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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빛 영성과 테오시스의 길

영성묵상훈련 김종덕 목사............... 조회 수 2785 추천 수 0 2011.07.25 23: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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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a_e6_18_CF_1FiVr_PJRW_337_18.jpg  밝은 빛 영성과 테오시스의 길

1. 서론
동방교회는 위대한 교부들을 모시고 있다. 이들을 동방교부 혹은 희랍교부라고 하는데 성 아타나시우스, 니싸의 감독 성 그레고리, 이집트 수도사 성 마카리우스, 콘스탄티노플 총감독 크리소스토무스 등을 들수 있다. 이 분들은 서방 라틴 교회 교부인 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요한네스 카씨아누스 처럼 가장 밝은 빛 가운데서 생활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장 많이 닮은 성화(聖化)된 성도들이다. 기독교 역사상 장성한 믿음을 가지고 빛과 소금 역할을 잘 감당한 영성지도자인 이 분들은 언제나 용감하게 전도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살면서 하나님과 가장 가깝게 교통함으로써 신령한 은혜의 강물을 교회에 공급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성도들을 천국건설 사업의 기둥 같은 일꾼으로 사용하셨고, 교회시대의 처음 익은 열매 혹은 교회시대의 인 맞은 종들로서 성결은총을 받게 하셨다. 그래서 교회는 이들을 교부(敎父)라고 호칭한다.

동방교회의 거룩한 교부들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참여하는 삶을 목표로 제시한다. 즉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러 밝은 빛 가운데 흠없는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증거한다.

성경 로마서 8장 29-30절에는 하나님의 부르신 목적이 나타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길에 가장 철저히 헌신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의 형상을 닮아 흠 없는 삶을 살아갔던 교부들처럼 온전한 행실 즉 완덕(完德)의 삶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목표를 세우고 정진하여야 한다. 성령께서는 풍성한 은총으로 도우실 것이다.
그런데 동방과 서방교부들의 영성 신학에는 독특한 주제가 등장하는데 그것은‘테오시스’(theosis, apotheosis)라는 것으로 동방신학에 있어서도 가장 특징적인 것이다. 기독교적 완전의 개념에 속하는 이 테오시스는 영성생활의 종국적인 목표로 여겨진다.

2. 영성신학의 주제 - 테오시스(theosis)
동방교부들에 의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주관적 은총에 의하여 구원의 문에 들어서게 되면, 이후에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온전히 닮은 완덕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인 성장, 성숙, 진보의 과정이 필수적임을 강조한다. 모든 세속성과 죄성(罪性)에서 완전히 분리되고 성별케 됨으로 밝은 빛 가운데 흠 없는 삶을 사는 완덕의 경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인데, 이 하나님의 부르신 목적이 완덕 즉 테오시스 즉 신화(神化)이다.

성 이레니우스를 비롯하여 오리케네스 등 동방의 교부들은 물론이요, 아우구스티노와 십자가의 요한에 의하여 확인되는 중요한 영성신학적 주제가 되는 테오시스는 말 그대로 ‘하나님이 되는 것’, 신화(神化 : deificatio, divinization)이다. 이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인간의 아들이 되셨고, 우리는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고양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내려오셨다. 우리가 우리의 본성에 머물면서 그분(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분(그리스도)은 자신의 본성에 머물면서도 우리의 본성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표현한다.

십자가의 요한은“하나님이 추구하시는 것은 마치 불이 모든 것을 불로 바꾸어버리듯이, 우리가 우리의 본성을 간직하면서 신성에 참여를 통하여 하나님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과의 일치를 이룬 영혼에게 자신이 영원의 날로부터 준비한 본질적인 영광을 주실 것인데, 이에 대한 궁극적인 선택은 인간이 하는 것이지만, 모든 인간은 이 일치에 이르도록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초청된(예정된)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테오시스 즉 신화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표가 되는 것으로서 신비신학에서 취급될 수 있는 내용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은총으로 구원받은 영혼과의 신비스런 관계를 유지하시는데 이러한 성령의 교통하심이 결국 인간을 신화시킨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에집트의 마카리우스를 중심한 동방교회의 입장과 밝은 빛 핵심진리에서의 증거를 간략히 서술해보겠다.

