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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인하여

빌레몬서 박상훈 목사............... 조회 수 2204 추천 수 0 2011.07.25 07:56:28
.........
성경본문 : 몬1:8-14 
설교자 : 박상훈 목사 
참고 : 승동교회 
사랑을 인하여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저를 돌려 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8_14)
 
어떤 여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믿음이 참 깊은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남편은 교회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하나님께 자기의 남편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 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남편이 뜻밖에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보, 나 오늘 당신하고 교회나 한 번 가볼까 하는데 괜찮겠소?”
그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아, 이제야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서둘러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교회로 나섰습니다. 가면서도 마음 속에는 내내 이런 생각만 했습니다. “오늘 목사님께서 무슨 말씀을 주실까? 이왕이면 교회에 처음 나오는 남편을 위해서 좀 적절한 말씀을 주시면 좋겠는데…”
드디어 교회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얼른 주보를 받아서 본문이 무엇인지 찾아보았습니다. 창세기 5장의 말씀이었습니다. 성경을 펴서 창세기 5장에 어떤 말씀이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족보 이야기만 지루하게 반복되어 있었습니다.
“누가 몇 살에 누구를 낳고 몇 년을 더 살다가 몇 살에 죽었더라.”
그는 가슴이 덜컹했습니다. 남편이 교회에 처음으로 나왔습니다. 이왕이면 예수님을 잘 믿으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삶이 형통할 수 있다는 좋은 말씀을 주시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지겨운 족보 이야기만 잔뜩 써있으니까 마음에 실망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성령께서 남편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시기를 바라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내내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를 다 마쳤습니다. 나오면서 뜻밖에도 남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이왕 왔으니까 등록을 하고 가야 되겠지. 가서 등록합시다.”
그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래서 바로 등록을 마쳤습니다. 집에 돌아왔습니다.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 듯이 그는 남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여보, 내가 오늘 듣기에는 목사님의 설교에 특별한 내용이 없었던 것 같던데 어떻게 당신의 마음이 움직여서 등록할 결심까지 하게 되었어요?”
그러자 남편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목사님 설교를 듣다보니까 옛날 사람들이 꽤 오래 살기는 살았더구먼. 그러나 결국 그들도 다 죽었잖아. 그런데 말이야. ‘죽었더라,’ ‘죽었더라’고 하는데 그 말이 내 귀에는 ‘너도 죽어!’라는 말로 들리는 거 있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나는 아직도 죽을 준비가 안되었거든. 그래서 이제라도 믿기로 작정하고 죽을 준비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등록을 하게 된거야.”
성령께서 남편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신 것입니다. 오늘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도 감동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무슨 말씀을 주시든지 그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풍성히 누릴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히 9:27의 말씀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감히 피할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우리는 이 세상을 다 떠나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맺힌 것은 다 풀어버리고 가야지, 미결 인생으로 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빌레몬처럼 용서할 것은 용서하고, 또 오네시모처럼 용서받을 것은 용서받아야 합니다. 풀지 못하고 맺힌 채 가게 되면 얼마나 마음이 찜찜하겠습니까? 이 땅에서 풀어야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예수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의 남은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 맺힌 것은 속히 풀어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인 윤동주의 「서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 죽어가는 존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나를 속상하게 했던 나의 오네시모도 죽어가고 있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내가 상처를 주고 내가 마땅히 용서받아야 할 나의 빌레몬도 사실은 죽어가는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잠시 잠깐후면 육신의 장막을 벗고서 하나님 앞에 다 서야 합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억울한 일이 무엇이 그렇게 많겠습니까? 우리가 용서받지 못할 만큼 체면 차릴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시인 윤동주의 결심 그대로 우리도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계속해서 빌레몬서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빌레몬서에는 용서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정의 실제적인 문제를 통해서 용서의 정신을 너무나도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묘사해 주고 있는 책이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빌레몬을 사랑하는 마음, 또 오네시모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둘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고 화평케 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셨던 사랑의 마음을 우리에게도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편의상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빌레몬을 향한 사도 바울의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을 어떻게 사랑했습니까?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우리가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을 여섯 가지로 칭찬했습니다. 첫째, 그에게는 주 예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둘째,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셋째, 그에게는 믿음의 교제가 있었습니다. 넷째, 그는 선을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섯째,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여섯째, 그는 성도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빌레몬은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므로 바울은 얼마든지 그의 사도적인 권위를 가지고 그에게 명할 수가 있었습니다.
