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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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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기도의 입문(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요약,
토마스키팅 저
관상기도는 하나님에 의하여 시작된 대화가 우리가 동의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일치로 이끌어지는 내적 변형의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하여서 현실을 보는 방식이 바뀌게 된다. 우리의 의식이 재구성되면서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을 통하여, 모든 것 너머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향상된 감수성을 가지고 지각하고 연관 지으며 반응할 수 있도록 되어가게 된다.
향심기도는 관상기도라는 사다리의 첫 단이라 볼 수 있다. 관상기도는 믿음, 소망, 사랑의 성장을 깊게 해주며, 영혼의 실체와 그 기능들의 정화, 치유, 성화를 도와준다. 관상기도는 하나님이 그 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하나의 세계이다. 나 개인의, 자기가 만든 세상은 끝나고,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주변에 새로운 세계가 나타나서 불가능한 일들이 매일 매일의 경험으로 된다.
믿음으로 하는 우리의 동의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내 안에 태어나시고 그리스도와 우리의 참 자아(새 사람)은 하나가 된다. 모든 진정한 기도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심과 그분이 중단없이 계속적으로 우리를 고무하신다는 사실에 대해 확신을 갖는데 바탕을 둔다.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성령의 영감이 우리의 영에 직접 주어지는 기도를 뜻하는 것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고 우리는 그 기도에 동의 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에 대한 전통적인 용어가 관상(contemplation)이다.
관상기도는 사고의 공백이라기보다는 사고로부터의 이탈이다. 기도의 뿌리는 내적 침묵이다. 관상기도는 절대 신비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언어와 사고와 정서와 같은 심리적 상태를 넘어서 우리의 마음과 정신과 몸과 정서를, 즉 우리의 전 존재를 열어드리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 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단순히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노력함으로써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면서 그 너머로 가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의 내적 행위를 바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봉헌하는 것이다. 성령의 활동은 갓 입양된 아이를 적응시키려고 가르치는 능숙한 가정교사와 비견할 수 있다. 기존의 거짓된 자기를 부정하고(막8:35), 새 집에 입양된 자로서, 새 집의 값어치에 맞추려면 우리의 태도와 행동 양식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가정교사는 이것저것을 가르치면서 늘 격려도 하고 결코 비난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새 삶으로 교처나가도록 유도해 간다. 관상기도의 수련은 성령께서 인도하는 교육이라 할 수 있다.
어느 것에나 마음을 두지 않고 초연하고 객관적으로 보고 받아들이는 무소유의 태도는 자기를 부정하게 하는 사고의 이탈을 가능하게 한다. 거짓된 자아란 곧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착각으로서, 뇌나 신경조직 속에 저장되어 있는 숩관적 행동형태와 정서적 습관들이 쌓인 것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그것들은 인생의 어떤 특정한 시점에서 어떤 상황에 부딪칠 때 컴퓨터 단추를 누르면 일어나듯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관상기도로 성령은 자아 중심적 성향의 뿌리를 치유해 주며 우리의 의식 활동의 원천이 된다. 거짓 자아가 아니라 성령의 영향 아래 자발적으로 행동하려면 과거의 정서적 프로그램은 지워지고 대치되어야 한다.
예수의 신성이 관상의 원천이다. 거룩하신 분의 현존이 감싸 주시는 경험을 할 때 우리는 내면으로 관상하도록 이끌린다. 이것은 예수의 인성을 통하여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변화산에서 본 제자들이 겪은 상황과 같다. 그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그러나 하나님 체험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체험이 아니다. 그분은 신성한 체험의 방법을 통하여 우리를 공허(emptiness)의 체험으로 이끌어 주신다. 하나님에 대한 어떤 지각도 단지 그분의 현존의 섬광을 지각할 뿐이며 결코 그분 자신을 지각할 수는 없다. 거룩하신 빛이 인간의 마음에 부딪치면, 하나의 빛줄기가 프리즘에 부딪쳐서 여러 색깔로 나뉘듯이, 여러 가지 많은 양상을 띤다.