1) 동방교회는 지리적으로 이탈리아의 동쪽에 있는 교회들을 일컫는다. 문화권의 유형에 따라 ‘희랍교회’로도 불린다. 대체로 동방교회는 330년대 로마제국의 수도가 로마로부터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한 이후,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중심 교회를 말한다. 이 동방교회를 ‘동방정통교회(the Eastern Orthodox Chruch) 혹은 약칭의 ‘정통교회’라고 부른다. 정통교회(Orthodoxy)라는 단어는 ‘올바른 믿음’과 ‘올바른 영광’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즉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앙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교회만이 정통(正統)은 아니다. 우리 개신교회들도 정통 삼위일체론과 정통 기독론을 성경 다음으로 중요한 교리로 보존하고 있으며, 고대 일곱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교리결정을 대부분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동방정교회의 역사와 신학, pp.3-16. 참조)

2) 요한계시록 14: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3) 교부는 교회 학문에 대한 공적과 그 생애의 거룩성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인정을 한 옛 시대의 교회 저술가들이며, 교회를 옳게 믿는 자들의 아버지들이다. 교부의 필수조건은 ① 정통교리 ② 생애의 거룩성 ③ 충분한 고전성 ④ 교회의 승인이다.(교부학 개론, p.21)

4) 요한복음 11:52, 17:20-23과 벧후 1:4 그리고 요한일서 3:2에 성경적 바탕을 두고있는 테오시스(theosis는 보통 ‘신화(神化)’로 번역된다. 밝은 빛 영성에서는 신인일화(神人一化)의 길에서도 최고의 경지에 오른 영적 상태로 이해한다. 신인일화의 최고봉은 완덕의 경지로서 사도 바울의 증거를 보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라고 표현했다. 또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나지안스의 그레고리의 저서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가. 마카리우스(St. Macarius, 300-390)의 영성
이집트의 수도사였던 마카리우스는 30세쯤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 은혜를 체험하였다. 그는 하나님 사랑과 구원의 은총을 잃지 않으려 조심하던 중 혹시나 다가올지도 모르는 영적인 위험을 피하고자 이집트 사막으로 가서 기도하며, 노동과 고행의 삶을 살았다. 그 당시 이집트는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의 광야생활과 같은 고독한 수도적 삶을 사는 이들이 많아, 셀(cells), 스케테(scete), 테베(thebes) 등으로 유명했다. 그는 스스로의 엄격한 절제생활을 위하여 비좁은 방 한 개를 만들어 지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알리지를 않았다. 그렇지만 더러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영접하기 위해 넓고 밝은 초가집을 준비해두기도 하였다. 하루 한 번 정도 금식을 하며, 7년간 더운 음식물을 입에 대지 않을 정도로 식욕을 따르는 육적 삶을 극복해보기도 하였다. 잠은 맨바닥 그대로였으며, 점점 고행과 극기를 실천할수록 우울하고 신경질적인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었으나 그는 오히려 밝고 명랑하며 쾌활하고 친절하였다고 한다.

마카리우스의 하나님을 관상하는 수도적 삶이 알려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케 되었고, 병자들과 악한 습성을 가진 사람들은 그를 만나면서 치유케 되는 기적을 체험하기도 하였다. 완덕을 목표로 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따랐으며, 매주일 드리는 예배의 성찬식 집례를 위하여 성직자가 되었고, 수도단체의 지도자(Abbas)가 되었다. 마카리우스는 다른 수도자들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면서 세상으로서의 귀향(還俗)을 권유받았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키며 육체의 순결을 봉헌하는 삶이 더 고귀하다고 믿어, 60년 정도의 광야 수도생활을 초가집에서 지켜나갔다. 이러한 마카리우스의 영성의 특징은 ‘마음의 영성’으로 어떤 지성적인 관상이나 사변적인 체계와 대조시켜 영성의 장소를 인격의 중심인 영(靈)으로 본다는 것이다. 마카리우스는 하나님 체험의 모멘트를 성령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의 신학을 기독교 영성사에 있어서 매우 뛰어난 성령신학이라고 부른다.

