어진 백성도 하난가 되지 못하므로, 공동체는 교회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특히 오늘날 목회형태의 두드러진 현상 가운데 하나인 외형중심적 목회현장에서 더욱 심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숫자가 많을수록 상대방에 대한 관심은 더욱 적어지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교회에 코이노니아 공동체는 서로 관심과 사랑을 기울여 주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개인적 교제의 축복이 흘러 나옴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에 있어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존 스토트(J.Stott)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오늘날 세계 도처의 목회현장에서 꾸준히 증가되고 있는 코이노니아적 목회형태의 필요성을 정확히 뒷받침하고 있다.
"확실히 우리 세대에 적어도 제2차 세계대전 말기부터 가정교회나 가정 그룹 운동이 세계 도처에서 꾸준히 퍼져 나가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명문화된 성경적, 역사적, 목회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성령의 자의적인 순수한 운동으로 보인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설명되어질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세속적 사회의 비인간화 과정과 대다수 교회의 피상적 형식주의에 대한 반발로 이해될 수 있다. 정말로 인간적이며, 진실로 참된 삶에 대한 욕구가 널리 퍼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은 현대교회의 상황에서 가장 시급히 요청되는 것은 교회 안의 참된 코이노니아라 할 것이다. 즉, 교회는 자신에게 부여된 코이노니아적 사명을 충실히 감당함으로써 참된 삶에 대한 욕구를 가진 현대인들을 하나님과 만나게 하고, 또 한 그들이 대인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서로 체험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교회에 있어서 코이노니아의 필요성을 세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로, 코이노니아는 사람이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수단이 되므로 필요하다. 둘째로, 코이노니아는 성도들로 하여금 성찬식과 기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깊은 교제를 이루게 하고, 또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은 한 지체로서 성도 상호간의 깊은 사랑과 교제를 가능케 함으로써 필요한 것이다. 셋째로, 코이노니아는 성도들이 모든 것을 서로 유무상통케 하는 사랑의 행위가 되기 때문에 필요하다. 반면에 코이노니아를 목회현장에 적용하면서 반드시 유의할 사항들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은 이 세상을 위해서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둘째, 오늘날 대형교회 만을 마치 성공적인 목회의 표본으로 생각하는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코이노니아 공동체로 말미암아 오늘날 제도화되어 가는 대형교회들이 갱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또 한편으로는 대교회 지상주의에 반발하는 무교회 주의 및 현실도피적 신앙 그리고 왜곡된 카리스마 운동 역시 오늘날 코이노니아를 목회현장에 적용함에 있어서 경계해야 할 신앙의 변태적 현상임을 유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지향해야 할 목회형태는 '함께 하는 공동체', 즉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통한 목회형태이며, 이를 통해서 현대교회는 갱신될 수 있다. 이제 미래의 목회형태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로 말미암아, 그리고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실현했던 바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통해서 코이노니아적 목회형태로 회복되어야 한다. 현대교회는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교회 안에 과감히 세우고, 그들을 세상으로 내어 보내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요청받고 있는 것이다.
C.한국교회를 위한 코이노니아적 목회형태
해방 후의 한국교회는 카리스마적 활동과 인물에 근거한 목회가 활발했고, 6.25전쟁 직후에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치유적 기능의 목회형태가 발전했으며, 그 이후에는 근대 산업사회가 발전하면서 치유나 구호 보다는 개인적 문제와 요구가 등장하게 되어 개인 신자들 돌보는 심방이나 상담목회 형태가 발달하게 되었다. 더구나 기존의 목회형태는 대부분 목회자 중심의 폐쇄적인 목회형태를 취하여, 목회현장에서 발생되는 성도들의 다양한 욕구들을 효과적으로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 목회자 중심의 폐쇄적 목회에서 평신도 중심의 개방적 목회로 갱신하되, 그 촛점을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의 코이노니아적 공동체 형성에 두어야 할 것이다.
코이노니아적 목회형태를 한국교회의 목회현장에 어떻게 적용하여야 하는 지는 크게 네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한국교회의 경직된 기구주의를 뛰어넘어 성령의 친교로 말미암은 '영적 목회형태'로 갱신하는 것이다. 둘째는, 개인의 신앙적 혹은 종교적 욕구 충족을 목적으로 하는 폐쇄적 목회형태를 뛰어넘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로 이해하고 성도들을 향해 모든 것을 열어두는 '개방적인 목회형태'로 갱신하는 것이다. 셋째는, 갈등과 반목과 증오를 뛰어넘어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화해의 목회형태'로 갱신하는 것이다. 넷째는, 날로 무거워져 가는 교회사역의 산적한 일더미로부터 해방되어 일중심으로부터 '인간돌봄 중심의 목회형태'로 갱신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코이노니아적 목회형태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가장 시급히 필요로 하는 목회형태인 동시에, 현재의 목회상황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목회적 요구를 영적, 개방적, 화해적, 인간 돌봄 중심적 열쇠로 풀어 나가고자 하는 가장 효과적인 목회형태가 된다.
Ⅴ.선교지향적 목회
A.선교의 개념
선교(mission)라는 용어는 라틴어의 '보낸다'는 뜻을 가진 '미토(mitto)'에서 유래된 것으로 헬라어의 '아포스텔로(apostello)'와 '펨포(pempo)'에 해당하는 말이다. 이 의미는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것을 뜻한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교회 전체의 사명을 지칭하기도 한다. 승천하시지 직전에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마28:19-20)을 시작으로 선교의 역사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선교사라는 용어는 13세기에 천주교의 수도원에서 처음 사용하였는데, 그 의미는 세상에서 사도의 생활과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자를 뜻하였다.
선교의 개념을 바로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선교의 개념에는 크게 두가지 서로 다른 견해가 있다. 그것은 '이 세상은 불타고 있는 건물과 같음으로 시간이 너무 늦기 전에 구조 작업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이 사회는 저주받아 곧 멸망하게 되므로 사회구조 개선에 시간을 보낼 수가 없다'는 전통적인 견해와, '하나님은 역사 과정 가운데서 일하시며 하나님의 선교의 목적은 사회의 조화의 의미에서 샬롬(Shalom)-평화, 안녕의 건설에 있다'는 에큐메니칼 견해가 있다.
1.에큐메니칼 선교신학
20세기 기독교 교회에서 중요한 운동 중의 하나는 에큐메니칼 운동이다. 19세기에 서구 교회는 전 세계에서 많은 교회를 설립하였으나, 분열로 말미암아 선교지에서 혼란을 줄 뿐 아니라 선교에도 장애를 주었다. 이로 인하여 교회 연합 운동이 선교지에서 일어났다. '교회 연합 운동인 세계 교회 협의회(W.C.C)의 창설은 자유주의 신학 사상으로 오히려 선교에 변화와 장애를 초래하였다. 20세기 세계 기독교 운동과 선교 운동에 큰 역할을 했던 서구 교회 지도자들은 전통적 선교 개념을 포기하고 사회 구원의 선교 신학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사실 W.C.C를 중심으로하는 에큐메니칼의 선교는 계속 순수한 복음을 그 자체를 증거하기 보다는 '인간화'를 그 목표로 하였다. 이들의 신학에 가장 종요한 것은 만인 구원론적인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 있고, 따라서 세상은 이미 구속된 세상이고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유업을 주장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같이 W.C.C를 중심으로하는 에큐메니칼의 선교는 구원을 못 받은 영혼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자각 못하는 자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들의 관심을 영적 구원과는 상관없이 육신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이것을 호켄다이크는 '샬롬'이라는 단어를 빌어 선교신학을 정립 시켰던 것이다. 샬롬의 구체적인 영역은 사회의 평화, 결합, 조와, 공의를 성립시키는 것이며, 이를 위해 교회는 복음을 선포하고 봉사하며 증거하는 것이라 했다.
2.복음주의 선교
복음주의 선교는 로잔 언약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철저하게 사회 복음주의가 되어버린 W.C.C에 대항하여 참으로 하나님의 복음이 증거되게 하는데 있다. 로잔 대회의 신학은 대체로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선교신학에서 복음 전도는 그 무엇보다 우선한다. 뿐만아니라 지상 명령의 어떤 세가계관이나 문화적 위임, 사회적 관심과 행동, 또는 두 왕국의 중요성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는 역사적 복음주의 신학, 곧 구원론을 보다 잘 나타내 주었다. 셋째는 성경의 무오성에 관한 것으로 에딘버러 대회에서 일어버릴 뻔한 것을 분명하게 되찾은 것이다.
B.한국교회의 선교적 사명과 문제점
21세기 운동의 발기인이자 현재 국제 총무로 있는 루이스 부시는 이 운동의 핵심국가로 한국을 지목하면서 말하기를 "전 세계 교회가 한국 교회를 주시하고 있다. 이 운동은 한 두번 모였다가 흩어지는 운동이 아니며, 2000년 이후까지 지속될 인류 최대, 최후의 성령운동이다. 영적으로 탁월한 한국교회 목회자와 기도로 무장한 1천 2백만 성도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다."
