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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삿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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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옥한흠 목사 |
참고 : |
전쟁을 모르는 세대를 위하여
본문: 사사기 3:1-6
오늘은 1919년 자주 독립을 외치며 궐기했던 3·1운동 다음날로 올해 84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는 장엄한 말로 낭독된 이 독립선언문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전국에 만세 삼창 소리가 퍼지던 그때를 기억하고 기념하면서 그 위대한 선배들 앞에 다시 한번 머리를 숙이는 중요한 시점에 있습니다.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배포하며 만세를 부를 때만해도 우리 민족은 하나였습니다. 거기에 영남, 호남이 따로 없었습니다.
아날로그 시대니, 디지털 시대니 하는 세대간의 차이도 없었습니다.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이라는 계층간의 갈등도 없었습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을 보면 기독교에서 16명, 천도교에서 15명, 불교에서 2명이 대표로 서명했습니다. 그들은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거나, 옥살이를 하기도 하고, 죽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우리 모두가 하나였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누구도 너와 나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사분오열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의 현실을 눈 앞에 두면서 살고 있습니다. 지역간, 계층간, 세대간의 균열은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입니다. 대선에서 드러난 세대간의 갈등은 점점 더 증폭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잉그하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전세계에서 세대별 가치관의 격차가 가장 심한 나라가 한국이다." 조금 쉽게 말하면 세계에서 한국만큼 세대간의 거리가 먼 나라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곧 부모와 자식 사이가 이렇게 먼 나라가 없고, 선배 세대와 후배 세대 사이가 이렇게 먼 나라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뒷받침이나 하듯 이 세대차이를 표현하는 단어나 용어들이 점점 더 난폭해지고 살벌해지는 것을 봅니다. '세대차이'라는 말을 시작으로 이제는 '세대갈등', '세대불신', '세대분열', '세대대립', '세대전쟁', '세대혁명'이라는 말로 발전하기에 이르렀고 이런 말들을 자연스럽게 주고 받을 정도로 살벌한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누가 이 기막힌 현실을 책임져야 합니까? 저는 교회가 우선적으로 책임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나라 국민의 1/4이 기독교인이고, 이 나라의 중심문화가 기독교이기 때문입니다. 새로 들어선 정부를 보아도 대통령만 빼놓고 국무총리가 신실한 크리스천입니다. 외교를 담당한 장관도 신실한 크리스천입니다. 경제를 담당한 부총리도 신실한 크리스천입니다. 우리 교회의 신실한 집사님 한 분도 경제팀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기독교가 이 나라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분오열되어서 세대간에 날카로운 대립을 하고 있는 이 현실을 놓고 누가 먼저 가슴을 쳐야겠습니까? 바로 예수 믿는 우리가 먼저 가슴을 쳐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옷을 찢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사기서는 우리에게 한줄기 빛을 던져줍니다. 우리가 처한 모든 문제에 대해 세밀하게 다 대답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주목해야 될 가치 있는 진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사기 시대는 이스라엘 나라가 아직 국가적인 체계를 갖추기 전, 약 400년 동안 하나님께서 사사, 요즘 말로 재판관이라 불리는 지도자를 세워 나라를 다스리던 과도기적인 한 때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때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이 사사기서입니다.
