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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5:27-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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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최응희 목사 |
참고 : |
고치시는 예수님
누가복음5:27-39, 갈라디아서2:20
오늘 말씀은 ‘레위’라 하는 세관원을 부르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별 볼일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놀라운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오히려 이 사람들은 자기같이 부족하고 죄많은 사람을 불러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충성하였습니다. 불러주시는 것 자체가 감동이요, 감사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배부른 사람들에게 음식은 감동이 될 수 없듯이, 스스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은 별로 감동이 되지 않습니다. 믿음을 그냥 악세사리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을 알지 못하거나 영혼을 귀중히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세상은 점점 그런 세상으로 치닫고 있고,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하는 사람들까지도 거의 영혼을 잊은 채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물질중심의 세상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레위도 그런 사람중의 하나였습니다.
1. 죄인을 부르신 예수(13-17)
오늘 말씀에 나오는 레위는 마태복음을 보면 ‘마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9:1). 마태는 당시 사회적으로 비난과 멸시와 미움받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들은 동족의 세금을 거두어 이방인에게 바치는 자들이라 하여 전혀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서 과하게 세금을 거둠으로서 더욱 미움을 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러한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셔서 고치시고 회복시키시어 더 큰 사명자가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본문에서는 마태가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5:27-28
아주 간단하게 쓰여져 있지만 아마도 이 말씀 속에는 보이지 않는 시간들과 감추어진 언어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마태의 깊은 갈등이 들어 있습니다. 비록 세관에 앉아서 돈을 세고 있지만, 그래서 뒷돈이 두둑해지고는 있지만 마음 한편으로 심령의 공허를 메꿀 길이 없는 마태의 속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마태는 육신적으로는 모자람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건강한 사람이었고, 세리일을 하면서 경제적으로도 꽤 괜찮았을 것입니다. 나중에 제자가 되어 마태복음을 그렇게 꼼꼼하게 기록한 것을 보면 지적으로도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텅 비었고, 영혼이 병들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육신적으로 건강하고, 물질적으로 풍요하다해도, 영적인 기쁨과 만족이 없으면 병든 영혼입니다. 스스로도 잘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공허감을 세속적인 것들로 메꾸려고, 사람들을 부지런히 만나고, 오락과 취미에 심취하기도 하면서 바쁘게 보냅니다. 그러나 그렇게 바쁜 듯 정신없이 사는 것이 공허감 때문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잘 모릅니다. 그저 자기는 바쁘다고만 생각하는 것이지요. 사실은 그런 행동들은 공허감을 메꾸기 위한 자기 최면이요, 속임수입니다.
아무리 육신적으로 화려하고 대단해도 영혼이 비어있으면 어딘가 텅 빈 자신을 느끼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외장은 잘 치장을 하였는데, 막상 문을 열고 들어가 보면 아무 것도 없이 텅 빈, 무채색의 집과 같습니다. 영혼이 충만한 사람은 비록 겉이 별로 화려하지 못해도 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주 아름다운 빛깔들로 가득 찬 내실을 볼 수 있습니다.
영혼의 뜰을 잘 가꾸기 바랍니다. 가꾸지 않는 텅 빈 영혼은 잡초가 무성해지고, 나중에는 쓰레기가 가득해 집니다. 쓸데없는 생각이 가득해지고, 더러운 영혼이 됩니다. 영혼의 뜰을 잘 가꾸기 바랍니다.
마태는 주님을 영접한 후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별로 떠들석한 제자는 아니었지만 매우 꼼꼼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태복음이라는 위대한 작품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2.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마태의 응답하는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이 말씀 속에 마태의 삶이 다 들어 있습니다.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leave, rise, follow). 자신의 삶을 한 문장으로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삶을 한 문장으로 만들어 보기 바랍니다. 어떤 문장이 됩니까? ‘항상 불만 속에 사는 사람’ 이런 문장이 되면 안되겠지요.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 ‘항상 감사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 ‘항상 섬김을 사명으로 사는 사람’ 이런 문장이 되어야 할 줄 압니다.
마태를 표현한 말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입니다. ‘지금까지의 일상을 청산하고’ 그런 말입니다. ‘지금까지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그런 말입니다. ‘지금까지 붙잡고 있던 가치관을 버리고’ 그런 말입니다. 그런 것들을 버리고, 일어나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다는 말입니다. 옛 사람을 죽이고, 거듭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런 말입니다.
이런 거듭남의 삶을 바울사도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2:20
이 고백이 여러분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마태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 특히 세리친구들을 자기의 집으로 초대하여 송별파티를 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그 자리에 초대되었습니다. 세리 마태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어찌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가 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주님은 대답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5:31-32
건강한 사람에게 의사가 쓸데없는 것처럼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아무 관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실은 아주 두려운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관계가 없다는 것은 심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심판의 주이시고, 예수님이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관계가 없다는 것은 구원과 관계가 없는 것이요, 결국은 심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이 ‘의인’은 참 의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의인인체 하는 바리새인들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사실은 의인인체 하는 바리새인들이야말로 영적으로 보면 병들었으면서도 병든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건강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치료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히려 스스로 건강하지 못한 것을 알고 겸손히 영혼의 의사이신 예수님께 무릎을 꿇는 사람들은 치유와 회복의 소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신 것입니다.
3.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주님은 자신을 의인인체 하며 다른 사람들을 얕보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바리새인들을 보시면서 낡은 가죽부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 5:37-38
바리새인들은 하늘을 향해 영혼을 열고,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에 감동하고, 어린아이처럼 기쁨으로 응답할 줄 모르는 굳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굳을 대로 굳어버린 낡은 가죽부대와 같아서 신앙을 ‘무엇을 안하는 것’에서 찾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내용은 항상 하지 말아야 될 일들의 목록들로 가득 차 있고, 죄 짓지 않기 위해서 하지 말아야 될 것들에 관심을 집중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신앙은 ‘금지의 덩어리’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 신앙은 ‘무엇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신앙은 ‘생명’입니다. 생명은 힘차고, 변화를 일으키고, 생명을 공급하고, 온전케 하고, 자라나는 것입니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입니다. 사랑하고, 살리고, 빛을 비추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생명력 있는 믿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은 그것입니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don't'의 사람이 아니라 ‘do'의 사람입니다. 복음은 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을 따르는 것입니다. 복음은 위축되고, 도피하고, 소극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힘차고, 늘 새롭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혹시, 여러분, 무엇을 안 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 있습니까? 남들보다 그 점에서 철저하다는 점에서 칭찬 받을 만 합니다. 그러나 더 좋은 믿음은 무엇을 하는 것에서 기쁨을 얻고, 무엇을 하는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입니다. 무엇을 안 함으로서가 아니라 무엇을 함으로서 참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죄를 안 짓는 것에 감사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남에게 해를 안 끼치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섬김의 삶을 사는 것으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나쁜 짓 안 하는 것에 자부하지 말고, 선한 일 행하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요,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모습입니다.
마태는 육신도 건강하고, 물질적으로도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잘 못된 인생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물질과 육신에만 몰두하여 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영혼은 방치되어 잡초만 무성한 밭과 같고, 만족과 기쁨과 감사가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것은 전혀 행복하지 못한 삶이요, 병든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치유되고 회복되었습니다. 아마도 그 생활이 전처럼 혼자만 편안하게 안주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주머니가 두둑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동행하는 생활은 날마다 감동이요, 기쁨이요, 감사였습니다. 그래서 그 감동을 기록한 것이 마태복음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돌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동행함으로 날마다 영혼의 만족과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감동과 감격이 있는 생활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육신도 영혼도, 믿음생활도 모두 건강한 은혜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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