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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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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일상생활사역(日常生活使役) 연구소 - http://www.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mc_data&wr_id=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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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교회가 온다」
The Shaping of Things to Come: Innovation and Mission for the 21c Church
2011년 8월 22일 교회2.0목회자운동 8월 정기모임 발제문
지성근 목사(IVF일상생활사역연구소,부산함께하는공동체교회)
개인적 여정과 「새로운...이 온다」시리즈
지금까지 나온 세권의 IVP의 「새로운....이 온다」시리즈는 한편으로는 우연히 결성된 조합이지만, 다른 편으로, 특히 내 개인의 삶의 여정에서 생각해 보면 우연하다고 할 수 없는 결합이다. 특히 필자 개인의 최근 10년여의 여정에서 이 세권의 책은 순차적으로 심대한 영향을 미친 책들이다.
우선 이 여정(journey)의 출발점은 20세기 말 십 수년간의 캠퍼스 사역의 고민, 즉 “변화하는 시대(혹은 세대)속에서 어떻게 젊은이 사역을 할 것인가?”하는 화두에서 시작되었다. 이때 만나게 된 것이 「새로운 청년사역이 온다」(처음 1997년에 Generating Hope라는 제목으로 나왔다가 2004년에야 Emerging Hope라는 제목으로 바꾸면서 세대논의에서 포스트모던 문화논의가 심화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제목은「새로운 청년사역의 희망이 온다」정도가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로 결국 번역 출간된 책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관심은 문제가 단순히 청년사역의 범주를 넘어서는 차원에 있다는 직감에 이르게 되었고 그것은 결국 시대사적인 변화(단순히 잠깐의 변덕이 아닌)의 자리에 우리가 서있다는 인식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인식에 영향을 준 여러 인물들, 사건들, 책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브라이언 맥클라렌과 그의 삼부작 (그 첫 번째 책이 2001년에 나온「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온다」A New Kind of Christian 이다)은 그 내용과 전달방식에 있어서 독보적이었다.
이런 책들로 인해 자연스럽게 형성되게 된 문화에 대한 이해와, 같은 시기에 일어나고 있던 “선교적 교회”(A Missional Church, 사실 나는 이것을 “보냄받은 교회”라고 계속 주장하는 편이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서로 만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기에 걸맞는 책을 만나게 되는 데 그것이 바로 「새로운 교회가 온다」(The Shaping of Things to Come 2003)이다.
사실 나 스스로 새로운 문화와 세상의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기존 교회의 사역자로서 한계를 많이 느끼는 상황에서 개척을 꿈꾸는 입장이었고 특히 세상속에서 표류하고 있는 21세기 초엽 한국교회의 모습으로 인한 고민이 이만 저만이 아닌 시점이었기 때문에 이 책을 만난 것은 그야말로 나로서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과 같았다.
고민 속에서 이 책들을 한 권, 한 권 차례로 읽었을 때 그 때는 이것들이 빨리 번역되어 함께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생각대로라면 시리즈의 지금 순서대로가 아니라「새로운 청년사역이 온다」「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온다」그리고「새로운 교회가 온다」의 순서대로 책이 나왔을 것이다. 그렇게 되지는 못했지만 이제 이렇게 이 세권의 책이 하나의 시리즈로 묶이게 되어 오히려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 여겨지니 사람의 생각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타이밍이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크리스텐덤 모드의 교회
[일상 하나님의 신비][바보 예수](ivp)의 저자인 마이클 프로스트와 알란 허쉬가 쓴 <새로운 교회가 온다>원제를 번역하면 [다가올 미래의 윤곽: 21세기 교회를 위한 혁신과 사명]이란 책은 A Emerging Missional church(신생의 선교적 교회, 보냄받은 교회)가 21세기, 탈 크리스텐덤(콘스탄틴)시대의 희망이다라고 말한다. 다양한 프로그램의 시도나 예배형식의 변화가 핵심이 아니라 얼마나 "보냄받은(sent-ness) 의식"을 갖느냐가 선교적 교회, 보냄 받은 교회의 관건이다. Christendom(기독교왕국) 모드의 교회는 그 기본적인 DNA가 변화되지 않는 한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크리스텐덤 사고를 지닌 교회의 특징은 3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매력을 끄는 데(끌어모으는데 attractional) 교회의 촛점이 있다. 교회가 내부적으로 잘 갖추어 있으면 자연스럽게 그 주변 마을과 도시의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오게 될 것이라고 전제한다. 이를 위해 프로그램을 구비하고, 내부환경을 바꾸고, 예배음악을 바꾸는 등 애를 쓰지만 정작 사람들을 일정한 장소로 끌어 모으는 데 관심을 쓰고 있을 뿐 세상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
둘째, 이원론적이다. 사실 이런 이원론적인 사고 때문에 교회가 매력적이 되려하는 결과를 낳는다. 거룩한 것(Sacred)과 거북한 것(Profane:더러운)을 구분하는 이 이원론은 지난 2000년간 교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왔다. 신앙을 가정과 일터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삶과 연결시키지 않는 어떤 신앙도 결국은 잘못된 교회의 방향을 낳게 하는 것이다.
세째, 종교적이고, 관료적인, 위에서 아래로의 수직적인 리더십을 지닌다. 모든 신자가 동일한 "제사장"이란 사실에 강조를 두지 않는 신약적 교회의 진정성(Authenticity)을 담아낼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속에서 함께 후사가 된 의식이 없는 교회는 "보냄받은교회" "선교적교회"가 될 수 없다.
위에 언급한 의식, 즉 매력을 통해 끌어 모으기 위해 애쓰고, 이원론에 사로잡혀 일상의 삶에 대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관심을 두지 않으며, 관료적이며 위에서 아래로의 리더십에 의존하는 교회는 어떤 새로운 시도를 하든지간에 결국은 크리스텐덤, 콘스탄틴 교회의 한계를 노정할 수 밖에 없고 이 한계안에 있는 한 21세기 세상을 향해 무기력한 모습으로 설 수 밖에 없다고 마이클프로스트와 알란 허쉬는 주장한다.
21세기 선교적 교회를 꿈꾼다
Post-Christendom(크리스텐덤이후)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21세기 환경속에서 꿈꾸어야 하는, 21세기 교회의 소망이 되어야 하는 A Missional Church(선교적교회 혹은 보냄받은 교회)에 대해 생각해 보자. 기존의 크리스텐덤(기독교제국)사고가 갖고 있는 특징을 세 단어로 요약하였다. 매력을 통해 끌어모으는 교회(Attractional), 이원론적 영성(Dualism), 계층적 리더십(Hierachical)이 마이클 프로스트와 알란 허쉬가 이야기하는 통상의 기존교회의 특징이다.
이제 적극적으로 선교적 교회, 보냄받은 교회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위에서 언급한 크리스텐덤 사고를 뒤집어 놓을 때 그 특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매력을 끌어서 사람들을 오게하는 방식의 교회를 하는 것(doing church)이 아니라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는 성육신적인 교회론(Incarnational ecclesiology)이
첫번째 특징이다. 세상으로 나가서 동일시하고 성육신하는 방식의 교회에 대해서는 수많은 케이스스터디가 필요하고 그것이 도움이 될 것인데 저자들은 실제적인 사례들을 이책에서 기록하고 있다.
두번째로 이원론적인 영성(혹은 제자도)이 아닌 메시아적 영성(Messianic Spirituality)이 필요하다. 메시야로 이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듯이 문화와 세상에 참여하는 영성이 필요하다.
세번째로 계층적인 리더십을 극복하고 사도적 형태의 리더십을 확립해야 한다. 이것은 다름 아닌 초대교회의 리더십 형태 즉 사도와 예언자와 전도자와 목사와 교사(APEPT)와 같이 은사에 따른, 그리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팀사역형태의 리더십을 의미한다.
<새로운 교회가 온다:21세기 교회를 위한 혁신과 선교>의 이런 제안이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의 토양에 어떻게 접목되어야 하는지는 우리의 몫이다. 주변에서 오늘 경험하는 교회 때문에 아파하는 신음들을 듣는다. 고통과 분개, 안타까움은 비젼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필수요소라고 돌아가신 죤 스토트가 말했다. 이제는 분개를 뛰어 넘어 꿈을 꾸어야 할 때이다.