사사기 초반에는 서로 상의한 두 세대가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가리켜 성경은 '전쟁을 아는 세대'와 '전쟁을 모르는 세대'로 명명합니다. 전쟁을 아는 세대는 기성세대를 말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오프라인(off-line) 세대로, 그들은 광야에서 태어나 길게는 40년 이상 광야훈련을 받았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신정국가의 정치, 경제, 문화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이것이 광야 세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드디어 그들이 요단강을 건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정복하기 위해 들어왔을 때, 손에 칼을 들고 제일 앞장 서서 전투를 했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대부분 20, 30대였던 그들은 전쟁을 아는 세대였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을 정복하면서 수년 동안 전쟁의 긴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그 땅을 평정하자마자 그들은 나라의 기초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힘들게 일만 한 사람입니다. 그들이 일하고 싸우면서 흘린 땀과 피의 대가로 어느 정도 삶이 안정되기 시작했고, 나라의 기틀도 잡혀졌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꿈이 있었다면, '강한 나라,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서 후손에게 전해주는 자랑스러운 선조가 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전쟁을 아는 세대는 한마디로 일과 전쟁만 하다가 인생을 다 보낸 세대입니다. 이런 독특한 그들이 경험과 배경 때문에 그들의 정치관은 자연히 보수주의였습니다. 전통을 중시하는 대신 변화나 개혁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보수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종교관은 유일신 사상이었고, 그들의 문화는 폐쇄주의였습니다. 선민의 문화 외에는 별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문을 닫아 놓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전쟁을 아는 세대들의 특징입니다. 우리나라의 기성세대와 비슷한 점이 있음을 인정할 것입니다. 반면에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새로운 세대들이 태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을 일컬어서 전쟁을 모르는 세대라고 말합니다. 4, 50년이 지나자 그들이 그 나라의 오피니언 그룹(opinion group)이 되었고, 주도 세력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의 살벌한 생활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만나를 먹어 본 일이 없습니다. 바위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구경한 일도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도 못했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기적다운 기적을 체험한 일도 없습니다. 모든 초자연적인 현상들은 전쟁을 아는 세대인 그들의 부모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안정된 생활을 했습니다. 농사를 짓고 양을 치는 평화로운 목가적인 분위기에 젖어 아름다운 꿈을 먹으면서 자란 세대였습니다. 그들의 부모가 땀과 피를 흘려 뿌린 씨앗을 거두면서 행복하게 자라고, 신나게 젊음을 구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세대는 아버지 세대와 틀려. 아버지 세대는 아버지 세대고, 우리 세대는 우리 세대야.' 이들이 전쟁을 모르는 세대였습니다. 오늘 우리나라의 전쟁을 모르는 세대들의 의식세계와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을 것입니다.
이렇게 전쟁을 아는 세대와 전쟁을 모르는 두 세대가 중복되는 50여 년 동안은 두 세대간의 갈등과 대립이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기성 세대들이 보기에 신세대야말로 정말 위험하고 불안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보기에 기성 세대야 말로 변화와 개혁이 필요한 대상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로 보이지 않는 갈등과 대립을 계속 이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은 신세대 편에 있었습니다. 종종"우리가 광야에 살 때는 말이야....", "우리가 가나안 전쟁을 한창 할 때는 말이야...그렇지 않았는데...." 하고 귀가 아플 정도로 말하던 구세대는 이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이 나라의 중심이 되어서 새로운 역사를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시대가 2, 3백 년 흐르면서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는지 압니까?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2:7) 그들이 다 죽고 나자 결국은 하나님 없는 역사가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2:10) 사사기의 역사는 패배와 수치, 부패의 역사입니다. 속된 말로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가 나라를 말아먹은 것입니다. 이런 역사를 우리는 사사기서를 통해 보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앞에 놓고 우리는 몇 가지 역사적인 교훈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전쟁을 아는 세대와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함께 공존하는 사회에서 배우고 생각해야 될 진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첫째로 사사기 시대에 전쟁을 아는 시대는 나중에 가나안 정복을 거의 끝내고 손에서 칼을 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조금씩 누리게 되자 자기도 모르게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세대에게 모범이 되지 못했고 감동을 주지 못했습니다. 