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엡3:14-21 |
---|---|
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고난 속에서 교회를 위해 드려야 할 기도
엡3:14-21
히말라야의 슈바이처라는 책이 있습니다. 강원희 의료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소명3’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나왔습니다. 80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입니다. 부부가 의사와 간호사로 만나 세브란스 출신 1호 의료선교사가 되어 히말라야,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에티오피아 오지에서 근 30년을 선교사로 봉사하신 분입니다. 한 참 잘 나가던 나이에 돈버는 자리를 마다하고, 안락한 자리를 마다하고, 병원장 자리를 마다하고 자신의 인생 몸통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다고 지금도 네팔에서 의료 선교를 감당하고 계십니다. 이 책에 감동적인 많은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30대 중반쯤 되는 부인이 배가 몸씨 아파 병원에 왔는데 진단결과 ‘장폐색’이었다고 합니다. 마취를 하고 황급히 수술을 해야 하는데 최신 의료 장비가 없어 그물망 마스크를 환자의 입에 밀착시키고 그 위에 마취약을 떨어뜨려 마취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답니다. 그런데 위험한 것은 음식물이나 역류한 소화액이 폐에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흡인성 폐렴에 걸려 폐가 순식간에 손상되어 사망에 이른답니다. 수술이 다 끝날 무렵 환자가 구토를 하기 시작했답니다. 구토한 오물이 폐에 들어가 흡인성 폐렴에 생겨 폐 절반가량이 하얗게 변해버렸답니다. 고름덩어리가 된 폐를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답니다. 환자는 의식이 없어졌고 산소가 부족했지만 산소를 주입할 기계도 없었답니다. 쇼크 상태라 수축기 혈압은 60, 맥박은 130을 가리켜 죽음의 문턱에서 절망적인 상황이었답니다. 그 때 기도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병원의 조용한 곳을 찾아 기도하였답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이 부르셔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나님, 저 환자를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제 능력 밖의 일이오니 주님이 저 생명을 살려 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했답니다. 세 시간 반 동안을 기도했답니다. 환자가 있는 회복실로 가보니까 환자가 살아나 있었답니다. 맥박이 정상이 되었답니다. 기도하는 동안 폐의 죽었던 세포가 생명의 세포로 바뀌었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탄성을 질렀답니다. 그 순간 ‘나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어서 내가 그 기도의 은혜를 입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떠오르더란 것입니다. 오늘날도 고난 가운데서 절망할 것만 아닙니다. 사업하다가 좋은 일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다 끝났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이제 죄수가 되어 로마 감옥에 갇힌 바울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같지만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 엡1:17-23절의 기도가 성도들의 개인적인 영적 성숙을 위한 기도라면 오늘 본문의 기도는 성도들 전체 즉 교회 차원의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의 기도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4-15절은 “기도의 대상과 자세”입니다.
16-19절은 “기도의 내용”입니다.
20-21절은 “기도의 결론”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권속이므로"(2:19)라는 말씀입니다. 과거에는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랐습니다. 육체의 욕심 따라 살았습니다. 그래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그리스도의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의 권속, 시민,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을 얻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무나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는 믿는 사람의 특권입니다. 기도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아시는 우리 아버지입니다. 구속함을 받은 모든 족속의 아버지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족속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자유자나 노예자나 산자나 죽은 자나 구별이 없습니다. 더 이상 에베소 교인들은 이방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동일한 상속자입니다.
어떤 자세로 기도합니까? 아버지 앞에 기도합니다. 마주 대한다는 말입니다. 정면으로입니다. 허공에 기도하는 것 아닙니다. 비 인격체에 기도한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보시고 계십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유대인은 보통 서서 기도합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말은 특별히 간절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에스라가 이스라엘의 죄를 참회할 때,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스데반이 순교의 고된 시련 가운데 기도할 때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으면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막을 수 없습니다. 환경과 상황을 초월합니다. 설교할 수 없고 가르칠 수 없으나 기도할 수는 있었습니다. 기도도 사역입니다. 바울을 감옥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지라도 기도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무슨 기도를 드립니까?(16-19)
세부적으로 나누면 다섯 가지 기도입니다. 첫째가 속사람을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16), 둘째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17), 세 째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게 하옵시고(17), 넷째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하옵시고(18), 다섯째가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19)입니다.