“오네시모를 용서해라!”
그렇게 명했더라도 빌레몬은 바울의 명에 순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적인 권위로 빌레몬에게 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했습니까? 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바울은 자기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그리고 빌레몬 앞에서 간구하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이러므로”가 “도리어”로 바뀌어졌습니다. “명할 수 있으나”가 “간구하노니”로 바뀌어졌습니다.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그렇게 바뀌어지게 했습니까? “사랑을 인하여.” 사랑은 교만치 않습니다. 사랑은 겸손한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을 지극히 사랑했기에 그 앞에서 자기 자신을 낮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빌레몬을 지극히 사랑했기에 빌레몬도 자기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레몬의 마음에 있는 사랑에 호소하기 위해서 자기가 지금 처해 있는 입장을 두 가지로 밝히고 있습니다. 9절 하반부입니다.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첫째, “나이 많은 나 바울은”입니다. 자기는 지금 늙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입니다. 지금 자기가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바울의 나이는 50대 후반이나 60대 초반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실제 나이보다도 더 들어 보였을 것입니다. 오랜 선교여행과 이런저런 핍박들, 또 오랜 감옥 생활로 그는 실제적인 나이보다도 들어보였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노년에 평안히 지내지 못하고,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빌레몬의 눈에서는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빌레몬에게 있어 사도 바울은 그의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바울 때문에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지 않습니까? 자기 생명의 은인이 나이도 많은 가운데 평안히 거하지 못하고 지금도 로마의 감옥에 갇혀 고생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의 마음 속에서 절로 동정심이 끓어올랐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에게 어떠한 것을 청한다 할지라도 내가 거절해서는 안되겠구나!”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간구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10절 말씀입니다.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오네시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래서 “갇힌 중에서”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오늘날의 교도소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행 28:30∼31을 찾아 보십시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요즘 교도소는 무료입니다. 먹여주고 재워줍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 돈을 주고 셋집에 유했습니다. 바울에게는 로마의 시민권이 있었습니다. 특혜를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는 감금된 상태입니다. 마음대로 자유롭게 여행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영접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때 오네시모가 찾아온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자기 주인 빌레몬을 통해서 이미 바울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해서 오네시모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일을 위해서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0절에서 그가 오네시모를 낳았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다 오네시모는 비천한 노예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오네시모를 가리켜서 자기의 아들이라고 애정 어린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오네시모를 위해서 바울은 빌레몬 앞에서 자기를 낮추면서 겸손하게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바울이 빌레몬을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의 마음을 조금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한 마디 한 마디 신중히 이어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보게, 빌레몬! 내가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다네.”
“네. 무엇입니까?”
“나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이 일을 자네에게 얼마든지 명할 수도 있어.”
“물론입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자네에게 지금 간구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어.”
“예. 잘 알겠습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나이가 많아. 거기다 지금 나는 감옥에 갇혀있어.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나? 그러니 자네는 나의 청을 거절하지 않고 반드시 들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네!”
“물론입니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갇힌 중에 낳은 나의 소중한 믿음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네.”
“네. 그것이 누구입니까?”