신앙은 자꾸 희미해지기 시작했고, 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못하는 모순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사는 즐거움을 조금씩 맛보면서 그들 자신도 주변에 있는 잡족들과 별로 다름이 없는 수준으로 신앙과 도덕성, 선민의식이 낮아지고 있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여호수아는 110세까지 살았습니다. 여호수아는 애굽에서 태어나 40년간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나올 때 거의 40세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두에서 지휘할 때에는 거의 85세에 가까운 노인이었습니다. 이 노인이 가나안 정복을 끝내고 세상을 떠날 때가 110세이므로 가나안에 들어온 지 약 2, 30년 정도 됩니다. 그렇다면 광야에서 태어나 광야에서 2, 30여년 살던 사람은 가나안 전쟁을 치를 때 20대, 30대의 전사들이었을 것입니다. 손에 칼을 들고 선두에 서서 나라를 위해 싸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여호수아가 110세가 된 시점이므로 약 30년이 지났습니다. 손에 칼을 들고 싸우던 20대, 30대가 이제는 50대, 60대로 다 접어들었습니다. 기성세대가 된 것입니다. 전쟁을 아는 세대가 이제 그 나라의 중심이 된 것입니다. 그들을 앞에 놓고 여호수아는 죽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만일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망하리라."(수23:16) 지금 숨을 거두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는 지도자가 마지막으로 후손들에게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말을 하지 않고 왜 이런 불길한 말을 할까요? 거기엔 이유가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볼 때 전쟁을 아는 기성세대가 영적으로 병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벌써 삶이 해이해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해서 냄새를 피우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망하겠기에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는 불안이 여호수아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너희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수24:23) 기성세대가 집안에 우상을 갖다 놓고 살았던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눈이 파랗게 살아있는데도, 주변에 있는 잡족들이 섬기는 신들을 받아 자기 집에 갖다 놓았던 것입니다. 옛날에 광야에서 전쟁을 한참 치르는 긴장된 상황에서는 그런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살만하자, 배가 부르자, 돈이 많아지자 점점 해이해져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떠났습니다. 그래서 다른 신을 받아들여 우상을 집안에 갖다 놓고 남몰래 섬기며 가나안 잡족들이 하는 대로 부패한 행동을 모방했던 것입니다.
이 정도로 순수성이 변질되고 세상과 타협하는 이중태도를 보이는 선배를 모범으로 생각할 후배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부모를 존경스러운 눈으로 보는 자손도 없습니다. 모범이 없으면 감동이 따라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사기에 있던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이런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앞서가는 세대로부터 감동을 받지 못했습니다. 계속되는 회의와 갈등 속에서 비판 의식이 생기고, 그 다음에 그들을 거부하는 의식들이 계속 발전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어떻습니까? 오늘날 전쟁을 아는 기성세대는 참혹한 전쟁을 치른 세대입니다. 극심한 가난을 딛고 일어나 그래도 세계에서 15위안에 들어가는 경제대국으로 발돋움을 할 수 있도록 한 썩는 밀알과 같은 세대였습니다. "잘 살아보세!"를 외치면서 일만했을 뿐 여가가 없었습니다. 언제 취미생활을 했습니까? 언제 세계를 호흡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까? 일만하며 지금까지 살아온 세대입니다. 그러나 이 세대도 2, 30년 전부터 살만하고 여유가 생기고 사는 재미를 맛보자 변질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시인합니다. 신앙이 삶을 지배하는 유일한 원칙이 되지 못했습니다. 전쟁할 때에는 신앙이 유일한 원칙이었습니다. 가난할 때에는 오직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의 영광만 위하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사는 어떤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가용을 타고 다니면서, 큰 집을 짓고, 여유 있게 살고, 여가를 즐기며, 재산을 축재하면서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만이 나의 삶을 유지한다는 원칙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신앙과 생활이 따로 노는 모순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을 모르는 2세들이 볼 때 이것은 이중인격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기성세대가 이런 상황에 놓여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쟁을 모르는 다음 세대에게 너무 모범이 되지 못하고 감동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왜 오늘날 의식이 있는 젊은이들이 개혁의 우선순위로 교회를 꼽습니까? 왜 대형교회는 개혁해야 될 영순위로 볼까요? 그들이 볼 때 교회는 말씀대로 살지 못한 부패한 집단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시각이 다 옳은 것은 아니지만 뭔가 냄새가 나는 데가 있으니까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 아닙니까?
