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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같은 하나님, 나같은 인간”(God Like Me, Human Like Me)

요한복음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499 추천 수 0 2011.07.31 23:20:23
.........
성경본문 : 요1:1-5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09.12.25 (김 영봉 목사)

“나같은 하나님, 나같은 인간”(God Like Me, Human Like Me)
--요한복음 (John) 1:1-5, 14

1.

Feliz Navidad! Merry Christmas!
이번 성탄절에 주님의 은총이 성도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그리고 각 가정에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어릴 적에 White Christmas를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던지요! 그런데 그 꿈이 이루어졌던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이제 50이 넘어 어릴 적의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White Christmas를 대하는 제 마음에는 반가움보다 걱정이 더 많습니다. 낭만을 잃어버리고 현실에 빠져 사느라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도록 마음을 잘 지켜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얼마 전, 존 하워드 그리핀(John Howard Griffin)이 쓴 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1961년에 출판되어 한 동안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책이고, 지금도 미국 사회를 아는 데 있어서 꼭 읽어 보아야 할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살림 출판사가 이 책을 번역하여 우리 말 독자들에게 소개했습니다.

존 하워드 그리핀이라는 사람은 참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1920년에 텍사스에서 태어나서 프랑스에서 문학과 의학을 공부한 다음, 그는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부대에서 의무병으로 근무했고, 나중에 2차 대전 때에는 미국 해군에서 복무합니다. 해군에서 복무할 때 사고를 당했는데, 그로 인해 10년 동안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동안에 그는 소설과 논평을 썼는데, 놀랍게도 10년 후에 저절로 눈이 치유되어 그 이후에 저널리스트와 작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합니다.

그는 1959년에 아무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을 결행합니다. 미국 사회의 뿌리깊은 인종 차별 문제에 대해 고민해 온 그는 흑인으로 변장하고 인종 차별이 특별히 심했던 남부의 몇 도시를 6주일 동안 여행합니다. 그는 피부과 의사로부터 피부를 검게하는 약을 처방 받아 복용하고, 전구를 피부에 쪼여 그을리고, 머리를 삭발합니다. 그리고 잘 지워지지 않는 검은색 물감을 노출된 피부에 바릅니다. 누가 보아도 의심하지 않을만큼 완벽한 흑인의 모습을 하고 그는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알라배마, 조지아 등지를 여행합니다.

이 여행을 통해 그가 알고자 했던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과연, 백인들은 흑인들을 대할 때, 그 사람의 경제력이나 교육 배경 혹은 지적 능력에 상관 없이 피부색 하나만으로 무조건 차별을 할까?” 6주일 동안의 경험을 통해 그가 얻은 대답은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극소수의 예외만 있었을 뿐, 그가 남부 지방을 여행하며 만난 거의 모든 백인들은 자신의 피부색 하나만으로 차별과 경멸과 모욕과 천시와 조롱과 폭력으로 그를 대했습니다. 때론, 자신을 저널리스트라고 소개하고, 교양과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를 보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리핀은 6주간의 경험을 담아 라는 책을 펴냅니다. 이 책이 나온 것이 1961년입니다. 이 책은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리핀은 전국적인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시금 신분을 감추고 숨어 다녀야 했습니다. 인종차별적인 백인들로부터 심각한 위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가족의 신변 안전을 위해 살던 집에서 이사해야 했습니다. 그의 인형을 만들어 화형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1975년에는 KKK단으로부터 폭행을 당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책과 이후의 강연과 글들은 미국 사회의 인종 갈등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2.

이미 50년이 지난 책이기는 하지만, 미국 사회에 몸을 담고 사는 사람으로서 꼭 한 번은 읽어 보아야 할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제가 지난 세월 동안 겪은 미국에서 겪은 혹은 목격한 인종 차별의 경험들을 생각해 보았고, 동시에 기독교 신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인 성육신의 교리(doctrine of incarnation)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리핀의 행동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닮은 점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핀은 백인으로서 미국 사회의 인종 차별의 문제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많이 썼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글을 쓰면 쓸수록 그에게는 ‘직접 체험’에의 열망이 커졌습니다. 직접 체험해 보지 않고서는 그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점점 커졌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결심을 합니다. 지금도 이러한 행동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입니다만, 1959년 당시에는 말할 수 없이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인종차별이 가장 심한 남부 도시들을 여행하는 것은 거의 생명을 건 모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6주일 동안의 체험으로 끝냈기에 망정이지, 조금 더 했더라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흑인을 증오하는 백인에 의해서건, 흑인도 아니면서 흑인 행세를 하는 것에 대해 분노한 흑인에 의해서건, 그는 죽임을 당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리핀의 이야기가 어떻게 성육신 교리와 관련성이 있는가? 여기서, 잠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요한복음 저자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1절). 여기서 ‘말씀’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로고스’(logos)입니다. 헬라 철학에서 ‘로고스’는 ‘절대 진리’(absolute truth) 혹은 ‘절대 원리’(grand principle)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절대 진리 혹은 원리가 하나의 인격체로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세상 모든 것이 그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의 한계점에 봉착합니다. 이 말씀을 하고 있는 저 자신도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듣는 여러분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저의 이해력의 한계와 언어 표현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가 설명하려는 대상 자체가 우리의 경험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직 우리 자신의 존재의 기원에 대해서조차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물며 우주의 기원과 신의 기원에 대해서 우리가 무엇을 안다 하겠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주어진 계시의 말씀에 비추어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기 위해 힘쓸 뿐입니다.

