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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후11: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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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
고린도후서(44) 행복한 사명자, 행복한 성도 (고후 11:7-10)
< 사도 바울의 순수한 헌신 >
살면서 조심해야 할 것이 많지만 그 중에서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돈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섬겼지만 사례비를 받지 않았습니다(7절). 텐트를 만들며 자비량 선교도 했지만 마게도냐 교회들로부터 후원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게도냐 교회들로부터 후원금을 받는 것은 마치 돈을 탈취한 것처럼 느꼈습니다(8절). 고린도 교회보다 마게도냐 교회들이 훨씬 더 재정적으로 열악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말로 쉽게 설명하면 당시 고린도 교회는 분당의 큰 교회였지만 마게도냐 교회들은 지방의 작은 교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사례비는 고린도 교회가 책임져야 마땅한데 오히려 마게도냐 교회들이 후원하니까 그것이 마치 어려운 교회들의 재정을 탈취한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로부터 사례비를 받지 않았습니까? 누를 끼치지 않고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9절).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역할 때 장막을 만들면서 생활비를 충당했지만 아무래도 부족했습니다. 그 부족한 생활비를 ‘루디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빌립보 교회’와 같은 여러 마게도냐 교회들이 후원금을 보내서 보충했습니다. 그처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면서 전혀 인간적인 계산이 없이 순수하게 영혼구원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영성과 은사와 신비체험을 자랑하던 거짓 선생으로부터 지키려고 했던 것은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거짓 선생들의 미혹에 빠져 영혼과 물질을 탈취 당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짓 선생들에게 마음을 뺐기지 말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돈 문제에서 사도 바울과 거짓 선생들은 확실히 대비가 되었습니다.
참된 목자는 사례비보다 영혼을 살리는 일에 관심이 많지만 거짓 목자는 영혼을 살리면서 생기는 돈에 관심이 많습니다. 더 질이 나쁜 목자는 아예 성도의 마음을 빼앗아서 그를 통해 많은 돈을 취할 생각만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빼앗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인 영성자랑을 활용합니다. 그런 상황을 알고 사도 바울은 “예언해준다! 은사를 준다! 기적을 일으킨다!”라고 하면서 은사체험, 기적체험, 신비체험을 내세우는 거짓 선생들을 경계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들의 최종목적은 대개 물질의 탈취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일에는 물질도 필요하기에 사역자들을 물질로 뒷받침하는 자세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잘 분별해서 성도를 ‘돈이 나오는 돈주머니’로 보는 거짓 목자들에게 물질이 휩쓸려가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휩쓸려간 물질은 또 다른 물질을 휩쓸려가게 해서 거짓 목자의 배를 점차 불려주게 됩니다. 한국 교회가 제일 욕을 먹는 것도 일부 교회들이 ‘교인’을 ‘영혼’으로 보지 않고 ‘돈주머니’로 본다는 의구심 때문입니다. 물론 이 문제에서 어떤 교회와 어떤 목자가 완벽하게 자유롭겠습니까?
왜 사도 바울은 ‘행복한 선교사’였습니까? 장막을 만드는 일을 통한 나름대로의 수입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급하면 언제든지 장막을 만드는 일을 통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자리에 얽매일 일이 없었고 어떤 인간적인 계산을 깔고 성도들의 마음을 빼앗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는 교인들의 눈치를 볼 일도 없었고, 사임이나 퇴임 이후를 걱정할 일도 없었습니다. 그처럼 ‘장막 만드는 사역’으로 남보다 돈에 덜 얽매여 사역할 수 있었던 점이 그의 중요한 행복의 요건이었습니다.
< 행복한 사명자 >
오늘날 많은 사역자들이 호구지책 때문에 어떤 자리에 집착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집착은 언제나 불행을 낳습니다. 하나님이 떠나라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성도들이 “목사님! 이제 떠나주세요!”라고 하면 언제든지 “그래요? 이제까지 감사했어요.”라고 말하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가 개척한 교회에서도 성도들이 그 개척목회자를 물러나라고 할 수 있습니까? 도의상 그러면 안 되고 복된 일도 아니지만 원칙적으로는 목회자가 개척한 교회라도 사정이 되거나 때가 되면 떠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교회는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복된 일은 성도들이 물러나라고 하기 전에 목사님이 때가 되어서 스스로 감을 잡고 깨끗하게 물러날 줄 아는 거룩한 센스입니다. 그런 작은 센스 하나가 그 목회자를 성도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남기는 영원한 히어로(hero)로 만듭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거짓 선생들의 농간에 미혹되어서 합당한 이유나 명분도 없이 목회자의 명성에 먹칠을 하고 목회자의 영성을 거론하면서 목회자를 물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케이스가 바로 그 케이스입니다. 사도 바울이 개척한 고린도 교회가 상당한 규모의 교회로 커지자 그 역량과 물질을 노린 거짓 선생들이 교회를 접수하려고 사도 바울에 대한 여러 비방을 늘어놓은 것입니다. “그는 천거서가 없다! 영성이 없다! 말이 어눌하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겨서 영원한 히어로의 준비를 이미 끝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자신이 개척한 교회를 미련 없이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여러 통의 편지를 써가면서 장황하게 자신의 처지를 변증하고 거짓 선생들의 실체를 알리려고 애씁니까? 고린도 교회가 잘못된 영성주의자들에 의해 접수되어서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물질과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 행복한 전도자였습니다. 왜 선교마인드를 가져야 합니까? 선교의 진정한 의미는 ‘대가에 대한 기대 없이 은밀하게 사랑을 나눠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나눠주는 훈련을 하다 보면 물질과 자리에 연연하는 삶을 탈피하면서 행복의 가능성도 그만큼 커집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었던 내적인 행복의 크기도 그가 최고의 선교마인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자리와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힘써 나누면서 사는 행복한 성도들이 되십시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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