한국 갤럽에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당신이 장차 종교를 선택한다면 무슨 종교를 선택하겠느냐?"고 질문한 결과 대다수가 불교였고, 그 다음이 가톨릭이었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만큼 기독교에 대해서 호감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한 유니세프에서 조사한 기록을 보셨을 것입니다. 아세아 지역에서 17개국을 조사한 결과, "정말로 부모를, 어른을 존경하느냐?"고 물었더니, 존경한다고 대답한 사람은 우리나라 젊은이들 가운데 17%밖에 안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의 평균 수치가 72%에 이릅니다. 이것은 오늘날 예수를 믿든 믿지 않던, 전쟁을 아는 기성세대는 전쟁을 모르는 다음세대에게 아무런 감동도 못 주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범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뭔가 모순을 안고 있는 세대로, 변화의 대상으로, 개혁의 대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세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성세대는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말씀을 통해 진단 받으면서 부끄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를 비판하는 젊은 세대를 놓고 나무라기만 하면 안됩니다. 섭섭하다는 말만 하면 안됩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사사기 시대에 전쟁을 아는 세대가 잘못되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편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한 마디 하고 싶습니다. 완전한 모범이라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존재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완전한 모범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모범이 되지 못 한다고 해서 전부 틀렸습니까? 아마 그런 극단적인 이론을 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고 봅니다. 모범이 되지 못하는 부분이 있지만 그 사람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보기에 오늘날 기성세대가 냄새나고 형편없고 세계화에 맞지 않는 시대에 뒤떨어진 무리로 보일 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나라를 가난에서 일으키고, 전쟁에서 구한 세대에게는 아직도 여러분들이 배워야 될 위대한 덕목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덕목이 아직도 있습니다. 꿋꿋함이 있습니다. 용기가 있습니다. 양심이 있습니다. 그래도 신앙이 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자녀들을 사랑하는 뜨거운 열정이 있습니다. 이런 부분들을 여러분이 주목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좋은 점을 배우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라도 좋은 점이 있으면, 앞서가는 세대로부터 배우겠다는 겸손을 가질 때 그들의 잘못에 대해 비판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배워야 될 것이 있습니다. 사사기 시대에 전쟁을 아는 세대는 다음 세대가 짊어지기에 너무 무거운 짐을 남겨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전쟁을 아는 세대가 전쟁을 하면서 승승장구했습니다. 수십 개의 성을 점령했습니다. 그래서 살만하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나안 땅에 있는 모든 부족을 다 멸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한 선민이기 때문에 남아 있는 잡족들과 공생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을 깨끗이 정리하고 평정한 다음,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전쟁을 아는 세대는 희생이 좀 따르더라도 끝까지 싸워서 가나안 부족이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했어야 됐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몇 년 간 전쟁을 하면서 지쳤기 때문입니다. 땅과 성을 차지하고 살 만해지자, '이 정도도 됐는데 왜 자꾸 피를 흘리느냐? 이만하면 됐지 않느냐?' 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뒷전에 두고 자신들의 자족감에 취해 전쟁을 기피했습니다.
그래서 전쟁은 멈추었는데 가나안 족속들은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일곱 족속이라고 했지만 여호수아와 사사기에 보면 스무 족속이 넘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종살이를 했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잡족들이야말로 굉장히 위험한 존재였습니다.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삿2:3) 옆구리의 가시와 올무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을 더럽힐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존재들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사정없이 쫓아내고 그 땅을 거룩하게 해야 했는데 이것을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전쟁을 모르는 다음 세대에게 다 떠넘긴 것입니다.
따라서 전쟁을 모르는 세대는 스무 개 부족이나 되는 가나안 잡족들과 공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려운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 결과 머지 않아 잡족들의 다양한 종교를 접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그들의 신을 받아들이게 되어, 다원주의 사상에 물들어 갔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라는 생각이 떠나고, 모든 신을 인정하고 어느 종교에나 구원이 있다는 다원주의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 진리라는 원래의 생각에서 빗나갔습니다.