I. 성육신적 교회론
경계(boundary)사고와 센터사고
매력을 통해 사람들을 '안'으로 끌어 모으려는 공동체는 ‘안'과 '밖'을 구분하는 일종의 경계를 설정하는 “경계사고”를 한다. 이 경우 안에 있는 사람들은 좋고 선하며 늘 바깥에 있는 이들을 가르칠 것이 있는 존재이고 반대로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흠이 많고 죄가 많아서 반드시 안으로 데리고 와서 변화를 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반대로 성육신적인 접근을 하려는 공동체는 누구나 모든 이들이 일종의 중심을 향하여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모든 이들의 고유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그들이 한발짝이라도 더 중심에 가까이 가도록 도우려는 생각을 한다.
경계사고와 센터사고를 울타리와 우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울타리를 치는 것은 목축의 경우 안과 밖을 구분하여 자기의 가축과 남의 가축을 구분하려 하는 데 이유가 있는데, 대개는 제한된 땅에서 이렇게 한다. 반면에 호주의 outback(광야)처럼 너무나 광활할 곳에서는 기본적으로 땅이 워낙 넓기 때문에 울타리를 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래서 물이 나는 우물을 중심으로 가축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가 모이곤 하는 방식을 택한다고 한다. 우물에서 신선한 물이 보장되는 한 가축들은 언제나 우물 가까이에 있게 되는 것이다.
기독공동체가 경계사고를 할 때는 크리스챤과 비그리스도인을 구분하고 비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는 것처럼 살고 생각하며 그래서 전도를 할 때는 언제나 우리 울타리 안으로 들어 오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러나 센터사고를 하는 공동체는 크리스챤과 '아직 크리스챤(not-yet Christian)'을 서로 다른 존재로 생각하기 보다는 추구의 과정의 차이로 이해하고,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잠재력과 가치를 인정하여 배우려고 하는 생각으로 삶을 나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기독공동체는 어떤 사고를 하고 있는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 것인가? 이것은 단순히 프로그램이나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더 근본적인 의식의 변화, 사고방식의 전환, 패러다임의 전환의 문제이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새롭게 다시 시작한다면 어떻게 다르게 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하고 저자들은 그 질문에 이런 대답을 하고 있다.
1.잘 들어야 한다(Listening to your patients)
전통적인 모델은 많이 말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역할이란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델을 전혀 다른 문화종족에게 가서 그대로 수용할 것을 요구하기 보다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수용되기 위해 그들의 생각과 문화에 대해 듣는 일이 필요하다. 마치 선교사가 다른 문화에 가서 사역을 하려 할 때 그 문화 속에 들어가 같이 먹고, 놀고,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상황화와 영혼에 속삭이기의 기본이다. 진실하게 듣는 것과 진정한 함께함이 미그리스도인들과 연대하는 영성을 개발하는 법이라고 저자들은 영혼에 속삭이기에서 말한다.)
2.'평화의 사람들'을 발견하라
건물에서 근사한 프로그램을 통해, 그리고 인쇄매체든지 전자매체든지 근사한 홍보를 하는 것에 엄청난 예산을 써서 시작하는 교회개척이 전통적인 방식이라면,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72명의 제자들을 내 보내실때 말씀하신 것처럼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고" 평화의 사람, 좋은 평판이 있고, 영적으로 열려 있으며, 자신의 마을이나 집단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을 통해, 그 관계의 네트웍을 통해 운동이 일어나는 방식을 택하라는 것이다. (누가복음 10장은 반복적으로 묵상할 필요가 있는 중요본문이다.)
3.사람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곱셈 번식하라(Multiplication, not Addition)
새로운 시대에는 작은 것이 훨씬 강한 방식이 될 수 있다. 교회당의 좌석을 더 많은 사람으로 채우려고 생각하기 보다 성육신적인 회중(incarnational congregation)을 늘리는(번식시키는)것에 강조를 두어야 한다. 보냄받은 선교적 성육신적 교회는 자신을 목적으로 삼기보다 한 과정으로 여긴다. 교회를 전체적이고 유기적인 전도의 리듬의 한 전략적 부분으로 여기므로 때로는 한 시즌으로 끝날 수도 있고 때로는 한 세대가 될 수도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자체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재생산하는 것이므로 조직이라기보다는 운동으로 교회를 이해하는 지도자들의 완전한 패러다임전환이 요구된다.
4.지도력이 중요하다.
상상력 풍부하고, 성경적이며 경건한 지도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문화적인 것과 성경적인 것의 차이를 구별하는 지혜가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며, 특히 상호평등한 의식과 협력적인 팀사역을 할 수 있는 협력의식이 포스트모던시대의 지도력에는 필수적이다.
5.건물을 사용할 때 조심할 것
매체가 메세지이다.(The medium is the message). 한 번 건물이 세워지면 교회 프로그램과 예산은 반드시 그것에 의해 많이 좌우되어질 것이다. 이자를 갚아야 하고 이를 위해 좌석이 채워져야하고 헌금이 많이 나와야 하고, 그래서 결국 매력을 통래 사람들을 끌어 모으려는 형태의 교회가 강화될 수 밖에 없다. 아무리 겉으로는 교회 밖에서의 섬기는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암묵적인 언어가 '교회에 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라고 이야기하게 되면 결국 교회당 안을 거룩한 곳, 교회당 밖을 속된 곳으로 여기는 생각을 은연중 심게 된다. 우리가 건물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런 점을 늘 유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4번과 5번은 후에 반복적으로 확대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다가 소위 “제3의 장소” 개념은 성육신적 선교의 목표인 진정한 연결, 진정한 보여줌, 진정한 다가감, 진정한 만남을 위해 원용할 수 있는 사회학적 개념인데 저자들은 이 개념을 원용한 공동체의 예를 이야기한다. 그리스도인과 미그리스도인들이 의미있고 안전하게 상호 교류할 수 있는 공동의 장소로 술집, 카페, 스포츠 팀등의 예를 들고 있다.
II. 메시야적 영성
헬라적 사고의 극복과 히브리적 사고의 재발견-일상생활의 영성의 발견
보냄받은 공동체로서 성육신적인 사역을 할 때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실제적이고 지속가능한 영성없이는 이 일은 불가능하다. 선교적 공동체 (즉 보냄받은교회 missional church)가 담아내어야 할 복음의 내용(콘텐츠)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선교적 공동체가 되고 실행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대안적 기독교영성의 모습에 대해 저자들은 이야기한다.
마이클프로스트와 알란허쉬는 선교적이고 메시야적인 영성이 무엇인지 보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돌아가야 하고, 무엇보다도 크리스텐덤사고의 핵심적 연원이 된 그리스적 사고에 물든 교리적(교리 자체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인 예수가 아니라 역사속에서 살고 호흡했던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얼마나 크리스텐덤 기독교가 그리스사상에 물들어 왔는지를 절감할 필요가 있고 어떤 점에 있어서 히브리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예수와 성경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보냄받은 공동체"를 가능케하는 영성적 틀로서 "메시야적 영성"(a messianic spirituality)을 회복하려면...
첫째 구체적이고 역사적이 되어야지 너무 사변적이고 이론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올바른 사고가 올바른 삶을 낳는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올바른 사고를 배웠다고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단순히 올바른 사고(orthodoxy)를 강조하는 것을 넘어서서 올바른 삶(orthopraxy)을 강조해야 한다.
둘째 성경적 신앙의 계시의 도구로서의 역사의 가치를 재발견해야 한다. 역사란 전쟁과 평화, 간음과 음모,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가 있는 삶의 자리요 한마디로 엉망진창(mess)이다. 그래서 a.d.300년이후의 크리스텐덤 교회는 그리스적 이원론에 의거하여 하나님이 이런 엉망진창의 역사속에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든 모르고든 거부하려 했다. 결국 하나님 관념도 우리의 신앙도 이 땅의 역사를 떠나버린, 사변적인 것이 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가 바로 우리가 살고 사역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현현해야 할 자리임을 확인하는 영성이 필요하다.