“지금 자네 앞에서 내 편지를 들고 있는 오네시모라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생각없이 그저 불쑥 말했다가 그것 때문에 남의 마음에 상처를 입힐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조금 참았어야 했는데… 왜 저런 말을 했을까?” 뉘우치면서 우리 자신들이 괴로워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교만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제부터는 말 한 마디라도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한 마디 한 마디 신중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사랑을 인하여 “이러므로”를 “도리어”로 바꿀 수 있고, “명할 수 있으나”를 “간구하노니”로 기꺼이 바꿀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오네시모를 향한 사도 바울의 사랑입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어떻게 사랑했습니까? 11절 말씀을 보십시다.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가 전에는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무익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뜻이 공교롭게도 “useful,” 곧 유익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전에는 자기 이름 값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빌레몬은 훌륭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좋은 주인이었습니다. 그가 까닭없이 자기의 종 오네시모를 학대하고 괴롭혔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네시모는 자기의 훌륭한 주인을 배신했습니다. 돈을 훔쳐 달아나 버렸습니다. 오네시모는 손해를 끼친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서 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곁에서 충성스럽게 뒷바라지를 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믿어주었습니다. “저 놈이 왜 저러지? 전에는 자기 주인 빌레몬의 돈을 훔쳐서 달아나더니 이제는 내게서 무엇을 훔쳐 달아나려고 저러나?” 바울은 그런 의심의 눈초리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보는 그대로의 오네시모를 믿어주고 인정해 주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바울은 “오네시모가 내게 유익한 것처럼 너에게도 유익할 것이다!”라고 빌레몬에게 그 종 오네시모를 칭찬해 주었습니다. 이 전에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유익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눈앞에서만 눈가림을 했을 것입니다. 마음 속에는 돈을 훔쳐서 달아날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정으로 그의 주인 빌레몬을 위해서 충성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는 단순히 하나의 종으로서가 아니고,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유익을 주는 인물이 될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다.
“네게 저를 돌려 보내노니.”
물론 오네시모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법적으로는 빌레몬의 종입니다. 빌레몬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용서를 받기 위해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내 심복이라”고 했습니다. 마음 심(心)자, 배 복(腹)자입니다. “오네시모가 나의 심장과 같이 나의 내장과 같이 나를 충성스럽게 잘 섬기고 있는 것처럼, 이제는 너에게도 심복이 되어서 충성스럽게 잘 섬길 것이다!”라고 칭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대인관계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다른 사람을 인정해 주고 믿어주고 칭찬해 줍니까? 그렇지 않으면 남을 비난하고 욕하는 일에 더 열심을 내지는 않습니까? 바울은 빌레몬도 사랑했습니다. 오네시모도 사랑했습니다. 우리도 이 사람 생각을 하면 감사하고, 저 사람을 생각하면 기뻐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만 생각해도 원망스럽고, 저 사람만 생각해도 분통이 터지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그만큼 우리의 마음에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오네시모가 전에는 잘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무익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도 얼마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익한 존재로 바뀌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믿어주고 인정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재미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학교의 선생님으로 하여금 자기 반에 있는 학생들 5명 가운데 1명을 임의로 택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택함을 받은 학생들에게 계속해서 일부러 칭찬해 주도록 했습니다.
“너, 요새 보니까 공부하는 자세가 많이 좋아졌어! 공부에 재미를 붙인 것 같구나! 너 이제 틀림없이 성적이 오를거야. 내가 장담하지!”
