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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몬1:8-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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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상훈 목사 |
참고 : | 승동교회 |
화평케 하는 자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저를 돌려 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8-16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이런저런 수많은 인간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예컨대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있고, 부부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에서는 선배와 후배의 관계가 있고, 직장 동료의 관계가 있습니다. 또한 교회에서는 성도간에 이런저런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우리 인간을 가리켜서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관계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여러 가지 관계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상처를 입을 때가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통해서 위로 받으려고 교회를 나왔는데, 나와 너 사이의 관계가 잘못되어서 오히려 마음에 상처를 입고 돌아갈 때도 없지 않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 5:9의 말씀을 보십시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마땅히 화평케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된다면, 우리는 그릇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이 빌레몬과 오네시모, 이 두 사람을 화평케 하기 위해서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빌레몬과 오네시모, 이 두 사람은 본시 주인과 종의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오네시모가 자기의 주인이었던 빌레몬을 배신했습니다. 물질을 축내었습니다. 돈을 훔쳤습니다. 그리고는 주인 빌레몬을 떠나서 멀리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오네시모가 당시의 세계 수도였던 로마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면서 과거의 모든 잘못된 삶을 뉘우치고 회개했습니다. 이제 그는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기 곁에 머물게 해서, 편지도 보내게 하고 이런저런 심부름을 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종은 주인의 소유물처럼 여겨질 때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임의대로 일을 진행하지 않고, 일단은 주인이었던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돌려보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해서 편지 한 장을 써서 빌레몬에게 전했습니다. 그 가운데 바울은 빌레몬에게 그 동안 오네시모에게 가졌던 모든 미운 감정들을 풀어버리고, 이제는 오네시모를 용서하면서 따뜻하게 맞아줄 것을 간곡하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빌레몬서의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살펴보면서 빌레몬과 오네시모를 하나되게 하고자 했던 사도 바울의 아름다운 모습을 통해서 몇 가지 중요한 깨달음을 얻고자 합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사도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영적인 권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든지 빌레몬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명할 수 있는 높은 지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바울은 나이도 많았습니다. 빌레몬보다도 연장자였습니다. 아울러 여러분, 빌레몬이 누구를 통해서 예수를 믿었습니까? 빌레몬은 바울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빌레몬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의 아들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있어서 믿음의 어버이였습니다.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나이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빌레몬을 낳았습니다. 얼마든지 빌레몬에게 명할 수 있는 지위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9절 말씀에서 어떻게 했다고 했습니까?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10절 끝 부분 말씀입니다. “네게 간구하노라.” 우리가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서 우리 자신을 낮추며 간구하는 그런 심정으로 바울은 스스로를 낮추었습니다. 높은 자리에 위치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의 겸손한 모습을 본받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나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대적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바울의 겸손한 모습을 본받아야 될 줄 압니다. 어떤 사람은 “겸손은 떠오르는 태양과 같다”고 했습니다. 겸손은 어둠을 밝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교만은 지는 석양빛과 같다”고 했습니다. 교만은 어둠을 더욱더 짙게 만들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평케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얼마나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우리 예수님의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종의 형체를 입고 오셔서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흉악한 죄인들이나 매어달리는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시고 또 낮추셨습니다. 그리해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평케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과 바울의 겸손을 우리가 본받게 되기를 원합니다. 남보다도 높은 자리에 서서 이렇게 저렇게 명하려 하지 마십시다. 그렇게 해서는 화평케 하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남을 높이고 나를 낮추는 겸손한 심정이 될 때,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서 하나될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남을 칭찬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11~12절 말씀을 보십시다.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저를 돌려 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물론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가 이전에는 자기 주인인 빌레몬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는 무익한 종이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빌레몬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신앙적인 인물이 자기의 노예 오네시모를 까닭 없이 괴롭히고 학대했다고는 우리가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네시모가 자기의 주인인 빌레몬을 배신했습니다. 돈을 훔쳤습니다.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오네시모는 사도 바울을 만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바울과 빌레몬에게, 그리고 주님의 몸된 교회에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보잘 것 없는 오네시모를 가리켜서 무엇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10절 말씀을 보니까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또 12절 끝 부분에 보니까 “저는 내 심복이라”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오네시모를 “사랑받는 형제”로 높이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칭찬하며 격려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간 관계는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바울처럼 남을 칭찬해 줍니까? 격려해 줍니까? 용기를 북돋아 줍니까?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비난하고 욕하는 일에 더 열심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는 우리가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처럼 남을 세워주고 칭찬해 주는 일에 인색하지 않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는 책을 써서 더욱더 유명해진 안이숙 여사의 글 가운데 “그럴 수도 있잖아요”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제가 소개를 해 드립니다.