성령은 성서와 우리 일상 생활의 사건을 통해 우리 양심에 말씀하신다. 우리가 개별적으로 이 두가지 원천을 묵상하며 과거의 정서적 프로그램을 깨드림으로써 우리의 정신이 더욱 세련된 수준에서 듣게 해준다. 그러면 성령은 우리의 참 자아인 내면의 깊은 차원에서 우리의 양심에 말씀하시기 시작한다. 이것을 적절히 말하자면 관상이다. 변화산에서 하늘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성령의 현존에 대한 그들의 의식을 각성시켰다. 이 성령은 언제나 그들 안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지만 그 때까지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 내면의 공간은 신성의 빛으로 오신 현존으로 가득찼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손을 대시자 그들은 정상적 지각 상태로 돌아와 그전과 같은 모습으로 보았지만 이제는 의식이 변형된 믿음으로 보게 되었다. 그들은 에수님을 더 이상 인간으로만 보지는 않게 되었다.
거룩한 독서는 성서구절을 읽기 시작하여서 하나님과 친교를 이루는 관상적 방법의 하나이다. 성서 내용을 묵상하면 자발적 기도(읽은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말씀드림, 즉 응답)로,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 현존 안에서의 쉼으로 옮겨 간다. 향심기도는 거룩한 독서의 세 단계에서 마지막 단계인 하나님 안에서 쉼으로 옮겨가는 하나의 방법이다.
향심 기도의 첫 단계들 - 신적인 일치(Divine union)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표이다. 향심기도는 관상기도로 들어가는 데에 일어나는 장애를 줄이려고 만들어진 것이다. 이 신중하게 마련된 방법은 관상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제공한다. 만일 관상 기도로 이끌어 가는 방법도 관상기도의 일부라고 그 뜻을 확장 해석한다면, 향심기도는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하여 한 단계 한 단계씩 오르는 관상기도의 사다리에서 제일 첫 번째 다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향심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직관력을 세련시켜 관상기도로 쉽게 들어가게 하는 방법이다.
관상기도로서 유익을 얻으려면 심령과 신경조직에 어느 수준의 내적 침묵을 유지해야 한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항생제를 먹을 때 약물로 효과를 보기위해서는 적당량의 항생제를 먹어어야 하는 것과 같다. 또 질병을 이기기 위해서 핏속에 요구되는 양만큼의 항생제가 들어 있어야 하는 것과 같다.
수련으로서의 향심기도는 우리의 정신 집중이 우리의 일상적인 사고의 흐름에서부터 빠져 나오도록 고안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 사고의 흐름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핵심적이고 깊은 자아의 다른 부분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기도는 우리의 의식( 내적 존재를 인식하도록?)을 우리 존재의 영적 수준에 열도록 하는 것이다. 이 수준을 우리의 기억, 상상, 감정, 내적 체험, 외부 사물의 인식, 등과 같이 것이 떠 있는 큰 강으로 비유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상적인 사고와 감정에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위와 같은 정신적 현상들이 솟아나는 그 원천을 의식하지 못한다. 배나 물건들이 강의 표면에 떠 있듯이 우리의 사고와 감정들도 어디엔가 떠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으 내적 의식의 흐름 위에 떠 있으며 이 내적 의식의 흐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수준은 우리의 일상적 의식에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가이 수준과 직접 접촉하지 않고 있으므로 우리가 이 수존의 의식을 개발하기 위하여는 어떤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심령 위를 떠내려가는 가치들보다도 내적 수준에서 발견하는 가치가 우리에게는 더욱 기쁨을 주는 가치들이다.
우리에게 신체 훈련, 음식, 후식, 수면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지로 내적 침묵의 순간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침묵이 우리에게 가장 깊은 새로움을 주기 때문이다. 향심기도의 방법은 기도 중에 일어나는 어떠한 사고 심지어 아주 신앙심 깊은 사고라 하리지라도 떠 내려 보내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소 : 지나친 소음이나 기대하지 않았던 소음 때문에 방해되지 않을 비교적 조용한 장소를 선택한다.
시간 : 가장 정신이 맑은 때, 하루의 일상 일이 시작되기 전의 아침 시간이 좋은 시간이다.
편하게 느낄 시간, 장소, 의자, 자세들을 선택하였으면 눈을 감고,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열고 자신을 내어 드리는 의향을 표시하는 거룩한 단어를 선택하여 그 단어를 상상의 수존에 도입한다.
향심기도는 스위치를 켜듯 하나님의 현존을 켜는 방법이 아니고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 달렸다. 하나님게 자신을 맡겨 드리는 것이며, 그 결과를 결정하는 이는 하나님이다.
거룩한 단어는 일단 습관화되면, 보통 떠오르는 일상적 사고들의 수를 줄이는 방법이 되며 의식의 흐름을 타고 흐르는 사고들 중에서 관심을 끄는 사고들을 막아주는 방법이 된다. 불요 불급한 사고의 흐름들을 쉽게 무시할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다.
