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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거울은 너무 작다”(Our Mirrors Are Too Small)
마가복음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308 추천 수 0 2011.07.31 23:20:23성경본문 : | 막8:27-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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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09.9.13 (김 영봉 목사)
“우리의 거울은 너무 작다”(Our Mirrors Are Too Small)
--마가복음 8:27-30
1.
오늘 이렇게 second campus ministry를 시작한 지 2주년을 맞아 센터빌 캠퍼스로의 이전을 감사하며 또한 축하하게 된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2년 동안 이 사역을 위해 헌신하며 수고하신 모든 교우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때로 여러분들의 희생과 헌신이 눈물 겨웠습니다. 이 campus ministry를 통해 혹시라도 얻은 열매가 있다면,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둘째는 여러 교우님들의 헌신 때문입니다. 또한 어렵고 힘든 이 사역을 책임지고 고군 분투해 온 강현식 목사님에게 치하의 말씀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우리를 받아 준 센터빌 연합감리교회 형제 자매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을 아까지 않으시고 오늘 예배에 와서 환영의 말씀을 전해 주신 앨런 목사님(Rev. Alan Felumlee)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아름다운 파트너로 함께 동역해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지교회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센터빌로의 이전이 이루어질 때까지 여러 모로 살펴 주시고 도움을 주신 조영진 감리사님께 또한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 이곳에 있지는 않지만, 지난 2년 동안 우리를 도와 준 매나싸스 St. Thomas 교회 형제 자매들 그리고 토미 헌돈(Rev. Tommy Herndon) 목사님에게 큰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오늘 맥클린 캠퍼스에서 많은 교우들이 축하해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센터빌 캠퍼스 이전 소식을 듣고 오늘 처음 방문해 주신 분들도 적지 않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새로운 장소로 이전해 왔기 때문에 이곳에 적응을 마치고 저희의 진면목을 보여 드리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입니다. 기도하시는 가운데 이 센터빌 캠퍼스가 여러분의 영적인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영적 갈망이 채워질 수 있도록 저와 목회실 그리고 모든 교우들이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2.
누가 여러분에게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저는 김영봉입니다”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 이름이지 저 자신이 아닙니다. “저는 와싱톤한인교회 목삽니다”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가 하는 일이지 제 자신은 아닙니다. “저는 한국계 이민자입니다”라고 소개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그것도 저의 배경이지 저 자신은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이 저에 대해 어떤 점을 말해 주기는 하지만, 저의 본질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라 소개하면 좋겠습니까?
이렇게 따지고 보면, ‘과연 나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봉착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누구인지를 소개하는 것은 고사하고, 나 자신이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그 질문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생각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실은, 중요합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없이 산다면, 그 사람의 삶은 분명히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고, 방향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살아 있으니 살아가고, 남들이 하니 나도 할 뿐입니다. 다만, 우리 내면에 있는 생명에 대한 동물적 욕구에 의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 삶은 죽은 것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아무런 답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오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스스로 답을 냈는데, 그 답이 자신의 실제 정체와 다른 겁니다. 안데르센의 동화 <미운 오리새끼>(Ugly Duckling)를 잘 아실 것입니다. 오리 둥지에서 다른 오리새끼들과 함께 태어난 백조 새끼는 자신을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백조 새끼는 다른 오리들과 같지 못한 것을 비관하며 살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못 알고 살아갑니다. 그로 인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한 번의 인생을 허비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됩니다. ‘나’는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자 하나님께서 ‘나’를 이미 디자인 해 놓으셨습니다. 우리 각자는 그 ‘나’를 찾고 그 ‘나’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리는 오리로 살고, 백조는 백조로 살고, 거위는 거위로 살듯, 나는 나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고 산다면, 우리는 결코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산다면 우리의 모든 노력은 결국 의미 없는 몸부림이 될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때에만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그 어느 것도 우리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려 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존재 전체를 비춰 줄 수 있는 거울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다른 거울들은 너무나 작아서 우리의 일부밖에 보여주지 못합니다.
