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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간의 광야 생활은 축복이었다

신명기 박신 목사............... 조회 수 3383 추천 수 0 2011.09.29 23:4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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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신8:1-3 
설교자 : 박신 목사 
참고 : http://www.whyjesusonly.com/ 

40년간의 광야 생활은 축복이었다.(신8:1-3)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蕃盛)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1-3)

도덕과 종교

신자를 포함하여 이외로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도덕과 거의 동일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죄를 짓지 않고 선하게 사는 것을 종교를 가진 가장 중요한 의미로 삼는다.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신앙(信仰)을 가진다는 뜻이며 또 신앙이란 반드시 믿고 따를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대상은 두말 할 것 없이 절대자, 신(神)이다. 따라서 종교의 본질은 믿고(信) 경배해야(仰) 할 대상인 신과 자기와의 관계 정립이다.

반면에 도덕의 본질은 인간 사회에서 인간끼리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잘 살려는 것이다. 인간 공동체를 유지, 번성시키기 위해 그 구성원이 지켜야 할 최소의 규칙이다. 그래서 공동체의 질서를 일정한 한도를 넘어서 무너뜨리는 행위를 죄라고 규정지은 것이 도덕이다.

만약 인간 상호 관계가 없다면 도덕은 아무 의미가 없다. 무인도에서 혼자 산다면 살인, 간음, 폭력, 도둑의 죄란 있을 수 없고 일 년 내내 벌거벗고 지낸다고 풍기문란으로 따질 이유도 없다. 요컨대 도덕은 인간관계를 올바르게 세우는 행동 규율이라면 종교는 한 개인이 절대자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라면 최소한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할, 말하자면 다른 사람과 아무 관계없이 혼자 있더라도 넘어서선 안 될 행동 규범과 사고의 한계가 있음을 본성적, 선험적으로 깨닫는다. 또 그런 측면이 도덕에 상당히 많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윤리적 자각이 왜, 어떻게 유독 인간에게만 들게 되었는지를 규명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근원과 연결되는 문제다. 그렇게 되면 이미 도덕이 다룰 문제가 아니라 종교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인간이 신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데 가장 중요하고도 선결되어야 할 문제는 죄에서 구원 받는 것이다. 모든 종교의 가장 중요한 실천 강령이 도덕적 규범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따라서 외형적으로는 도덕과 종교가 동일하게 윤리적 규범을 강조하게 되었기에 신자들마저 그 둘을 잘 구분하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선 몰라도 기독교에서만은 이 둘을 엄밀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착하게 살지 말라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신앙 이전에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이며 또 사실은 도덕만으로도 충분히 배울 수 있다. 종교를 통해 따로 더 배울 필요가 없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그 자녀에게 가장 중요하게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착하게 살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 년간 방황하는 동안 만나만 먹고 살았다. 성경은 그 사건을 두고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게 하려는 하나님의 시험이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말하는 떡은 물질이고 여호와의 말씀은 윤리적 계명이라고 단순히 해석하고 치운다. 예의 종교와 도덕을 혼동하는 습관이 작동된 것이다. 즉 신자라면 물질을 멀리 하고 대신에 착하게 살라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어 가르쳐지고 있다는 말이다.

광야를 방황하게 된 배경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 하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입구인 가데스바네야에 도착했다. 이제 곧 그 땅으로 진군해 들어가면 이 땅에서 최초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신정국가가 탄생할 참이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정탐꾼들이 가나안 족속과 자신들을 비교하여 도무지 승산이 없는 전투라고 평가했다. 이스라엘은 잔뜩 겁을 먹고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뒤로 한 채 당신이 명한 전투를 포기해 버렸고 당연히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다.

그런데 그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원칙은 너무나 엄격하고 공정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14:27,28) 이스라엘이 불평한 내용에 정확하게 맞추어 벌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불평했는가?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14:2,3)  

애굽 땅에 돌아가거나 광야에서 죽었으면 죽었지 가나안 족속의 칼에 죽을 수는 없다고 불평했다. 하나님으로선 열 가지 이적과 홍해를 갈라 구원해낸 백성들을 다시 애굽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대신에 그들이 말한 그대로 광야에서 방황하며 죽게 만들었다. “너의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민14:29,30) 하나님의 징벌은 너무나 엄격했다.  