오늘 본문은 본래 동사는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 달라는 것 하나입니다. 그것과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고난 속에서 교회를 위해 우리가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할 것인가 의미적으로 분류하여 세 가지만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성도들의 속사람이 강건하기를 원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16).
사람은 무엇보다 건강해야 합니다. “돈을 잃은 것은 조금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은 것은 많이 잃은 것이요. 건강을 잃는 것은 모두를 잃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재물을 잃는 것은 일생의 일부를 잃은 것입니다. 명예를 잃었다고 해서 인생의 전부를 잃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건강을 잃으면 생명을 잃는 것입니다. 돈 잃었다고 건강까지 잃으면 그 사람은 지혜가 없는 사람입니다. 건강 잃으면 인생의 전부를 잃는 것입니다. 건강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영적 건강이 중요합니다. 영적 생명을 잃어버리면 영원을 잃는 것입니다. 천국에 갈 수 없고 영원한 형벌을 받는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천국이 없다면 상관없지만 영원한 천국이 있으면 영혼의 문제만큼 심각한 것은 없습니다. 인생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후의 또 다른 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영원한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이 천국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고난 가운데 처해 있다할 지라도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 부모를 위해 기도할 때, 성도를 위해 기도할 때,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속사람이 강건하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선순위가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해 지는 것입니다.
겉사람의 건강도 중요하지만 속사람의 건강 역시 더욱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속사람이 무엇입니까? 거듭난 자아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영혼을 말합니다.
속사람은 겉사람과 대비된 말씀입니다. 고후 4장 16절에 보면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로마서 7장 22절에는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롬7:22)”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면 속사람은 영적인 부분입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듭난 감정, 지성, 의지, 양심 우리의 영혼입니다. 사탄이 세상 풍속과 육신의 욕심을 통하여 속사람을 감염시킵니다. 사탄은 속사람이 강건해 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겉 사람과 함께 부패하게 만듭니다. 지성을 병들게 하여 고집과 아집 교만하게 만듭니다. 의지를 병들게 만들어 습관의 노예, 욕심의 노예가 되게 만들어 버립니다. 감성과 양심을 감염시켜 무감각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양심의 감각을 상실하여 화인맞은 사람처럼 되게 만듭니다. 조그마한 상실에도 낙심하게 만듭니다. 에베소 교인들이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으니까 고난 속에 낙심하게 만듭니다. 회의가 들게 만듭니다. 예수 믿고 잘 된다면서 자기 스스로 잘못되어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사업이 잘되어야 할 텐데 사업이 망해간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떨어집니다. 속사람이 흔들입니다. 요즈음 몇몇 가정이 사업이 잘 안 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개업 예배를 드리고 사업이 잘 되기를 위해 계속 기도했는데 안 된다는 소식을 들으면 목회자가 잘못한 것처럼 마음이 낙심됩니다. 회의가 들게 됩니다. 속사람이 병들 수 있습니다. 성공과 실패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결국 관점의 차이입니다.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결과물입니다. 누가 에디슨을 실패한 사람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누가 바울을 실패한 사람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누가 아브라함 링컨을 실패한 인간으로 보겠습니까? 죽지 않았다면 지금의 실패가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고난이 결국 우리는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하게 합니다.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우리가 무엇보다 속사람의 강건함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속사람을 강건하게 할 수 있습니까?
세상은 무수히 많은 세균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에서 육체의 저항력을 기르기 위해서 사람들은 네 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첫째는 운동을 합니다. 노폐물을 배출시키고 폐에 신선한 공기를 넣어 줍니다. 신진 대사를 원활하게 해 줍니다. 둘째는 약품을 사용합니다. 직접 세균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감염된 기관을 제거 수술합니다. 넷째는 예방접종을 하여 면역성을 길러 줍니다.