제 어릴 적, 인천에서 경찰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고모부가 계셨습니다. 그 아들, 즉 제 고종 사촌 동생이 방학이면 제가 살던 시골 집으로 놀러오곤 했습니다. 이 동생은 작은 키에 아주 개구장이어서 자주 동네 아이들과 다투었습니다. 싸우다가 힘에서 밀리면 그 동생이 자주 하던 행동이 있었습니다. 양 허리춤에 손을 얹고 배를 힘껏 내밀고 큰 소리로 외치는 겁니다. “씨, 우리 아버지 순경이야! 순경이란 말이야!” 그 동생에게는 ‘순경의 아들’이라는 것이 큰 자부심의 근거였고, 모두 ‘농부의 자식들’이었던 동네 아이들은 그 말에 주눅이 들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촌 동생은 나이가 들어 가면서, 순경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더 이상 별 의미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순경의 아들이라는 사실만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살기에 그가 너무 커졌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자신에 대해 말해 줄 더 큰 것이 필요했습니다.
누구나 그런 것 같습니다. 자라가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판단하게 해 주는 거울이 계속 바뀌는 것 같습니다. 어릴 적에는 부모가 잘 났다는 것이나 혹은 부자라는 것을 거울로 하여 자신이 누구인지 결정합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나면 그것 가지고는 자긍심(self-esteem)을 세울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을 비추기에 거울이 너무 작아지는 겁니다. 그러면 자신보다 더 큰 무엇을 찾아 자기가 누구인지를 다시 정리합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거나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 혹은 멋진 배우자와 결혼하는 것이 얼마간 큰 거울의 역할을 해 줍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거울이 너무 작아져 자신을 다 비출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또 다른 거울을 찾습니다. 출세를 하는 것, 유명해지는 것, 혹은 거대한 부를 이루는 것을 통해 자기 자신을 다시 규정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신을 다 비추기에는 형편없이 작은 거울임을 알게 됩니다.
결국, 우리 대부분은 평생토록 자신에게 맞는 거울을 찾아 분투하다가 마침내는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동안 수집한 작고 낡고 깨진 거울들을 남겨놓고 쓸쓸히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나마 이런 사람들은 능력있고 잘 난 사람들의 경우입니다. 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긍지를 가지고 살도록 도와 주는 손 거울 하나 만져 보지도 못하고 일생을 마칩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끝없이 ‘더 큰’ 거울을 찾다가 허망하게 인생을 마치고,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인생을 마칩니다.
4.
그렇다면, 우리의 존재 전체를 비추어 줄 ‘큰 거울’은 과연 없는 것일까요? 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얻는 것들은 작은 손거울 혹은 벽에 걸어두고 보는 작은 거울의 역할 밖에는 하지 못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고귀한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보다 더 큰 존재는 하나님 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거울 이외의 모든 거울들은 우리를 비추어 보여 주기에 한계가 있습니다.
이 진실에 대해 다윗은 시편 8편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저 큰 하늘과
주님께서 친히 달아 놓으신
저 달과 별들을 내가 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
주님께서는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그에게 존귀하고 영화로운 왕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습니다.(3-6절)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요 질서입니다. 이 세상에 ‘나’보다 더 큰 존재, 그래서 나의 모든 면을 살펴 보고 내가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알 수 있도록 해 주는 존재, 그 존재는 오직 하나님밖에 안 계십니다. 미국 대통령이라는 자리도, 노벨상이라는 영예도, 교황의 보좌도, 세계 최고의 부자라는 명예도 ‘나’라는 존재를 알게 하는 데 충분하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진실로 알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그 앞에서 잠잠히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나로서 살아갈 길을 찾습니다.
그 길을 찾는 것이 구원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나로서 살아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나로서 살아가는 것이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고 있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내가 누군데! 내가 과거에 어떠했는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은 마치 전신을 비추어주는 커다란 거울 앞에서 깨어진 손거울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믿음의 참된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라는 커다란 거울 앞에 서서 우리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도록 돕습니다.