한국교회는 세계선교를 수행함에 있어서 아직도 선교사의 숫자적인 면에서나 전교인 당 선교사 파송 비율에서 볼 때 서구 교회를 따라 갈 수 없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이 시대에 세계 선교의 지도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결코 허황된 바람이 아니라 이것은 세계적 동향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교회는 선교에 있어서 분명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우선 영적 생명력을 지닌 젊은 신자가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적인 열정도 다른 나라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뜨겁다. 세째로 재정적으로 선교를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이며, 다음은 세계의 2/3가 한국교회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이라는 것이며, 특히 한국 선교사들이 타문화권에서 그 문화의 적응이 빠르다는 것이다. 끝으로 현대 한국인들이 세계 각국에 흩어져 디아스포라적 선교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처럼 선교적 위치와 가능성이 중한데 비해 한국교회의 선교적 문제점이 나타난다. 단편적으로 선교의 가능성을 효율적으로 잘 감당할만한 선교체재가 아직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이 한국교회의 실정이다. 문제점으로는 철저한 교파주의로 인한 협력 선교의 부진이다. 이는 한국교회가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약점이며 이미 세계 교회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두번째로는 교직주의로 인한 평신도 자원의 동결로서 실질 교회의 98%이상이 평신도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참여가 없는 선교사역은 풍성한 영혼 구원의 결과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세째로, 물량적인 성장주의로 인한 전시적 선교가 되어 버렸다. 이는 선교의 순수한 동기에서 벗어나 전시적이고 명분위주의 사업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철저한 개교회 주의로 인한 선교의 무관심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개교회의 대형화로 인하여 자신의 교회만이 최고로 생각하는 편협적이고 배타적인 신앙을 하고 있다. 이 개교회 주의는 각 지역에서도 많은 문제점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하나를 덧붙인다면 지난친 선교의 열정으로 인한 선교단체의 폐단이다. 선교단체의 난립현상과 경험부족의 선교사 파송으로 인한 폐단인 것이다.
C.선교지향적 교회
현대 교회는 선교사명을 위해서 과감하게 교회 체제를 바꾸어야 한다. 선교를 위한 구조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러한 세계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인 개개인이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선교지향적인 교회를 목회자, 예배, 선교교육의 측면에서 살펴본다.
1.목회자의 선교구조적 갱신
선교의 성패는 그 지역 교회의 지도자들의 지도력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개교회 지도자들은 선교 문제에 있어서 흔히 많은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다. 목사 자신은 선교 방면에 대해서 거의 훈련을 받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자기 교단의 선교 기관에서도 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최고의 관심사가 더 많은 예산이나 건물 또는 프로그램, 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전 세계를 향한 비젼을 품고 더 깊이 헌신하는 것이어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목회자들이 먼저 선교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고 목회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현지 선교지를 답사한다던가, 선교에 관한 많은 서적들을 참고로 할 수 있다. 우선적으로 목회자를 비롯하여 교회지도자들이 앞서지 않으면 안된다. 선교지향적인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목회자 혼자만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다. 전 교인이 동조하고 따라 주어야 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그래도 선교의 핵을 이룬다고 볼 수 있는 전주 안디옥 교회는 교회 재정의 60%를 선교비로 사용한다고 한다. 그리고 담임 목사인 이동휘 목사는 선교하는 자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고 말한다. 요약하면 "제자들이 주님의 지상명령을 승천후 여름까지도 못하다가 오순절날 성령이 강림하신 이후로 그 명령이 실현되었습니다. 복음선교는 오직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선교를 못하는 이유는 어느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선교하는 일은 나로 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을 때는 이미 성령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선교를 할 때 인간적인 모든 방법들이 개입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직 성령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외에도 서울 남서울 교회의 홍종길 목사는 그의 안식년을 기해 중국에서 사비로 교회를 개척하였고(한 교회만 아니라 여러교회로 추정), 서울 온누리 교회의 하용조 목사는 강단에서 한번도 헌금에 대한 설교를 하지 않지만 선교를 위한 선교헌금은 선포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선교헌금에 대한 설교를 통하여 그 예배에 참석한 자들이 선교헌금을 작정한 것이 약 10억에 가깝다고 한다.
2.예배를 통한 선교정신 고취
전 교인이 자발적인 선교 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은 예배이다. 한국교회의 성도는 아직도 샤머니즘의 영향을 벗지 못하여 예배를 복 받으려는 한 방편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음을 볼 수 있다. 어느 특정한 주일을 정하여 선교헌신예배로 드리는 것은 선교정신을 고취하기에는 부족하다. 선교에 대한 메세지를 강력히 강화한다던가 현재 선교사역지의 보고서를 알려주고 전적으로 기도를 부탁한다던가, 많은 예배 가운데 한 예배(수요일 예배, 새벽예배, 금요철야예배 등)를 선교를 위한 예배로 드리는 것도 선교정신을 고취시키는 좋은 방법일 것이다. 아주 획기적인 것은 수개월 전에 선교수련회를 준비하여 교인들이 순수한 선교의 정신을 가지고 정규적으로 실질적인 답사와 함께 그곳에서 선교수련회를 실시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많은 재정적 요구와 사전 교육이 필요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담임 목사가 선교에 대한 설교를 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교인들에게 선교의 정신을 불어 넣어주는 것은 없다. 또한 예배를 통한 선교교육과 함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선교 교육이 주일 학교에서부터 장년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3.선교교육 강화
현재 한국 교회는 1988년부터 매 2년마다 개최되는 '선교한국'을 통해 수많은 대학생과 젊은 청년들이 선교에 헌신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많은 선교 헌신자가 배출되어도, 교회가 이들을 품고 훈련하여 파송할 준비가 되지 않으면 이들의 헌신은 교회 안에 고여 결국 상실되고 말 것이다. 이런 면에서 교회가 선교의 자원이 될 학생들을 바르게 선교교육을 한다면 오늘 선교지에서 요구되고 있는 한국교회의 선교 갱신은 물론, 필요한 곳으로 흐르는 물로서 우리의 학생 자원들은 세계 복음화의 최전선에서 그들의 생애를 드리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교회학교 어린이들에게까지도 선교를 가르쳐야 한다. 미국 교회에서 외국으로 나간 선교사들 중의 많은 수가 12세 미만의 선교사로 헌신했다는 통계가 있다. 앞으로 20년 동안 한국교회가 보다 많은 선교사를 보내기 원한다면 지금 주일 학교에서부터 선교교육을 잘 시켜야 할 것이다.
Ⅵ.제자훈련
오늘날 한국교회가 제자훈련이라는 개념을 교회 양적 성장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또한 제자훈련이 개인의 영적 발달.영적 성장에 치중하기 때문에 그것은 종종 기술적인 면과 관계되어 또 다른 율법주의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제자훈련은 교회성장의 도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이다. 무슨 특별한 교재를 가지고 특별한 시간에 모이는 것이 제자훈련이 아니다. 목회 전체가 제자훈련이요, 목사의 삶 자체가 제자훈련이다. 이 제자훈련은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함보다 발전시키기 위함임을 알아야 한다.
A.목표와 필요성
1.목 표
제자훈련을 함에 있어서 먼저 주의를 해야 할 것은 제자훈련이 단순한 성경공부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나 전도나 양육을 위한 전문적인 혹은 기능인을 양성하는 방법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제자훈련의 궁극적인 목표는 한마디로 그것은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본받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여 영적 재생산을 할 수 있는 헌신된 예수님의 제자를 육성하는데 있다. 재생산은 그리스도인이 실제적인 성장을 시작하는 단계이다. 세계를 복음화하기 위한 하나님의 기본 방법이 영적 재생산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 복음화를 위한 제자 삼는 일의 소명은 교회에서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이며, 모두에게 부여된 임무인 것이다.
2.필요성
와그너는 '세계 인구의 약 30%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지만 이들 중 대부분은 이름만 그리스도인이지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와같은 이유는 바로 제자훈련을 통한 올바른 양육을 받지 못한데서 기인된 것이다. 양육하고 적절한 훈련을 시켜서 성숙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워주는 일은 중요하다. 제자훈련의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네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로, 제자 삼는 사역을 통하여 단지 더 많은 제자를 얻는 유익 뿐만이 아니라 양육자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더 헌신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제자 삼는 사역은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째로, 오늘날의 상황에 적절한 과업을 감당하기 위하여 교회를 훈련시키며, 교회에게 기동력을 부여할 수 있는 지도자들을 따르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네째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데 필요하다. 주님은 우리에게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의 구원을 이루라(빌2:12)고 말씀하셨다.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이룬 양적 부흥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더 큰 하나님 나라의 비젼을 가지고 전진하기 위해서 교회는 새롭게 갱신해야만 할 것이다. 그 방법으로는 교회의 주체인 평신도를 예수님의 제자로 가르치고 훈련하는 것이 긴박하게 요구된다.