하나님의 일부이지만 하나님과 별개로 존재하는 신적인 인격체, 즉 ‘로고스’가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이 성탄절의 소식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에서 하는 말이 그겁니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셨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신적인 존재가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부릅니다. ‘성육신’이라는 말은 ‘거룩한 육신’이라는 뜻이 아니라 ‘육신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교리에 대해 우리는 자칫 “에이, 그게 어떻게 가능해?”라는 반응으로 외면해 버리기 쉽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신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라고 물을 때, 그 사람은 이미 신의 존재를 전제하는 것입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에게는 이 말 자체가 의미가 없습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만이 이 말을 두고 가능한지 어떤지를 질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신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인간과는 다른 차원의 존재입니다. 신이 정말 존재하고, 그 신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면, 그 신이 인간의 육신을 입는 것이 불가능하겠습니까? 신을 전제한다면, 신에게는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전제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육신의 교리를 두고 가능성의 여부를 따지는 것은 스스로 논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3.

성육신의 교리를 두고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라고 묻는 것은 스스로 논리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문제의 초점을 혼동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마치 그리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백인이 흑인으로 변장했는데, 어떻게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모두 속아 넘어갈 수 있지?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속였지?”라고 질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것도 호기심이 가는 질문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관심이 거기에 묶인다면, 우리는 헛다리를 짚는 것입니다. 를 읽으면서 우리의 첫 번째 질문은 “그리핀은 왜 흑인으로 변장하고 위험을 감수하며 남부 도시들을 여행했는가?”에 있어야 합니다. 어떤 약을 먹어 피부를 검게 했는지의 질문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성육신의 교리를 두고 우리는 “왜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는가?”라고 질문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육신을 입으셨습까? 왜 하나님은 영원의 차원을 떠나 시간의 차원으로 내려 오셨습니까? 왜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떠나 3차원의 공간 안으로 들어오셨습니까? 절대 진리로 활동하시던 그 신적 존재는 왜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의 한계 안으로 들어오셨습니까?

그 대답을 우리는 요한복음 14장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한 번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청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8절). 영이신 하나님, 보이지 않는 하나님, 온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겁니다. 잡을 수 없는 신의 존재를 손에 잡은 것처럼 알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답하십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9절).

이 말씀을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이 생전에 책을 쓰셨다면, 그 책의 제목은 <나같은 하나님>(God Like Me)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우리 인간은 도대체 손에 잡히지 않는 그 절대자, 아무리 생각해도 잡힐 듯 말 듯한 그 창조자, 그 절대 원리, 그 절대 진리, 그 절대 선, 그 절대 아름다움을 보고 싶어합니다. 빌립에게 있었던 열망,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을 속 시원히 보고 싶은 열망, 그 열망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열망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뭔가 깨달았다는 종교적인 천재들도 거대한 코끼리의 피부 한 자락을 만진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천재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것이 전부인 것처럼 싸웁니다만, 아무도 그 잡을 수 없는 실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로 인해 영적 세계는 혼란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같은 인간의 영적 열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눈에 보이는 하나님’으로서 우리 곁에 오신 분입니다. 누군가 “신이 진정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그 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싶다”고 말한다면, 성서는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예수님과 같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방식대로 사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과 행적과 삶과 죽음을 진지하게 들여다 보면, “아, 참된 신이 존재한다면, 이렇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에 동의할 분도 계실 것이고, 동의하지 못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동의할 수 없는 분들, 동의가 잘 되지 않는 분들에게 먼저 말씀드립니다. 한 번이라도, 복음서 중 하나를 택하여 진지하게 읽고 묵상하시면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과 삶 속에서 신의 모습을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머리로 이해하려고만 하지 마시고, 성령의 영감으로 오는 깨달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면 필경 그분의 말씀과 삶을 통해 드러나는 신의 모습을 보고 도마처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20:28)이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구요? 일단 한 번 해 보시고 물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동의하시는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그것을 교리로 받아들이는 데서 끝나지 마시고, 실제로 그러한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읽고 묵상하면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해 줄 수 있을만큼, 그분에 대해 배우기 바랍니다. 머리로만이 아니라 무릎으로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토대 위에 설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이웃들에게 우리가 믿는 ‘믿음의 도’(way of our faith)를 전해 주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같은 하나님’(God like Jesus)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4.