이것이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으로 인해 자기 자신에 대해 착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이것이 필요합니다. 세상에서의 실패로 인해 자기 자신에 대해 한 없이 절망하며 하루 하루 연명하듯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이것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무런 생각 없이, 하루 하루 동물적인 생존 본능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이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존귀하고 영화로운 왕관’을 쓴 사람처럼 살아가는 변화가 누구에게나 있어야 합니다. 그것 아니고는 우리의 삶은 진실로 살맛 나는 삶으로 변할 수 없습니다.
5.
이같은 변화를 위해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야기는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갈릴리 지방을 중심으로 전도하시고 가르치시고 많은 이들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렇게 하신 다음, 갈릴리 북쪽에 있는 한적한 곳으로 제자들을 이끌고 가셨습니다. 일종의 retreat을 떠나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그분은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7절)
그러자 제자들이 앞을 다투어 자신들이 들은 이야기를 예수님께 전합니다. “주님, 저는, 이미 죽은 세례 요한이 살아 돌아왔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또 다른 제자가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죽지 않고 하늘로 들려 올라간 엘리야가 다시 온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또 다른 제자는 이렇게 보고합니다. “저는, 주님이 이사야나 예레미야같은 예언자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원래,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 하기를 좋아하게 마련입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계시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하나씩 둘러 보신 다음, 그들의 의표를 찌르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9절) 다른 사람들 이야기는 앞을 다투어 하던 제자들이 그들 자신의 의견을 물으니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질문하신 것으로 보아서는 예수께서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있음에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들에게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막상 생각을 말했다가 정답이 아니면 어쩔까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 침묵을 깬 사람은 열혈청년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생각하기 전에 말하고, 말하기 전에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십니다.”(29절) ‘그리스도’는 ‘메시야’라는 히브리말에 해당하는 헬라말로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그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대중에게 알릴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알려졌다가는 십자가의 길에 지장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컸습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던지신 질문, 즉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을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이 이 질문을 던지실 때, 제자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서 그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사람에게 인정받거나 영광 받는 것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무슨 이유로 이 질문을 던지셨을까요? 이 질문이 제자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이 질문이 중요했습니까?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아야만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사렛 예수를 누구로 알고 믿고 고백하느냐가 우리 각자에게 결정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을 ‘살아난 세례 요한’으로, ‘돌아온 엘리야’로 혹은 예언자 중 한 사람으로 아는 것과 ‘그리스도’로 아는 것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그 이상의 어떤 존재였습니다. 만일 그분을 ‘살아난 세례 요한’으로만 믿는다면, ‘돌아온 엘리야’로만 믿는다면, 혹은 예언자 중 한 사람으로만 믿는다면, 나사렛 예수는 다만 비범한 인물로 그칩니다. 나사렛 예수를 그런 존재로 믿는 것으로는 나에게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아브라함 링컨이나 세종대왕에 대해서 배우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나를 구원하기 위해 창조자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원자라고 믿고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의 다스림 아래에서 살아간다면, 나는 내 자신이 누구인지를 환히 보여주는 커다란 거울 앞에 서는 셈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여 창조자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새롭게 발견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자신이 도저히 구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며, 동시에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비싼 값을 치루고 다시 사신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도 함께 깨달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은 “너희는 너희 자신을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앞의 질문에 대해 제대로 답하면 뒤의 질문에 대한 정답을 얻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면, 나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게 되고, 고귀한 존재로 살아갈 길이 열립니다. 반면, 앞의 질문에 대해 정답을 발견하지 못하면, 뒤의 질문에 대해서도 오답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바로 알려면 우리 자신보다 먼저 예수가 누구인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가 나에게 누구인지를 바로 대답하면, 내가 누구인지는 저절로 풀립니다. 내가 누구인지가 밝혀지면 내 인생은 새롭게 변모할 것입니다.