콘스탄틴, 크리스텐덤 기독교의 그리스적 사고인 이원론을 넘어서 히브리적 사고와 깊은 관련성이 있는 일상(Everyday Life)을 구속하는 영성이 새로운 시대의 교회를 위해 필요한 영성의 주된 내용이 될 것이다. 이원론때문에 서구 기독교는 즐거움, 열정, 육체적 욕구와 같은 것들을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 바깥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오직 영혼에만 촛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어왔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선교적인 자원으로 활용하는 영성적 틀이 필요한데 그것이 다름아닌 "일상생활의 영성"일 것이다.
방향이 올바로 설정된 즐거움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동기를 제공하는 것이 된다. 한 랍비가 이야기했듯이 "언젠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즐기라고 주신 즐거움을 우리가 얼마나 누렸는지 아니면 못 누렸는지를 갖고 판단하실 것"이다. 구약의 토라가 단순한 법률적 명제로 점철되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성전에서 어떻게 해야하는가 뿐 아니라 나귀가 웅덩이에 빠졌을 때, 주방에 흰 곰팡이가 생겼을 때, 여성의 월경과 관련하여 등 인간의 모든 삶의 국면을 하나님과 연결시키려는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으면 인간의 모든 삶은 거룩한 것이다.
신명기 6:4의 shema(들으라 이스라엘, 하나님은 한분이신 여호와시니)의 하나님 역시 단순히 '영원하고 불변하는 하나님"이라는 그리스적 개념의 사변적인 단일신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삶의 각영역마다 그곳을 다스리는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당시 주변의 다신교적 상황속에서 하나님만이 그 모든 삶의 영역을 다스리는 분이시라는 실제적인 단일신론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삶의 모든 국면이 한 분 하나님, 여호와의 다스림속에 있고 통일될 수 있기에 삶이 사역이며, 일이 선교고, 놀이가 예배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거룩이란 크리스텐덤 기독교가 그랬듯이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라기 보다는 매일의 삶을 거룩하게 하려고 우리가 하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선교적 거룩', 메시야적 영성, 현실과 역사와 일상생활을 긍정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새롭게 방향을 찾는 영성이 "육화된, 보냄받은 선교적 공동체"를 채우고 지속하게 하는 동력이 될 것이다.
성례가 되는 행동
행위는 성례전적일 뿐 아니라 그 자체로 계시적이다.
오직 메시아적 영성만이 우리에게 일상을 거룩하게 하며 하늘과 땅 사이의 일상적인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자원을 제공한다.
medium(매체)이 message다.
60년대에 마샬 맥루한이 "매체가 메시지이다"란 말을 했었다. 그가 매체라고 했을 땐 단순히 미디어만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기술이나 도구들을 다 아우르는 의미였다. 그러므로 이 말은 이렇게 바꾸어 쓸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도구를 만들지만, 결국 도구가 우리를 빚게 된다."
마이클 프로스트와 알란 허쉬는 이 맥루한의 이론을 크리스텐덤시대의 교회가 사명을 행하기 위해 사용한 도구(tools)에 적용하여 생각한다. 그래서 '설교''건물''신학교'들에 대해 신학적인 성찰을 하고 있다.
포스트모던시대의 문화적 언어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은 채 오직 혼자 이야기하는 설교만이 유일하고 중요한 매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크리스텐덤 교회의 철학적 수사기법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 것이지, 성경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나아가 혼자만 하는 설교는 회중을 설교자에게 중독되게 한다. 맥루한의 이론대로 우리는 설교를 고안해내지만(실은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으로부터 기술을 빌려와서), 거꾸로 설교가 우리를 만들어낸다. 다음 주일 목사가 교회에서 설교하지 않기로 작정해보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면 알수 있을 것이다.(컴퓨터중독자가 컴퓨터를 하지 못할 때 생기는 일과 비슷한 일이 생긴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건물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자. 맥루한의 말대로 "우리가 건물을 빚고 건물이 또 우리를 만든다." 실제로 건물이 없는 교회를 사람들은 잘 생각하지 못한다. 건물이 없는 교회는 뭔가 불완전한 교회로 생각하기도 한다. 크리스텐덤 기독교시대에야 비로소 큰 건물과 첨탑등의 구조물들이 생겨났지 실제로 가장 본질에 충실하고 효과적인 사역을 했던 시절을 생각하여 보면 빌딩을 소유하지 않을때가 그랬다는 것을 교회사를 보면 알수 있다.
실제로 건물이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도구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건물이 사람들을 수동적인 소비자가 되게 하고 무대 위에서 전문가들이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 같은 분위기가 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매우 정적이고, 매력을 끌려하며, 큰 돈을 들이는 건물보다 주변 이웃과 하나님의 백성사이에 근접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우리의 '도구'로서 건물을 디자인할 필요가 있다.
신학교는 훈련시스템으로서의 도구이다. 그런데 매체인 신학교가 주는 암시적 메시지는 무엇인가? 방안에 수많은 의자들이 앞에 있는 강의자를 향하여 있는 구조는 어찌 그리 교회 건물의 구조와 비슷한지 놀랄만한 일이다. 전문가가 지식을 전달하는 모델이 신학교에서 교회로 연결되어 지는 것이다. 이런 강의모델보다 더 성경적인 모델은 행동-성찰(action-reflection)스타일의 학습모델이 필요하다. "academy"스타일의 매체가 과연 제자를 삶고 선교하는 우리의 메세지에 적합한 모델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가장 중요한 메시지의 전달매체는 우리 자신이다. 유일하고 핵심적인 설교자의 설교는 설교단에서 하는 말로가 아니라 그의 삶에서 오는 것이다. (We are our Messages!) 보냄받은 교회, 육화된 교회를 위한 메시지는 그 공동체를 섬기고 이끄는 리더십의 삶속에 나타난 비젼과 가치를 보면서 그 공동체안에서 서로 관계를 맺는 사람들의 삶이 매체가 되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III. 사도적 리더십
리더십과 상상력
포스트모던시대의 성육신적 공동체는 유지 관리(maintenance)를 위한 리더십이 아니라 사명(mission)을 위한 리더십(apostolic leadership)이 필요하다. 또한 한사람의 리더십에 의존하기 보다 여러 사람이 공동의 리더십을 통해 공동체를 조화롭게 은사를 따라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리더는 액셀레이터의 역할(APE타입-사도,선지자,전도자=CEO기업가형, 질문자형, 스카우터형)을 하고 어떤 리더는 (PT-목사, 교사=화합형, 조직화형) 브레이크의 역할을 함으로 유기적이고 열매맺는 공동체를 가능케할 것이다.