우리가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단순한 한 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오는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속사람이 강건해 질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부어 주시는 강력한 힘으로 우리는 강건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공급하여 주실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바라볼 때 비록 현실은 어렵고 이해가 되지 않지만 소망을 가지며 낙심도 하지 않게 됩니다.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풍성하신 것을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힘으로 능으로 못하는 것도 성령님께서 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 받을 때 지혜를 얻습니다. 성령 충만 받을 때 회의가 들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 받을 때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성령 충만 받을 때 성령의 갖가지 은사가 나타납니다. 성령 충만 받을 때 회의가 사라집니다. 성령 충만 받을 때 낙심에서 일어납니다. 성령으로 속사람이 강건해 지는 것입니다.
사사기 6장에 보면 기드온이란 젊은이가 나옵니다. 두려움과 의심과 피해의식과 열등감이 많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삿6:15) 그런데 성령이 임하게 되자 나팔을 불며 이스라엘 사람들을 다 모아서 적군을 물리치는 큰 용사가 됩니다.(삿6:34) 오순절 성령의 충만을 받으니까 무력했던 제자들이 새힘을 얻고 담대하게 나아가 병자를 일으킵니다. 복음을 전하여 세상을 바꿉니다. 요엘서 2장 28절에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여,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을 통하여 현상과 현실을 넘어 꿈과 비전을 말하는 존재들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강건한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나아갑니다. 속사람 강건한 다윗이 골리앗 앞에 담대히 나아가 승리합니다. 속사람이 강건한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 앞에서도 금신상 절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에베소 교인들은 바울이 당하는 환난을 보며 낙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속사람이 강건해 지면 이 낙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2. 우리는 고난 속에서 성도들의 마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경영하시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은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살아갑니다. 마음이 오늘 교회에 가겠다고 결심하여 오늘 예배에 참석했을 것입니다. 마음이 오늘 날씨 좋은데 가족과 함께 해변으로 가야하겠다고 생각하신 분은 아마 다들 해변에 가있을 것입니다. 마음의 움직임대로 인생은 가고 삶이란 결국 마음의 결정체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누가 경영하는냐에 따라 인생은 세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을 늘 자신이 경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최종 결정권을 자신이 가지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이성, 자신의 지혜로 마음을 경영합니다. 두 번째 종류의 사람은 마음을 자신이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경영하게 합니다. 사탄이 경영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2장에 나와 있는 것처럼 세상 풍속과 육체의 욕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기 전의 삶의 특징입니다. 세 번째의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마음을 경영하도록 맡기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에베소 교인들을 위한 두 번째 기도는 이 마음을 주님께서 경영하도록 맡기라는 기도입니다. 흑자 인생이 되려면 주님이 경영해야 합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실패와 성공은 결국 관점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시간으로 인생을 바라보아야 결국 최종적인 성공을 할 수 있습니다. 주제권을 주님께 드리라는 기도입니다. 에베소 교회 교인들이 주님께 왕의 자리를 내어 놓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이미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계십니다. 그런데 왜 에베소 교인들의 마음에 이미 예수님이 계시는데 이런 기도를 할까요? 거하다는 말은 두 가지 말이 있습니다. 하나는 일시적으로 거한다(파로이케오 paroikeo)입니다. 손님처럼 나그네처럼 거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구적으로 거한다(카토이케오 katoikeo)라는 말입니다. 주인으로 정착하여 거주하심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집으로 삼고 그 안에 살게 한다는 말입니다. 영구적으로 거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온전히 자유롭게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거함인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다니면서도 주님의 다스림을 받기를 싫어합니다. 일정한 부분만 다스려 달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주님이 간섭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관계를 맺었지만 관계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모든 삶의 주인이 되게 에베소 교인들의 권리를 주님 앞에 내려놓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주인이 예수님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교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의 주인이 되셔서 우리의 감정과 의지에 거하시고 생활 전체를 지배 통제 지도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마음 중심과 삶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자리 잡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마음을 주님께서 경영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믿음으로 우리가 예수님께 내 왕좌를 내어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내 안에 예수님께서 계시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에, 교회 생활에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교인의 마음이 목사에게 지배되고, 장로에게 지배되고, 돈에게 지배되고, 세상 풍속에 지배되면 강건한 교회가 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인격적입니다. 폭군이 아니십니다. 문밖에 두드립니다.