성령의 현존과 은혜는 그의 영이신 하나님에게 우리가 참여하여 교통함으로써 체험될 수 있다. 신적인 도움으로 하나님에 의해 다시 태어날 때 영혼은 순결하고 완전하게 되어 영화롭게 된다. 심지어 “이 현세의 삶에 있어서 성령과 혼합된다”고 주장한다. 즉 성령께서는 죄된 정욕들로부터 떠나 정온과 평화의 apatheia(無慾)에서 감각적으로 주님을 체험케 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영혼은 그 현재의 본성에서 또 다른 본성 즉 신적 본성에로 변화되며, 성령의 권능을 통해 자신이 새롭게 역사되는 신적 삶의 참여 -신화(神化, theosis)의 가능성을 제시받는다. 이것은 처음 아담의 범죄로 인해 파손되고 마모되었던 하나님 형상의 회복인 것이며 마지막 아담2)이신 그리스도의 현재적인 역사, 즉 성령의 현재적 역사하심에 의해 부여되는 인간의 운명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완성시키는 역사는 ‘테오시스’라는 표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의 삶의 여정은 성령의 교통을 통하여 죄성과 악한 정욕들에서 전적으로 해방되어, 순전하고 흠 없는 주님의 지상생활처럼 내적 사랑의 완전 속에 살아가는 완덕의 경지 즉 신인일화의 최고봉까지 도달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본성과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거룩함”을 이루어 성령의 열매를 온전히 맺으며 그리스도의 충만함에 도달하는 것은 성령의 주관적 은총인 것이다. 그렇지만 마카리우스는 겸손함 속에서의 금욕적 실천과 기도의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는 것임을 강조한다. 하나님에로의 도정(道程)은 고난과 인내 그리고 고독, 금식, 철야, 회개의 온전한 절제생활을 필수적인 것으로 인정하지만 그 중심은 ‘기도’에 있다고 말한다.

나. 기타 동방교부들의 영성과 신학
기독교인들의 삶의 목적은 신화(deification)라는 용어로 적절하게 잘 정의 될 수 있다. 이것은 몇몇 선택된 자들을 위해서만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동일하게 의도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동방정교회 교부들은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정상적인 목표가 신화라고 믿고 있다.‘신이 됨‘(theosis)이라는 신화의 개념은 비록 우리가 종종 약하고 범죄하고 실패할지라도 성실하게 이 목표를 향해야 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확실히 우리는 마지막 날에 충분히 신성화(deified)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인 각자는 여기 지금 현재의 삶 속에서(here and now) 신성화(divinization)의 과정이 시작되어야 함을 말한다. 비록 현재의 삶 속에서는 매우 소수의 사람만이 참으로 하나님과의 충만한 신비적 연합을 달성한다고 분명히 선언하지만 테오시스의 길은 개방되어 있는 것이다.

가이사랴의 대감독 바실(St. Basilius, 330-379)은 소아시아 카파토키아 지방의 수도인 가아사랴에서 출생했다. 그가 생존했을 당시의 4C는 기독교 박해가 끝났을 때쯤이었고, 학식과 덕망이 뛰어난 위대한 인물이 많이 등장하면서 교회내부의 적 즉 이단 교리를 배격하며 교회를 지키는 일에 열중했는데, 그런 인물들 중 대표자가 바실이다. 바실의 가족들 중 많은 이가 성화된 성도들의 발자취를 남겼다. 할머니를 비롯 부모님과 누나, 두 동생이 모두 교회 안에서 성덕이 뛰어난 인물 즉 성인으로 기록되어있다. 바실은 아테네에 가서 유학을 하고 학위 취득 후 귀향하여 교수직을 감당했는데, 그의 누나 마크리나는 동생이 현세의 욕망과 이생의 자랑에 빠져 교만해질까봐 겸손과 자기 비움의 길을 권유했다. 이에 바실은 이집트 테베와 여러 광야수도단체를 방문하였고,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동방교회 안에 바실 수도원을 세웠다. 이 수도원에서 지켜진 수도규칙을 바실수도규칙이라 불렸다.

바실은 워낙 덕망과 학식이 높아 아리우스 이단파에 속했던 황제 발렌스가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자 노력을 많이 했다. 그럼에도 거부하자 화가 나서 바실의 재산 몰수와 투옥 매질과 귀양 혹은 사형언도의 위협을 가했다. 그러자 바실은 태연히 답변하기를 “추호도 무서울 게 없습니다. 나는 수도자이기에 몰수당할 재산이 없고, 엄격하고 철저한 고행 극기 회개생활로 매질을 견딜 수 있을 것이며, 참된 고향은 천국이니 귀향살이도 가능하고, 사형당함도 오히려 유익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즉시 천국에 가게될 테니까요”. 이렇게 당당하고 순교적 신앙의 지조가 분명한 바실의 인격을 대한 황제는 오히려 감동을 받아 그에게 별장부지를 하사하였고, 바실은 그곳에 병원, 고아원, 양로원을 건축해 운영하게되자 사람들은 그곳을 ‘바실리아스’라고 호칭케 되었다.

한편 발렌스 형제는 아리우스파 이단자들의 계속된 모함으로 바실을 귀양보낼 결심을 하게 되어 칙서에 서명을 하려했지만, 펜이 3차례나 부러지는 바람에 포기하게 된다. 또한 그날 밤에는 건강하던 황태자가 갑자기 열병으로 위독해지게 되자 큰 근심에 쌓였을 때, 황후는 바실과 같은 무죄하고 거룩한 교회일꾼을 귀양살이시키려는 악행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내려진 것이라고 황제에게 간언을 했다. 이에 황제는 귀양길에 오른 바실을 다시 돌이키게 하였고, 바실이 황태자를 위해 기도를 드리자 태자는 즉시 완쾌되었다.