6.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복음이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일국의 대통령에게도 필요하고, 세계 최고의 갑부에게도 필요하며, 병상에서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필요하며, 공허한 눈빛으로 하루 하루를 버티고 사는 사람에게도 필요합니다. 이 복음이 저에게도 필요하고, 여러분 각자에게도 필요합니다. 이 복음이 우리 자녀들에게도 필요하고, 우리 직장 동료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이 복음이 우리 옆집에 사는 사람에게도 필요하고, 탄자니아의 이름 모를 소년에게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 캠퍼스를 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이 복음, 그것 없이는 내가 누구인지 알 도리가 없는 그 유일한 희망, 그것을 좀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려고 이 캠퍼스를 열었습니다. 지난 2년 동안 우리는 힘껏 이 일을 해 왔습니다. 이제 이곳 센터빌에서 이 복음을 나누는 일에 더욱 힘쓸 것입니다. 목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 안에서 자신을 바로 알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한 채, 혹은 자신에 대해 착각한 채, 텅 빈 눈동자로, 죽음의 그늘 아래에서 인생을 허비하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결단 찬송으로 우리는 ‘People Need the Lord’라는 찬양을 부를 것입니다. 이 찬양을 지은 사람이 Greg Nelson과 Phil McHugh입니다. 이 찬양의 가사는 우리 말로 다음과 같습니다.
매일 스치는 사람들 내게 무얼 원하나
공허한 그 눈빛은 무엇으로 채우나
모두 자기 고통과 두려움 가득
감춰진 울음소리 주님 들으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깨지고 상한 마음 주가 여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모두 알게 되리 사랑의 주님
캄캄한 세상에서 빛으로 부름받아
잃어 버린 자들과 나누라고 하시네
주의 사랑으로만 사랑할 수 있네
우리가 나눌 때에 그들 알겠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깨지고 상한 마음 주가 여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모두 알게 되리 우리의 사랑으로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Greg Nelson과 Phil McHugh가 이 찬양을 짓게 된 동기를 어디선가 읽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저희는 어느 날 찬양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아침 나절 내내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두고 토론했습니다. 점심 때가 되어 우리는 내쉬빌에 있는 어느 식당으로 갔습니다. 자리를 잡자 웨이트레스가 우리 식탁으로 왔습니다. 우리에게 와서 미소지으며 인사를 하는데, 그의 눈동자가 텅 비어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는 짐짓 유쾌한 듯 행동하려 했으나, 그의 얼굴 표정은 어두웠습니다. 그가 주문을 받아 사라졌을 때, 우리는 서로를 말 없이 바라보았고,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저 여자에게 주님이 필요하네.”그런 다음 우리는 식당 내부를 두리번 거리며 살펴 보았습니다. 그들도 역시 얼굴 표정에 공허감을 짙게 풍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서 우리는 마음에 무거운 짐을 느꼈습니다. 갑자기 이 사람들 모두에게 주님이 필요하다는 느낌이 압도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적었습니다. ‘그들은 주가 필요해’라고. 점심 식사를 마치자 마자 우리는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와 우리 마음에 있던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식당에서 본 그 사람들의 모습과 이 세상에 수백만의 사람들이 한 줄기 빛을 찾고 있다는 깨달음이 합쳐져서 이 노래가 탄생했습니다.
7.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주가 필요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 도리가 없고,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면, 우리의 인생은 허비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고 진정한 나로 살아갈 때에야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복음이 오늘 이곳에서 저와 여러분에게 실현되기를 기원합니다.
센터빌에서의 우리의 사역을 통해 이 복음이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센터빌 연합감리교회가 우리와 함께 사역함으로써 더 다양한 인종들에게 이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분들이 저희를 초청한 이유는 바로 이 일을 이루고자 함입니다. 저희 와싱톤한인교회와 센터빌 UMC가 주님의 성령의 능력에 힘 입어 함께 사역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 생명의 복음이 이 센터빌 지역에 “물이 바다에 넘침 같이”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우리의 거울은 너무 작다”(Our Mirrors Are Too Small)
--마가복음 8:27-30
1.