B.임상적 제자훈련 모델
이 분야에 있어서 대표적인 인물은 아임스(Leroy Eims)와 쿠네(Gary W. Khune)이며, 대부분의 선교단체들의 성장 프로그램이 여기에 해당된다.
1.아임스의 모델
아임스는 국제 네비게이토 선교회에서 오랫동안 사역을 해오고 있다. 그는 선교회에서 실제적으로 제자를 삼는 일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군들을 생산해 내는 일을 돕고있는 많은 사람들의 경험과 아울러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그리스도인의 성장 과정을 '제자 삼는 사역의 기술'에서 상세히 기술한다. 그는 성장 과정들을 초신자 또는 양육받지 않은 상태의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로부터 제자, 일군, 지도자가 되기까지의 4단계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단계는 전도과정으로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주님을 증거하는 단계이다. 그 결과 초신자를 얻게 된다. 둘째 단계는 확립과정으로 전도의 결과로 얻어진 초신자를 양육하여 훈련 목표에 들어 있는 대로 제자의 삶의 성품들이 그의 삶 가운데 나타나도록 세워 주는 일을 하는 단계이다. 그 결과로 초신자는 전도할 수 있는 제자가 된다. 세째 단계는 무장 단계로 제자를 일 대 일로 만나 도와줌으로써 훈련 목표 가운데로 인도하는 단계이다. 그리하여 다른 일군을 세워주고 영적으로 무장시킬 수 있는 일군을 얻게 된다. 네째 단계는 전문화 훈련 과정이다. 일군들 중에서 지도자로서의 부르심과 은사를 받은 자로서 첫 지도자가 행한 모든 일들을 수행할 수 있는 자이어야 한다. 그는 다른 사역지에 가서도 자신이 훈련받았던 것과 같은 종류의 사역을 홀로 담당할 수 있는 자이다. 이러한 과정들에 소요되는 기간은 초신자에서 제자로의 과정은 2년이고, 제자에서 일군으로의 과정은 2년, 일군에서 지도자로서의 과정은 3년이다.
2.쿠네의 모델
쿠넨는 '개인적 새신자 양육의 원동력'에서 개 교회에서의 효과적인 훈련으로 먼저 초신자 양육을 받은 뒤에 본격적인 성장 단계로 6단계를 제시하고 있다.
1단계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로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에서 전도의 효과를 성취하는 단계이다. 2단계는 성장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로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이 일관성있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단계이다. 3단계는 그리스도인은 전도하기 위하여 전적으로 헌신하므로 이제 그의 말과 생활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도에 참여하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는 단계이다. 4단계는 재생산의 첫 단계이다. 자신을 지도자로 간주한다면 자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 새 그리스도인과 함께 일하도록 훈련받고 있는 단계이다. 이것이 자신의 재생산의 첫 표식이기도 하다. 5단계는 당신이 양육하고 훈련하는 사람의 사역에서 훈련받는 사람에게 그 훈련을 전하도록 성장함을 나타내는 단계이다. 이 국면이 재생산의 중요한 면이 되는 것이다. 6단계로는 실제적인 재생산을 위한 단계이다. 본 단계에 속한 사람은 모든 단계를 스스로시작하는 사람이 되도록 성장하는 단계이다. 이 사람은 당신에게서 독립이 가능한 사람이다.
C.선교전략으로서의 제자훈련
예수님의 지상명령의 목표가 제자를 삼는 것이며 예수님도 일생의 사역을 제자훈련으로 일관하셨고,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기 위한 계획이 바로 제자를 훈련시키는 일이었다. 요즘 세계선교 운동은 선교의 개념으로 진통을 겪고 있다. 전도가 현존, 인간화, 해방화로 대치되었다. 이러한 급진적인 선교사상과는 반대로 복음주의 교회는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에게 전도하는 것을 강조하여 거기에 대한 전략개발에 열중하고 있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옹호자들이 평신도의 중요성에 눈을 먼저 뜬 것은 사실이지만 전략면에서는 성경적 원리를 따르지 못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내세운 전략은 참여와 세속화이다. 그 반면에 평신도의 선교적 사명을 크게 외치며 일어난 복음주의 선교단체들은 그들의 전략이 성경에서 재발견된 제자도였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실천적 행동에, 복음주의 선교단체들은 인격적 형성에 그 전략의 우선권을 두고 있다. 에큐메니칼측의 평신도 운동은 탁상공론에 그쳐 버린 듯한 인상을 남긴 반면, 복음주의 선교단체들은 세계적으로 괄목할 만한 열매를 거두고 있다. 그래서 선교전략으로서는 성경적 방법인 제자삼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사역의 최대 목표는 제자를 삼는 사역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얼마나 멋있는 교회당을 건축하느냐 하는 것도, 얼마나 멋있는 설교를 하느냐 하는 것도, 얼마나 많은 신자를 확보하느냐 하는 것도, 그것이 제자삼는 사역의 도구와 보조자료와 방법은 될 수 있을지라도 목적이 되서는 안된다. 오직 제자삼는 사역만이 우리의 목표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가고, 전하고, 세례주고,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할 것이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거듭나는 것을 봄으로 끝나는 것이 우리의 사역이 아니다. 가르쳐서 순종하게 하며 성장하여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뿐 아니라 또 닷 가르쳐 순종하게 할 수 있는 제자를 재생산할 수 있는 제자삼는 목표가 우리 사역의 목표이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복음은 우리 세대에서 끝나 버리고 말 것이다.
성경의 선교론과 전도론 연구에 나타난 현대교회의 중요한 경향은 제자훈련이다. 근래에는 신앙의 체험과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강조하는 제자화 훈련의 관점에서 선교를 다룬다.
Ⅶ.결 론
영성이해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평신도들이 영성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영성이라고 이야기를 던지면 신비스런 체험과 초자연적인 능력의 소유자 등의 말을 먼저 꺼낸다. 필자가 봉사하고 있고 있는 교회의 학생들에게 영성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들이 막무가내이다. 한 학생이 '기도하는 능력'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런대로 제일 나은 말이었다. 통전적 영성의 이해에 있어서 목회자 자신이 올바른 개념하에 있지 안으면 안된다. 무엇보다도 목회는 목회자가 우선적이다. 모든 교회의 제반도 목회자 중심으로 인도되어 진다. 하물며 신앙의 성장과 관리 또한 목회자의 지도하에서 제대로 이루어 진다. 영성을 통한 목회개발에 있어서 가장 중심은 목회자 즉 성도들을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중심이 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목회에 성공하려면 목회자가 먼저 깨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평신도를 향한 올바른 목회에로 전향할 수 있다.
교회(기독교)는 성장해야 하는 무리이다. 성장은 가만히 앉아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존의 방법들로 인해 때에 맞혀 시기적절하게 임기응변으로 목회에 임한다면 그 교회는 성장이 없다. 교회의 성장요인 중에 기도와 말씀을 통한 삶의 적용 같은 가장 기본적인 요인 외의 목회자의 지각있는 판단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얼마만큼 목회자가 자신의 목회에 있어서, 또는 교회에 있어서, 더 나아가서는 한국교회에 있어서, 더 광범위하게 말하면 기독교 전체에 있어서 과거와 현재의 성패의 실례를 토대로 하여, 미래지향적인 목회방침을 설정하고 대처해나가는가에 통전적 영성의 목회개발이 제대로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영성에 대한 평신도들의 올바른 인식을 위한 교육과 영성훈련 프로그램, 선교지향적인 목회와 제자훈련 등등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이 시대에 필요하고 얼마나 적적하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검토하고 분석하여야 할 것이다. 그 다음에 영성을 통한 목회개발이 양적 질적으로 교회와 성도개인에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알고보면 통전적 영성의 목회개발은 초대 교회시대의 공동체적 예배형식과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한 사역으로 되돌아 가는 경향을 짙게 느낄 수 있다. 불란서의 떼제 공동체이며, 미국의 코이노니아 농장, 인간관계훈련을 통한 교육방법, 선교지향적인 교회와 목회 등이 모두 여기에서 비롯될 수 있다고 보아 진다. 하지만 현대 시대에 맞게 모든 방법론과 적용론이 변화한다. 올바른 영성을 이해하고 그러한 삶을 살고 있다면 성서를 기초로 하는 목회방법론이 무수히 많이 나올 수 있다. 얼마만큼 고민하고 연구하는가에 달려있다. 교회는 성장을 요구하지만 변화없는 성장을 이룰 수는 없다. 올바른 영성을 기초로 많은 고민과 연구에 교회는 변화하면서 성장할 수 있다.