이스라엘은 또 하나님께 다른 원망을 했었다. 우리 처자가 가나안 족속에게 사로잡히게 하느니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불평을 귀에 들린 대로 하자면 처자들로 가나안의 포로가 되도록 해야 하거나 최소한 가나안 땅에 들여 놓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이들은 어른들 불평대로 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처리했다.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민14:31,32) 아이들은 하나님에게 불평하지 않았고 또 그 상황에 대해 아무 책임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징벌은 너무나 공정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배교와 불신앙에 대해선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으로 벌을 내린다. 알기 쉽게 말해 하나님을 믿느니 내 주먹을 믿고 세상에서 돈 버는 것이 최고라고 큰 소리 치는 자들은 진짜로 돈을 벌게 해준다. 돈을 벌어 형통하는 것이 어떻게 벌인가 싶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바로 벌이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는 세상에서 어떤 부정한 방법이라도 동원해 돈만 모으려 든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상실한 마음과 더럽고 부끄러운 정욕에 내버려 두어 그에 따르는 추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게 되는 것만큼 사실은 더 무서운 벌은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아무리 제 멋대로 배교해도 당신의 뜻만은 절대 변경하거나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이루신다. 하나님의 역사가 기계적으로 혹은 우연히 되는 일은 절대로 없다. 모든 것을 오직 당신의 뜻과 계획대로 완벽하게 실현하여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신다.  

하나님의 은총

그래서 하나님의 징벌을 내리는데 간과해선 안 될 또 다른 절대적인 원칙이 하나 있다. 불신자와 당신의 백성에 대해 징계의 원칙이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불신자에게는 벌을 더 세게 내리고 신자는 사정을 봐준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불신자에겐 현실적으로는 아무 벌을 내리지 않고 그대로 두신다. 단지 그들과 아무 관계가 없을 뿐이다.

신자에게 내리는 벌은 불신자의 것과는 정반대여야 한다. 불신자에겐 아무관계를 맺지 않고 그들 원하는 대로 두었다. 신자에겐 당연히 그 관계를 유지한 채로 당신이 원하는 대로 벌을 내려야 한다. 나아가 그 관계를 잘 유지하려니 현실적으로는 징벌이 더 엄정해질 수밖에 없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히12:5,6) 남의 아들은 아무리 잘못해도 자기와 아무 관계가 없으므로 함부로 야단칠 수 없다. 그러나 자기 아들은 사랑하기 때문에 더 야단쳐야 한다. 또 사랑하는데도 더 엄하게 야단치는 이유는 당연히 아들이 그 잘못을 고쳐서 올바르게 되기 원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가데스 바네야에서 불신앙과 배교의 죄를 범했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아무 벌을 주지 않았다. 광야에서 죽게 해달라는 대로 그들의 욕심과 상실한 마음에 따르도록 40여년을 버려두었다. 불신자의 경우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비록 인간의 눈에는 환난이 끝이 없어서 마치 하나님이 자기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은 듯이 보일지라도 그 분 쪽에선 그렇게 하는 법은 결코 없다. 신자를 절대 무심하게 방치하지 않고 그분의 의롭고 강한 손이 붙들고 있다. 고난의 기간 동안에도 하나님의 은총은 변함없이 베풀어진다. 신자가 힘들어 하므로 더 큰 권능으로 함께 해 주신다.

광야는 어떤 곳인가? 물과 먹을 것이 없는 곳이다. 낮에는 한여름의 무더위보다 더 찌고 밤에는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광야 생활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던 이스라엘 민족이 무려 40년간이 생존해 내었지 않는가? 하나님이 그들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붙들고 있지 않았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민족이 광야를 방황했다면 틀림없이 금방 다 죽었을 것이다. 가데스 바네야로 벌을 받은 자는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였다. 그럼 40년을 생존했으니까 최하 60살 까지는 다 살아남았다는 의미다. 당시로선 그것도 광야에선 아주 장수한 셈이다.

모든 인간이 가장 소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힘들게 노력하지 않아도 먹고 마실 것이 해결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놀고먹을 수만 있다면 한이 없을 것 같다. 광야 40년 동안에 이스라엘이 뚜렷하게 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땅을 갈아 씨를 뿌린 적도 없다. 양이나 가축을 키운 것도 아니다. 그저 아침에 일어나면 구름 기둥이 장막 위에 머물지 떠날지만 바라보고 그대로 따른 것뿐이었다.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진행하였고 구름이 머무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혹시 구름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있다가 아침에 그 구름이 떠오를 때에는 그들이 진행하였고 구름이 밤낮 있다가 떠오르면 곧 진행하였으며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유진하고 진행치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진행하였으니.”(민9:17,21,22)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아무 일을 하지 않았어도 그들이 먹고 마실 것을 다 챙겨주셨다. 반석에서 생수를 내시고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다. 구름기둥과 불기둥도 단순히 행선지를 가르쳐주는 인도자 역할만 한 것이 아니었다. 낮의 뜨거운 햇빛과 밤의 차가운 날씨를 가려주는 보호막을 겸했다. 비유컨대 냉난방 시설이 되어 있는 곳에서 먹고 마실 것에 부족한 것 없이 지냈다는 뜻이다. 그것도 무려 40 년간을 말이다.