언제나 존재하였고 또 참여하도록 초대되어 왔던 실재의 더 충만한 수준으로 자신을 조율하는 방법이 관상기도이다. 이와 같은 확장된 의식으로 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을 줄이기 위하여 몇 가지 합당한 훈련이 필요하다. 한 가지 길은 의식의 흐름을 타고 일상적 사고가 흐르는 속도를 늦추는 일이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사고들 사이사이에 틈이 생기게 되는데 그렇게 된면 사고의 저변에 있는 실재를 인식하기 시작하게 된다.
향심기도란 주의(attation)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지향(intention)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계시리라고 믿는 자신의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갈 지향을 갖는다. 관념이나 느낌으로가 아니라 순수한 믿음으로 스스로를 하나님께 열어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문을 아주 부드럽게 노크하는 것과 같다. 이 문은 상대 쪽에서 렬리는 것이다. 이것은 무제한 기다림의 게임이다. 이 기도는 기대하는 것이 아니요 떠나 버리는 훈련이다.
우리의 일상적 사고로부터 우리의 정신을 비우는 일은 우리가 단지 시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것은 마치 욕조 안의 마개를 우리가 빼는 것과 같다. 물은 저절로 빠저 나가며 우리가 물을 욕조 밖으로 밀어낼 필요는 없다. 그저 흘러 나가게 내버려 둔다. 당신의 일상의 사고들이 당신으로부터 빠져 나가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기대하지 않으면서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활동이다.
향심기도는 모든 지각을 지나가게 하는 훈련인데 그 지각한 내용을 밀어내거나 언짢게 여기지 않고 그냥 떠나 보냄으로써 하는 것이다. 더 깊은 주의에 이르른 것은 사고를 덜 하는 데서 오는 것이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되기도 한다. 이런 때에 당신은 갈 수 있는 가장 깊은 곳에 이른 것이다.
외부로부터 오는 잡음에 대하여 최선의 길은 그 잡음에 저항하는 마음을 떠나 보내고 그 잡음이 일어나게 내버려 두는 일이다. 하루종일 바쁘게 돌아 다니는 사람도 관상할 수 있다. 같이 여행하는 동료에게 “나는 지금 묵상을 하려고 한다” 라고 말하며 함께 몇 분 동안의 조용한 시간을 갖게 할 수 있다.
이 기도의 관점에서는 어떠한 영상도 사고로 간주한다. 상상이나 기억이나 추리 등이나 어떠한 감각에서 일어나는 지각 행위는 모두 사고이다. 흐르는 강의 표면에 흐르는 것들에 주의를 주지 말고 그 강 자체에 주의를 주라. 당신의 주의는 어떤 특정한 사고를 지향해서는 안 된다. 거룩한 단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거룩한 단어는 단지 당신의 참 자아와 그 자아의 중심에 계시는 하나님께 당신을 열어 드린다는 당신의 지향을 재구성하는 방법에 불과하다.
상징으로서의 거룩한 단어 - 거룩한 단어는 어떠한 것을 선택하였든지 관계없이 거룩하다. 그 이유는 그 단어의 뜻이 거룩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지향이 거룩하기 때문이다. 거룩한 단어는 절대 신비이며 당신 안에 머물고 계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 드린다는 당신의 지향을 나타낸다. 그 단어에 편한 느낌이 들면 그 단어에 머물러라. 만일 당신이 어떤 다른 단어로 옮기고 싶으면 옮겨도 좋다. 거룩한 단어는 당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나 화살표이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 드리고 그분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당신의 지향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거룩한 단어는 당신이 당신의 원천으로 파고들 수 있게 만든다. 우리는 우리의 거짓 자아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또 거짓 자아가 관심을 갖는 것, 그리고 그 거짓 자아를 자극하고 강화 시키는 세속적인 것들과도 동일시한다.
인간의 의지는 무한한 사랑으로 향하고, 인간의 마음은 무한한 진리로 향하도록 만들어진 만큼, 아무 것도 이것을 막지 않는다면 의지와 마음은 사랑과 진리로 향하도록 되어 있다.