현재 기독공동체나 교회는 정형화된 리더십 모델이 지배적이고 이런 리더십들은 항상 공동체를 예견가능하고 무미건조한 모습으로, 그리고 남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이끌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세기의 문화는 상상력(imagination)이 선교와 사역을 위해 매우 중요한 자원이 되는 시대이다. 매우 좌뇌(이성중심)중심적 문화에서 이제 우뇌(감성중심)문화로 변화해가는 시점에 복음을 이 시대에 제대로 커뮤니케이션하기 위해서 상상력과 창의성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실용적인 이유를 넘어서는 보냄받은 교회 자체의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다. (공동체적, 균형적 리더십)
아인슈타인이 상상력에 대해 언급한 세가지 말이 선교적교회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첫째,'상상력은 지식보다 더 중요하다.' 지식정보만으로는 유용하지 못하다. 오히려 상상력과 창의력, 디자인을 통해 이런 단순한 데이터를 뭔가 유용한 것으로 바꿀때 그것이 쓸모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도적 지도력은 오랜 행습과 예배의식들에 새로운 의미를 창의적으로 부여하는 자이며 재해석하고 그 의미를 새롭게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
둘째, '상상할 수 없으면 실행할 수도 없다.' 현재 지도자들에게 부족한 것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theological reflection의 부족) 집을 짓든지 예술 작업을 하든지 무슨 일이든지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에 일을 하여야 한다. 스티븐코비는 이것을 "첫번째 두번째 창조"라고 했다. 첫번째 창조는 마음속에서 목적을 갖고 하는 창조이다. 그리고 나서 두번째 창조인 실행이 가능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동체에서 리더십의 역할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고 꿈을 꾸고 비젼을 가지게 만드는 것이다. 선교적 공동체의 리더는 자신의 꿈을 강요하는 자가 아니다. 오히려 공동체의 각자의 꿈을 모아서 그 꿈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의미를 제공하는 (the management of meaning) 역할을 리더가 하여야 하는 것이다. 리더는 이를 위해 공동체가 상상력과 창의력을 가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네모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네모사고와 다른 방식의 사고를 해야 가능하다.' 다른 말로 패러다임쉬프트가 리더에게는 늘 필요하다. 이를 위해 리더는 1.거룩한 불만족을 격려하고, 2.전복적인 질문기법을 사용하고, 3.늘 초심자(주변인)처럼 생각하며, 4.위험을 무릅쓰고 자신과 조직을 위험에 노출시켜야 하며, 5. 변화의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혁명을 조직하기
보냄받은 교회를 운동으로 인식하고 운동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 조직의 생명주기를 이해하고 Sigmoid 성장곡선으로서의 영적인 갱신운동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것이 필요하다. 하워드 스나이더등의 관점에서 얻을 수 있는 갱신 운동의 본질은 1.유력한 교회제도와의 긴장가운데 갱신운동은 존재하며 그러므로 기성체제로부터 모종의 반대를 경험하게 되며, 2. 변화를 시작하고 촉진시키는 데 있어 엘리트가 아닌 비전통적이고 변두리에서 나오는 리더십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운동의 정서가 배양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무엇이 아닌 중심에 두는 것이 절대적이다. 경계를 모호하게 하므로 엄청난 다양성을 배양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성을 강조하는 것이 보냄받은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일다. 여전히 예수님은 교회의 주요한 선교적 자산이다.
새로운 선교적 시도와 교회 개척을 하려는 모든 이들의 출발점으로 “생태적 리더십”의 원리를 저자들은 제안한다. 1)더 작고 더 ‘유기적’이고 선교적인 단위의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고 대형교회를 모델로 삼고 교회를 세우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는 일반적인 전제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크기와 관련하여 특별한 교회 건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 더 작고 더 다양하며 덜 조직적이고 삶 지향적이며 선교적이고 관계적인 신앙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프로그램과 관련하여 교회의 삶을 제도화하는 사역의 빈 곳을 채워 넣기 위한 수단으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다.
또 다른 요소는 교회가 어떤 모양을 가져야 할지 또 어떻게 조직되어야 할지는 미리 알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본질과 운명의식과 같은 DNA를 가지고 있다면 그들의 특별한 환경이 형태와 구조를 대부분 결정할 것이다. 2)교회로 하여금 복음에 진실하여 선교적으로 정직하게 해 주는 것이 ‘재생산 가능성’이다. 복음은 본질상 전달되는 메시지이며 이 복음이 전달되지 못하면 교회는 주어진 상황가운데서 불임의 상태에 있게 된다.
마치 좋은 아이디어가 매체인 인터넷이나 SNS를 통해 엄청난 일을 일으키듯 복음이 매체인 유기적인 교회 구조를 통해 재생산 가능하며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3)교회가 장기적으로 과업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것이 ‘지속가능성’이다. 여기서 저자들은 사역팀을 위한 후원시스템에 대해 구체적인 조언을 하고 있는데 특히 한국의 상황에서 많이 토론해야 할 주제인 것 같다.
크리스텐덤에 길들여진 비선교적인 교회와 안전한 중산층 생활로 마비되고 무기력해진 이들을 불러내어 용기를 갖고 새로운 시도를 하게 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배가 만들어 진 이유는 아니다.”
이 책에 대한 나의 몇가지 피드백
1.보냄받은 교회(Missional Church)에서 어디에 방점을 두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보냄받은(Missional)”에 방점을 두느냐, 아니면 “교회(church)"에 방점을 두느냐에 따라 이것을 교회성장전략 혹은 어려운 시대의 탈출구정도로 보느냐 아니면 정말 성경적이고 진정한 교회에 대한 방향전환인가의 차이가 있다고 보여진다. 이것은 <새로운 교회가 온다>의 저자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의 진정한 의미이다. ”기독론이 선교학을 결정하고 이어서 선교학이 교회론을 결정한다. 순서를 바꾸어 교회론이 우리의 목적 의식과 선교를 결정하게 하면 우리는 결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고 진정성 있는 보냄받은(선교적) 교회가 될 수 없다. (p.371)
2.IVP의 서평지에 올렸던 <「새로운 교회가 온다」역자의 후기의 후기>라고 하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제언을 한 적이 있다.
아쉬움: 삼위일체신앙의 강조
큰 대목에서 한 가지 더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원론적 영성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메시야적 영성을 제시하는 점이다. 자칫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일원론에 빠지게 되면 또 다른 극단에서 이슬람의 일신론이나 동양의 전체론적 관점처럼 통제적이거나 모호한 영성으로 치닫기 십상이다. 이런점에서 이원론과 일원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삼위일체적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저자들이 이 책에서 말하는 메시야적 영성이라는 것이 이 삼위일체적 영성의 다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으로 오신 메시야 예수안에서 계시되고 성령으로 우리에게 현존하는 성부하나님에 관한 자연스런 진술인 삼위일체 신앙이 기독론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 삼위일체 신앙이 보냄으로서의 선교학을 가능하게 하며, 이 삼위일체의 다양성속에서의 하나됨 속에서 교회론이 생기게 되기 때문에(요한복음 17장 18절-23절) 굳이 메시야적 영성을 삼위일체적 영성으로 확대하여 적용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최근에 하게 된다.
3. Apostolic leadership의 논의들이 이야기하는 바 핵심은 교회2.0의 “2.0정신”과 일치한다. 웹2.0에서 원용한 이 개념은 애시당초 개방 창여 공유 소통이라는 정신을 내포한다. 그런 점에서 교회2.0이 요구하는 리더십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개방적이며 참여와 공유와 소통이 가능하도록 배려하는 소위 “좀됨의 리더십(servant leadership)과 상황에 맞게 리더십을 발휘하는 ”상황적 리더십(situational leadership)" 개념을 더 차용할 수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가면서
이 책을 읽으면서, 혹은 읽고 나서 이런 질문을 던지시는 분들을 종종 만난다. “이 책의 결론은 결국 개척교회를 하라는 말이 아닙니까? 기존교회 혹은 일반교회에서 여기서 말하는 것은 적용 불가능한 것 아닐까요?” 나의 대답은 Yes! 그리고 No! 이다. Yes라는 대답은 사실상 이 책의 문제의식의 출발부터가 파던 우물을 더 깊이 파는 것이 아닌 다른 우물을 파야한다고, 그러므로 조금씩 바꾸는 것이 아니라 확 바꾸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급진적(Radical)인 주장이 이 책의 논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그 내용으로 들어가 보면 No!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
‘보냄받은 교회’(Missional Church)에 대한 급진적 강조는 실상은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 피터 드러커가 조직 혁신의 대표적인 예로 들었던 미국 걸스카우트의 여성 CEO 프란시스 헤셀바인은 내가 우연히 보게 된 TV에서 “21세기 미국 걸스카우트의 혁신은 새로운 것을 시도한 것이라기 보다 원래의 정신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가장 급진적인 혁신은 가장 근본적인 데로 돌아갈 때 가능한 것이다 (‘급진적’이라는 의미의 Radical이란 말은 ‘근본적’이라는 뜻도 겸하고 있다).