그래서 사사기를 보면 두 군데에 재미있는 말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더라." 요즘 현대 용어로 바꾸면 상대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좋으면 선이요, 내가 나쁘면 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닙니다. 그런 절대 진리는 부정해 버리고 오직 기준을 나에게만 둡니다. 그래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대주의가 오늘날만 기승을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사기 시대에도 이런 상대주의가 젊은이들의 마음과 사상을 전부 못 쓰게 만들어버렸습니다. 바로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이런 상대주의 가치관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문화와 교류하면서 그들은 자기 고유의 칼라를 잃어버리고 혼합주의에 빠져버렸습니다. 가나안 잡족들을 남겨놓음으로 인해 그 후손들이 이렇게 끔찍한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됐고, 결국 그 나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리에까지 나아갔던 것입니다. 과연 1차적인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바로 전쟁을 아는 세대에게 있습니다. 갈렙처럼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싸웠더라면 그 나라가 그렇게 오염되진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전쟁을 아는 오늘 우리 기성세대가 전쟁을 모르는 다음 세대에게 떠넘겨야 될 짐이 너무 무거운 것 같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불쌍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기성세대가 여러분에게 살맛 나는 사회, 살맛 나는 국가를 이어받도록 하지 못하고 병이 든 사회를 떠 넘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임현진 교수가 이번 대구 지하철 참사를 보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사회를 '모험추구사회'라고 정의하면서 '이 사회에서는 안전보다도 속도를, 내실보다도 외형을, 과정보다도 결과를, 미래에 부과될 비용보다도 현재에 비용 절약을 더 중요한 덕목으로 삼는 나라'가 되어버렸다고 말했습니다. 이 나라는 정상이 아닌 완전히 병든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졸속으로 건설한 거대한 구조물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너질지 모르는 러시안 룰렛과도 같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그는 지적했습니다.
이것은 건물이나 시설물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정신 구조물, 정신세계, 가치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우리의 신앙관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무엇이든지 기초를 닦는 안전보다 그저 '빨리빨리'에 정신이 없고,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는 것보다는 남의 눈에 띠는 부분을 항상 의식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과정보다도 한탕 하겠다는 결과, 대통령이 되어도 통일 병에 걸려서 뭔가 업적을 남기려고 하다가 나라를 엉뚱한 데로 끌고 가는 상황들이 왜 벌어집니까? 문제가 무언가 가치관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를 한번 보십시오. 양심이 살아 있습니까? 정치고위관리가 적어도 국민전체를 상대로 말을 할 때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다면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이 낫습니다. 1달러도 보낸 일이 없다고 해놓고는 나중에는 어마어마한 돈을 보냈다고 실토하면 도대체 우리 젊은 세대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거짓말들이 공공연히 통용되고 인정받는 사회라면 병든 사회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회를 떠맡아서 앞으로 이 나라를 끌고 가야 합니다. 마치 가나안 잡족들을 떠맡은 것과 똑같습니다. 이 사회에 보십시오. 가치관이 뒤틀린 사회가 아닙니까? 가난해도 떳떳하게 가난할 수 있는 가치관이 있습니까? 결코 자랑스럽지 못한 방법으로 돈을 번 졸부들이 온통 사치하고 방탕 하는 통에 나라 전체가 '돈, 돈' 하는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이런 병든 사회를 전쟁을 아는 우리 세대가 전쟁을 모르는 여러분에게 지금 떠넘기고 있는 것입니다. 대구 지하철 사고를 보면서 우리가 가슴을 치는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원칙 하나만 제대로 지켰더라도 저렇게 끔찍한 일이 없을 텐데. 원칙 하나만 지켰더라도 저렇게 무고한 생명이 희생을 당하지 않을 텐데.' 대충대충 되는대로 원칙과 기본에 충실하지 않은 사회는 무너지는 사회입니다. 병든 사회입니다. 신문에서도 보셨을 것입니다. 지난 5년 동안 종합방재 훈련을 한번도 실시하지 않은 지하철 공사에 정부가 지난 12월 안전대상을 수여했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면서도 이것이 부끄러운 줄 모르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인터넷 신문으로 젊은이들을 대변한다고 하는 '오마이뉴스'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 386세대의 변화와 열망은 기성세대가 파산낸 조국의 도덕적 원칙과 상식을 다시 바로 세우려고 하는 소박한 바람에 불과하다."