Ⅷ.참고문헌
국내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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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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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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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장지혁. "목회에서의 영성훈련 프로그램 개발." 신학석사학위논문, 감리교신학대학신학대학원,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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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간행물
1. 김인호. "대학부선교교육 이렇게 하라" 「목회와 신학」 1994년 8월호,
2. 성기호. "교회의 사명과 복음 선교론." 「목회와 신학」 1991년 12월호,
3. "기독교 21세기 운동." 「뉴스레터」 1993년 10월호,
Ⅰ.서 론
현대교회 특히 개신교에 있어서 영성에 대한 깊은 관심은 최근의 움직임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카톨릭교회는 12세기를 전후해서 꽃을 피운 신비주의 신학을 계속 개혁하고 수정.보완하여 오늘날의 영성신학으로 발전되었고, 새로운 분야로 정립이 되었고, 현재에도 많은 수도자들과 신도들이 영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실천적인 움직임이 매우 활발하다고 볼 수 있다.
영성은 자연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관계들이 양육을 통하여 성숙하듯이 우리가 영적 삶이라고 부르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다만 점진적으로 발전될 수 있다. 다시말하면 영성은 개발되는 것이다. 영성개발이란 새사람을 만들어 나가는 인간의 훈련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우리들 속에서 새창조의 역사를 행하실 수 있도록 성령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훈련이다.
교회사적 영성에서 우리가 살펴 본 바 같이 종교 개혁자들의 경건과 영성생활의 전통은 미국의 대각성 운동이 19세기 이후 세계선교운동으로 확산되었으며 20세기에 와서는 세계선교운동의 열매라고 할 수 있는 에큐메니칼 영성운동으로 꽃피게 되었다. 특히 최근에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신.구교의 울타리를 넘어 그리스도교 영성의 공동광장에 점차로 폭이 넓어져 가고 있다. 이런 경향은 영성훈련의 다양한 에큐메니칼 운동 측면에서 즉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개신교 안에서 일고 있는 수도원 운동이 이런 방향에서 영성운동을 시도하고 있는데, 스코틀랜드의 '요나 공동체', 불란서의 '떼제 공동체', 그리고 미국의 '코이노니아 농장' 같은 데가 그 대표적인 영성훈련의 센터가 되고 있다.
본 소고는 통전적 영성의 목회개발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우선적으로 영성에 대한 교육적인 개념을 살피고, 영성훈련의 대표적 모델 세가지를 제시하며, 코이노니아적 목회형태와 제자훈련의 영성목회, 그리고 선교지향적인 영성목회를 간단히 살펴본다.
Ⅱ.영 성 교 육
A.영성교육의 목적
영성교육의 목적은 한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완전이다. 여기서 완전은 과.부족이 없는 완전한 존재를 지닐 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무엇일까? 필자는 바로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요한 웨슬레도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개념이다. 그래서 그는 설교를 통하여 완전은 곧 사랑을 뜻한다고 누차 강조하였다. 사랑의 완성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데 있다. 그리고 이것이 영성교육의 목적이기도 하다.
B.영성교육의 내용
영성교육의 내용에 있어서는 세가지 측면에서만 살펴 본다. 기도와 예배와 성서연구이다.
1.기 도
기도는 가끔 영성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욕망은 기도의 행위에 의해서 충족된다. 영성이 하나님과 관계를 지향하는 내적 성향이라면, 기도란 이것을 구하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영성적으로 성숙하게 됨에 따라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치중하게 된다. 이러한 기도는 무념적(無念的) 기도와 상념적(想念的) 기도이다. 무념적 기도는 마음에서 상을 비워 버리는데 목적을 둔 기도이다. 주로 침묵의 기도로서 고전적으로는 관상 및 신과의 합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표현된다. 한편, 기도에 있어서 보통 성서적인 이미지를 그려봄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의 전달 매체로 삼는 명상의 형태가 있다. 이것이 전형적인 상념적 기도의 형태이다. 하나님 사랑을 위한 훈련으로서의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구하기보다 하나님과의 보다 친밀한 관계성을 추구하는 기도에 역점을 두어서, 하나님의 뜻을 삶을 통하여 준행하는데 힘쓰도록 해야 할 것이다. 삶을 통한 영성 교육의 한 방법으로서의 기도는 이러한 기도의 실천적 의미를 갖는다.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특별한 만남은 일상의 삶 가운데로 확산되어야 하며, 초월적 기도의 경험이 삶의 순간 순간마다 새롭게 경험될 때,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성취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자는 기도가 삶과 유리되어 개인적 종교성의 열락을 추구하는 방편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기도의 능력은 개인적 삶과 공동체적 삶의 능력으로 연결되고, 삶의 현장에서 기도의 출발점을 찾도록 해야 할 것이다.
2.예 배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해 주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림으로서 응답하는 만남의 사건이 발생해야 한다. 한편 예배는 하나님의 일이지만 동시에 그 역사하심에 응답하는 인간의 행위에 의해 형성된다. 따라서 예배는 매일의 삶 속에서 임재하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요 응답이다. 그러나 예배는 개인이 아닌 공동행위인 것을 의미한다. 만남의 사건과 공동행위는 예배의 모든 순서를 통하여 일어나게 되며, 특히 현대 개신교회에서 뜸한 성례전을 통한 하나님의 현존과 선포되는 말씀의 역사가운데서 일어나게 된다.
1)성례전
성례전은 초대 교회 이후 종교개혁 시대까지 가장 핵심적인 예배의 요소가 되어 왔다. 종교개혁이 있기 전까지 기독교의 성례전은 7성례였다.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에 의해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한 세례와 성만찬을 성례전이라고 못박아 놓았다. 세례라는 성례전을 통하여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또 그러한 공동체의 성만찬을 통해서 위로와 용기를 얻고 믿음과 소망, 사랑을 주님 앞에서 재 다짐 하는 것이다. 성례전은 그 자체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밀접한 관계성이 전제되며, 그 초월적 관계성의 가시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성례전이 갖는 공동체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근거로 한 인간 관계의 성격을 나타내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성례전에 있어서 성만찬은 떡과 포도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와 말씀이 포함되어 있다. 회중은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받음으로서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회중 상호간의 교제를 나누게 된다. 이렇게 떡과 포도주는 행위와 말씀에 연결될 때 그리스도의 임재의 상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영성교육방법으로서의 성만찬은 예전으로 경험된 이러한 그리스도의 현존을 삶 속에서 그 의미의 실천을 통하여 실현되어야 할 것이다.
2)설 교
설교는 예배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예배를 떠나 독자적으로 성립할 수가 없다. 종교개혁과 함께 예배자들의 언어로 말씀이 선포되어진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설교는 새로운 생명의 양식으로 수많은 영혼들을 일깨웠고, 계속하여 개신교는 설교 중심의 교회로 발전되어 갔다. 그 후로 지금까지 설교는 개신교 영성개발의 중심적 수단이 되어 왔다. 설교는 기록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선포하고 그 말씀을 오늘의 언어로 바르게 해석하여 삶의 현장에 효율적으로 적용함으로써 회중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존에 참여하도록 하여야 한다. 설교는 회중이 하나님의 행위에 응답하도록 듣는 사람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선포되어야 한다. 밀러(D.G. Miller)는 '복음을 설교하는 것은 단순히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설교한다는 것은 단순히 강단에 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역동적인 사건의 일부가 되게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3.성서연구
성서를 통해 하나님은 자기를 계시하신다. 성서는 단순히 과거 경험의 보고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통로이다. 성서연구가 영성교육의 방법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인간이 참여할 때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통한 영성교육은 곧 성서에의 참여이다. 성서연구는 하나님을 만나는데 있다. 이러한 만남은 삶의 변화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성서연구에 있어서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문제는 성서가 삶과 괴리되어 지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성서는 인간들의 하나님 체험에 대한 보고서이다. 또한 그 체험은 과거의 경험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속에서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신앙의 경험이다. 성서를 연구함에 있어서 그 체험에의 참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Ⅲ.영성훈련
이 단원에서 영성훈련을 통한 새로운 교회의 성장을 예시한다.
