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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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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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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첫째, 영혼이 발견되어야 한다. 우리가 성령의 조명을 받게되면 나의 실상(육체, 자아)을 보게된다.
어느 집사님께서 자신은 이웃에게 나누고 베푸는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선하다고 생각하셨다. 그런데 몇 년 전 그 집사님의 집의 상하 방을 세를 내놓았는데, 셋방의 엄마가 밖에 나가 돈을 벌고 아빠가 아이들을 돌보는 집이었다. 아이들이 엄마의 품에서 충분히 사랑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음식 냄새만 나면 집사님댁의 문 앞에 모두들 달려와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아이들의 모습이 집사님에게 보기 싫었다. 원래 이웃에게 나누기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아이들의 그러한 모습을 싫어하는 자신을 보면서 그동안 자신을 착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실제는 참으로 인색하고 사랑이 없는 자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동안 이웃에게 나누어준 것은 내가 좋아서 한 일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육체도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나를 발견하기 어렵다. 하물며 영혼을 발견하는 것은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문제는 거듭났음에도 내 영혼을 모르고 사는 것이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 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라고 말씀해도 도대체 우리는 영혼의 생각이 무엇이고 육신의 생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산다. 나는 오늘 하나님 앞에 살았다고 생각하나 사실은 죽은 자 일 수 있다. 내가 귀신을 좇아내고 병자도 고치고 많은 일을 했다고 해도 주님은 악한 자야 내게서 떠나가라 너는 나와 도무지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실 수 있다(마 7:22-23). 그러므로 영혼의 발견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는 영혼이 발견되어 영으로 육신을 다스리고, 생명의 열매를 맺어드릴 수 있어야한다. ‘영혼의 발견’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할 수 있고 또한 훈련 속에서 가능하다. 오늘날 교회 속에 이러한 중요한 것은 감추어져 있고 자꾸 율법을 말한다. 영혼이 발견되지 못함으로 사실 성경 속에 이해하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하는 말씀이 많다. 주안에서 기뻐하라 하셨는데 도대체 주안에서 기쁨이 무엇인지 모른다.
둘째, 성령과 말씀으로 성장한다.
영혼의 성장을 다룸에 있어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아 파쇄의 문제, 곧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이다. 내 안에 영혼이 있다. 그러나 육체가 가로막아 영혼이 활동을 할 수가 없다. 쉬운 표현으로 누군가 나를 욕했다고 하면 당연히 내 안에서 영이 흘러나와야 한다. 오른 뺨을 때리면 즐거운 마음으로 왼뺨도 대야 한다. 주를 위하여 핍박받을 수 있는 마음으로 그렇게 할 수 있어야한다. 그러나 우리는 내 영혼을 감싸고 있는 자아가 먼저 나와서 화가 난다. 화는 참아서는 소용이 없다. 그 화를 내게 하는 본질 곧 육신, 자아가 깨어져야한다. 자아가 파쇄 되지 않고는 영적 성숙을 이룰 수 없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나를 비방하고 무시 할 때에 화가 난다면 내 안을 살펴보면 여전히 칭찬 받고 싶은 자아가 보인다. 이럴 때 그를 통하여 나의 자아를 깨Em리시니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 많은 기적과 이적을 베풀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주님을 포도주를 즐기고 음식을 탐하는 자라고 모욕했다. 그럴 때 주님은 ‘옳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마 12:20-27)하고 오히려 감사한다. 왜냐하면 주님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영혼의 성숙이다. 영혼은 성령과 말씀으로 성장한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께 인도한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발견하게 하고 또한 하나님의 뜻, 말씀을 가르치신다. 영성훈련의 시작도, 목표도, 목적도 예수그리스도이다. 실질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서 그를 본받게 한다.
바울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고 고백한다. 그는 때로는 굶주렸다. 그때 그는 하나님 앞에 앉아 이 굶주림이 무엇인지 주께 물었다. 그때 성령이 그를 예수그리스도께 인도하고, 주님은 하나님을 위하여 죽기를 거절하지 않으셨음을 알게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가난에도 처할 줄 아는 비결을 가르치시니 감사하게 된다. 주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러면서 영혼이 성장하는 것이다.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 말씀은 살았으나 성령으로 하지 아니하면 다만 의문의 율법이 되고 만다.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도 고린도서에 사람의 지혜로 하지 않고 오직 성령으로 말한다고 고백한다. 성령으로 할 때에만 영혼의 양식이 되어 자라게 한다. 그리고 말씀의 능력은 오직 삶에 있다. 필자가 앞에서 찬양을 한 곡만 인도해도 영혼들이 주님을 만나고 회개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것은 필자의 삶의 참 고백이 되어 그 생명이 각 사람에게 전이(轉移)되는 것이다. 말씀이 생명이 되어 영혼이 자라나게 하기 위해서는 말씀의 사역자인 자신에게 먼저 말씀이 실제가 되어야한다.