나아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수많은 금은보화를 챙겨왔는데도(출12:35,36) 이방 족속이나 광야에 출몰하는 그 흔한 도적 떼로부터 습격 받지 않았다. 하나님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지켜주셨기 때문이다. 아마 이방족속도 잘 가지 않는 깊숙한 광야로 인도했기에 그들이 공격할 마음을 아예 먹지 못했을 것이다. 또 가나안 족속들이 애굽의 열 가지  재앙과 홍해 사건을 익히 알고 있어서 도리어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수2:9-11) 무장이 제대로 되지 않은 이스라엘 자손으로선 천만다행이었다.

하나님이 광야 40 년간 이스라엘에게 허락한 모든 외적 조건은 어느 모로 따져도 환난이라기보다는 너무나 큰 은혜였다. 그들이 광야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에 의해서였다. 요컨대 하나님이 그들을 벌을 주었다기보다는 징계에 감쳐져 있었지만 큰 축복을 베풀었다. 당신의 말씀을 잘 키는지 시험하려고 모든 조건을 그에 합당하게 만드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험은 신자를 나쁘고 힘든 상황으로 몰아넣어서 죄를 안 짓고 믿음으로 잘 인내하는지 테스트 해보는 방식이어야만 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아무런 실제적인 어려움은 없었지 않는가? 또 그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대로 순순히 따랐다.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광야 사건은 시험으로 성립될 조건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이스라엘이 그 시험을 잘 통과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시험이 신자가 힘든 상황을 선으로 이겨내는 모습으로만 이뤄질 것이고 또 그래야 한다고 기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실은 편한 상황에서 이뤄질 때가 더 많다. 솔직히 나쁜 상황은 신자라면 믿음의 성숙이나 하나님에 대한 헌신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매달린다. 지은 죄도 회개하고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문제는 오히려 아무 문제없이 편할 때다.

따라서 악한 상황과 편한 상황에서의 하나님의 시험은 그 성격을 달리 한다. 악하고 힘든 상황은 사흘 굶어서 남의 집 담장 넘지 않을 자 없다는 속담처럼 과연 그런 형편 하에서도 나쁜 짓을 하지 않을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반면에 편안하고 풍족한 상황에선 인간은 구태여 죄를 지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히려 그럴 때일수록 당신을 제대로 찾는지 보길 원하신다.  

물론 이스라엘이 방황했던 광야는 겉으로만 보면 지내기에 힘든 열악한 환경이었다. 인간이 무슨 노력을 해도 먹을 것을 생산해 낼 수 없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먹을 것과 거주할 곳과 냉난방 시설은 갖추어 주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고 따르는 백성에게는 광야는 사실은 힘든 곳이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수5:12) 가나안 땅에 입경해서 그곳의 첫 수확을 얻을 때까지 만나를 먹을 수 있어서 전혀 굶지 않았다는 뜻이지 않는가?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 사십년 동안에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릍지도 아니하였던 것이다.(신8:4)

떡과 말씀에 대한 오해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는”(신8:3) 시험의 내용은 흔히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 뜻이 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떡’은 물질이 풍부한 것이며 ‘말씀’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선하게 사는 것이라고만 단순하게 생각한다. 물질을 추구하느라 하나님 계명을 어기고 죄를 범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질을 추구한 적이 없지 않는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며 살인, 강도, 간음, 거짓말 한 적도 없다. 이미 금은보화를 풍부하게 갖고 있었고 먹고 마실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들이 범한 죄는 모세의 지도력에 대해 끝없이 불평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에 대해 원망만 터뜨렸다. 왜 하나님이 이런 곳으로 몰아넣는가, 왜 아무 맛도 없는 만나만 먹게 하는가, 고기는 왜 안 주는가, 조금만 주려도 조금만 허기져도 모세를 못살게 닦달했다.

언뜻 보면 먹고 마시는 것 때문에 죄를 범한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때마다 만나, 메추라기, 생수로 즉시 해결해 주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불평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다른 말로 당장에 먹고 마실 것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환경과 여건이 자기들 기분에 도저히 안 찬다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징벌을 받고 있는 중에 말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문자적으로 적어 놓은 계명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라고 했다. 하나님이 신자로 몸담게 하시는 모든 환경과 맞닥트리게 만드는 사건과 사람들 모두를 일컫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끄신 것이 분명하면 그곳이 광야이든, 애굽의 노예살이이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든, 그에 순복하고 감사함으로 반응해야 된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떡’도 단순히 물질의 풍부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반대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인도에 따르기보다는 스스로 자기 인생을 꾸려 나가려는 태도다. 무엇이든 자기 뜻과 기분대로만 하려는 뿌리 깊은 죄성이다.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도 자기가 원하는 때와 방식으로만 이뤄져야 한다는 너무나도 완악한 고집이다.