최근 돌아가신 John Stott가 소위 21세기의 새로운 교회운동에 대한 우호적(?) 응답으로 쓴「살아있는 교회」(The Living Church)를 읽으면서 경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90세에 이른 나이에 교회의 혁신을 추구하는 운동에 우호적인 반응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첫 번째이고, 새로운 혁신 운동들과 기독교의 아름다운 전통이 어떻게 균형을 이루어 드러나야 할지에 대해 이렇게 잘 정리를 해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 두 번째 이유이다. 원래의 정신이 들어 있는 전통과 원래의 정신을 구현하려는 새로운 운동, 이 둘 다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
The Shaping of Things to Come: Innovation and Mission for the 21c Church
2011년 8월 22일 교회2.0목회자운동 8월 정기모임 발제문
지성근 목사(IVF일상생활사역연구소,부산함께하는공동체교회)
개인적 여정과 「새로운...이 온다」시리즈
지금까지 나온 세권의 IVP의 「새로운....이 온다」시리즈는 한편으로는 우연히 결성된 조합이지만, 다른 편으로, 특히 내 개인의 삶의 여정에서 생각해 보면 우연하다고 할 수 없는 결합이다. 특히 필자 개인의 최근 10년여의 여정에서 이 세권의 책은 순차적으로 심대한 영향을 미친 책들이다.
우선 이 여정(journey)의 출발점은 20세기 말 십 수년간의 캠퍼스 사역의 고민, 즉 “변화하는 시대(혹은 세대)속에서 어떻게 젊은이 사역을 할 것인가?”하는 화두에서 시작되었다. 이때 만나게 된 것이 「새로운 청년사역이 온다」(처음 1997년에 Generating Hope라는 제목으로 나왔다가 2004년에야 Emerging Hope라는 제목으로 바꾸면서 세대논의에서 포스트모던 문화논의가 심화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제목은「새로운 청년사역의 희망이 온다」정도가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로 결국 번역 출간된 책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관심은 문제가 단순히 청년사역의 범주를 넘어서는 차원에 있다는 직감에 이르게 되었고 그것은 결국 시대사적인 변화(단순히 잠깐의 변덕이 아닌)의 자리에 우리가 서있다는 인식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인식에 영향을 준 여러 인물들, 사건들, 책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브라이언 맥클라렌과 그의 삼부작 (그 첫 번째 책이 2001년에 나온「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온다」A New Kind of Christian 이다)은 그 내용과 전달방식에 있어서 독보적이었다.
이런 책들로 인해 자연스럽게 형성되게 된 문화에 대한 이해와, 같은 시기에 일어나고 있던 “선교적 교회”(A Missional Church, 사실 나는 이것을 “보냄받은 교회”라고 계속 주장하는 편이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서로 만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기에 걸맞는 책을 만나게 되는 데 그것이 바로 「새로운 교회가 온다」(The Shaping of Things to Come 2003)이다.
사실 나 스스로 새로운 문화와 세상의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기존 교회의 사역자로서 한계를 많이 느끼는 상황에서 개척을 꿈꾸는 입장이었고 특히 세상속에서 표류하고 있는 21세기 초엽 한국교회의 모습으로 인한 고민이 이만 저만이 아닌 시점이었기 때문에 이 책을 만난 것은 그야말로 나로서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과 같았다.
고민 속에서 이 책들을 한 권, 한 권 차례로 읽었을 때 그 때는 이것들이 빨리 번역되어 함께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생각대로라면 시리즈의 지금 순서대로가 아니라「새로운 청년사역이 온다」「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온다」그리고「새로운 교회가 온다」의 순서대로 책이 나왔을 것이다. 그렇게 되지는 못했지만 이제 이렇게 이 세권의 책이 하나의 시리즈로 묶이게 되어 오히려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 여겨지니 사람의 생각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타이밍이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크리스텐덤 모드의 교회
[일상 하나님의 신비][바보 예수](ivp)의 저자인 마이클 프로스트와 알란 허쉬가 쓴 <새로운 교회가 온다>원제를 번역하면 [다가올 미래의 윤곽: 21세기 교회를 위한 혁신과 사명]이란 책은 A Emerging Missional church(신생의 선교적 교회, 보냄받은 교회)가 21세기, 탈 크리스텐덤(콘스탄틴)시대의 희망이다라고 말한다. 다양한 프로그램의 시도나 예배형식의 변화가 핵심이 아니라 얼마나 "보냄받은(sent-ness) 의식"을 갖느냐가 선교적 교회, 보냄 받은 교회의 관건이다. Christendom(기독교왕국) 모드의 교회는 그 기본적인 DNA가 변화되지 않는 한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크리스텐덤 사고를 지닌 교회의 특징은 3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매력을 끄는 데(끌어모으는데 attractional) 교회의 촛점이 있다. 교회가 내부적으로 잘 갖추어 있으면 자연스럽게 그 주변 마을과 도시의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오게 될 것이라고 전제한다. 이를 위해 프로그램을 구비하고, 내부환경을 바꾸고, 예배음악을 바꾸는 등 애를 쓰지만 정작 사람들을 일정한 장소로 끌어 모으는 데 관심을 쓰고 있을 뿐 세상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
둘째, 이원론적이다. 사실 이런 이원론적인 사고 때문에 교회가 매력적이 되려하는 결과를 낳는다. 거룩한 것(Sacred)과 거북한 것(Profane:더러운)을 구분하는 이 이원론은 지난 2000년간 교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왔다. 신앙을 가정과 일터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삶과 연결시키지 않는 어떤 신앙도 결국은 잘못된 교회의 방향을 낳게 하는 것이다.
세째, 종교적이고, 관료적인, 위에서 아래로의 수직적인 리더십을 지닌다. 모든 신자가 동일한 "제사장"이란 사실에 강조를 두지 않는 신약적 교회의 진정성(Authenticity)을 담아낼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속에서 함께 후사가 된 의식이 없는 교회는 "보냄받은교회" "선교적교회"가 될 수 없다.
위에 언급한 의식, 즉 매력을 통해 끌어 모으기 위해 애쓰고, 이원론에 사로잡혀 일상의 삶에 대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관심을 두지 않으며, 관료적이며 위에서 아래로의 리더십에 의존하는 교회는 어떤 새로운 시도를 하든지간에 결국은 크리스텐덤, 콘스탄틴 교회의 한계를 노정할 수 밖에 없고 이 한계안에 있는 한 21세기 세상을 향해 무기력한 모습으로 설 수 밖에 없다고 마이클프로스트와 알란 허쉬는 주장한다.
21세기 선교적 교회를 꿈꾼다
Post-Christendom(크리스텐덤이후)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21세기 환경속에서 꿈꾸어야 하는, 21세기 교회의 소망이 되어야 하는 A Missional Church(선교적교회 혹은 보냄받은 교회)에 대해 생각해 보자. 기존의 크리스텐덤(기독교제국)사고가 갖고 있는 특징을 세 단어로 요약하였다. 매력을 통해 끌어모으는 교회(Attractional), 이원론적 영성(Dualism), 계층적 리더십(Hierachical)이 마이클 프로스트와 알란 허쉬가 이야기하는 통상의 기존교회의 특징이다.
이제 적극적으로 선교적 교회, 보냄받은 교회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위에서 언급한 크리스텐덤 사고를 뒤집어 놓을 때 그 특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매력을 끌어서 사람들을 오게하는 방식의 교회를 하는 것(doing church)이 아니라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는 성육신적인 교회론(Incarnational ecclesiology)이
첫번째 특징이다. 세상으로 나가서 동일시하고 성육신하는 방식의 교회에 대해서는 수많은 케이스스터디가 필요하고 그것이 도움이 될 것인데 저자들은 실제적인 사례들을 이책에서 기록하고 있다.
두번째로 이원론적인 영성(혹은 제자도)이 아닌 메시아적 영성(Messianic Spirituality)이 필요하다. 메시야로 이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듯이 문화와 세상에 참여하는 영성이 필요하다.
세번째로 계층적인 리더십을 극복하고 사도적 형태의 리더십을 확립해야 한다. 이것은 다름 아닌 초대교회의 리더십 형태 즉 사도와 예언자와 전도자와 목사와 교사(APEPT)와 같이 은사에 따른, 그리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팀사역형태의 리더십을 의미한다.
<새로운 교회가 온다:21세기 교회를 위한 혁신과 선교>의 이런 제안이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의 토양에 어떻게 접목되어야 하는지는 우리의 몫이다. 주변에서 오늘 경험하는 교회 때문에 아파하는 신음들을 듣는다. 고통과 분개, 안타까움은 비젼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필수요소라고 돌아가신 죤 스토트가 말했다. 이제는 분개를 뛰어 넘어 꿈을 꾸어야 할 때이다.