A.떼제 공동체
떼제는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 지역 중앙 언덕들에 둘러싸인 작은 마을로서 끌루니 읍에서 그리 멀리 않은 곳에 있다. 1940년 이래로 화해와 교회일치를 위해 일하는 한 공동체 형제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공동기도를 삶의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로서 오늘날 갖가지 배경과 나이의 사람들이 찾아와 공동기도와 묵상을 하는 순례지이기도 하다. 떼제 수사중 반은 떼제에 있고, 반은 다른 대륙에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뉴욕의 무허가 정착촌, 브라질 동북부와 동아프리카 최대의 빈민가, 그리고 캘커타(인도)의 가난한 무슬렘 속에서 버림받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우애 공동체를 이루고 산다. 창립후 20년동안 이 공동체는 비교적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점차적으로 18세에서 30세 사이의 젊은이들이 떼제로 몰려들기 시작하였고, 이를 계기로 '젊은이의 공의회'가 개최되어 1974년에 4만여명이 참석하면서 해마다 온 세계의 젊은이들이 모여 자신들의 삶의 관심사를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며 공동체의 기도에 참여한다. 그 공동체의 지침서를 간단히 살펴보면, 머리말에서 공동생활지침에 대한 안내와 권고로 하며, 특히 화해를 요청하고 있다. 다음은 그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공동의 기도'인데 예배에서의 진지함과 찬미와 적극적으로 기도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식사는 기쁨이 넘치는 나눔의 식사를 하고 간혹 '침묵의 식사'를 하기도 한다. 회의는 지석적인 공동체 생활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뜻을 찾는데 목적이 있다고 하면서 평화를 추구함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침묵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인내함으로 순결을 유지하는 우정을 십자가를 통한 이웃사랑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모든 재산은 전적으로 공유하고 가난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창조의 소박한 아름다움속에 놓아두는 것이고 하루하루를 기쁨속에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고 했다. 이 지침이 자체적으로 하나의 목적이나 결말인양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는 심정을 가지라고 했다. 다음은 서원식의 서약서이다.
서원식에서 하는 서약
주여 나를 받아주소서 그러면 내가 살 것입니다.
내가 기다리며 기대하는 가운데 기뻐하게 하소서.
형제여, 당신을 부르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기억할 것이며 또한 이제 당신이 할 대답도 그분께 하는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하여 당신은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자신을 그분께 봉헌하시겠습니까?
--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당신 형제들과 일치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끝까지 수행하시겠습니까?
-- 그렇게 하겠습니다.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당신 형제들과 더불어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것까지를 공유하면서 마음을 열도록 노력하며 살아가시겠습니까?
-- 그렇게 하겠습니다.
당신 형제들과 더불어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이웃에 더 잘 봉사하기 위하여 또 그리스도의 사랑에 당신 자신을 남김없이 바치기 위하여 끝까지 독신으로 지내겠습니까?
-- 그렇게 하겠습니다.
-- 중 략 --
위의 서약은 공동체의 수사가 되기 위한 서약일 뿐이다. 떼제의 화해와 일치의 의미가 많은 젊은이들에게 호응을 얻어 함께 모여 공동기도하는 것과 또 떼제의 찬양을 기도의 후렴귀로 하는 것이라든지 묵상등을 특별나지 않게 하면서 많은 일체감을 주고 있다.
B.카톨릭의 '피정'
피정이라는 말은 한문표현에서 들어온 것이다. 즉, '피소정념(避騷靜念)' 혹은 '피세정수(避世靜修)'의 줄임말이다. 풀이해 보면, 소란함을 피해서 중요히 묵상에 잠긴다는 뜻이 된다. 영어로는 'retreat'란 단어를 쓴다. 개신교적 해석으로는 퇴수로서 평상시의 생활에서 물러나와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피정의 역사는 이렇다. 오늘날 카톨릭 신자 중 피정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14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피정은 교회안에서 수도자나 은수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개념이었다. 차츰 평신도들에게도 그 필요성이 생기던 중,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이 교회에 소개되면서 이 방법을 통하여 평신도들도 자신을 돌아보고 수련하는 기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16세기 초에는 성 빈첸치오 드 바오르가 당시의 사회적 요청에 응하여 평신도들의 단체피정을 시작했다. 이것이 평신도들의 첫 단체피정이다. 제 2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가 더욱 더 평신도의 적극적인 신앙생활, 개인적인 신앙체험 등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서 부터 피정은 평신도들에게 더욱 많이 알려지고 많은 이들이 피정에 참가하는 추세이다. 특히 주일학교 어린이들과 중.고등부 학생들, 대학.청년들 교사들의 피정이 많이 있고 30대 부부, 40대 부부 등 여러 부류의 단체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지도신부들이 다수 있다. 그들의 필수불가결한 피정장소는 각 교구별로 산재해 있고, 1990년 현재 전국에 약 35곳에 이른다. 각 '피정의 집'마다 나름 대로의 프로그램을 갖고 있으며 지도신부가 있고 지도를 요구할 때에 그들은 피정을 지도하지만 원하지 않을 시는 그 단체의 신부가 지도를 해야 한다. 학생들의 피정에는 많은 재료들이 있는데 감수성 훈련에 관한 것과 많은 피정을 위한 글귀와 기도문이 있고 피정묵상을 위한 성경구절 안내와 다양한 참회예문이 있고, 특히 상당한 양의 슬라이드 자료가 있다. 성인들을 위한 피정에는 영신수련 피정(8,10,30일), 청원자 피정(3박 4일), 첫서원자 피정(5박 6일), 종신서원자 피정(8일), 종신서원 10주년 피정(10일)과 부제서품을 앞두고 사제들이 참여하는 30일 피정이 있다.
C.그룹 다이나믹스
그룹역학에 대한 이론은 미국 마이네주 베델에 있는 국립교육연구원에서 1947년에 사회심리학자 쿠르트 레윈(Kurt Lewin)을 중심으로 인간관계훈련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면서 정립되기 시작했다. 현재 이 국립교육연구원은 산업계, 교육계, 사회사업계, 정긴의학계와 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대인관계 개선과 조직개발을 위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인간관계 훈련을 실시하고 있는 대표적 기관이라 할 수 있다. 이 인간관계 훈련이 구미 여러나라에서는 이미 소개되어 실시된지 오래이고 일본에서는 1960년도부터 이것이 소개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대에 소개된 이래 교회, 청소년단체, 일반사회단체, 직장, 병원, 학교 등지에서 여러가지 형태로 실시되지만 대부분이 종교적인 단체, 즉 카톨릭과 개신교의 수련회 등에서 활발하게 실시되고 있다. 이런 그룹방법이 종교적인 차원에서 실시되기는 17-18세기의 중세 카톨릭이나 경건주의 운동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현재 우리가 실시하고 있는 그룹방법의 원형은 1905년 이후의 미국 성공회 교육 지도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시도된 것으로 본다.
최근 우리나라에 이 그룹방법이 도입되어 매우 활발히 실시되면서 그 명칭도 다양하게 지어졌다. 공동체 훈련, 공동체의식 훈련, 구조화된 체험, 지도력 개발, 심성개발, 체험학습, 감수성훈련, T-그룹(Training), D-그룹(D-evelopment Group)등의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 교회에서는 소그룹 성서연구의 붐을 일으켰고, 처음에는 젊은이들 층에서 시작한 이 소그룹 성서연구는 성인들에게고 제자훈련이란 이름으로 알려진바 되고 있다. 홈즈는 교회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이런 일련의 훈련들이 교회안의 갈등을 제거해주고 교인 상호간의 관계성을 강화해 줌으로써 교회의 목적을 효과적으로 성취하게 해 준다면 참으로 바람직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Ⅳ.코이노니아적 목회
A.정 의
코이노니아(koinonia)의 핵심적인 의미는 기본 단어인 코이노스(koinos:공통)에 있으며, 명사 코이노니아(koinonia:교제)와 코이노노스(koinonos:동료), 그리고 동사 코이노네요(koinoneo:나눈다)는 모두 우리가 무엇을 공통으로 소유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어떤 사람이나 사물과의 나눔 혹은 친교를 뜻하며, 그로 말미암은 관계와 사랑을 의미한다. 신약성서에 사용된 단어들은 그리스도인의 코이노니아를 세가지 형태로 묘사하고 있다. 첫째, 성도가 함께 물려받은 공통된 유산으로서 복음과 그 축복을 공유함을 의미하는 것과 둘째로는 성도가 복음을 나누어 줌과 동시에 소유한 물질도 서로 나누어주는 코이노니아를 누리는 것이다. 셋째는 서로 주고 받는 것으로 물질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돌아보는 모든 면을 다 포함하는 것이다.
이에 따른 코이노니아적 교회는 어떤 것인가? 외형적으로 보이는 건물이나 조직으로서의 교회를 가리켜 '보이는 교회'라고 한다면, 이에 반하여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하나님과 인간의 코이노니아 및 인간 상호간의 코이노니아를 가리켜 '보이지 않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는 곳이며, 그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설 교제를 나누는 코이노니아이다.