바실은‘위대한’‘큰’이라는 뜻을 가진‘the Great’를 붙여‘大바실’로 호칭되는 위대한 동방교부다. 인간은 세상의 썩어질 정욕을 피하여 신성에 참여함으로써 신인일화의 길 즉 신화의 삶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자 이집트의 수도자들을 찾아가며 철저한 금욕생활을 했다.

또 알렉산드리아의 대감독 아타나시우스(St. Athanasius, 295-373)는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신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고 말한다. 아리우스 이단자들의 농간에 의해 5번이나 추방당했던 아타나시우스는 성인전기(聖人傳記)의 원형인 안토니오 성자의 전기를 기록하면서, 모든 기독교인이 목적해야 할 최종적 목표는 신이 됨, 테오시스(theosis), 신화, 혹은 신성화를 달성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통한 구원과 구속은 우리의 신화(神化)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약 인간이 신이 됨, 즉 신성화가 가능하다면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과 완전한 하나님이 되셔야만 한다. 하나님만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리스도가 구원한다면 우리 인간들은 그 분의 행하신 것에 참예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인간이며 동시에 신이신, 성육신(成肉身)하신 하나님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하나의 다리가 놓여졌다. 이 다리를 통해 ‘테오시스’는 가능한 것이다.

다. 밝은빛 성경의 핵심진리와 테오시스
성경 중에서 가장 핵심적이며 중요한 진리 중의 하나가 영적성장에 대한 이론이다. 왜냐하면 영적 성장론은 무엇보다도 체험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질서 있고 체계적으로 정돈된 진리로서 테오시스 즉 완덕을 목표로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6:1-5에서는 그리스도 도의 초보적 단계에 머무르지 말고 완전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힘쓰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분명히 완전한 신앙의 경지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또한 로마서 8:29-30 말씀을 보면 성도들의 영적 성장에 대한 원리와 그 최고의 경지가 목표로 제시됨을 보게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형상을 닮게 하고자 하는 계획을 보이신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들의 형상을 닮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완덕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성도들은 먼저 부르심을 받는 경험을 한다. 그 다음에는 의로 여김 받는 칭의 체험을 하게된다. 그 다음에는 의롭다하심을 받는 득의(得義) 경험에 도달하고, 마지막으로 ‘영화’롭게 되는 경지까지 성장하게 되는데 이 마지막 단계에 이른 영화가 곧 완덕을 뜻하는 것으로 테오시스(theosis)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완덕의 경지는 어떤 것일까? 이것은 영혼의 할례,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하는 성결 은총을 받은 후에도 점진적으로 성장하여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을 만큼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영혼의 할례를 받은 성도들 중에서도 소수의 성도들만이 완덕의 경지까지 성장하게 된다.

구원받은 성도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처럼 천국을 상징하는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훈련(연단)을 받아야만 한다. 즉 1차 연단 과정, 2차 연단 과정, 3차 연단 과정을 통과한 후 득의체험 즉 성결 은총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생명이 영혼 가운데 내주합일 되고, 생명수가 폭포수처럼 늘 폭주(暴注)하는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된다. 왜냐하면 광야 40년 연단과정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매일 살게됨으로써 하나님의 생명수가 유입(流入)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정도까지 성장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확실히 맛보면서 용사와 같이 달려가는 것이다. 생명수의 유입이 풍성하기에 고통받을 때나 괴로울 때나 큰 위로와 평강을 맛보면서 살게된다. 그래서 영성가들은 이러한 영정성장의 단계를 신인합일(神人合一)의 길 혹은 신인일화(神人一化)의 길에 도달했다고 가르친다. 그렇지만 아직은 최고봉에 오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신 목적 즉 아들의 형상을 온전히 닮은 상태인 완덕의 최고봉은 아직도 멀었다(not-yet). 그러나 신인일화의 길에 들어서면 완덕은 훨씬 가까운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동방 교부들에게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눅17:21)고 하신 것은 심중(心中)천국에 대한 확실성이 은유적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보게된다. 이집트의 안토니(St. Antony)는 “너희 자신을 알라. 자신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안다.”라고 했고, 시리아의 이삭(St. Issac)은 “천국은 너희 안에 있다. 너희 자신 안에서 너희는 천사들과 천사들의 주(主)를 볼 것이다.” 라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파코미우스(St. Pachomius)는 “그의 마음의 순수함 속에서 그는 거울 속에서처럼 불가시적 하나님을 본다.”고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동방 교부들의 입장은 “하나님의 최고의 형상은 인간의 인격이다.”라는 표현에 잘 집약된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온전한 형상을 닮아 밝은 빛 가운데 흠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인격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완덕 즉 테오시스(theosis, 神化)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테오시스에 이르는 길을 알아보자.

