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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2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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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손봉호 교수 |
참고 : | 강변교회 |
“공정함”
본문: 출23: 1- 9
오늘 사랑하는 친구가 시무하시는 강변교회에 와서 말씀을 전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은혜 스러운 설교는 못하고 특강 비슷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공정함”이라는 이런 설교를 자주 들어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23장을 읽고 성경에 이런 구절이 다 있구나 하는 상당한 인상을 받고 오늘 여러분과 같이 상고하고자 합니다.
지난 7월10일 미국 상원 정보위원회에서 CIA정보원이 정보를 잘못 보고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잘못된 정보를 근거로 부시 대통령이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CIA의 책임이 크다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정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부시 대통령이 그 정보를 받기도 전에 이미 전쟁을 할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그 정보가 왔을 때 이라크기 대량살상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부분을 과대평가하고 그런 징후가 없다는 정보는 무시해 버리고 결국 엄청남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CIA가 옳은지, 미국 대통령이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잘못된 정보, 잘못된 판단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가 하는 것은 분명하지요? 그 판단을 누가 하느냐, 어떤 정보냐에 다라서 그 결과는 다르겠지요. 책임이 크면 클수록 , 그 영향력이 크면 클수록 그 사람의 판단은 더 공정해야 되고, 그 사람이 받는 정보는 더 정확해야한다는 것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모든 사람의 판단이 공정해야 합니다. 놀랍게도 몇 천 년 전에 기록된 출애굽기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역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런 위대한 생각을 그 시대에 내 놓을 수 없다 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첫째로, 본문 1절에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근거 없는 소리를 돌아다니며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런 것을 옛날에 우리나라에서 한때 <카더라 방송>이라는 것이 유행했었습니다. 경상도 말로 <하더라>를 <카더라>라고 합니다. 대중 매체가 공정한 소식을 전하지 않고 신문도 그렇고 정부 발표도 못 믿으니까 사람들이 이 <카더라> 방송만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카더라 방송>이 사실일 때가 많아지면서 점점 더 이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옳았다가 또 그렇치 않기도 하다보니까 사람들이 어찌 판단해야 좋을지 모르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찌 됐던 하나님의 백성은 그런 근거 없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근거 없는 판단은 성숙한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편견을 가지면 공정한 정보를 받을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 놓고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고 판단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요 성숙한 인격이 해야 할 일입니다.
둘째로, 1절 하반부에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가령 교통사고 같은 경우에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악한 사람이 짜고 현장에 있었다는 어떤 증인을 데려와서 법정에서 거짓말을 함으로서 결국 피해자가 교통사고를 당한데 더하여 벌금까지 무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이따위 짓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인의 큰 약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며칠 전 법무부 장관과 식사를 같이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분이 저한테 몇 년 전 한국과 일본 사람과의 정직성에 대한 통계자료를 보여 준 적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2000년 최근의 자료를 가져 와서 보여 주었습니다. 2000년 한 해 동안 우리나라에서 위증으로 기소된 사람이 1198명이었다고 합니다. 일본은 5명이었습니다. 240배지요. 인구수를 감안하면 671배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1996년 통계가 466배였는데 2000년에 671배로 늘어난 것입니다. 위증이 얼마나 악합니까? 사실을 잘 못 말해서 죄 있는 사람은 용서받고 죄 없는 사람이 벌을 받도록 하는 것이 위증 아닙니까? 어떻게 하다가 우리나라가 일본에 비해서 이렇게 많은 차이가 날 수 있습니까? 너무 너무 창피합니다. 한류다 뭐다 해서 야단이지만 죄송하지만 한국은 아직 멀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기독교인이 19%이고 일본은 0.7%밖에 안 됩니다. 모함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괜한 사람 나쁜 짓 했다고 고발해서 고생시키는 그런 사람을 무고라고 하지 않습니까? 무고보다 더 심해서 검찰에서 이런 사람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재판에 회부한 사람이 한 해 동안 2965명이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2명 이었습니다. 1483배 무고했고 인구수를 감안하면 4151배라는 것입니다. 이런 통계를 볼 때마다 한국인이란 사실이 너무 부끄럽습니다. 한 나라는 도덕적 선진국이고 한 나라는 도덕적 야만국입니다. ‘모함하지 말라’ ‘위증하지 말라’, ‘무고하지 말라’ 하는 이런 성경구절이 우리에게 무슨 작용을 했습니까?. 너무 부끄럽습니다.