B.코이노니아적 목회형태
공동체가 결핍되어 있고 또 이를 양육할 사역의 구조가 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는 그 누룩이 제 구실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의 흩어진 백성도 하난가 되지 못하므로, 공동체는 교회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특히 오늘날 목회형태의 두드러진 현상 가운데 하나인 외형중심적 목회현장에서 더욱 심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숫자가 많을수록 상대방에 대한 관심은 더욱 적어지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교회에 코이노니아 공동체는 서로 관심과 사랑을 기울여 주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개인적 교제의 축복이 흘러 나옴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에 있어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존 스토트(J.Stott)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오늘날 세계 도처의 목회현장에서 꾸준히 증가되고 있는 코이노니아적 목회형태의 필요성을 정확히 뒷받침하고 있다.
"확실히 우리 세대에 적어도 제2차 세계대전 말기부터 가정교회나 가정 그룹 운동이 세계 도처에서 꾸준히 퍼져 나가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명문화된 성경적, 역사적, 목회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성령의 자의적인 순수한 운동으로 보인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설명되어질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세속적 사회의 비인간화 과정과 대다수 교회의 피상적 형식주의에 대한 반발로 이해될 수 있다. 정말로 인간적이며, 진실로 참된 삶에 대한 욕구가 널리 퍼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은 현대교회의 상황에서 가장 시급히 요청되는 것은 교회 안의 참된 코이노니아라 할 것이다. 즉, 교회는 자신에게 부여된 코이노니아적 사명을 충실히 감당함으로써 참된 삶에 대한 욕구를 가진 현대인들을 하나님과 만나게 하고, 또 한 그들이 대인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서로 체험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교회에 있어서 코이노니아의 필요성을 세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로, 코이노니아는 사람이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수단이 되므로 필요하다. 둘째로, 코이노니아는 성도들로 하여금 성찬식과 기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깊은 교제를 이루게 하고, 또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은 한 지체로서 성도 상호간의 깊은 사랑과 교제를 가능케 함으로써 필요한 것이다. 셋째로, 코이노니아는 성도들이 모든 것을 서로 유무상통케 하는 사랑의 행위가 되기 때문에 필요하다. 반면에 코이노니아를 목회현장에 적용하면서 반드시 유의할 사항들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은 이 세상을 위해서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둘째, 오늘날 대형교회 만을 마치 성공적인 목회의 표본으로 생각하는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코이노니아 공동체로 말미암아 오늘날 제도화되어 가는 대형교회들이 갱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또 한편으로는 대교회 지상주의에 반발하는 무교회 주의 및 현실도피적 신앙 그리고 왜곡된 카리스마 운동 역시 오늘날 코이노니아를 목회현장에 적용함에 있어서 경계해야 할 신앙의 변태적 현상임을 유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지향해야 할 목회형태는 '함께 하는 공동체', 즉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통한 목회형태이며, 이를 통해서 현대교회는 갱신될 수 있다. 이제 미래의 목회형태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로 말미암아, 그리고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실현했던 바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통해서 코이노니아적 목회형태로 회복되어야 한다. 현대교회는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교회 안에 과감히 세우고, 그들을 세상으로 내어 보내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요청받고 있는 것이다.
C.한국교회를 위한 코이노니아적 목회형태
해방 후의 한국교회는 카리스마적 활동과 인물에 근거한 목회가 활발했고, 6.25전쟁 직후에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치유적 기능의 목회형태가 발전했으며, 그 이후에는 근대 산업사회가 발전하면서 치유나 구호 보다는 개인적 문제와 요구가 등장하게 되어 개인 신자들 돌보는 심방이나 상담목회 형태가 발달하게 되었다. 더구나 기존의 목회형태는 대부분 목회자 중심의 폐쇄적인 목회형태를 취하여, 목회현장에서 발생되는 성도들의 다양한 욕구들을 효과적으로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 목회자 중심의 폐쇄적 목회에서 평신도 중심의 개방적 목회로 갱신하되, 그 촛점을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의 코이노니아적 공동체 형성에 두어야 할 것이다.
코이노니아적 목회형태를 한국교회의 목회현장에 어떻게 적용하여야 하는 지는 크게 네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한국교회의 경직된 기구주의를 뛰어넘어 성령의 친교로 말미암은 '영적 목회형태'로 갱신하는 것이다. 둘째는, 개인의 신앙적 혹은 종교적 욕구 충족을 목적으로 하는 폐쇄적 목회형태를 뛰어넘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로 이해하고 성도들을 향해 모든 것을 열어두는 '개방적인 목회형태'로 갱신하는 것이다. 셋째는, 갈등과 반목과 증오를 뛰어넘어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화해의 목회형태'로 갱신하는 것이다. 넷째는, 날로 무거워져 가는 교회사역의 산적한 일더미로부터 해방되어 일중심으로부터 '인간돌봄 중심의 목회형태'로 갱신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코이노니아적 목회형태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가장 시급히 필요로 하는 목회형태인 동시에, 현재의 목회상황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목회적 요구를 영적, 개방적, 화해적, 인간 돌봄 중심적 열쇠로 풀어 나가고자 하는 가장 효과적인 목회형태가 된다.
Ⅴ.선교지향적 목회
A.선교의 개념
선교(mission)라는 용어는 라틴어의 '보낸다'는 뜻을 가진 '미토(mitto)'에서 유래된 것으로 헬라어의 '아포스텔로(apostello)'와 '펨포(pempo)'에 해당하는 말이다. 이 의미는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것을 뜻한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교회 전체의 사명을 지칭하기도 한다. 승천하시지 직전에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마28:19-20)을 시작으로 선교의 역사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선교사라는 용어는 13세기에 천주교의 수도원에서 처음 사용하였는데, 그 의미는 세상에서 사도의 생활과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자를 뜻하였다.
선교의 개념을 바로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선교의 개념에는 크게 두가지 서로 다른 견해가 있다. 그것은 '이 세상은 불타고 있는 건물과 같음으로 시간이 너무 늦기 전에 구조 작업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이 사회는 저주받아 곧 멸망하게 되므로 사회구조 개선에 시간을 보낼 수가 없다'는 전통적인 견해와, '하나님은 역사 과정 가운데서 일하시며 하나님의 선교의 목적은 사회의 조화의 의미에서 샬롬(Shalom)-평화, 안녕의 건설에 있다'는 에큐메니칼 견해가 있다.
1.에큐메니칼 선교신학
20세기 기독교 교회에서 중요한 운동 중의 하나는 에큐메니칼 운동이다. 19세기에 서구 교회는 전 세계에서 많은 교회를 설립하였으나, 분열로 말미암아 선교지에서 혼란을 줄 뿐 아니라 선교에도 장애를 주었다. 이로 인하여 교회 연합 운동이 선교지에서 일어났다. '교회 연합 운동인 세계 교회 협의회(W.C.C)의 창설은 자유주의 신학 사상으로 오히려 선교에 변화와 장애를 초래하였다. 20세기 세계 기독교 운동과 선교 운동에 큰 역할을 했던 서구 교회 지도자들은 전통적 선교 개념을 포기하고 사회 구원의 선교 신학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사실 W.C.C를 중심으로하는 에큐메니칼의 선교는 계속 순수한 복음을 그 자체를 증거하기 보다는 '인간화'를 그 목표로 하였다. 이들의 신학에 가장 종요한 것은 만인 구원론적인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 있고, 따라서 세상은 이미 구속된 세상이고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유업을 주장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같이 W.C.C를 중심으로하는 에큐메니칼의 선교는 구원을 못 받은 영혼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자각 못하는 자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들의 관심을 영적 구원과는 상관없이 육신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이것을 호켄다이크는 '샬롬'이라는 단어를 빌어 선교신학을 정립 시켰던 것이다. 샬롬의 구체적인 영역은 사회의 평화, 결합, 조와, 공의를 성립시키는 것이며, 이를 위해 교회는 복음을 선포하고 봉사하며 증거하는 것이라 했다.
2.복음주의 선교
복음주의 선교는 로잔 언약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철저하게 사회 복음주의가 되어버린 W.C.C에 대항하여 참으로 하나님의 복음이 증거되게 하는데 있다. 로잔 대회의 신학은 대체로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선교신학에서 복음 전도는 그 무엇보다 우선한다. 뿐만아니라 지상 명령의 어떤 세가계관이나 문화적 위임, 사회적 관심과 행동, 또는 두 왕국의 중요성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는 역사적 복음주의 신학, 곧 구원론을 보다 잘 나타내 주었다. 셋째는 성경의 무오성에 관한 것으로 에딘버러 대회에서 일어버릴 뻔한 것을 분명하게 되찾은 것이다.
B.한국교회의 선교적 사명과 문제점
21세기 운동의 발기인이자 현재 국제 총무로 있는 루이스 부시는 이 운동의 핵심국가로 한국을 지목하면서 말하기를 "전 세계 교회가 한국 교회를 주시하고 있다. 이 운동은 한 두번 모였다가 흩어지는 운동이 아니며, 2000년 이후까지 지속될 인류 최대, 최후의 성령운동이다. 영적으로 탁월한 한국교회 목회자와 기도로 무장한 1천 2백만 성도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다."