“그럴 수도 있잖아요
못 생기고 모양 없다고 흉보지 마세요.
그를 지으신 분이 그렇게 만드신 것일테니까
그럴 수도 있잖아요.
화 잘 낸다고 나무라지 마세요.
일 때문에 피곤하고
신경이 늘어지면
그럴 수도 있잖아요.
늘상 늦는다고 수군거리지 마세요.
일이 많아 바쁘고
전화통화를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잖아요.
설사 한가했더라도 시계를 보지 않다가
그럴 수도 있잖아요.
욕심이 많다고 욕하지 마세요.
매번 다른 사람 생각을
미처 못 하다 보니
그럴 수도 있잖아요.
무식하여 아무것도 모른다고 멸시하지 마세요.
배울 수 있는 길이 제한되어 못 배웠으니
그럴 수도 있잖아요.
인색하고 사랑이 없다고 미워하지 마세요.
경제에 시달릴 때를 염려하여 절제하다 보니
그럴 수도 있잖아요.
노래를 못 하고 음성이 나쁘다고 흉보지 마세요.
그렇게 태어났으니
그럴수도 있잖아요.
게으르고 더럽다고 멸시하지 마세요.
신경상태가 늘어져서
감각이 예민하지 못하니
그럴 수도 있잖아요.
눈치없고 염치없다고 시비하지 마세요.
다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테니까
그럴 수도 있잖아요.
이해하세요!
우리 이해하기로 해요.
내가 나를 싸매고 가리고 변호하듯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밥먹듯 하기로 해요.
그러면 기쁨이 생겨요.
마음에 늘 평안이 있어요.
세상 사는 것이 재미있어져요.
오나가나 즐겁고 감사하기만 해요.
왜! 왜! 왜냐고 따지지 마세요.
불행해져요.
미움이 생겨요.
친구가 없어요.
세상만사는 모두 이유가 있기 마련이지요.
세상만사는 모두 그럴 수도 있기 마련이지요.
그럴 수도 있지!
이해하는 습관은
행복을 만드는 신호랍니다.”
여러분, 주변에 혹시 누가 잘못을 했습니까? 비난하고 욕하기에 앞서 넓은 마음을 가지고 이해해 주십시다. “과거에는 잘못했지만 지금은 달라졌겠지! 새로운 사람이 되었겠지!” 이해하고 기대하는 마음, 신뢰해 주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 모두는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로, 사도 바울은 뒤로 물러설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주도권을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13~1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오네시모는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과거에는 빌레몬에게 해를 끼치고 달아나 버렸지만, 이제는 스스로 사도 바울의 종이 되어서 그의 곁에 머물면서 정성을 다해 돕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가 계속해서 자기 곁에 있으면서 자기의 심부름도 해주고, 편지도 부치는 등의 일을 도와주기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주인된 빌레몬의 승낙 없이는 자기의 뜻대로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간 관계에 있어서 어려운 문제가 생기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무엇을 해야 되겠다! 내가 무슨 일의 주도권을 쥐고 해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데서 문제가 생기는 줄 압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관심은 그런 데에 있지 아니했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오직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작은 일을 하고서도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굉장히 섭섭해하지 않습니까? 이제는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중요한 일, 큰 일을 하면서도 한 걸음 물러서는 법을 배울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유명한 성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경건하게 삶을 사는지 하늘의 천사들도 그의 경건한 모습을 보고 감동할 정도였습니다. 하루는 천사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서 내려왔습니다. 천사들은 그에게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가 당신의 경건한 삶에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신에게 한 가지 선물을 하고 싶은데 무엇을 드리면 좋겠습니까? 병을 고치는 능력을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아니면 죽은 자라도 다시금 살릴 수 있는 능력을 우리가 당신에게 선물로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당신의 원하시는 소원을 우리가 기꺼이 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그가 정색을 하면서 이렇게 사양했습니다.
“아닙니다. 병을 고치는 능력과 죽은 자를 다시 일으키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이 아닙니다.”
그러자 천사들이 또 다시 말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당신이 복음을 외칠 때마다, 그것을 듣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감화를 입히고 새사람이 되게 하는 설교의 은사를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성자가 또 사양을 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에 감화를 입고 새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지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당신에게 무슨 선물을 주기 원하십니까?”