I. 성육신적 교회론
경계(boundary)사고와 센터사고
매력을 통해 사람들을 '안'으로 끌어 모으려는 공동체는 ‘안'과 '밖'을 구분하는 일종의 경계를 설정하는 “경계사고”를 한다. 이 경우 안에 있는 사람들은 좋고 선하며 늘 바깥에 있는 이들을 가르칠 것이 있는 존재이고 반대로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흠이 많고 죄가 많아서 반드시 안으로 데리고 와서 변화를 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반대로 성육신적인 접근을 하려는 공동체는 누구나 모든 이들이 일종의 중심을 향하여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모든 이들의 고유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그들이 한발짝이라도 더 중심에 가까이 가도록 도우려는 생각을 한다.
경계사고와 센터사고를 울타리와 우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울타리를 치는 것은 목축의 경우 안과 밖을 구분하여 자기의 가축과 남의 가축을 구분하려 하는 데 이유가 있는데, 대개는 제한된 땅에서 이렇게 한다. 반면에 호주의 outback(광야)처럼 너무나 광활할 곳에서는 기본적으로 땅이 워낙 넓기 때문에 울타리를 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래서 물이 나는 우물을 중심으로 가축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가 모이곤 하는 방식을 택한다고 한다. 우물에서 신선한 물이 보장되는 한 가축들은 언제나 우물 가까이에 있게 되는 것이다.
기독공동체가 경계사고를 할 때는 크리스챤과 비그리스도인을 구분하고 비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는 것처럼 살고 생각하며 그래서 전도를 할 때는 언제나 우리 울타리 안으로 들어 오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러나 센터사고를 하는 공동체는 크리스챤과 '아직 크리스챤(not-yet Christian)'을 서로 다른 존재로 생각하기 보다는 추구의 과정의 차이로 이해하고,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잠재력과 가치를 인정하여 배우려고 하는 생각으로 삶을 나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기독공동체는 어떤 사고를 하고 있는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 것인가? 이것은 단순히 프로그램이나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더 근본적인 의식의 변화, 사고방식의 전환, 패러다임의 전환의 문제이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새롭게 다시 시작한다면 어떻게 다르게 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하고 저자들은 그 질문에 이런 대답을 하고 있다.
1.잘 들어야 한다(Listening to your patients)
전통적인 모델은 많이 말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역할이란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델을 전혀 다른 문화종족에게 가서 그대로 수용할 것을 요구하기 보다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수용되기 위해 그들의 생각과 문화에 대해 듣는 일이 필요하다. 마치 선교사가 다른 문화에 가서 사역을 하려 할 때 그 문화 속에 들어가 같이 먹고, 놀고,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상황화와 영혼에 속삭이기의 기본이다. 진실하게 듣는 것과 진정한 함께함이 미그리스도인들과 연대하는 영성을 개발하는 법이라고 저자들은 영혼에 속삭이기에서 말한다.)
2.'평화의 사람들'을 발견하라
건물에서 근사한 프로그램을 통해, 그리고 인쇄매체든지 전자매체든지 근사한 홍보를 하는 것에 엄청난 예산을 써서 시작하는 교회개척이 전통적인 방식이라면,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72명의 제자들을 내 보내실때 말씀하신 것처럼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고" 평화의 사람, 좋은 평판이 있고, 영적으로 열려 있으며, 자신의 마을이나 집단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을 통해, 그 관계의 네트웍을 통해 운동이 일어나는 방식을 택하라는 것이다. (누가복음 10장은 반복적으로 묵상할 필요가 있는 중요본문이다.)
3.사람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곱셈 번식하라(Multiplication, not Addition)
새로운 시대에는 작은 것이 훨씬 강한 방식이 될 수 있다. 교회당의 좌석을 더 많은 사람으로 채우려고 생각하기 보다 성육신적인 회중(incarnational congregation)을 늘리는(번식시키는)것에 강조를 두어야 한다. 보냄받은 선교적 성육신적 교회는 자신을 목적으로 삼기보다 한 과정으로 여긴다. 교회를 전체적이고 유기적인 전도의 리듬의 한 전략적 부분으로 여기므로 때로는 한 시즌으로 끝날 수도 있고 때로는 한 세대가 될 수도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자체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재생산하는 것이므로 조직이라기보다는 운동으로 교회를 이해하는 지도자들의 완전한 패러다임전환이 요구된다.
4.지도력이 중요하다.
상상력 풍부하고, 성경적이며 경건한 지도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문화적인 것과 성경적인 것의 차이를 구별하는 지혜가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며, 특히 상호평등한 의식과 협력적인 팀사역을 할 수 있는 협력의식이 포스트모던시대의 지도력에는 필수적이다.
5.건물을 사용할 때 조심할 것
매체가 메세지이다.(The medium is the message). 한 번 건물이 세워지면 교회 프로그램과 예산은 반드시 그것에 의해 많이 좌우되어질 것이다. 이자를 갚아야 하고 이를 위해 좌석이 채워져야하고 헌금이 많이 나와야 하고, 그래서 결국 매력을 통래 사람들을 끌어 모으려는 형태의 교회가 강화될 수 밖에 없다. 아무리 겉으로는 교회 밖에서의 섬기는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암묵적인 언어가 '교회에 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라고 이야기하게 되면 결국 교회당 안을 거룩한 곳, 교회당 밖을 속된 곳으로 여기는 생각을 은연중 심게 된다. 우리가 건물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런 점을 늘 유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4번과 5번은 후에 반복적으로 확대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다가 소위 “제3의 장소” 개념은 성육신적 선교의 목표인 진정한 연결, 진정한 보여줌, 진정한 다가감, 진정한 만남을 위해 원용할 수 있는 사회학적 개념인데 저자들은 이 개념을 원용한 공동체의 예를 이야기한다. 그리스도인과 미그리스도인들이 의미있고 안전하게 상호 교류할 수 있는 공동의 장소로 술집, 카페, 스포츠 팀등의 예를 들고 있다.
II. 메시야적 영성
헬라적 사고의 극복과 히브리적 사고의 재발견-일상생활의 영성의 발견
보냄받은 공동체로서 성육신적인 사역을 할 때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실제적이고 지속가능한 영성없이는 이 일은 불가능하다. 선교적 공동체 (즉 보냄받은교회 missional church)가 담아내어야 할 복음의 내용(콘텐츠)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선교적 공동체가 되고 실행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대안적 기독교영성의 모습에 대해 저자들은 이야기한다.
마이클프로스트와 알란허쉬는 선교적이고 메시야적인 영성이 무엇인지 보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돌아가야 하고, 무엇보다도 크리스텐덤사고의 핵심적 연원이 된 그리스적 사고에 물든 교리적(교리 자체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인 예수가 아니라 역사속에서 살고 호흡했던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얼마나 크리스텐덤 기독교가 그리스사상에 물들어 왔는지를 절감할 필요가 있고 어떤 점에 있어서 히브리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예수와 성경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보냄받은 공동체"를 가능케하는 영성적 틀로서 "메시야적 영성"(a messianic spirituality)을 회복하려면...
첫째 구체적이고 역사적이 되어야지 너무 사변적이고 이론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올바른 사고가 올바른 삶을 낳는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올바른 사고를 배웠다고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단순히 올바른 사고(orthodoxy)를 강조하는 것을 넘어서서 올바른 삶(orthopraxy)을 강조해야 한다.
둘째 성경적 신앙의 계시의 도구로서의 역사의 가치를 재발견해야 한다. 역사란 전쟁과 평화, 간음과 음모,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가 있는 삶의 자리요 한마디로 엉망진창(mess)이다. 그래서 a.d.300년이후의 크리스텐덤 교회는 그리스적 이원론에 의거하여 하나님이 이런 엉망진창의 역사속에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든 모르고든 거부하려 했다. 결국 하나님 관념도 우리의 신앙도 이 땅의 역사를 떠나버린, 사변적인 것이 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가 바로 우리가 살고 사역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현현해야 할 자리임을 확인하는 영성이 필요하다.