오늘 이렇게 second campus ministry를 시작한 지 2주년을 맞아 센터빌 캠퍼스로의 이전을 감사하며 또한 축하하게 된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2년 동안 이 사역을 위해 헌신하며 수고하신 모든 교우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때로 여러분들의 희생과 헌신이 눈물 겨웠습니다. 이 campus ministry를 통해 혹시라도 얻은 열매가 있다면,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둘째는 여러 교우님들의 헌신 때문입니다. 또한 어렵고 힘든 이 사역을 책임지고 고군 분투해 온 강현식 목사님에게 치하의 말씀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우리를 받아 준 센터빌 연합감리교회 형제 자매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을 아까지 않으시고 오늘 예배에 와서 환영의 말씀을 전해 주신 앨런 목사님(Rev. Alan Felumlee)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아름다운 파트너로 함께 동역해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지교회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센터빌로의 이전이 이루어질 때까지 여러 모로 살펴 주시고 도움을 주신 조영진 감리사님께 또한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 이곳에 있지는 않지만, 지난 2년 동안 우리를 도와 준 매나싸스 St. Thomas 교회 형제 자매들 그리고 토미 헌돈(Rev. Tommy Herndon) 목사님에게 큰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오늘 맥클린 캠퍼스에서 많은 교우들이 축하해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센터빌 캠퍼스 이전 소식을 듣고 오늘 처음 방문해 주신 분들도 적지 않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새로운 장소로 이전해 왔기 때문에 이곳에 적응을 마치고 저희의 진면목을 보여 드리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입니다. 기도하시는 가운데 이 센터빌 캠퍼스가 여러분의 영적인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영적 갈망이 채워질 수 있도록 저와 목회실 그리고 모든 교우들이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2.
누가 여러분에게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저는 김영봉입니다”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 이름이지 저 자신이 아닙니다. “저는 와싱톤한인교회 목삽니다”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가 하는 일이지 제 자신은 아닙니다. “저는 한국계 이민자입니다”라고 소개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그것도 저의 배경이지 저 자신은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이 저에 대해 어떤 점을 말해 주기는 하지만, 저의 본질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라 소개하면 좋겠습니까?
이렇게 따지고 보면, ‘과연 나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봉착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누구인지를 소개하는 것은 고사하고, 나 자신이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그 질문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생각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실은, 중요합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없이 산다면, 그 사람의 삶은 분명히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고, 방향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살아 있으니 살아가고, 남들이 하니 나도 할 뿐입니다. 다만, 우리 내면에 있는 생명에 대한 동물적 욕구에 의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 삶은 죽은 것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아무런 답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오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스스로 답을 냈는데, 그 답이 자신의 실제 정체와 다른 겁니다. 안데르센의 동화 <미운 오리새끼>(Ugly Duckling)를 잘 아실 것입니다. 오리 둥지에서 다른 오리새끼들과 함께 태어난 백조 새끼는 자신을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백조 새끼는 다른 오리들과 같지 못한 것을 비관하며 살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못 알고 살아갑니다. 그로 인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한 번의 인생을 허비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됩니다. ‘나’는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자 하나님께서 ‘나’를 이미 디자인 해 놓으셨습니다. 우리 각자는 그 ‘나’를 찾고 그 ‘나’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리는 오리로 살고, 백조는 백조로 살고, 거위는 거위로 살듯, 나는 나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고 산다면, 우리는 결코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산다면 우리의 모든 노력은 결국 의미 없는 몸부림이 될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때에만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그 어느 것도 우리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려 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존재 전체를 비춰 줄 수 있는 거울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다른 거울들은 너무나 작아서 우리의 일부밖에 보여주지 못합니다.