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젊은 세대가 보기에 기성세대는 도덕적 원칙보다 상황적 이익에 목을 메는 비뚤어진 세대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고쳐야 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뒤틀리고 잘못된 사회와 나라를 여러분에게 지금 넘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이 나라를 책임지고 어깨에 메고 끌고 가야 합니다. 얼마나 짐이 무겁습니까? 그래서 저는 여러분을 동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짐을 여러분에게 떠넘기게 된 우리 세대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을 모르는 여러분 세대에 한 마디 하고 싶습니다. 실패학이란 실패도 연구의 대상이 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기성세대는 어떻게 보면 실패학의 연구 대상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실패를 연구의 대상으로 놓고 연구하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오히려 그런 과오를 반복하지 않으면서 이 나라와 하나님나라를 더 아름답게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세대나 다음 세대에게 짐을 남겨놓지 않는 법은 없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무거운 짐을 여러분에게 남겨놓고 가지만, 여러분들도 3, 40년이 지나면 지금보다도 더 무거운 짐을 여러분 후대에게 남겨놓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판만 하지말고, 큰 소리만 치지 말고, 앞서가는 세대의 잘못을 연구의 대상으로 놓고 그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노력하면 이 나라 구원할 수 있는 길이 생기리라고 믿습니다.
끝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사사기 서를 보면 하나님을 부정한 세대는 망했습니다. 사회전반에 만연된 무신론 사상이 사사기의 시대를 암흑의 시대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는 바츨라프 하벨 체코 대통령이 표현한 것처럼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무신론 문명입니다. 모든 사람의 의식에서 하나님을 추방하고 있습니다. 사회 각 분야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디에서 인간성이 파괴됩니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에서 인간성이 파괴됩니다. 누구의 마음에서 증오와 복수가 불탑니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복수의 불길이 타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하철에서 사고가 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서 성 매매나 성 문란의 죄악들이 날마다 날마다 반복됩니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자의 마음에서 그와 같은 죄가 반복되는 것입니다. 사치와 한탕주의가 어디에서 생기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는 유혹을 받을 때, 그와 같은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정합니까? 개인과 가정이 망합니다. 하나님 없는 곳에서는 무엇이든지 가능합니다. 세상의 모든 악이 다 가능할 수 있는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없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전쟁을 아는 세대가 사는 길,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사는 길은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전쟁을 아는 세대는 전쟁을 모르는 세대를 이해하고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잘못을 하나님 앞에 회개할 수 있어야 됩니다. 다음 세대 앞에 눈물을 흘리고 자기의 실패를 인정해야 합니다.
동시에 전쟁을 모르는 세대는 예수 안에서 기성세대를 이해하고 포용하고 그들의 좋은 점을 배울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실패를 통해서 더 나은 역사를 창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두 세대가 함께 만나 새로운 부흥을 일으키는 내일의 역사를 창조해야 합니다. 이럴 때 교회가 삽니다. 이 나라가 삽니다. 여러분의 세대가 삽니다. 하나님이 이런 은혜를 우리 모두에게 주실 줄 믿습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 함께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날마다 기도합시다. 다같이 기도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오늘 대한민국 이 사회를 주께서 다 알고 계십니다. 전쟁을 아는 기성세대가 이 사회를 너무나 병들게 만들었음을 시인합니다. 하나님을 거부한 무신론의 문명 속에서 온갖 타락과 범죄와 거짓이 난무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주님, 이런 사회를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지금 넘기고 있습니다. 이제 이 나라와 이 세계를 짊어져야 될 전쟁을 모르는 세대들에게 은혜를 주시길 원합니다. 먼저 이들에게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려워하는 믿음을 주시길 원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문제의 해답이 있음을 알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신앙으로, 말씀으로, 성령이 주시는 은혜로 우리의 난제를 해결하고 다음 세대를 아름다운 거룩한 세대로 꽃 피울 수 있도록 주의 귀한 자녀들을 축복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옥한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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