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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0:30-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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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노은기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2011년 7월 31일 주일예배 말씀증거 |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선하게 산다는 것은?
(누가복음 10장 30-37절)
2011년 7월 31일 주일예배 말씀증거
노은기 형제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지금 선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어떻게 살라 하시겠습니까?
헛된 욕망의 옷을 벗으라 하시렵니까?
네 마음을 비우라 하시겠습니까? 부족한 것의 생각을 채우시고,
이 시간 당신과 같이 호흡하며, 당신의 숨결 속에 젖어 들기를 원합니다. 인도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선하게 산다는 것, 선하게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가는 삶 일 까요? 요즘 저 자신에게 계속적으로 물어보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또 제 아내에게는 이것저것 사소한 것들을 많이도 물어 봅니다. “여보! 이렇게 하는 것이 맞아요? 저것 어딨어요? 이것이 무엇이지요?”라고 할 때마다 저를 쳐다보는 아내의 눈빛은, “아이고 왜 그렇게 사는 기여.” 하며, 마치 어린 아이를 쳐다보는 눈빛입니다.
선하게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착하고(善) 아름답게(䁢)사는 것입니까? 여러분들에게 여쭤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 속에서도 나이가 드니까 질문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제 아내가 곁에서 한마디 합니다. “여보! 나는 괜찮은데, 하나님께 너무 지나친 질문은 하지 말아요.”라고 합니다. 왜냐고 물으니까. 너무 성가시게 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궁금하거든 네가 천국으로 와라.”고 하신답니다.
그래서 저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천국은 좀 늦게 가더라도 새길교회 자매 형제님과 더불어 예수 따르미의 삶을 더 많이 살고 싶어, 하나님께 질문을 자제하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선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인천공항 옆 조그마한 섬 마을에서 농부로서 살려고 농사일을 배우며 살아 온지가 25년이 흘렀습니다. 농부는 정월부터 씨앗을 심기 시작하면 1년 내내 농사일에 몰두하게 됩니다. 하루 이틀 여행하는 것도 마음대로 못합니다. 하루라도 빠뜨리고 돌보지 아니하면 사고가 납니다. 요즘 같은 장마철에는 삽을 어께에 메고 논두렁 밭두렁에 서있어야 합니다. 무너진 곳이 없나 장마 비에 작물이 넘어지지는 않나, 밤새 잘 있나 새벽같이 나가 문안해야 합니다. 행여 다른 잡풀들이 심어놓은 곡식을 헤치지 아니하나 돌봐 줘야 합니다. 밭에 심어놓은 작물들은 주인의 발자국소리를 듣고 자란답니다. 그래서 새벽부터 해질 무렵까지 시간 나는 데로 들에 나가 돌아 봐야 합니다.
요즘은 동물들을 함부로 잡지 못하게 하니까 저희동네에는 고라니가 많이 번식하여 밤이 되면 여기저기 뛰어 다닙니다. 어찌 보면 낭만이 있고 재미있는 것 같지만, 농부에게는 아닙니다. 정성들여 가꿔온 농작물을 밤새 뜯어 먹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고라니가 미워집니다. 잡아 없앴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그 마음속에 선한 삶이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까요?
가끔 멧돼지가 농작물을 헤치고 집안까지 들어와 사람까지 헤친다는 데 걱정입니다. 그런 치열한 생존경쟁가운데 어떻게 선한 삶을 살 수 있을 까요?