성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 땅에서 선한 일, 착한 일을 많이 행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제가 선한 일을 많이 하되, 그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작은 일을 하면서도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못하면 마음 아파하고 섭섭해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이제는 무슨 일을 하든지 내가 아무리 큰 일을 하고 중요한 일을 한다 할지라도, 모든 영광은 주께 돌리고 나는 뒤로 물러설 줄 아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면서, 우리 각자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일에만 열심을 내십시다. 겸손으로 우리의 허리를 동이고, 다른 사람을 나보다 더 낫게 여깁시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주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로,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의 인격과 감정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여기서 말하는 “저”는 빌레몬의 종 오네시모를 가리킵니다. “빌레몬아 오네시모가 너를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습니까? 돈을 훔쳤습니다. 그리고는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거친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와 같이 아주 부드럽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냥 생각 없이 말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가, 그것 때문에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도 바울처럼 말 한 마디라도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생각해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1:2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바울이 쓴 이 편지는 빌레몬 한 사람만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빌레몬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가 돌아가면서 이 편지를 읽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오네시모가 누구인지, 오네시모가 주인인 빌레몬에게 무슨 짓을 행했는지 환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오네시모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굉장히 부드러운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엡 4:15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물론 우리가 참된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오직 어디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까? 사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바른 말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랑 밖에서 이루어지게 되면 그 말 한 마디 때문에 서로간에 원수지간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처럼 남의 기분을 잘 살펴 줄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할 줄 압니다.
사람들이 흔히 잘못 생각하는 실수가 있습니다. 그저 하나님께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남의 기분을 무시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도 바울을 생각해 보십시다. 바울은 하나님께 잘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만큼 하나님께 잘한 사람이 어디 있었습니까?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잘 것 없는 노예의 신분인 오네시모의 인격과 감정까지도 무시하지 아니했습니다. 오히려 오네시모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아량이 있어야 될 줄 압니다.
성공적으로 목회를 잘 하시는 어느 나이 드신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목사님이 젊은 시절에 처음으로 교회에서 목회를 하실 때였습니다. 하루는 그 교회의 인품이 훌륭하신 장로님이 목사님을 식사에 초청했습니다. 그리고는 융숭하게 음식 대접을 하고 나서 목사님에게 책을 한 권 선물하셨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 책을 읽어보고서 참으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목사님, 시간 나시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시고 우리 교인들에게도 이 책을 요약해서 설교하실 때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중에 보니까 그 책 속에 봉투가 하나 들어 있고, 그 안에는 이러한 편지 내용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책을 사서 보시려면 돈이 많이 드실텐데, 적은 돈이지만 도서비에 보태어 쓰시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아무런 생각 없이 그것을 잘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똑같은 일이 여러 번 반복이 되니까 그 장로님이 어떠한 경우에 그렇게 하시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이런저런 일로 바쁘셔서 설교 준비를 제대로 못할 때가 종종 있었을 것입니다. 교인들에게 말씀을 통해서 감동을 주지 못할 때, 그 장로님은 어김없이 목사님을 식사에 초청해서 대접을 잘하신 뒤에 도서비를 봉투에 넣어 드려서 목사님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그 때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목회를 잘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그처럼 훌륭하신 장로님을 만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잘 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나와 너 사이의 관계에서 다른 사람의 인격과 감정을 존중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제대로 되어질 때 우리 모두는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네 가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바울은 겸손했습니다. 남을 칭찬해 주고 세워주는 일에 인색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앞세우려 하지 아니하고, 뒤로 물러설 줄 아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다른 사람의 인격과 감정을 존중할 줄 알았습니다. 남을 비난하고 욕하는 일에 열심 내지 말고, 남을 세워주고, 위로해 주고, 격려해주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아울러 작은 일을 하고서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하지 말고, 중요하고 큰 일을 한다 할지라도, 뒤로 물러설 줄 아는 지혜를 배우기 원합니다.
그리해서 우리 교회가 더욱더 주 안에서 하나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 성도들 간에 마음을 같이해서 주님을 잘 섬김으로 우리 교회가 더욱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가 되어 나가기를 원합니다. 더 나아가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고, 사랑이 풍성한 교회 되기를 원합니다. 아울러서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좋은 소문이 점점 더 퍼져 나가는 교회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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