3. 밝은 빛 영성과 테오시스(theosis)의 길
앞에서 우리는 완덕과 테오시스의 밀접성을 상고했다. 동방 영성에서 표현되는 테오시스(theosis) 즉 신화(神化)가 신인일화(神人一化)의 최고봉에 다다른 완덕에 해당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본받아 주님의 삶을 지금 오늘, 여기에서(now and here) 재현하는 영성생활의 목표는 완덕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이 말씀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기독교인은 다 완덕에로 부름 받았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다면 완덕(perfectio)의 단어를 잠깐 살펴보겠다. 이 단어는 ‘다하다, 모조리 해치우다, 끝까지 하다, 오롯하게 하다.’라는 동사(perficere)에서 유래하여 ‘다된 것, 모자람이 없는 것, 있을 것이 모두 있는 것’이라는 완전의 뜻을 갖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표현하기를 “완전이란 없는 것이 없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인간의 행복은 무엇일까? 모든 인간은 다 완전에의 원의(願意, aspiration)가 있다. 모자람이 없고, 있을 것이 모두 있는 완전성이라는 목표점에 도달하려는 원의! 이것이 채워질 때 인간은 행복한 것이다. 마치 화살이 과녁의 표지판 가운데를 뚫었을 때와 같다. 이와 같이 우리의 원의는 완덕이라는 종착지에서 멎어야만 참된 행복과 만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원의를 신비적 열망(mystical aspiration)이라고 한다.

어거스틴(St. Augustinus, 354-430)은 참회록에서 “하나님의 한줌 피조물인 인간이 감히 주님을 기리려 드옵나이다. 주님을 기림으로써 즐기라 일깨워주심이오니, 님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에 님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에 안식이 없나이다.”(참회록 1장)라고 고백했다. 하나님과의 합일, 사랑의 합일에서 오는 행복함의 고백이며 절대적 완전성을 가지신 하나님께 이르게 되었을 때의 기쁨이리라.

엄밀한 의미에서 절대적 완전성을 가지신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다(Solus Deus). 사랑의 하나님만이 절대 완전이시다. 그분이 전부이시고, 진흙으로부터 온 우리 인간은 무(無, nothingness)인 것이다. 그러기에 성경은 인간이 무로부터 창조되었다(creatio ex nihilo)고 선언한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있다가 없어지는’ 존재요, ‘없다가 있는’ 존재이다. 진정한 ‘있음(有)’은 절대적 완전이신 하나님뿐이시며 단지 인간의 ‘있음-존재’는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것임을 인식해야만 한다.

사도 베드로는 사람들을 나그네로 묘사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나그네들이다. 그런데 나그네는 그들이 가는 목적지가 있고, 그 목표가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표적이시고, 우리는 그 표적을 향하여 날아가는 화살인 것이다. 이른바 화살 나그네이다. 사랑의 하나님 품이라는 과녁에 정확히 꽂혀야 하는 화살, 즉 사랑이신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고, 일치가 되고, 연합이 되어야만 하는 인생이다. 그러므로 모든 기독교인은 사랑의 합일과 완덕에로 이끄시는 주님을 소망하고 사랑하며 믿고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하여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어야 할 것.”(고전 13:13)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사랑의 성장을 제일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 사랑의 성장이 곧 완덕에로 이끄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완덕은 사랑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살아있는 것이고, 영원한 주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완전에로 초청 받은 그리스도인임을 인식하는 영적 각성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면 이후에는 완덕에 도달하는 방법을 간략히 기술해 보겠다. 그 내용은 3가지 관상적 기도와 자기부정과 수도적 삶이다.

가. 관상(觀想)적 기도(contemplation’s prayer)
우선 기도의 정의를 살펴보겠다. 동방교부들 중의 교부라는 호칭을 듣는 닛사의 그레고리(St. Gregorius Nyssenus, 331-395)는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정의한다. ‘모세의 생애’라는 신비서적을 저술한 그레고리는 영혼의 거울(mirror of soul)이라고 말해지는 신비조명을 통하여, 인간은 자기의 죄악된 욕망(정욕)에 의해 잊혀진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발견케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신적 미(美)를 발견하면서부터 하나님과의 완전일치를 향하는 영혼의 여정(Journey of the soul into God)이 시작됨을 말한다. 그러므로 기도는 필수적인 것이다. 이 기도의 삶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즉 테오시스에 도달케 하기 때문이다.