그러면서 선생님에게도 그 사실을 애써 믿도록 했습니다. 그랬더니 나중에 그 학생들 모두가 실제로 성적이 향상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심리학에서는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라고 부릅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피그말리온은 키프로스 왕의 이름입니다. 그는 자기 왕궁에 있는 미녀조각상을 보고 반해 버렸습니다. 마치 사람인 것처럼 그는 조각상을 사랑했습니다. 하늘에 있는 신이 그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아서 그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내게 좀 부족한 듯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믿어주고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면 실제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피그말리온 효과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피그말리온 효과를 잘 이용하셨습니다. 수제자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엄벙덤벙하고 실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에게 새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베드로,” 곧 반석이라는 뜻의 이름이었습니다. 그의 성격과는 잘 맞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가 실수할 때도 부족할 때도 “반석아! 반석아!”라고 불러주셨습니다. 과연 베드로는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하고, 예수님을 떠나서 갈릴리 바다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십자가에서 거꾸로 순교 당하는 반석과 같은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의 오네시모가 잘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전에는 잘못했지만 본심은 그렇지 않겠지! 이제는 달라졌겠지! 앞으로는 달라지겠지!” 바울처럼 넉넉한 마음으로 인정해 주고, 믿어주고, 격려해 주고, 세워주고, 칭찬해 줄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바울은 선한 일을 억지로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강요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선한 일이라도 그 자체가 사랑이 되지는 않습니다. 억지같이 아니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의로 할 때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바울에게는 하나의 소박한 꿈이 있었습니다.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지금 바울은 나이가 많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누군가가 자기를 도와주어야 할 형편입니다. 만일 빌레몬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기꺼이 그는 복음을 위해서 사도 바울의 뒷바라지를 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레몬은 그 자리에 없습니다. 다행스럽게 빌레몬의 종 오네시모가 그 자리에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을 대신해서 지금 바울을 잘 섬기고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바울을 섬기고 있는 것은 따지고 보면 그의 주인 빌레몬을 대신하는 일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 빌레몬은 그 소식을 듣더라도 기뻐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 대신에 오네시모를 자기 곁에 머물러 두어 복음을 위해서 시중들게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심복같이 충성스럽게 잘 섬기고 있는 오네시모를 그 주인인 빌레몬에게 되돌려 보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4절 말씀을 보십시다.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빌레몬이 그의 종 오네시모를 용서하는 선한 일이 억지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의 선한 일이 자의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결코 강요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무엇인가 이루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마음에 상처를 줄 수가 있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올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일 것입니다.
어느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부인이 남편을 기다리다가 지쳐서 잠들었습니다. 한밤중에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가보았더니 남편이 완전히 술에 만취되어서 돌아왔습니다. 거기다 혼자만 온 것이 아니고 술친구 한 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자기 집에서 2차를 해야 되겠다고 친구를 같이 데리고 온 것입니다. 얼마나 속상한 일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인은 군말없이 주방에 가서 술상을 차려 대접했습니다. 친구는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 집 같으면 자기 아내가 난리가 났을텐데 이 집 부인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습니다. 아주 평안한 모습으로 정성을 다해 술상을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정색을 하고 물었습니다.
“아주머니, 우리 집 사람 같으면 벌써 사네 못사네 하며 난리가 났을텐데 어떻게 아주머니는 싫은 내색도 전혀 없이 이렇게 대접을 잘해 주십니까?”
그 부인은 그저 웃기만 하고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친구는 또 졸랐습니다.
“말씀 좀 해 주세요! 그래야 우리 집 사람도 알고 배울 것 아닙니까?”
남편도 옆에서 어서 알려주라고 거들었습니다. 그제야 부인은 마지못해서 입을 열었습니다.