저는 퇴직을 하고 농사나 지으면서 편하게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동네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통장을 하라 합니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승낙을 하고 나니까. 어떤 사람은 지역에서 동대장을 한사람이 왜 통장을 하는냐? 하는 눈치고요. 반면에 또 어려운 일을 맡으셨군요.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반응을 나타냅니다. 경계하는 사람도 있구요. 그냥 말없이 주민들의 눈과 귀가 되고 발이 되어 봉사하며, 선하게 살아보려 했습니다. 그런데 일을 하다 보니 선하게 산다는 것이 어렵게 되어 버렸습니다. 주민을 위해서 행정기관과 마찰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또 자기만을 생각하는 주민의 요구를 어떻게 이해와 설득으로 인도 할 것인가? 어렵습니다. 사회구조의 부조리가 관행이라는 악습으로 재현됩니다. 잘못된 정부시책도 혹시 불이익 당할까 봐 말이 없습니다. 소수자와 약한자의 인권은 무시됩니다, 원주민에게 외지인은 차별대우를 받습니다. 행여 자기 것을 빼앗길까봐 웅크리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마을 지도자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버스 노선 하나 바뀌어도 어떤 사람은 좋아지고 어떤 사람은 나빠지고, 선한 생각을 가지고 말을 한다 해도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얽혀서 잘 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그러려니 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들 엇더며, 져런들 엇더 료,
만수산(萬壽山) 드렁츩이 얼거진들 엇더 리,
우리도 이 치 얼거져 백년(百年)지 누리리라.
고려 말 충신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하여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읊던 하여가(何如歌), 그 시가 새삼스럽게 제 마음을 요즈음은 흔들어 놓습니다.
어느 날 어린 도망자 한명이 적의 눈을 피해 숨으려고 조그마한 마을에 찾아들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도망자에게 친절히 대해 주고 묵을 장소까지 주었습니다. 그러나 도망자를 찾는 병사들이 와서 그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묻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리게 되었습니다. 병사들은 동트기 전까지 도망자를 내놓지 않으면 마을에 불을 지르고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사람들은 목사를 찾아가서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 보았습니다. 목사는 그 소년을 적에게 넘겨주어야 할지 아니면, 마을 사람들이 다 죽게 내버려 두어야 할지 고심하다가 혼자 방으로 들어가 성경을 읽으며 동트기 전에 해답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꽤 시간이 흘러 새벽녘이 되었을 무렵 목사는 말씀 한 구절을 보게 되었습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죽는 편이 낫다.” 목사는 성경을 덮고 병사들을 불러 그 소년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려 주었습니다. 병사들은 도망자를 끌고 가 죽였습니다.
마을에서는 축제가 벌어 졌습니다. 목사가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사는 함께 기뻐하지 않았고 깊은 슬픔에 잠긴 채 자신의 방에 틀어 박혀 있었습니다. 그날 밤 한 천사가 그에게 찾아 와 물었습니다. “너는 무슨 일을 했는가?” “저는 마을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도망자를 적군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네가 메시야를 넘겨주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그러자 목사는 괴로워하며 반문했습니다. “제가 무슨 수로 그것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자 천사가 말했습니다. “성경을 읽는 대신 단 헌 번이라도 그 소년을 찾아가 그 눈을 들여 다 보았다면 너는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헨리 나우웬의 ‘상처 입은 치유자’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목사가 성경에서 눈을 돌려 그 소년의 눈을 들여다봤다면, 그 소년의 진정성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듯 우리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눈을 돌려버리고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는 것 은 아닌가. 내 이웃의 진실을 경전이 주는 표피에 써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먼저 30절 이전 구절(25절~29절)말씀을 보면 선한 이웃관계에 대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가 주어진 배경 설명으로, 한 율법사가 영생의 조건을 묻고 다시금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이웃이 누구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30절~35절은 선한 이웃관계의 전형을 제시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자체를 이야기하고, 36절~37절은 주님께서, 자신은 당연히 이웃사랑을 베풀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이웃사랑의 대상에 대해서만 물어본 율법사에게 참 이웃사랑을 베푸는 자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까지 다시 물으시면서 나아가 이웃사랑의 실천까지 촉구한 사실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말씀에 나오는 사람들을 한 사람씩 주의 깊게 들여 다 보고 싶습니다.