황금의 입을 가진 사람이라 불리우는 요한 크리소스톰(St. Johannes Chrisostomus,347-407)은 ‘하나님과 말하기’라고 기도의 정의를 내린다. 하나님의 자비의 은총이 선재(先在)하기 때문에 원죄로 인해 상처를 입은 영혼이 주님 형상으로 다시 회복될 수 있음을 강조하는 크리소스톰 역시 그레고리처럼 영성적으로 신화(神化)의 성취가 가능함을 말한다. 인간은 이것에의 향수(鄕愁)가 기도를 통해 살아나는 것이라 표현한다.

아빌라의 테레사(St. Teresa of Avila, 1515-1582)는 “분명 우리를 사랑하시는 줄로 우리가 아는 그분과 단 둘이서 자주 있으며 우정으로 정담을 나누는 것”으로 기도의 정의를 내린다.‘정담(情談)’이라는 것은 때때로 청원을 할 수 있으나 하나님께 정신을 들어올려서 찬양하고 경배와 사랑을 올리는 것을 의미한다. ‘단둘이서’는 마음을 고요히 함을 뜻하며, 침묵 속에서 사랑의 주님을 응시하는 관상적 의미가 담겨있다. ‘분명 우리를 사랑하시는’은 십자가를 통해 아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시고 완덕으로 초청하시는 그 사랑(agape)을 앎으로 우리도 주님을 믿고 소망하며 사랑해야 함을 담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대로 교부들과 성인들은 하나같이 ‘사랑하시는 주님과의 대화’라고 기도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이와 같은 표현은 성인들이 그들의 기도체험에서 얻어진 기도의 개념을 열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으로만이 아니라 마음 안에 성부 하나님을‘아버지’라고 믿고 느끼면서, 그리고 사랑하는 대상이심을 고백하면서 바치는 기도가 있어야 한다.

사실 관상적 기도는 가장 심오한 영적 단계의 기도이다. 고대 교부들이나 기독교 영성가들이 최고의 이상과 목표로 삼았던 기도형태이다. 이는 우리 영혼이 이 세상 모든 정욕과 죄성의 올무에서 완전히 초탈되어 맑게 정화되고 심령이 신적 광채 즉 생명의 빛으로 밝게 조명되었을 때, 하나님의 실재를 직관하는 경지의 기도인 것이다.

광야에서의 3차 연단과정을 통하여 양심의 빛이 밝아지고, 선한 의지가 튼튼해지며, 밝은 예수님의 빛을 따라 철저하게 생활하기를 좋아하다가 영적 할례를 받고 생명이 내주합일되면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내리는 생명강물이 성도들의 이마에 폭포수처럼 강하게 흘러들어 온다. 그리고 온 몸의 구석구석까지 신비로운 생명의 감각을 느끼면서 살게되는데 이와 같은 천국의 신비로운 평강을 맛보면서 올리는 기도가 실질적인 관상기도인 것이다. 그러나 아직 광야의 길에서 정화의 과정을 통과하는 성도들일지라도 사랑으로 가득찬 시선으로 오직 주님만 응시하며 사랑의 고백을 드리는 습득적(acquired) 관상기도는 높은 완덕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나. 자기부정(自己否定) - 아포파틱(Apophatic)의 길
1) 부정의 신학
동방교회 교부들에게서 특히 강조되는 영성이‘아포파틱’(apophatic) 즉 ‘부정의 방법’(via negativa)이다. 이것은 긍정의 방법이라는‘카타파틱’(kata phatic)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써,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초월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진술하는 하나님 - 예를 들어, 하나님은 선하시고, 지혜로우시고, 사랑이시고, 아름다움이시고 등등 - 은 하나님은 내적 본성을 적절히 묘사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우리들의 긍정적 진술은‘본성’이 아니라 ‘본성 주위에 있는 것들’ 뿐이기에 부정되어야 한다는 신학이다.