성육신의 은총을 입는 순간, 우리는 ‘성육신의 길’(way of incarnation)로 부름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으로 들어오신 것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과 삶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실제로 살아내심으로써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인류 역사에 신처럼 굴면서 온갖 영화를 누리려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신이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고, 신이 아파하시는 것처럼 아파하고, 신이 사시는 것처럼 살아간 사람은 나사렛 예수, 그분 한 분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두고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이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했다면, 베들레헴에서 아기들이 헤롯의 칼에 죽임을 당할 때 같이 죽게 했으면 좋았을 거 아닙니까? 그 때 죽으나 십자가에서 죽으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어차피 나중에 십자가에서 죽게 할 거라면, 왜 그 많은 어린아이들을 희생시키면서 살려 냈습니까? 어차피 죽게 할 것이라면 일찌감치 죽게 내버려 두지, 왜 살려 두어서 그렇게 모진 고난을 받고 나서 죽게 하셨습니까?”

얼른 들으면 그럴 듯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십자가에서의 죽음만이 아닙니다. 그분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인간의 자리로 내려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인간을 사랑하시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처럼 사랑하시다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이 땅에서 30여년을 살면서 인간이면 누구나 당할 아픔과 고난을 모두 겪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잊어버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시면서 그분은 많은 비난과 오해와 박해와 멸시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가장 분명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보여줍니다. 십자가는 성육신의 길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성육신의 길을 걷는 것, 즉 누군가를 사랑하여 그 사람의 자리로 내려가 그 자리에서 그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살면서 그 사람의 희망이 되어 주는 것은 인간으로서 참되기를 꿈꾸는 사람들이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성육신의 길은 인간이 참된 인간으로 변화하는 길이며, 참된 인간이 마땅히 걸어가야 하는 길입니다. 가장 완전한 성육신의 길을 걸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의미에서 가장 완전한 인간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며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의 성육신 사건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분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성육신의 길을 걸음으로 ‘예수님같은 인간’(Human like Jesus)이 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존 그리핀이 흑인들이 받는 인종 차별의 아픔을 알기 위해 흑인으로 변장하고 온갖 모욕과 차별과 고통을 감수한 것은 성육신의 길을 걸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라는 책에서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만, 말년에 그는 천주교 수도회에도 입회하고, 유명한 수도사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과 가까이 지냅니다. 그 우정이 얼마나 두터웠던지, 토마스 머튼은 세상을 떠나기 전, 그리핀에게 자신의 전기를 쓸 자격과 권한을 주었습니다. 이런 것을 고려해 볼 때, 그가 그 위험한 일을 하게 된 근본적인 동기는 신앙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그가 의식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해도, 그의 행동은 성육신적인 것이었습니다. 당시, 수 많은 백인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흑인들을 차별하고 억압하고 저주할 때, 그리핀은 이같은 선택을 했습니다. 그 많은 기독교인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그토록 적었다는 뜻입니다.