어떻게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경영할 수 있겠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내 안에 내주 하시고 믿음으로 행함으로 예수의 사람으로 능력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 믿음으로 그 고난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과 힘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로마 권력은 힘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믿음으로 산 사람입니다. 힘이 이길 것 같지만 결국 믿음이 승리합니다. 믿음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각종 질병을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12년 동안 혈루증 앓는 자가 났습니다. 믿음으로 앉은뱅이가 일어납니다. 믿음으로 손마른 자가 고침을 받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약5:15)” 합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다 죄라고 했습니다. 바로 주님이 내 안에 내주하여 나의 마음을 경영하게 하려면 어떤 경우든지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3. 우리는 고난 속에서 성도들이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충만하기를 위하여 기도합니다.(17-19)
17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감옥에서 에베소 교인들 위해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사랑 가운데 뿌리를 박고 떠가 굳어지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뿌리는 나무를 비유하고 터는 건축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환난 가운데 고난 가운데 교회가 견고하게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교회가 견고하게 세워질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 돈에 뿌리 박고, 권력에, 명예에 뿌리를 박으면 안 됩니다. 시기 질투에 뿌리를 박으면 안됩니다. 사랑이 우리 삶의 뿌리를 내리게 할 토양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우리의 삶을 세울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힘은 이 사랑에 있습니다. 교회의 참된 힘은 바로 이 사랑에 있습니다. 사람 가운데 뿌리를 박을 때 참된 힘이 나옵니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는데 그건 철학자의 말이고 그리스도인의 강력한 힘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고전 8:1을 보십시오. "지식을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랑 대신 지식을 앞세울 때 분파와 분열이 생겼습니다. 만일 사랑이 아닌 것을 제일로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사랑이 아닌 것을 기초로 하면 타락합니다.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랑에 뿌리를 두지 않은 지식은 교만과 거만을 나을 뿐입니다.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믿음 역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갈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사역도 사랑이 없으면 공허와 분열만 남을 따름입니다.
설교자가 설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사업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사랑으로 세상을 녹여가는 삶입니다. 모든 것은 사랑이 있을 때 힘을 얻습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사랑하니까 칠년을 수일같이 보냅니다(창29:20) 사랑은 시간을 초월합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일과 활동을 위한 참되고 유일한 동기입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바울이 고난 가운데 주의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고후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도다"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지 못하고 터가 굳어지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일과 활동 속에는 궁극적인 가치가 없습니다.(고전13장)
우리가 뿌리를 내려야 할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떤 것입니까?
이 사랑은 지식에 넘치는 사랑입니다. 이성의 한계를 뛰어 넘는 사랑입니다. 지식을 능가하는 사랑이고 지식으로 다 깨달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헤아릴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사랑입니다.
사랑의 너비는 모든 족속에게 미칩니다(계5:9,11) 사랑의 제한 없습니다. 사랑의 길이는 끝이 없습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릅니다(렘31:3) 사랑의 깊이는 가장 낮고 낮은 자에게까지 미칩니다. 심오합니다. 사랑의 높이는 우리를 들어 올리는 사랑입니다. 그와 함께 살아나고 부활 하늘나라에 앉히는 사랑입니다(요17:24).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인류를 포함할 정도로 충분히 넓고 영원토록 계속될 될 만큼 충분히 길며 각각 타락한 죄인에게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깊으며 하늘로 올리올 만큼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충만한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순준까지 도달하는 것입니다.
경제가 인생을 뿌리채 흔들려고 합니다. 건강이, 자식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걱정이 폭풍이 되어 인생을 뿌리채 흔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를 박으면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충만한데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5)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구하거
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주시는 분이십니다.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이십니다. 기도를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돌아 가신 것이 아니고 아들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 이루십니다.
생각하는 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의 구함 생각보다 더 넘치도록 해주십니다.
바울처럼 감옥에 갇혀 있습니까? 질병의 감옥, 돈의 감옥, 미래의 두려움에 대한 감옥, 어쩔 수 없는 유혹의 감옥,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감옥, 바꿀 수 없는 습관의 감옥에 갇혀있습니까? 고난의 현장에서 회의 하고 있습니까? 바울의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어떤 고난 속에서도 성령 충만을 주어 속사람이 강건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어떤 고난 속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 인생에서 주님이 왕되심을 선포하면 살게 하옵소서.
하나님 어떤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박고 그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1.6.5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