셋째로, 2절에 “ 다수를 따라 행하지 말며 ”가 있습니다. 다수 편을 항상 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다수를 따라 결정합니다. 심지어 헌법재판소도 판사의 수에 따라 탄핵이나 수도행정 이전이 잘 못 됐다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다수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다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도저히 객관적 사실을 알 수 없을 때 다수를 따라 결정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다수라고 해서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시대의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전수결(만장일치)은 무효였다고 합니다. 한 두 사람이라도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해야 유효한 판결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이 사실이냐 ,공정하냐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공평치 않게 하지 말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가난한 자에 대해서, 나와 이해관계가 없을 때는 가난한 자편을 듭니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있으면 전혀 달라집니다. 약자는 구박을 해도 보복도 못하고, 도와주어도 별 도움이 안 되지만 ,강자의 마음을 거스려 놓으면 손해를 보게 될 것이고 잘 보이면 득을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인간이 이중적입니다. 나와 이해관계가 없으면 예외 없이 약자 편을 들고, 나와 이해관계가 있으면 강자 편을 듭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9절에 나오는 나그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방 나그네도 약자 아닙니까? 가난한 자나 이방 나그네라고 하여서 불공정하게 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가장 비겁한 사람들이 약한 자에게 강하고 강한 자들에게 약한 자 들입니다. 사실 우리가 다 상당히 비겁합니다. 저 자신도 비겁합니다. 사람을 차별 대우할 위험을 모두가 다 안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9절입니다.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찌니라”. 앞에서는 가난한 자라고 억울하게 하지 말라고 명령했고 여기서는 가난한 자라고 무조건 모두 옳다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일반적으로 가난한 자라고 해서 무시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데, 가난한 자라고 해서 그 사람에게 부당하게 유익되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가 잘못 됐을 때는 잘못 됐다고 말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노동운동이 참 심각합니다. 저도 대학 총장으로서 노동조합과 씨름을 해야 하는데 그동안 겁이 나서 노동조합이 잘못했다고는 아무도 말을 못했어요. 노동조합이 아무리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해도 누구도 말을 안합니다. 이것도 비겁한 것입니다. 약자든 강자든 잘했으면 잘했다,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 공정한 것입니다. 약자라고 해서 무시하는 것도, 약자라고 해서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 것도 다 불공정하다는 것입니다.
4,5절에 아주 재미있는 내용이 나옵니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 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 울 지니라.” 여기서 원수는 철천지 원수가 아니라 재판에서 나와 이해관계가 걸린 사람이라고 합니다.
가령 저 사람한테서 내가 500만원을 받아야 하는데 안 주어서 억울한 중에, 어느 날 저 사람의 나귀가 길을 잃고 빙빙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 때 유혹이 ‘돈 500만원 대신에 저 나귀를 내가 가지고 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가 참 많지 않습니까? 모두 다 자기가 옳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모두 자기가 다 판사입니다. 3심을 거쳐 대법원까지 와서 져 놓고도 그래도 억울하다고 합니다. 재판이 얼마나 많은지 판사들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라고 합니다. 근거 없는 판단은 성숙한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 나한테 빚 진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나귀가 너무 짐을 많이 져서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 나귀 주인이 나귀를 일으켜 세우려고 혼자 애를 쓰고 있는데 그 광경을 멀찌감치 바라보고 속으로 ‘고소하다’라고 하면서 즐기고 있다면 그 따위 짓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과 같은 구절입니다. 엄격히 따져보면 나귀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 나귀가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 사람과 나 사이의 금전관계이지 나귀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서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나귀뿐만 아니라 어떤 소송문제에 걸려 있더라도 그 소송의 경우에만 나와 이해관계가 있지 그 외의 문제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도와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정성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주도 면밀 하십니까? 하나님의 공정성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철저하게 공정하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공정성을 해치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뇌물입니다. 8절에 보면“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뇌물, 이것이 우리사회의 아주 큰 문제입니다. 우리나라만큼 뇌물을 많이 주고받는 나라가 별로 없습니다. 아까 그 법무장관이 보여준 자료 중에 우리나라에 뇌물을 받아서 기소된 사람이 1년에 480명인데 일본은 111명이었답니다. 인구수를 감안하면 일본보다 12배를 더 받는 다고 합니다. 또 증 뇌, 즉 뇌물을 주다가 걸린 사람이 1985명인데 일본은 119명으로 17배가 많고 인구수를 감안하면 47배나 더 뇌물을 준다고 되어 있습니다. 