성육신의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자신이 당연히 누릴 특권과 안전을 내려 놓고 다른 사람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 자체가 보통 사람에게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 자리에 서서 그 사람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과정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인기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꺼립니다. 그리핀은 비록 6주일 동안 그 실험을 했습니다만, 남부 도시들에서 흑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직접 체험하고 그것을 신문과 방송을 통해 고발했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평생 백인 우월주의자들로부터 위협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는 1980년에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난 이유가 피부를 검게 하기 위해 복용했던 약 Oxsoralen 의 부작용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6주일 동안의 성육신의 경험을 위해 그리핀은 적지 않은 값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동안 어떤 길을 걸어 왔는지, 돌아 보십시다. 하나님으로서 인간이 되시고, 온 인류의 왕으로서 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주님으로 믿고 따르십니까? 그분을 통해 참 하나님을 발견하셨고, 그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걸으셨던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살펴 보십시다. 나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고, 때로 그 자리에 내려 앉아 함께 울고 아파할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가진 자로서 베푸는 값싼 동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하게 함께 있어주는 마음을 말합니다. 몇 달 전에 타계한 에드워드 케네디(Edward Kennedy)를 가리켜 ‘목소리 없는 이들을 위한 목소리’(A voice for the voiceless)라고 불렀는데, 우리는 과연 목소리 없는 이들의 목소리가 되고, 힘 없는 이들의 힘이 되며, 희망 잃은 이들의 희망이 될 마음이 있습니까? 오늘, 이 의미 깊은 성탄일에 우리가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축하하고 감사한다면, 성육신의 길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다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 권사로 취임하는 분들에 대한 고시와 면접이 있었습니다. 그 때, 면접 중에 어느 교우에게서 들은 말씀입니다. 그분은 어릴 적에 서울에 있는 어느 산 근처에서 자랐습니다. 그 산에는 커다란 서치 라이트(search light)가 있어서 밤이 되면 산 정상을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자라가면서 그분은 그 불빛을 바라보면서 “나도 저렇게 위로, 위로 올라가는 삶을 살아야지!”라고 결심하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 결과, 직업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많은 것을 얻었고 이루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분은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며 감사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와서 그동안 자신이 추구했던 삶의 방향이 과연 옳은지 반성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특별히, 최근에 들은 몇 편의 설교로부터 심한 도전을 받았다고 합니다. 요즈음 그분은 위만 쳐다 보고 산 것에 대해 반성하며, 이제는 방향을 돌려 아래를 내려다 보고 살피며 살아야 하겠다고 마음 먹고 기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이 고백을 듣고서 깊이 감동하고 또한 동감했습니다. 그 고백을 들으면서, 저 자신은 성육신의 길을 온전히 걷고 있는지, 스스로 자문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고 축하하기 위해 모인 모든 성도들에게도 여쭙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어떤 방향을 쳐다보고 살아 왔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같은 예수’께서 걸으신 성육신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 세상 사람들이 몰려가고 있는 ‘높아지는 길’, ‘올라서는 길’, ‘다 가지는 길’, ‘나 혼자 잘 되는 길’을 향해 헐떡이며 뛰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저와 여러분을 더욱 강하게 사로잡으셔서 성육신의 길을 올곧게 걸어 ‘예수같은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며, ‘예수같은 사람’으로 변모해 가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땅에 임하신 주님,
하나님이기를 멈추고
인간이 되신 주님,
영원을 떠나
시간 안으로 들어오신 주님,
그리하여 인간의 모든 고난과 아픔을 겪으신 주님,
그 성육신의 길을 걸어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저희로 성육신의 신비를 깨닫게 하시고,
성육신의 길을 걷게 하소서.
그 신비에 참여하여
참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시며
참 인간의 길을 걷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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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94 히브리서 새로운 살 길을 걷다”(We Are On the New and Living Way) 히10:19-25  김영봉 목사  2011-07-31 2439
5593 마가복음 진리는 때로 부담스럽다”(Truth Is Often Burdensome) 막12:38-44  김영봉 목사  2011-07-31 2637
5592 시편 예배가 나를 만든다”(Worship Forms Me) 시24:1-10  김영봉 목사  2011-07-31 3672
5591 시편 따뜻한 관심(Radical Hospitality) 시34:1-8  김영봉 목사  2011-07-31 2436
5590 마가복음 우리에게 부족한 것”(One Thing We Lack) 막10:17-22  김영봉 목사  2011-07-31 2552
5589 마가복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By All Means) 막9:42-48  김영봉 목사  2011-07-31 2889
5588 시편 시냇가에 심긴 나무”(A Tree Planted By the Streams of Water) 시1:1-6  김영봉 목사  2011-07-31 3241
5587 마가복음 우리의 거울은 너무 작다”(Our Mirrors Are Too Small) 막8:27-30  김영봉 목사  2011-07-31 2308
5586 야고보서 두 개의 영적 전립선”(Two Spiritual Prostates) 약2:14-17  김영봉 목사  2011-07-31 2494
5585 요한복음 영생에 이르는 열매”(The Crop for Eternal Life) 요4:3-9  김영봉 목사  2011-07-31 2745
5584 시편 순례길에 오른 캐라반”(Caravan on Pilgrimage) 시133:1-3  김영봉 목사  2011-07-31 2582
5583 요한계시 3 가지 새로움 계21:1  강종수 목사  2011-07-31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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