한국교회는 세계선교를 수행함에 있어서 아직도 선교사의 숫자적인 면에서나 전교인 당 선교사 파송 비율에서 볼 때 서구 교회를 따라 갈 수 없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이 시대에 세계 선교의 지도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결코 허황된 바람이 아니라 이것은 세계적 동향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교회는 선교에 있어서 분명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우선 영적 생명력을 지닌 젊은 신자가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적인 열정도 다른 나라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뜨겁다. 세째로 재정적으로 선교를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이며, 다음은 세계의 2/3가 한국교회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이라는 것이며, 특히 한국 선교사들이 타문화권에서 그 문화의 적응이 빠르다는 것이다. 끝으로 현대 한국인들이 세계 각국에 흩어져 디아스포라적 선교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처럼 선교적 위치와 가능성이 중한데 비해 한국교회의 선교적 문제점이 나타난다. 단편적으로 선교의 가능성을 효율적으로 잘 감당할만한 선교체재가 아직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이 한국교회의 실정이다. 문제점으로는 철저한 교파주의로 인한 협력 선교의 부진이다. 이는 한국교회가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약점이며 이미 세계 교회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두번째로는 교직주의로 인한 평신도 자원의 동결로서 실질 교회의 98%이상이 평신도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참여가 없는 선교사역은 풍성한 영혼 구원의 결과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세째로, 물량적인 성장주의로 인한 전시적 선교가 되어 버렸다. 이는 선교의 순수한 동기에서 벗어나 전시적이고 명분위주의 사업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철저한 개교회 주의로 인한 선교의 무관심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개교회의 대형화로 인하여 자신의 교회만이 최고로 생각하는 편협적이고 배타적인 신앙을 하고 있다. 이 개교회 주의는 각 지역에서도 많은 문제점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하나를 덧붙인다면 지난친 선교의 열정으로 인한 선교단체의 폐단이다. 선교단체의 난립현상과 경험부족의 선교사 파송으로 인한 폐단인 것이다.
C.선교지향적 교회
현대 교회는 선교사명을 위해서 과감하게 교회 체제를 바꾸어야 한다. 선교를 위한 구조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러한 세계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인 개개인이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선교지향적인 교회를 목회자, 예배, 선교교육의 측면에서 살펴본다.
1.목회자의 선교구조적 갱신
선교의 성패는 그 지역 교회의 지도자들의 지도력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개교회 지도자들은 선교 문제에 있어서 흔히 많은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다. 목사 자신은 선교 방면에 대해서 거의 훈련을 받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자기 교단의 선교 기관에서도 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최고의 관심사가 더 많은 예산이나 건물 또는 프로그램, 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전 세계를 향한 비젼을 품고 더 깊이 헌신하는 것이어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목회자들이 먼저 선교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고 목회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현지 선교지를 답사한다던가, 선교에 관한 많은 서적들을 참고로 할 수 있다. 우선적으로 목회자를 비롯하여 교회지도자들이 앞서지 않으면 안된다. 선교지향적인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목회자 혼자만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다. 전 교인이 동조하고 따라 주어야 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그래도 선교의 핵을 이룬다고 볼 수 있는 전주 안디옥 교회는 교회 재정의 60%를 선교비로 사용한다고 한다. 그리고 담임 목사인 이동휘 목사는 선교하는 자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고 말한다. 요약하면 "제자들이 주님의 지상명령을 승천후 여름까지도 못하다가 오순절날 성령이 강림하신 이후로 그 명령이 실현되었습니다. 복음선교는 오직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선교를 못하는 이유는 어느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선교하는 일은 나로 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을 때는 이미 성령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선교를 할 때 인간적인 모든 방법들이 개입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직 성령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외에도 서울 남서울 교회의 홍종길 목사는 그의 안식년을 기해 중국에서 사비로 교회를 개척하였고(한 교회만 아니라 여러교회로 추정), 서울 온누리 교회의 하용조 목사는 강단에서 한번도 헌금에 대한 설교를 하지 않지만 선교를 위한 선교헌금은 선포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선교헌금에 대한 설교를 통하여 그 예배에 참석한 자들이 선교헌금을 작정한 것이 약 10억에 가깝다고 한다.
2.예배를 통한 선교정신 고취
전 교인이 자발적인 선교 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은 예배이다. 한국교회의 성도는 아직도 샤머니즘의 영향을 벗지 못하여 예배를 복 받으려는 한 방편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음을 볼 수 있다. 어느 특정한 주일을 정하여 선교헌신예배로 드리는 것은 선교정신을 고취하기에는 부족하다. 선교에 대한 메세지를 강력히 강화한다던가 현재 선교사역지의 보고서를 알려주고 전적으로 기도를 부탁한다던가, 많은 예배 가운데 한 예배(수요일 예배, 새벽예배, 금요철야예배 등)를 선교를 위한 예배로 드리는 것도 선교정신을 고취시키는 좋은 방법일 것이다. 아주 획기적인 것은 수개월 전에 선교수련회를 준비하여 교인들이 순수한 선교의 정신을 가지고 정규적으로 실질적인 답사와 함께 그곳에서 선교수련회를 실시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많은 재정적 요구와 사전 교육이 필요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담임 목사가 선교에 대한 설교를 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교인들에게 선교의 정신을 불어 넣어주는 것은 없다. 또한 예배를 통한 선교교육과 함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선교 교육이 주일 학교에서부터 장년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3.선교교육 강화
현재 한국 교회는 1988년부터 매 2년마다 개최되는 '선교한국'을 통해 수많은 대학생과 젊은 청년들이 선교에 헌신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많은 선교 헌신자가 배출되어도, 교회가 이들을 품고 훈련하여 파송할 준비가 되지 않으면 이들의 헌신은 교회 안에 고여 결국 상실되고 말 것이다. 이런 면에서 교회가 선교의 자원이 될 학생들을 바르게 선교교육을 한다면 오늘 선교지에서 요구되고 있는 한국교회의 선교 갱신은 물론, 필요한 곳으로 흐르는 물로서 우리의 학생 자원들은 세계 복음화의 최전선에서 그들의 생애를 드리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교회학교 어린이들에게까지도 선교를 가르쳐야 한다. 미국 교회에서 외국으로 나간 선교사들 중의 많은 수가 12세 미만의 선교사로 헌신했다는 통계가 있다. 앞으로 20년 동안 한국교회가 보다 많은 선교사를 보내기 원한다면 지금 주일 학교에서부터 선교교육을 잘 시켜야 할 것이다.
Ⅵ.제자훈련
오늘날 한국교회가 제자훈련이라는 개념을 교회 양적 성장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또한 제자훈련이 개인의 영적 발달.영적 성장에 치중하기 때문에 그것은 종종 기술적인 면과 관계되어 또 다른 율법주의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제자훈련은 교회성장의 도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이다. 무슨 특별한 교재를 가지고 특별한 시간에 모이는 것이 제자훈련이 아니다. 목회 전체가 제자훈련이요, 목사의 삶 자체가 제자훈련이다. 이 제자훈련은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함보다 발전시키기 위함임을 알아야 한다.
A.목표와 필요성
1.목 표
제자훈련을 함에 있어서 먼저 주의를 해야 할 것은 제자훈련이 단순한 성경공부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나 전도나 양육을 위한 전문적인 혹은 기능인을 양성하는 방법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제자훈련의 궁극적인 목표는 한마디로 그것은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본받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여 영적 재생산을 할 수 있는 헌신된 예수님의 제자를 육성하는데 있다. 재생산은 그리스도인이 실제적인 성장을 시작하는 단계이다. 세계를 복음화하기 위한 하나님의 기본 방법이 영적 재생산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 복음화를 위한 제자 삼는 일의 소명은 교회에서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이며, 모두에게 부여된 임무인 것이다.
2.필요성
와그너는 '세계 인구의 약 30%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지만 이들 중 대부분은 이름만 그리스도인이지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와같은 이유는 바로 제자훈련을 통한 올바른 양육을 받지 못한데서 기인된 것이다. 양육하고 적절한 훈련을 시켜서 성숙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워주는 일은 중요하다. 제자훈련의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네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로, 제자 삼는 사역을 통하여 단지 더 많은 제자를 얻는 유익 뿐만이 아니라 양육자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더 헌신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제자 삼는 사역은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째로, 오늘날의 상황에 적절한 과업을 감당하기 위하여 교회를 훈련시키며, 교회에게 기동력을 부여할 수 있는 지도자들을 따르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네째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데 필요하다. 주님은 우리에게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의 구원을 이루라(빌2:12)고 말씀하셨다.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이룬 양적 부흥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더 큰 하나님 나라의 비젼을 가지고 전진하기 위해서 교회는 새롭게 갱신해야만 할 것이다. 그 방법으로는 교회의 주체인 평신도를 예수님의 제자로 가르치고 훈련하는 것이 긴박하게 요구된다.