뇌물은 결국 특혜를 받으려고 주는 것이 아닙니까? 뇌물을 받는 사람의 판단을 불공정하게 만들기 위해서 뇌물을 주는 것이 아닙니까? 안 그렇습니까? 제가 몇 년 전 공명선거운동 할 때의 일입니다. 후보자들이 돈을 마구 뿌립니다. 하도 답답해서 어느 해에는 “받고 찍지 말자”고 라는 캠페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캠페인은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인간은 뇌물을 받으면 마음이 약해집니다. 뇌물을 받고 나면 반드시 공정해 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뇌물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신16:19, 10:17. 하나님은 뇌물을 받지 않으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공정하게 판단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공정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마지막 심판을 바라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심판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심판은 항상 불공정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판단은 정보도 부족하고, 인간에게는 감정도 있고, 판단능력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딤 전4:8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바울은 이 세상에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믿는 사람조차도 사울을 잘못 판단하고, 의심도 많이 받고 오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의로운 재판장이 나타나실 때 자기는 의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저는 공정하다는 것이 너무 중요해서 사형제도에 관해서 여러 사람과 의견충돌을 많이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형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제가 사형 제도를 반대하는 이유는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그 죄의 값을 받아야 그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형시키는 것이 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학생들이 시험 중 부정행위 하다가 잡히면 ‘선생님, 한번만 봐 주세요’라고 하는 소리입니다. 너무 화가 납니다. 내가 못된 짓을 해 놓고도 평생 벌을 안받고 산다면 나는 일생동안 빚지고 구차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피해자의 인격존중이 아니라 가해자의 인격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사형 제도를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철저하십니다.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너무 철저 하셔서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정도로 우리 하나님은 잔혹하십니다. 우리가 지은 죄가 너무 크기 때문에 절대로 우리를 용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공정성이란 것이 아주 중요한 ,우리의 구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능한 한 공정하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뇌물도 받지 말고, 쓸데없는 풍문을 듣고 너무 흥분하지도 말고, 가난하다고 해서 특별히 봐 주지도 말고, 권력있고 명예가 크고, 돈이 있다고 해서 아부하지도 말고,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의 신임을 받아야 전도도 할 수 있습니다.
2가지를 갖추어야합니다. 하나는 정직해야 되고, 둘째는 공정해야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의식적으로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어떤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떤 불교 믿는 사람과 예수 믿는 사람에 대해서 말할 때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 편을 들 위험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경상도 사람이라면 나도 모르게 경상도 사람 편을 들 위험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므로 더 조심해야 됩니다. 내가 혹시 불공정하게 한 쪽 편을 들지 않나 하고 의식적인 노력을 하지 않으면 공정해지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모두가 공정하려고 노력하는 태도가 필요하고 저는 그것이 신사적이고 숙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친구 중에 기독교 신자가 아닌 대학교수가 있는데 다른 교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다른 교수는 이 친구하고 경쟁관계에 있는 사람입니다. 사이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그 다른 교수를 칭찬을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훌륭함을 이야기합니다. 제가 굉장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후로 저는 그 친구 말을 콩을 팥이라 해도 다 믿습니다. 그 정도의 인격을 우리가 갖추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 미워하는 사람의 훌륭한 점을 훌륭하다고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에게는 공정성이 생명입니다. 지도자가 공정성을 상실하면 그 지도력은 그 날로부터 사라져 버립니다.
회사 사장이 불공정해서 자기 후배는 진급시키고 후배 아닌 다른 사원은 아무리 성실히 일해도 진급 안 시키면 후배도 일 안하고 다른 사원도 일 안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 회사는 망합니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에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가정조차도 자녀들에게 공정해야지 억울하게 차별대우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공정하심의 모습을 본 받아서 우리도 공정한 사람이 되어서 이 사회에 어느 정도 질서를 심을 수 있고 사람들의 신임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손봉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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