사실 ‘하나님이 무엇이다’라고 진술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이해와 지식의 한계 안에서 하는 일이니까 절대적으로 초월하신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이 된다. 그분은 피조물 위에(above), 그리고 피조물 밖에(outside)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긍정적 표현들과 용어들은 부정적인 용어와 표현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말하기를 거부하고, 단순히 하나님은 무엇이 아니다라고 진술하는 것이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닛사의 그레고리는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모든 지식을 넘어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은 불가시적이고 불가해성의 어둠에 의해 전적으로 분리되어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과 비전은 이 방식 속에서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다마스커스의 요한(St. Johannes Damascus, 675-754)은 “하나님은 무한하며, 불가해적이며, 그에 관하여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무한성과 불가해성이다. … 하나님은 실존하는 것들의 계층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것들 너머에, 심지어 존재 그 자체를 넘어 존재한다”라고 기록하였다.

하나님 인식에 관한 이해불가능성의 강조는 앞으로 심도 있는 연구가 계속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포파틱 신학은 부정에서 부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연합과 일치로 이끄는 신비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분으로가 아니라 얼굴을 대면하여 알 수 있는 분으로 인도하는 부정신비주의 신학인 것이다.

2) 부정의 길과 테오시스의 길
참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부정신학에서 우리는 부정의 길이 연합과 일치로 이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우리의 욕망과 애정 그리고 죄성의 굴레에 매여있는 기독교인이 자기부정의 길에 철저하지 않는다면 결단코 성화와 완덕은 이룰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서술코자 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자기부정의 길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① 자기부정에 대한 성경적 근거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 16:24; 막 8:34-36; 눅 9:23-25)고 말씀하신다. 특이한 것은 누가복음에 ‘날마다’(매일)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말씀에 이어서 “제 목숨을 구원코자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해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라고 하셨다. 참으로 난해하기 짝이 없는 ‘부정의 길’을 제시하는 말씀이다.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제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사형장으로 간다는 뜻인데, 그러므로 이 말씀은 심각하고 극단적인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담긴 것은 ‘십자가의 신비’와 ‘정화(淨化)’를 통한 완덕의 단계를 목표로 하고 계심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즉 죄악적인 자기, 정욕적인 자기, 세상적인 자기, 지옥적인 자기, 마귀적인 자기를 부인하며 영적 성장의 길을 걷는 것이 ‘수동적 정화’이다. 성령의 강권하시는 은총의 도움이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스스로 주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여 교만한 자기, 음란한 자기, 질투하는 자기, 포학한 자기, 태만한 자기, 아집적인 자기를 부인하고 즉‘나를 끊고’‘욕망을 끊고’‘하나님 아닌 것에의 욕망을 끊고’ 영적 성장의 길을 걷는 것은 ‘능동적 정화’라고 한다. 이 두 가지의 정화에서도 특히 성령의 도움을 받는 수동적 정화가 절대 중요함을 인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의인도 자신의 결점을 모르고 7번 죄에 떨어진다”는 말씀처럼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악됨과 정욕적 삶과 결점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요한은 “나의 숨어있는 것까지 다 씻어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했다.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는 모든 죄를 떼어내고, 정욕과 결점을 다 씻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우리 영혼의 죄악적인 행실을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능력으로 씻기워 정화(淨化)되며, 우리 인격이 그리스도 중심적 인격으로 변화되어 완덕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데오시스의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추구이다.

② 영성가들의 자기 부정에 대한 교훈
테오시스를 지향하는 기독교인에게는 죄가 크던 작던, 무겁던 가볍던 그러한 것에 대하여 구별할 필요도 없이 모든 죄가 테오시스의 장애물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늘 소죄(小罪)를 범하며 지내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 이익에 붙잡혀 살아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욕과 결점의 내용을 잘 파악하여 이것들을 제거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테오시스의 경지는 그림의 떡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합일도 마찬가지이다.
십자가의 요한은 이 부분에 대하여 재미있는 예화를 들어 설명한다. 교회의 박사, 전체의 박사(Doctor Toti)라고 불리는 십자가의 요한은 갈멜산에 오르기 위한 영성 생활에서 '빨판상어'라는 정욕을 떼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큰 배(기선)가 항해할 때 이 빨판상어가 달라붙어 있으면 배는 항해를 못하게 된다. 고래보다 작은 빨판상어는 우리의 불완전, 소죄, 정욕적 쾌락 등등을 의미하는 것이니, 이것이 있는 이상 배는 목적지인 포구(항구)에 도달 못한다. 또 하나의 비유는, 새(鳥)를 날지 못하게 하는 가는 실이다. 굵은 실이든 가는 실이든 날아가려는 새의 발목을 묶고 있으면 날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실은 끊어야만 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테오시스(완덕)의 하늘을 향해서 또는 테오시스(완덕)의 포구를 향해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다 그 원인이 있다는 사실이다. 정진과 진보와 성숙을 방해하는 '작은 것들'을 소홀히 취급하다 보면 점점 큰 것에 떨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큰 독(항아리)이 있어도 독에 작은 틈이 있으면 다 새어버리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함이 절대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시험(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하도록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항상 '깨어서'(vigilance) '자신에 주의'(attention to oneself)함으로 기도에 전심해야 한다. 무엇을 기도하나? "나는 가련한 자 - 죄인이요,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임을 믿고, 죄를 지은 이상으로, 정욕을 따라 사는 그 이상으로 주님의 용서와 긍휼을 희망하며 마음을 토로(吐露)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깨어있음과 자기에 주의함인 것이다.