B.임상적 제자훈련 모델
이 분야에 있어서 대표적인 인물은 아임스(Leroy Eims)와 쿠네(Gary W. Khune)이며, 대부분의 선교단체들의 성장 프로그램이 여기에 해당된다.
1.아임스의 모델
아임스는 국제 네비게이토 선교회에서 오랫동안 사역을 해오고 있다. 그는 선교회에서 실제적으로 제자를 삼는 일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군들을 생산해 내는 일을 돕고있는 많은 사람들의 경험과 아울러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그리스도인의 성장 과정을 '제자 삼는 사역의 기술'에서 상세히 기술한다. 그는 성장 과정들을 초신자 또는 양육받지 않은 상태의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로부터 제자, 일군, 지도자가 되기까지의 4단계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단계는 전도과정으로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주님을 증거하는 단계이다. 그 결과 초신자를 얻게 된다. 둘째 단계는 확립과정으로 전도의 결과로 얻어진 초신자를 양육하여 훈련 목표에 들어 있는 대로 제자의 삶의 성품들이 그의 삶 가운데 나타나도록 세워 주는 일을 하는 단계이다. 그 결과로 초신자는 전도할 수 있는 제자가 된다. 세째 단계는 무장 단계로 제자를 일 대 일로 만나 도와줌으로써 훈련 목표 가운데로 인도하는 단계이다. 그리하여 다른 일군을 세워주고 영적으로 무장시킬 수 있는 일군을 얻게 된다. 네째 단계는 전문화 훈련 과정이다. 일군들 중에서 지도자로서의 부르심과 은사를 받은 자로서 첫 지도자가 행한 모든 일들을 수행할 수 있는 자이어야 한다. 그는 다른 사역지에 가서도 자신이 훈련받았던 것과 같은 종류의 사역을 홀로 담당할 수 있는 자이다. 이러한 과정들에 소요되는 기간은 초신자에서 제자로의 과정은 2년이고, 제자에서 일군으로의 과정은 2년, 일군에서 지도자로서의 과정은 3년이다.
2.쿠네의 모델
쿠넨는 '개인적 새신자 양육의 원동력'에서 개 교회에서의 효과적인 훈련으로 먼저 초신자 양육을 받은 뒤에 본격적인 성장 단계로 6단계를 제시하고 있다.
1단계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로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에서 전도의 효과를 성취하는 단계이다. 2단계는 성장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로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이 일관성있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단계이다. 3단계는 그리스도인은 전도하기 위하여 전적으로 헌신하므로 이제 그의 말과 생활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도에 참여하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는 단계이다. 4단계는 재생산의 첫 단계이다. 자신을 지도자로 간주한다면 자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 새 그리스도인과 함께 일하도록 훈련받고 있는 단계이다. 이것이 자신의 재생산의 첫 표식이기도 하다. 5단계는 당신이 양육하고 훈련하는 사람의 사역에서 훈련받는 사람에게 그 훈련을 전하도록 성장함을 나타내는 단계이다. 이 국면이 재생산의 중요한 면이 되는 것이다. 6단계로는 실제적인 재생산을 위한 단계이다. 본 단계에 속한 사람은 모든 단계를 스스로시작하는 사람이 되도록 성장하는 단계이다. 이 사람은 당신에게서 독립이 가능한 사람이다.
C.선교전략으로서의 제자훈련
예수님의 지상명령의 목표가 제자를 삼는 것이며 예수님도 일생의 사역을 제자훈련으로 일관하셨고,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기 위한 계획이 바로 제자를 훈련시키는 일이었다. 요즘 세계선교 운동은 선교의 개념으로 진통을 겪고 있다. 전도가 현존, 인간화, 해방화로 대치되었다. 이러한 급진적인 선교사상과는 반대로 복음주의 교회는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에게 전도하는 것을 강조하여 거기에 대한 전략개발에 열중하고 있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옹호자들이 평신도의 중요성에 눈을 먼저 뜬 것은 사실이지만 전략면에서는 성경적 원리를 따르지 못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내세운 전략은 참여와 세속화이다. 그 반면에 평신도의 선교적 사명을 크게 외치며 일어난 복음주의 선교단체들은 그들의 전략이 성경에서 재발견된 제자도였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실천적 행동에, 복음주의 선교단체들은 인격적 형성에 그 전략의 우선권을 두고 있다. 에큐메니칼측의 평신도 운동은 탁상공론에 그쳐 버린 듯한 인상을 남긴 반면, 복음주의 선교단체들은 세계적으로 괄목할 만한 열매를 거두고 있다. 그래서 선교전략으로서는 성경적 방법인 제자삼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사역의 최대 목표는 제자를 삼는 사역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얼마나 멋있는 교회당을 건축하느냐 하는 것도, 얼마나 멋있는 설교를 하느냐 하는 것도, 얼마나 많은 신자를 확보하느냐 하는 것도, 그것이 제자삼는 사역의 도구와 보조자료와 방법은 될 수 있을지라도 목적이 되서는 안된다. 오직 제자삼는 사역만이 우리의 목표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가고, 전하고, 세례주고,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할 것이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거듭나는 것을 봄으로 끝나는 것이 우리의 사역이 아니다. 가르쳐서 순종하게 하며 성장하여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뿐 아니라 또 닷 가르쳐 순종하게 할 수 있는 제자를 재생산할 수 있는 제자삼는 목표가 우리 사역의 목표이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복음은 우리 세대에서 끝나 버리고 말 것이다.
성경의 선교론과 전도론 연구에 나타난 현대교회의 중요한 경향은 제자훈련이다. 근래에는 신앙의 체험과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강조하는 제자화 훈련의 관점에서 선교를 다룬다.
Ⅶ.결 론
영성이해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평신도들이 영성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영성이라고 이야기를 던지면 신비스런 체험과 초자연적인 능력의 소유자 등의 말을 먼저 꺼낸다. 필자가 봉사하고 있고 있는 교회의 학생들에게 영성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들이 막무가내이다. 한 학생이 '기도하는 능력'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런대로 제일 나은 말이었다. 통전적 영성의 이해에 있어서 목회자 자신이 올바른 개념하에 있지 안으면 안된다. 무엇보다도 목회는 목회자가 우선적이다. 모든 교회의 제반도 목회자 중심으로 인도되어 진다. 하물며 신앙의 성장과 관리 또한 목회자의 지도하에서 제대로 이루어 진다. 영성을 통한 목회개발에 있어서 가장 중심은 목회자 즉 성도들을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중심이 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목회에 성공하려면 목회자가 먼저 깨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평신도를 향한 올바른 목회에로 전향할 수 있다.
교회(기독교)는 성장해야 하는 무리이다. 성장은 가만히 앉아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존의 방법들로 인해 때에 맞혀 시기적절하게 임기응변으로 목회에 임한다면 그 교회는 성장이 없다. 교회의 성장요인 중에 기도와 말씀을 통한 삶의 적용 같은 가장 기본적인 요인 외의 목회자의 지각있는 판단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얼마만큼 목회자가 자신의 목회에 있어서, 또는 교회에 있어서, 더 나아가서는 한국교회에 있어서, 더 광범위하게 말하면 기독교 전체에 있어서 과거와 현재의 성패의 실례를 토대로 하여, 미래지향적인 목회방침을 설정하고 대처해나가는가에 통전적 영성의 목회개발이 제대로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영성에 대한 평신도들의 올바른 인식을 위한 교육과 영성훈련 프로그램, 선교지향적인 목회와 제자훈련 등등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이 시대에 필요하고 얼마나 적적하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검토하고 분석하여야 할 것이다. 그 다음에 영성을 통한 목회개발이 양적 질적으로 교회와 성도개인에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알고보면 통전적 영성의 목회개발은 초대 교회시대의 공동체적 예배형식과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한 사역으로 되돌아 가는 경향을 짙게 느낄 수 있다. 불란서의 떼제 공동체이며, 미국의 코이노니아 농장, 인간관계훈련을 통한 교육방법, 선교지향적인 교회와 목회 등이 모두 여기에서 비롯될 수 있다고 보아 진다. 하지만 현대 시대에 맞게 모든 방법론과 적용론이 변화한다. 올바른 영성을 이해하고 그러한 삶을 살고 있다면 성서를 기초로 하는 목회방법론이 무수히 많이 나올 수 있다. 얼마만큼 고민하고 연구하는가에 달려있다. 교회는 성장을 요구하지만 변화없는 성장을 이룰 수는 없다. 올바른 영성을 기초로 많은 고민과 연구에 교회는 변화하면서 성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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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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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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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기호. "교회의 사명과 복음 선교론." 「목회와 신학」 1991년 12월호,
3. "기독교 21세기 운동." 「뉴스레터」 199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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