제 어릴 적, 인천에서 경찰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고모부가 계셨습니다. 그 아들, 즉 제 고종 사촌 동생이 방학이면 제가 살던 시골 집으로 놀러오곤 했습니다. 이 동생은 작은 키에 아주 개구장이어서 자주 동네 아이들과 다투었습니다. 싸우다가 힘에서 밀리면 그 동생이 자주 하던 행동이 있었습니다. 양 허리춤에 손을 얹고 배를 힘껏 내밀고 큰 소리로 외치는 겁니다. “씨, 우리 아버지 순경이야! 순경이란 말이야!” 그 동생에게는 ‘순경의 아들’이라는 것이 큰 자부심의 근거였고, 모두 ‘농부의 자식들’이었던 동네 아이들은 그 말에 주눅이 들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촌 동생은 나이가 들어 가면서, 순경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더 이상 별 의미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순경의 아들이라는 사실만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살기에 그가 너무 커졌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자신에 대해 말해 줄 더 큰 것이 필요했습니다.
누구나 그런 것 같습니다. 자라가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판단하게 해 주는 거울이 계속 바뀌는 것 같습니다. 어릴 적에는 부모가 잘 났다는 것이나 혹은 부자라는 것을 거울로 하여 자신이 누구인지 결정합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나면 그것 가지고는 자긍심(self-esteem)을 세울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을 비추기에 거울이 너무 작아지는 겁니다. 그러면 자신보다 더 큰 무엇을 찾아 자기가 누구인지를 다시 정리합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거나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 혹은 멋진 배우자와 결혼하는 것이 얼마간 큰 거울의 역할을 해 줍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거울이 너무 작아져 자신을 다 비출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또 다른 거울을 찾습니다. 출세를 하는 것, 유명해지는 것, 혹은 거대한 부를 이루는 것을 통해 자기 자신을 다시 규정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신을 다 비추기에는 형편없이 작은 거울임을 알게 됩니다.
결국, 우리 대부분은 평생토록 자신에게 맞는 거울을 찾아 분투하다가 마침내는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동안 수집한 작고 낡고 깨진 거울들을 남겨놓고 쓸쓸히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나마 이런 사람들은 능력있고 잘 난 사람들의 경우입니다. 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긍지를 가지고 살도록 도와 주는 손 거울 하나 만져 보지도 못하고 일생을 마칩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끝없이 ‘더 큰’ 거울을 찾다가 허망하게 인생을 마치고,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인생을 마칩니다.
4.
그렇다면, 우리의 존재 전체를 비추어 줄 ‘큰 거울’은 과연 없는 것일까요? 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얻는 것들은 작은 손거울 혹은 벽에 걸어두고 보는 작은 거울의 역할 밖에는 하지 못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고귀한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보다 더 큰 존재는 하나님 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거울 이외의 모든 거울들은 우리를 비추어 보여 주기에 한계가 있습니다.
이 진실에 대해 다윗은 시편 8편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저 큰 하늘과
주님께서 친히 달아 놓으신
저 달과 별들을 내가 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
주님께서는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그에게 존귀하고 영화로운 왕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습니다.(3-6절)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요 질서입니다. 이 세상에 ‘나’보다 더 큰 존재, 그래서 나의 모든 면을 살펴 보고 내가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알 수 있도록 해 주는 존재, 그 존재는 오직 하나님밖에 안 계십니다. 미국 대통령이라는 자리도, 노벨상이라는 영예도, 교황의 보좌도, 세계 최고의 부자라는 명예도 ‘나’라는 존재를 알게 하는 데 충분하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진실로 알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그 앞에서 잠잠히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나로서 살아갈 길을 찾습니다.
그 길을 찾는 것이 구원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나로서 살아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나로서 살아가는 것이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고 있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내가 누군데! 내가 과거에 어떠했는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은 마치 전신을 비추어주는 커다란 거울 앞에서 깨어진 손거울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믿음의 참된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라는 커다란 거울 앞에 서서 우리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도록 돕습니다.