첫째로 율법 교사가 나옵니다. 율법교사는 율법에 능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권위자들이라고 자부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공의를 무시하고 자기의 의가 최고인 사람들입니다. 자기만이 옳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무엇을 해야 영생하는 법을 몰라서 물었을까요? 예수를 시험하여 묻고 있다고 했습니다. 교만한 자 일 것입니다. 교만은 선한 삶을 사는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그 길로 내려가는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성직으로 임명되어 성전에서 종사하는 종교의 사역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목사나 신부를 가리키는 말로, 헬라어로는 거룩을 뜻하는 단어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 날 주일날 제사장은 거룩하게 지내야 합니다. 그래서 피 흘리는 이웃을 외면합니다. 부정한 것을 만지면 안 됩니다. 고통당하는 이웃을 보고도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은 금기시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레위사람입니다. 레위사람은 다른 지파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속한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 중에서 제한적이지만 제사장도 될 수 있었고, 성막에서 봉사 할 수 있는 특권으로 십일조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주일날 하나님에 관한 일 외에는 다른 일을 하는 것은 죄라고 생각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가는 것은 그 사람들의 신앙에서는 지극히 정당하고 합리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넷째로 강도 만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사람입니다. 예루살렘과 여리고는 하나님의 성전과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을 대비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 가다가 강도를 만났다고 이야기 합니다. 상황 상에는 물론 성지인 예루살렘에 가서 경배를 드리고 내려가는 사람일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야기에서 예루살렘의 부패한 모습을 보고 또 종교지도자들의 타락한 현실에 실망하여, 선한 삶을 찾아 시골로 내려가는 사람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불의와 항거 하며, 사회의 구조 악에 맞서 싸우다 처참하게 무너진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율법사도 제사장도 레위인도 외면합니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 두고 갔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이런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200여 일 째 35m 고공 크레인에서 정리해고 등 노동현장의 구조 악을 외치며 농성하는 사람.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일생을 보내다가 수 십 년이 지난 후 겨우 무죄 선고를 받아 사회로 돌아온 억울한 자. 고용 및 계약직으로 같은 환경, 같은 조건으로 근무하는 데 정규와 비정규라는 이유 때문에 차별대우를 면치 못하는 고용현장의 울부짖는 노동자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선한 삶은 어떠한 삶일까요?
마지막 다섯째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이웃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은 원수처럼 지내는 데도 가던 길을 멈춰 섭니다. 상처를 치유 합니다. 자기가 타고 가던 나귀에 태워서 여관으로 가서 저녁동안 돌봐주며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냥 떠나가도 되는 데, 돌아오는 길에 부족한 치료비를 갚겠다고 하며 그의 치료를 부탁하고 갑니다. 우리 여기계신 교우 여러분들은 그런 상황이라면 틀림없이 그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가가 없다고 굶주려 죽어가는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는 자와 명예와 탐욕에 눈이 어두어 자기의 의(義)에 도취되어 있는 자, 그리고 약하고 어려운 사회구조 속에서 대의를 위하여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대의정신과 같은 것들이 선하게 살려하는 기준은 분명히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다섯 명의 사람을 만났습니다.
혹시 제가 얄팍한 지식으로 교만하지 않았나. (율법교사)
아니 제가 상대방과 대화할 때 내 생각 만 옳다고 주장하지 않았나. (제사장)
내 의(義)를 빌미로 상대를 무시하지 않았나. (레위인)
반성하여봅니다.
또한 제사장이 지나 갈 때에 어떤 핑계를 가졌을까? 레위인이 지나갈 때 무슨 핑계가 있었을 까? 성경에 나타난 제사장과 레위인의 역할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도 핑계거리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추운겨울, 출근길에 연탄 손수레를 밀고 가는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그 할머니는 작은 언덕인데도 힘이 부쳐 길을 오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출근시간이 다소 지연된다 하더라도 할머니의 수레를 밀어주고 출근해야 마음이 편한 사람으로 살아보려고 하는 데, 그것도 쉽지 않네요. 교우 여러분은 그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천국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것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에 꽃처럼 사라져간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낭송함으로 마치겠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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