콘스탄틴, 크리스텐덤 기독교의 그리스적 사고인 이원론을 넘어서 히브리적 사고와 깊은 관련성이 있는 일상(Everyday Life)을 구속하는 영성이 새로운 시대의 교회를 위해 필요한 영성의 주된 내용이 될 것이다. 이원론때문에 서구 기독교는 즐거움, 열정, 육체적 욕구와 같은 것들을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 바깥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오직 영혼에만 촛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어왔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선교적인 자원으로 활용하는 영성적 틀이 필요한데 그것이 다름아닌 "일상생활의 영성"일 것이다.
방향이 올바로 설정된 즐거움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동기를 제공하는 것이 된다. 한 랍비가 이야기했듯이 "언젠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즐기라고 주신 즐거움을 우리가 얼마나 누렸는지 아니면 못 누렸는지를 갖고 판단하실 것"이다. 구약의 토라가 단순한 법률적 명제로 점철되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성전에서 어떻게 해야하는가 뿐 아니라 나귀가 웅덩이에 빠졌을 때, 주방에 흰 곰팡이가 생겼을 때, 여성의 월경과 관련하여 등 인간의 모든 삶의 국면을 하나님과 연결시키려는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으면 인간의 모든 삶은 거룩한 것이다.
신명기 6:4의 shema(들으라 이스라엘, 하나님은 한분이신 여호와시니)의 하나님 역시 단순히 '영원하고 불변하는 하나님"이라는 그리스적 개념의 사변적인 단일신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삶의 각영역마다 그곳을 다스리는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당시 주변의 다신교적 상황속에서 하나님만이 그 모든 삶의 영역을 다스리는 분이시라는 실제적인 단일신론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삶의 모든 국면이 한 분 하나님, 여호와의 다스림속에 있고 통일될 수 있기에 삶이 사역이며, 일이 선교고, 놀이가 예배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거룩이란 크리스텐덤 기독교가 그랬듯이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라기 보다는 매일의 삶을 거룩하게 하려고 우리가 하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선교적 거룩', 메시야적 영성, 현실과 역사와 일상생활을 긍정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새롭게 방향을 찾는 영성이 "육화된, 보냄받은 선교적 공동체"를 채우고 지속하게 하는 동력이 될 것이다.
성례가 되는 행동
행위는 성례전적일 뿐 아니라 그 자체로 계시적이다.
오직 메시아적 영성만이 우리에게 일상을 거룩하게 하며 하늘과 땅 사이의 일상적인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자원을 제공한다.
medium(매체)이 message다.
60년대에 마샬 맥루한이 "매체가 메시지이다"란 말을 했었다. 그가 매체라고 했을 땐 단순히 미디어만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기술이나 도구들을 다 아우르는 의미였다. 그러므로 이 말은 이렇게 바꾸어 쓸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도구를 만들지만, 결국 도구가 우리를 빚게 된다."
마이클 프로스트와 알란 허쉬는 이 맥루한의 이론을 크리스텐덤시대의 교회가 사명을 행하기 위해 사용한 도구(tools)에 적용하여 생각한다. 그래서 '설교''건물''신학교'들에 대해 신학적인 성찰을 하고 있다.
포스트모던시대의 문화적 언어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은 채 오직 혼자 이야기하는 설교만이 유일하고 중요한 매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크리스텐덤 교회의 철학적 수사기법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 것이지, 성경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나아가 혼자만 하는 설교는 회중을 설교자에게 중독되게 한다. 맥루한의 이론대로 우리는 설교를 고안해내지만(실은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으로부터 기술을 빌려와서), 거꾸로 설교가 우리를 만들어낸다. 다음 주일 목사가 교회에서 설교하지 않기로 작정해보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면 알수 있을 것이다.(컴퓨터중독자가 컴퓨터를 하지 못할 때 생기는 일과 비슷한 일이 생긴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건물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자. 맥루한의 말대로 "우리가 건물을 빚고 건물이 또 우리를 만든다." 실제로 건물이 없는 교회를 사람들은 잘 생각하지 못한다. 건물이 없는 교회는 뭔가 불완전한 교회로 생각하기도 한다. 크리스텐덤 기독교시대에야 비로소 큰 건물과 첨탑등의 구조물들이 생겨났지 실제로 가장 본질에 충실하고 효과적인 사역을 했던 시절을 생각하여 보면 빌딩을 소유하지 않을때가 그랬다는 것을 교회사를 보면 알수 있다.
실제로 건물이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도구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건물이 사람들을 수동적인 소비자가 되게 하고 무대 위에서 전문가들이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 같은 분위기가 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매우 정적이고, 매력을 끌려하며, 큰 돈을 들이는 건물보다 주변 이웃과 하나님의 백성사이에 근접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우리의 '도구'로서 건물을 디자인할 필요가 있다.
신학교는 훈련시스템으로서의 도구이다. 그런데 매체인 신학교가 주는 암시적 메시지는 무엇인가? 방안에 수많은 의자들이 앞에 있는 강의자를 향하여 있는 구조는 어찌 그리 교회 건물의 구조와 비슷한지 놀랄만한 일이다. 전문가가 지식을 전달하는 모델이 신학교에서 교회로 연결되어 지는 것이다. 이런 강의모델보다 더 성경적인 모델은 행동-성찰(action-reflection)스타일의 학습모델이 필요하다. "academy"스타일의 매체가 과연 제자를 삶고 선교하는 우리의 메세지에 적합한 모델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가장 중요한 메시지의 전달매체는 우리 자신이다. 유일하고 핵심적인 설교자의 설교는 설교단에서 하는 말로가 아니라 그의 삶에서 오는 것이다. (We are our Messages!) 보냄받은 교회, 육화된 교회를 위한 메시지는 그 공동체를 섬기고 이끄는 리더십의 삶속에 나타난 비젼과 가치를 보면서 그 공동체안에서 서로 관계를 맺는 사람들의 삶이 매체가 되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III. 사도적 리더십
리더십과 상상력
포스트모던시대의 성육신적 공동체는 유지 관리(maintenance)를 위한 리더십이 아니라 사명(mission)을 위한 리더십(apostolic leadership)이 필요하다. 또한 한사람의 리더십에 의존하기 보다 여러 사람이 공동의 리더십을 통해 공동체를 조화롭게 은사를 따라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리더는 액셀레이터의 역할(APE타입-사도,선지자,전도자=CEO기업가형, 질문자형, 스카우터형)을 하고 어떤 리더는 (PT-목사, 교사=화합형, 조직화형) 브레이크의 역할을 함으로 유기적이고 열매맺는 공동체를 가능케할 것이다.