이것이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으로 인해 자기 자신에 대해 착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이것이 필요합니다. 세상에서의 실패로 인해 자기 자신에 대해 한 없이 절망하며 하루 하루 연명하듯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이것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무런 생각 없이, 하루 하루 동물적인 생존 본능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이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존귀하고 영화로운 왕관’을 쓴 사람처럼 살아가는 변화가 누구에게나 있어야 합니다. 그것 아니고는 우리의 삶은 진실로 살맛 나는 삶으로 변할 수 없습니다.
5.
이같은 변화를 위해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야기는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갈릴리 지방을 중심으로 전도하시고 가르치시고 많은 이들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렇게 하신 다음, 갈릴리 북쪽에 있는 한적한 곳으로 제자들을 이끌고 가셨습니다. 일종의 retreat을 떠나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그분은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7절)
그러자 제자들이 앞을 다투어 자신들이 들은 이야기를 예수님께 전합니다. “주님, 저는, 이미 죽은 세례 요한이 살아 돌아왔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또 다른 제자가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죽지 않고 하늘로 들려 올라간 엘리야가 다시 온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또 다른 제자는 이렇게 보고합니다. “저는, 주님이 이사야나 예레미야같은 예언자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원래,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 하기를 좋아하게 마련입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계시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하나씩 둘러 보신 다음, 그들의 의표를 찌르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9절) 다른 사람들 이야기는 앞을 다투어 하던 제자들이 그들 자신의 의견을 물으니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질문하신 것으로 보아서는 예수께서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있음에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들에게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막상 생각을 말했다가 정답이 아니면 어쩔까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 침묵을 깬 사람은 열혈청년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생각하기 전에 말하고, 말하기 전에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십니다.”(29절) ‘그리스도’는 ‘메시야’라는 히브리말에 해당하는 헬라말로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그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대중에게 알릴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알려졌다가는 십자가의 길에 지장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컸습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던지신 질문, 즉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을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이 이 질문을 던지실 때, 제자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서 그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사람에게 인정받거나 영광 받는 것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무슨 이유로 이 질문을 던지셨을까요? 이 질문이 제자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이 질문이 중요했습니까?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아야만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사렛 예수를 누구로 알고 믿고 고백하느냐가 우리 각자에게 결정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을 ‘살아난 세례 요한’으로, ‘돌아온 엘리야’로 혹은 예언자 중 한 사람으로 아는 것과 ‘그리스도’로 아는 것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그 이상의 어떤 존재였습니다. 만일 그분을 ‘살아난 세례 요한’으로만 믿는다면, ‘돌아온 엘리야’로만 믿는다면, 혹은 예언자 중 한 사람으로만 믿는다면, 나사렛 예수는 다만 비범한 인물로 그칩니다. 나사렛 예수를 그런 존재로 믿는 것으로는 나에게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아브라함 링컨이나 세종대왕에 대해서 배우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나를 구원하기 위해 창조자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원자라고 믿고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의 다스림 아래에서 살아간다면, 나는 내 자신이 누구인지를 환히 보여주는 커다란 거울 앞에 서는 셈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여 창조자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새롭게 발견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자신이 도저히 구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며, 동시에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비싼 값을 치루고 다시 사신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도 함께 깨달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은 “너희는 너희 자신을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앞의 질문에 대해 제대로 답하면 뒤의 질문에 대한 정답을 얻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면, 나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게 되고, 고귀한 존재로 살아갈 길이 열립니다. 반면, 앞의 질문에 대해 정답을 발견하지 못하면, 뒤의 질문에 대해서도 오답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바로 알려면 우리 자신보다 먼저 예수가 누구인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가 나에게 누구인지를 바로 대답하면, 내가 누구인지는 저절로 풀립니다. 내가 누구인지가 밝혀지면 내 인생은 새롭게 변모할 것입니다.