거룩한 단어는 여러 가지 사고들을 줄여서 하나님께 열어 드린다는 하나의 생각으로 집약시키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은총의 힘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곳, 즉 영적인 영역으로 우리 자신이 들어갈 수 있도록 허용해 주는 조건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며 그분이 모든 실재의 부분이시라는 믿음을 갖는 데 실패한다. 현재의 순간순간, 우리가 보는 모든 사물들, 우리 존재의 근저가 모두 그분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확인하는 개인적 체험을 갖게 될 때까지는 이것을 잘 믿으려 들지 않는다.
하나님게서 현존하신다는 내적 체험을 갖고 나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 모든 사건들, 그리고 모든 자연들 속에 계신 그분을 감지하는 능력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 때에 우리는 어떠한 외적인 감각으로 그리고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의 일치를 즐기는 체험을 갖게 된다.
관상 기도는 우리 자신이 몸담고 있는 실재를 각성하는 하나의 길이다. 관상 기도 중에 성령께서는 우리가 휴식할 수 있고 영적 다툼을 하지 않을 위치에 우리를 놓아 주신다. 은밀한 기름바름으로 우리가 지각할 수 없는 심적 수준에서, 우리 인간의 연약한 성질 때문에 생긴 상처를 치유해 주신다. 그것은 마치 미취된 사람이 수술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모르고 깨어난 후에야 알게 되는 것과 같다. 관상기도의 목적은 우리의 내적 변형의 과정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향심기도에서 기도의 목적은 우리의 모든 사고를 떠나 보내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아의 존재의 근저와의 접촉을 더욱 깊게 하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갖는 지향이 이 기도의 근본이다.
어떻게 거룩한 단어가 작용하는가? - 거룩한 단어는 당신이 내면의 수준에서 생각하는 단순한 사고이다. 단어의 단계에서 넘어서 순수한 인식으로 들어갔을 때에만 내면화의 과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리아는 그에게 말씀하시는 분에게서 듣는 말씀들을 넘어가서 그분과의 일치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향심 기도를 하려고 앉아서 거룩한 단어를 내면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거룩한 단어를 넘어서 그 단어가 지향하는 분, 즉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어떠한 관념도 넘어서, 절대 신비이신 하나님의 현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분은 우리를 당신께 끌어 당기고 계신다. 하나님의 현존에 동의하는 것 자체가 바로 그분의 현존이다. 이 기도의 목적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중심에서 끊임없이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활동과 접촉을 이루려는 데 있다.
만일 당신이 새 친구를 정규적으로 만나 대화를 나누면 빠르게 서로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도를 하루에 두 번, 아침 일찍 한 번 그리고 저녁 식사 전에 한 번 할 것을 권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의 장기적 목표를 하나님과의 우정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에 둔다면 별 재미없게 느끼는 기도의 시간도 당신을 부담스럽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저 기도 시간 동안 사고의 물결이 끊임없이 몰려오면 어떻게 하나? 상상은 영구히 작동하는 인간의 기능이기 때문에 언제나 상상을 만들어 낸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당신의 있는 그대로를 그리고 하나님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서, 하나님께서 늘 편안하지는 않더라도 가장 좋은 길로 당신을 인도하시리라는 것을 신뢰하여야 한다.
사고들이 지나가 버리면 거룩한 단어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기본 법칙은 강 위에 떠가는 모든 사고들을 떠내려 보내는 것이다. 초기에는 거룩한 단어에 매달리지 않으면서 그 지향을 유지하기 어렵다. 향심 기도에서 당신이 어떤 다른 사고를 하고 있다고 알아차렸을 때에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간다.
거룩한 단어의 의미나 그 단어로부터 오는 반향 같은 것을 알려고 노력해서는 안된다. 거룩한 단어는 하나의 몸짓으로서 당신의 지향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 지향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 것이다. 거룩한 단어는 내적 침묵에 이르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므로 당신이 어떠한 생각도 넘어서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현존 안으로 일단 들어가면, 거룩한 단어로 되돌아갈 필요가 없다.
거룩한 단어는 오직 상징일 뿐이다. 우리의 의지가 향하는 곳을 가리키는 지침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우리의 몸짓이며 표시이다. 향심 기도의 기본적인 초점은 신인적 존재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더 깊게 하려는 것이다. 성령께서 당신의 기도를 더욱더 이끌어 가면서 당신은 아주 순수한 의식으로 끌려가게 되는데 그 순수한 의식은 당신의 참 자아를 바라보는 하나의 직관이다. 이 세상에서는 순수한 믿음으로가 아니고는 하나님을 곧바로 아는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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