현재 기독공동체나 교회는 정형화된 리더십 모델이 지배적이고 이런 리더십들은 항상 공동체를 예견가능하고 무미건조한 모습으로, 그리고 남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이끌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세기의 문화는 상상력(imagination)이 선교와 사역을 위해 매우 중요한 자원이 되는 시대이다. 매우 좌뇌(이성중심)중심적 문화에서 이제 우뇌(감성중심)문화로 변화해가는 시점에 복음을 이 시대에 제대로 커뮤니케이션하기 위해서 상상력과 창의성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실용적인 이유를 넘어서는 보냄받은 교회 자체의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다. (공동체적, 균형적 리더십)
아인슈타인이 상상력에 대해 언급한 세가지 말이 선교적교회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첫째,'상상력은 지식보다 더 중요하다.' 지식정보만으로는 유용하지 못하다. 오히려 상상력과 창의력, 디자인을 통해 이런 단순한 데이터를 뭔가 유용한 것으로 바꿀때 그것이 쓸모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도적 지도력은 오랜 행습과 예배의식들에 새로운 의미를 창의적으로 부여하는 자이며 재해석하고 그 의미를 새롭게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
둘째, '상상할 수 없으면 실행할 수도 없다.' 현재 지도자들에게 부족한 것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theological reflection의 부족) 집을 짓든지 예술 작업을 하든지 무슨 일이든지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에 일을 하여야 한다. 스티븐코비는 이것을 "첫번째 두번째 창조"라고 했다. 첫번째 창조는 마음속에서 목적을 갖고 하는 창조이다. 그리고 나서 두번째 창조인 실행이 가능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동체에서 리더십의 역할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고 꿈을 꾸고 비젼을 가지게 만드는 것이다. 선교적 공동체의 리더는 자신의 꿈을 강요하는 자가 아니다. 오히려 공동체의 각자의 꿈을 모아서 그 꿈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의미를 제공하는 (the management of meaning) 역할을 리더가 하여야 하는 것이다. 리더는 이를 위해 공동체가 상상력과 창의력을 가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네모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네모사고와 다른 방식의 사고를 해야 가능하다.' 다른 말로 패러다임쉬프트가 리더에게는 늘 필요하다. 이를 위해 리더는 1.거룩한 불만족을 격려하고, 2.전복적인 질문기법을 사용하고, 3.늘 초심자(주변인)처럼 생각하며, 4.위험을 무릅쓰고 자신과 조직을 위험에 노출시켜야 하며, 5. 변화의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혁명을 조직하기
보냄받은 교회를 운동으로 인식하고 운동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 조직의 생명주기를 이해하고 Sigmoid 성장곡선으로서의 영적인 갱신운동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것이 필요하다. 하워드 스나이더등의 관점에서 얻을 수 있는 갱신 운동의 본질은 1.유력한 교회제도와의 긴장가운데 갱신운동은 존재하며 그러므로 기성체제로부터 모종의 반대를 경험하게 되며, 2. 변화를 시작하고 촉진시키는 데 있어 엘리트가 아닌 비전통적이고 변두리에서 나오는 리더십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운동의 정서가 배양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무엇이 아닌 중심에 두는 것이 절대적이다. 경계를 모호하게 하므로 엄청난 다양성을 배양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성을 강조하는 것이 보냄받은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일다. 여전히 예수님은 교회의 주요한 선교적 자산이다.
새로운 선교적 시도와 교회 개척을 하려는 모든 이들의 출발점으로 “생태적 리더십”의 원리를 저자들은 제안한다. 1)더 작고 더 ‘유기적’이고 선교적인 단위의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고 대형교회를 모델로 삼고 교회를 세우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는 일반적인 전제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크기와 관련하여 특별한 교회 건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 더 작고 더 다양하며 덜 조직적이고 삶 지향적이며 선교적이고 관계적인 신앙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프로그램과 관련하여 교회의 삶을 제도화하는 사역의 빈 곳을 채워 넣기 위한 수단으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다.
또 다른 요소는 교회가 어떤 모양을 가져야 할지 또 어떻게 조직되어야 할지는 미리 알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본질과 운명의식과 같은 DNA를 가지고 있다면 그들의 특별한 환경이 형태와 구조를 대부분 결정할 것이다. 2)교회로 하여금 복음에 진실하여 선교적으로 정직하게 해 주는 것이 ‘재생산 가능성’이다. 복음은 본질상 전달되는 메시지이며 이 복음이 전달되지 못하면 교회는 주어진 상황가운데서 불임의 상태에 있게 된다.
마치 좋은 아이디어가 매체인 인터넷이나 SNS를 통해 엄청난 일을 일으키듯 복음이 매체인 유기적인 교회 구조를 통해 재생산 가능하며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3)교회가 장기적으로 과업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것이 ‘지속가능성’이다. 여기서 저자들은 사역팀을 위한 후원시스템에 대해 구체적인 조언을 하고 있는데 특히 한국의 상황에서 많이 토론해야 할 주제인 것 같다.
크리스텐덤에 길들여진 비선교적인 교회와 안전한 중산층 생활로 마비되고 무기력해진 이들을 불러내어 용기를 갖고 새로운 시도를 하게 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배가 만들어 진 이유는 아니다.”
이 책에 대한 나의 몇가지 피드백
1.보냄받은 교회(Missional Church)에서 어디에 방점을 두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보냄받은(Missional)”에 방점을 두느냐, 아니면 “교회(church)"에 방점을 두느냐에 따라 이것을 교회성장전략 혹은 어려운 시대의 탈출구정도로 보느냐 아니면 정말 성경적이고 진정한 교회에 대한 방향전환인가의 차이가 있다고 보여진다. 이것은 <새로운 교회가 온다>의 저자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의 진정한 의미이다. ”기독론이 선교학을 결정하고 이어서 선교학이 교회론을 결정한다. 순서를 바꾸어 교회론이 우리의 목적 의식과 선교를 결정하게 하면 우리는 결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고 진정성 있는 보냄받은(선교적) 교회가 될 수 없다. (p.371)
2.IVP의 서평지에 올렸던 <「새로운 교회가 온다」역자의 후기의 후기>라고 하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제언을 한 적이 있다.
아쉬움: 삼위일체신앙의 강조
큰 대목에서 한 가지 더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원론적 영성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메시야적 영성을 제시하는 점이다. 자칫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일원론에 빠지게 되면 또 다른 극단에서 이슬람의 일신론이나 동양의 전체론적 관점처럼 통제적이거나 모호한 영성으로 치닫기 십상이다. 이런점에서 이원론과 일원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삼위일체적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저자들이 이 책에서 말하는 메시야적 영성이라는 것이 이 삼위일체적 영성의 다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으로 오신 메시야 예수안에서 계시되고 성령으로 우리에게 현존하는 성부하나님에 관한 자연스런 진술인 삼위일체 신앙이 기독론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 삼위일체 신앙이 보냄으로서의 선교학을 가능하게 하며, 이 삼위일체의 다양성속에서의 하나됨 속에서 교회론이 생기게 되기 때문에(요한복음 17장 18절-23절) 굳이 메시야적 영성을 삼위일체적 영성으로 확대하여 적용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최근에 하게 된다.
3. Apostolic leadership의 논의들이 이야기하는 바 핵심은 교회2.0의 “2.0정신”과 일치한다. 웹2.0에서 원용한 이 개념은 애시당초 개방 창여 공유 소통이라는 정신을 내포한다. 그런 점에서 교회2.0이 요구하는 리더십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개방적이며 참여와 공유와 소통이 가능하도록 배려하는 소위 “좀됨의 리더십(servant leadership)과 상황에 맞게 리더십을 발휘하는 ”상황적 리더십(situational leadership)" 개념을 더 차용할 수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가면서
이 책을 읽으면서, 혹은 읽고 나서 이런 질문을 던지시는 분들을 종종 만난다. “이 책의 결론은 결국 개척교회를 하라는 말이 아닙니까? 기존교회 혹은 일반교회에서 여기서 말하는 것은 적용 불가능한 것 아닐까요?” 나의 대답은 Yes! 그리고 No! 이다. Yes라는 대답은 사실상 이 책의 문제의식의 출발부터가 파던 우물을 더 깊이 파는 것이 아닌 다른 우물을 파야한다고, 그러므로 조금씩 바꾸는 것이 아니라 확 바꾸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급진적(Radical)인 주장이 이 책의 논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그 내용으로 들어가 보면 No!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
‘보냄받은 교회’(Missional Church)에 대한 급진적 강조는 실상은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 피터 드러커가 조직 혁신의 대표적인 예로 들었던 미국 걸스카우트의 여성 CEO 프란시스 헤셀바인은 내가 우연히 보게 된 TV에서 “21세기 미국 걸스카우트의 혁신은 새로운 것을 시도한 것이라기 보다 원래의 정신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가장 급진적인 혁신은 가장 근본적인 데로 돌아갈 때 가능한 것이다 (‘급진적’이라는 의미의 Radical이란 말은 ‘근본적’이라는 뜻도 겸하고 있다).
최근 돌아가신 John Stott가 소위 21세기의 새로운 교회운동에 대한 우호적(?) 응답으로 쓴「살아있는 교회」(The Living Church)를 읽으면서 경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90세에 이른 나이에 교회의 혁신을 추구하는 운동에 우호적인 반응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첫 번째이고, 새로운 혁신 운동들과 기독교의 아름다운 전통이 어떻게 균형을 이루어 드러나야 할지에 대해 이렇게 잘 정리를 해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 두 번째 이유이다. 원래의 정신이 들어 있는 전통과 원래의 정신을 구현하려는 새로운 운동, 이 둘 다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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