③ 이용도 목사의 영성생활과 부정의 길
이용도 목사님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삶에 철저하였고, 반대로 육성(肉性)을 따라 사는 삶을 철저히 배격하였다. 냉혹할 정도의 자기부정의 자세가 지극했다. 이 목사님은 주님 안에서 사는 삶이 최고의 축복인데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육신과 물질의 세계라고 했다.

"주여, 침방에서 사귀는 사랑의 사귐의 때를 허락하소서. 지금은 나의 신방(新房)에 잡인(雜人)의 출입이 잦아서 주님과 고요히 사귀었을 사랑과 진리를 얻지 못하나니 나의 영은 무한히 피로하나이다."

주님과의 동거를 향한 이 목사님의 갈망은 사무쳤다. 육을 생각지 말고 영만을 생각하며 "주여, 내 마음속에 다시 살으소서."라고 외치며, 모든 것과의 단절을 시도했다.

"주여, 마음을 결심의 띠로 꽁꽁 묶어 주님의 제단에 바치고자 정성스레 올리노라면, 어느덧 묶였던 띠가 끊어지고, 모았던 마음이 산산이 풀어져, 이 바람 저 바람에 날리고 마니, 글쎄 이를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얼마 후에는 또 흩어진 마음을 집어 모으노라고 눈물을 짜면서 애를 박박 쓰곤하니 주님의 제단에 한번도 알뜰한 제물을 바쳐보지도 못하고 밤낮 이 노름만 하다가 서산에 해가 떨어져 버리고 말면 어찌합니까, 주님이시여!"

이렇게 갈망하며 우는 이 목사님은 차라리 십자가 밖에 모르고, 아무 것도 보지 않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불구자를 만들어 달라고 기도한다. 이것은 세상을 향하여, 자기를 향하여 죽는 것을 의미한다.

1932년 7월 18일, 이 목사님은 벗 변종호씨에게 아주 절실한 말을 하고 있다. "육의 자기를 온전히 버리고, 영이 주에게 끌리어 사소서. 그 영에게 삼키운 바 되어 물욕의 나, 정욕의 나, 죄악의 나는 아주 무(無)가 되소서. 그리하여 몸은 땅에 있으되 영은 높이 하늘에 살으소서."

세상과 멀어지고 세상에서 버림을 받을수록, 정욕적 자기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주님과 가까워진다면 이것은 부정신비주의가 아닐 수 없다. 이 목사님은 기독교인들이 성령 아니면 육(육성)을 좇게 되어 있다고 본다. "우리는 육에서는 안(安)할 자 아니요"라든가, "마귀는 육욕(肉慾)이 인격화한 것"이라든가 하는 말들이 그렇다.

이용도 목사님은 영을 따라 육을 죽이는 피눈물의 과정을 끝내고 주님 안에 사는 신비적 합일에 도달한다. "나는 벌써 지상의 사람이 아니다. 신비의 나라에 배회하고 있다." "나는 눈, 코, 입, 귀, 손, 발, 그것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곧 주의 눈이 나의 눈이요, 주의 귀가 나의 귀였나이다. 나의 눈은 내 자체 안에 있지 않고 주에게 있나이다."

이렇게 고백하며 증거 할 수 있었던 신인일화의 체험을 그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주님께서 나에게 신으로 임재하시었던 일을 내가 잊을 수 없나이다."

4. 결 론
크리스찬 완덕 즉 테오시스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험한 듯 하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길 중에도 지름길이 있듯이 우리는 성령의 은총을 힘입어 이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을 희망해야 한다. 관상적 기도와 자기부정의 철저함 그리고 수도적 삶(monastic life)을 따라 모든 것에 절제의 열매를 풍성히 맺으며 철저한 참회생활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주님의 거룩한 형상을 온전히 닮게 될 것이다. 동방교부들의 영성과 하나님의 빛을 밝게 증거하는 성경의 핵심진리가 우리의 영적 생활에 등불로 비춰주고 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밝은 빛을 추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더 큰 은총으로 축복하시길 빈다.

김종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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