첫째, 영혼이 발견되어야 한다. 우리가 성령의 조명을 받게되면 나의 실상(육체, 자아)을 보게된다.
어느 집사님께서 자신은 이웃에게 나누고 베푸는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선하다고 생각하셨다. 그런데 몇 년 전 그 집사님의 집의 상하 방을 세를 내놓았는데, 셋방의 엄마가 밖에 나가 돈을 벌고 아빠가 아이들을 돌보는 집이었다. 아이들이 엄마의 품에서 충분히 사랑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음식 냄새만 나면 집사님댁의 문 앞에 모두들 달려와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아이들의 모습이 집사님에게 보기 싫었다. 원래 이웃에게 나누기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아이들의 그러한 모습을 싫어하는 자신을 보면서 그동안 자신을 착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실제는 참으로 인색하고 사랑이 없는 자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동안 이웃에게 나누어준 것은 내가 좋아서 한 일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육체도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나를 발견하기 어렵다. 하물며 영혼을 발견하는 것은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문제는 거듭났음에도 내 영혼을 모르고 사는 것이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 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라고 말씀해도 도대체 우리는 영혼의 생각이 무엇이고 육신의 생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산다. 나는 오늘 하나님 앞에 살았다고 생각하나 사실은 죽은 자 일 수 있다. 내가 귀신을 좇아내고 병자도 고치고 많은 일을 했다고 해도 주님은 악한 자야 내게서 떠나가라 너는 나와 도무지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실 수 있다(마 7:22-23). 그러므로 영혼의 발견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는 영혼이 발견되어 영으로 육신을 다스리고, 생명의 열매를 맺어드릴 수 있어야한다. ‘영혼의 발견’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할 수 있고 또한 훈련 속에서 가능하다. 오늘날 교회 속에 이러한 중요한 것은 감추어져 있고 자꾸 율법을 말한다. 영혼이 발견되지 못함으로 사실 성경 속에 이해하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하는 말씀이 많다. 주안에서 기뻐하라 하셨는데 도대체 주안에서 기쁨이 무엇인지 모른다.
둘째, 성령과 말씀으로 성장한다.
영혼의 성장을 다룸에 있어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아 파쇄의 문제, 곧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이다. 내 안에 영혼이 있다. 그러나 육체가 가로막아 영혼이 활동을 할 수가 없다. 쉬운 표현으로 누군가 나를 욕했다고 하면 당연히 내 안에서 영이 흘러나와야 한다. 오른 뺨을 때리면 즐거운 마음으로 왼뺨도 대야 한다. 주를 위하여 핍박받을 수 있는 마음으로 그렇게 할 수 있어야한다. 그러나 우리는 내 영혼을 감싸고 있는 자아가 먼저 나와서 화가 난다. 화는 참아서는 소용이 없다. 그 화를 내게 하는 본질 곧 육신, 자아가 깨어져야한다. 자아가 파쇄 되지 않고는 영적 성숙을 이룰 수 없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나를 비방하고 무시 할 때에 화가 난다면 내 안을 살펴보면 여전히 칭찬 받고 싶은 자아가 보인다. 이럴 때 그를 통하여 나의 자아를 깨Em리시니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 많은 기적과 이적을 베풀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주님을 포도주를 즐기고 음식을 탐하는 자라고 모욕했다. 그럴 때 주님은 ‘옳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마 12:20-27)하고 오히려 감사한다. 왜냐하면 주님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영혼의 성숙이다. 영혼은 성령과 말씀으로 성장한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께 인도한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발견하게 하고 또한 하나님의 뜻, 말씀을 가르치신다. 영성훈련의 시작도, 목표도, 목적도 예수그리스도이다. 실질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서 그를 본받게 한다.
바울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고 고백한다. 그는 때로는 굶주렸다. 그때 그는 하나님 앞에 앉아 이 굶주림이 무엇인지 주께 물었다. 그때 성령이 그를 예수그리스도께 인도하고, 주님은 하나님을 위하여 죽기를 거절하지 않으셨음을 알게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가난에도 처할 줄 아는 비결을 가르치시니 감사하게 된다. 주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러면서 영혼이 성장하는 것이다.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 말씀은 살았으나 성령으로 하지 아니하면 다만 의문의 율법이 되고 만다.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도 고린도서에 사람의 지혜로 하지 않고 오직 성령으로 말한다고 고백한다. 성령으로 할 때에만 영혼의 양식이 되어 자라게 한다. 그리고 말씀의 능력은 오직 삶에 있다. 필자가 앞에서 찬양을 한 곡만 인도해도 영혼들이 주님을 만나고 회개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것은 필자의 삶의 참 고백이 되어 그 생명이 각 사람에게 전이(轉移)되는 것이다. 말씀이 생명이 되어 영혼이 자라나게 하기 위해서는 말씀의 사역자인 자신에게 먼저 말씀이 실제가 되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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