“사실 남편과 제가 결혼한지 10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10년 동안 남편에게 교회에 다니며 예수님을 믿자고 졸라대었는데 남편은 아직까지 한 번도 교회에 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니까 앞으로도 교회에 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저는 믿으니까 죽으면 천당가지 않겠습니까? 이까짓 고생이야 좀 하면 어떻습니까? 그러나 남편은 믿지 않으니까 죽으면 지옥에 갈 것 아닙니까?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이라도 대접 좀 잘 받으라고 제가 정성을 다해서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두 사람이 술맛이 나겠습니까? 술맛이 싹 달아나 버렸습니다. 결국 그 두 사람도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억지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강요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사랑은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주장을 고집하지 않고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배려하는 것이 바로 참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마음 속에 주신 사랑을 우리에게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도 기꺼이 사랑을 인하여 낮아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러므로”를 “도리어”로 바꿀 수 있고, “명할 수 있으나”를 “간구하노니”로 바꿀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오네시모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잘못을 저질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전에는 무익했지만 이제는 유익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믿어주십시다. 인정해 주십시다. 세워주고 칭찬해 줄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결코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내 유익만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세심하게 배려해 주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셨던 사랑의 마음을 우리에게도 주셔서 먼저 우리 자신들이 나와 너와의 관계를 늘 아름답게 맺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피스메이커(Peacemaker)로서 화평케 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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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40 빌레몬서 오네시모를 용서하라 몬1:1-3  박상훈 목사  2011-07-25 2786
5539 시편 하나님은 나의 목자 시23:1-6  한태완 목사  2011-07-23 2777
5538 요한복음 우라부지 집에서 와이라노! 요2:14-17  강종수 목사  2011-07-22 2468
5537 고린도전 영을 따라 사는 사람 고전2:12  강종수 목사  2011-07-22 2176
5536 사사기 전쟁을 모르는 세대를 위하여 삿3:1-6  옥한흠 목사  2011-07-21 2606
5535 아모스 정의의 강물 암5:21~27  유관지 목사  2011-07-21 2205
5534 마가복음 지금, 우리에겐 뭔가 거대한 것이 필요합니다 막1:9-11  이정수 목사  2011-07-20 2090
5533 마가복음 기도는 이루어진다!”, 과연 그러한가? 막14:36  이정수 목사  2011-07-20 2848
5532 창세기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창조주 이십니다 창1:1-2:3  이정수 목사  2011-07-20 2524
5531 잠언 기도는 나의 실존을 하나님께 맡기는 일입니다 잠16:3  이정수 목사  2011-07-20 2567
5530 마가복음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 막6:46  이정수 목사  2011-07-20 2121
5529 시편 묵상기도(Meditative Prayer) 시19:1-14  이정수 목사  2011-07-20 2420
5528 누가복음 소원기도(reflexive prayer) 습관 눅18:1-8  이정수 목사  2011-07-20 3334
5527 다니엘 위대한 습관을 창조하자! 단6:10  이정수 목사  2011-07-20 2287
5526 시편 멈추라, 그리고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시46:1-10  이정수 목사  2011-07-20 2859
5525 누가복음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데로 가라! 눅5:1-11  이정수 목사  2011-07-20 3436
5524 요한복음 지금, 두려운가요? 요14:27  이정수 목사  2011-07-20 2021
5523 데살로전 성령을 소멸치 말라 살전5:19  이정수 목사  2011-07-20 3265
5522 고린도전 너희 몸은 성령의 전이라 고전6:15-20  이정수 목사  2011-07-20 3015
5521 예레애가 푸른 나이에 꼭 기억할 것들? 애3:25-29  이정수 목사  2011-07-20 2196
5520 요한삼서 이렇게 효도하라 요삼1:2-4  이정수 목사  2011-07-20 2089
5519 고린도후 은혜 받은 자, 은혜 받을 자 고후8:1-5  이한규 목사  2011-07-16 3259
5518 고린도후 서로 힘이 되어주는 길 고후7:12-16  이한규 목사  2011-07-16 2417
5517 고린도후 근심을 유익으로 만드십시오 고후7:9-11  이한규 목사  2011-07-16 1948
5516 고린도후 영혼의 병균 침투를 막는 길 고후7:9-11  이한규 목사  2011-07-16 2086
5515 고린도후 하나님의 사랑 받는 사람 눅15:8-10  이한규 목사  2011-07-16 2107
5514 고린도후 쓸데없는 근심을 버리십시오 고후7:9  이한규 목사  2011-07-16 1875
5513 고린도후 칭찬의 위력 고후7:2-4  이한규 목사  2011-07-16 2281
5512 고린도후 성공적 삶을 위한 3가지 약속 고후7:1  이한규 목사  2011-07-16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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