6.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복음이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일국의 대통령에게도 필요하고, 세계 최고의 갑부에게도 필요하며, 병상에서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필요하며, 공허한 눈빛으로 하루 하루를 버티고 사는 사람에게도 필요합니다. 이 복음이 저에게도 필요하고, 여러분 각자에게도 필요합니다. 이 복음이 우리 자녀들에게도 필요하고, 우리 직장 동료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이 복음이 우리 옆집에 사는 사람에게도 필요하고, 탄자니아의 이름 모를 소년에게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 캠퍼스를 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이 복음, 그것 없이는 내가 누구인지 알 도리가 없는 그 유일한 희망, 그것을 좀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려고 이 캠퍼스를 열었습니다. 지난 2년 동안 우리는 힘껏 이 일을 해 왔습니다. 이제 이곳 센터빌에서 이 복음을 나누는 일에 더욱 힘쓸 것입니다. 목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 안에서 자신을 바로 알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한 채, 혹은 자신에 대해 착각한 채, 텅 빈 눈동자로, 죽음의 그늘 아래에서 인생을 허비하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결단 찬송으로 우리는 ‘People Need the Lord’라는 찬양을 부를 것입니다. 이 찬양을 지은 사람이 Greg Nelson과 Phil McHugh입니다. 이 찬양의 가사는 우리 말로 다음과 같습니다.
매일 스치는 사람들 내게 무얼 원하나
공허한 그 눈빛은 무엇으로 채우나
모두 자기 고통과 두려움 가득
감춰진 울음소리 주님 들으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깨지고 상한 마음 주가 여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모두 알게 되리 사랑의 주님
캄캄한 세상에서 빛으로 부름받아
잃어 버린 자들과 나누라고 하시네
주의 사랑으로만 사랑할 수 있네
우리가 나눌 때에 그들 알겠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깨지고 상한 마음 주가 여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모두 알게 되리 우리의 사랑으로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Greg Nelson과 Phil McHugh가 이 찬양을 짓게 된 동기를 어디선가 읽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저희는 어느 날 찬양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아침 나절 내내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두고 토론했습니다. 점심 때가 되어 우리는 내쉬빌에 있는 어느 식당으로 갔습니다. 자리를 잡자 웨이트레스가 우리 식탁으로 왔습니다. 우리에게 와서 미소지으며 인사를 하는데, 그의 눈동자가 텅 비어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는 짐짓 유쾌한 듯 행동하려 했으나, 그의 얼굴 표정은 어두웠습니다. 그가 주문을 받아 사라졌을 때, 우리는 서로를 말 없이 바라보았고,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저 여자에게 주님이 필요하네.”그런 다음 우리는 식당 내부를 두리번 거리며 살펴 보았습니다. 그들도 역시 얼굴 표정에 공허감을 짙게 풍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서 우리는 마음에 무거운 짐을 느꼈습니다. 갑자기 이 사람들 모두에게 주님이 필요하다는 느낌이 압도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적었습니다. ‘그들은 주가 필요해’라고. 점심 식사를 마치자 마자 우리는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와 우리 마음에 있던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식당에서 본 그 사람들의 모습과 이 세상에 수백만의 사람들이 한 줄기 빛을 찾고 있다는 깨달음이 합쳐져서 이 노래가 탄생했습니다.
7.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주가 필요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 도리가 없고,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면, 우리의 인생은 허비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고 진정한 나로 살아갈 때에야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복음이 오늘 이곳에서 저와 여러분에게 실현되기를 기원합니다.
센터빌에서의 우리의 사역을 통해 이 복음이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센터빌 연합감리교회가 우리와 함께 사역함으로써 더 다양한 인종들에게 이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분들이 저희를 초청한 이유는 바로 이 일을 이루고자 함입니다. 저희 와싱톤한인교회와 센터빌 UMC가 주님의 성령의 능력에 힘 입어 함께 사역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 생명의 복음이 이 센터빌 지역에 “물이 바다에 넘침 같이”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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