하나님은 비록 이스라엘로 광야에서 방황하다 죽는 엄정한 징벌을 내리셨지만  세상 어느 민족도 받지 못한, 아니 전혀 알지도 못하는 놀라운 은총으로 함께 하셨다. 어쩌면 그런 방황 중에도 그들이 다시 가데야 바네야로 진군하겠다고 회개하고 일어섰다면 더 빨리 가나안으로 입경시켰을 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까지 원하지는 않았더라도 최소한 만나를 주신 당신의 뜻만은 알아주기를 원했다. 당신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징벌의 궁극적인 목적은 항상 구원이며 또 그러기 위해선 신자의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그 진리를 말이다.  

환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징벌 가운데 신자가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분이 신자의 회개를 더 기다리신다. 신자가 고난을 인내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신자의 배교와 불신앙을 인내하시는 것이 더 힘들고 안타깝다. 신자는 자신이 자라는 것보다 고난의 종결에만 관심을 쏟지만 하나님은 고난을 더 보태더라도 신자의 성숙을 원하신다.

만나 시험의 본질은 과연 이스라엘이 먹고 마실 것에 부족함이 없을 때도 하나님을 제대로 경배하는지 보겠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신자가 도저히 견디다 못해 어쩔 수 없이 당신 대신에 재물부터 추구해야만 할 만큼의 극심한 궁핍으로는 좀처럼 몰아넣지 않으신다. 신자가 고난에서 구원받으려 기도하는지 안 하는지만 알아 보려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대신에 그분은 신자를 어떤 곳, 어떤 상황으로 인도하더라도 과연 당신께 진정으로 순복하고 제대로 경배할 것인지 가장 알고 싶어하신다. 신자들이 흔히 “지금 제 코가 석자이니까 조금 형편이 나아지고 여유가 생기면 그 때 가서 열심히 봉사하고 경배 하겠습니다”라고 핑계 되는 것이 아주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궁핍하여 재물이 없을 때 보다는 반대로 넘쳐날 때 오히려 하나님을 외면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 하나님에 대한 인류 최초의 배교도 하나 부족함이 없는 낙원에서였지 않는가?

따라서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은 항상 동일하다. 도덕적인 죄를 짓도록 일부러 더럽고 추한 상황으로 몰아넣지 않으신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종교적인 의무를 다하는지 보려고 시험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찾을 것인지,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지만 보길 원하신다.  

광야의 만나 시험은 가데스 바네야의 죄의 연장선 상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데스에서 물질을 밝히느라 윤리적 종교적 죄를 지은 것이 아니었다. 만약 정말로 물질을 밝혔다면 오히려 가나안으로 쳐들어갔어야 했다. 대신에 그들은 전쟁은 해보나마나 빤히 질 것이므로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거나 광야에서 죽겠다고 나섰을 뿐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이렇게 힘들게 만들 것 같으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포기해도 좋으니 차라리 하나님을 따르지 않겠다고 했다. 하나님이 힘들게만 안 하면 하나님을 따르겠다는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먹고 마실 것에 부족한 것이 없으면 하나님 하라는 대로 다 하겠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정말로 원한다면 바로 그것을 두고 시험을 해보자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먹고 마실 것에 부족한 것이 없었는데도  끝까지 하나님을 제대로 경배하지 못했다는 것이 광야 40년의 결산서였다.

신앙생활의 본질

인간은 주위 여건과 상관없이 심지어 아무리 편해도 무조건 자기 뜻대로만 하고 싶어 하는 존재다. 세상만사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신자가 된다는 의미의 본질은 바로 그 근본적인 생각을 거꾸로 바꾸는 것이다. 주위 여건이 어떠하든 자기 뜻은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전 생각이 어지간해선 바뀌지 않는다. 원죄로 인간의 출생과 함께 따라오는 인간의 본성 그 자체다. 다른 말로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도 가장 고치기 힘든 습성이다. 당연히 하나님은 신자가 가장 먼저 그리고 중점적으로 바로 그것을 고치길 원하신다. 그래서 그 겉모습이 환난이든 평안이든 또 그 내용은 징벌이든 은혜이든 하나님이 신자에게 직간접으로 베푸시는 모든 섭리와 은혜를 오직 그 본성을 고치는데 초점을 맞추신다.

요컨대 하나님이 신자에게 가장 바라는 것은 도덕 생활이 아니라 종교생활, 정확하게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선하고 의로우신 절대자를 절대적으로 믿고 경배하라는 것이다. 아무리 자기 생각과 판단으로는 불평불만이 자기도 모르게 따라 나오는 상황이라도 그분의 보호와 인도에는 그 분만의 너무나 선하고 의로운 뜻이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에서 완전하시고 공평하시다. 인간의 죄악을 다루는 모습도 신자와 불신자에게 차별대우를 하지 않으실 만큼 엄정하시다. 오히려 신자들을 더 엄격하게 다루신다. 그분의 궁극적인 목표는 당신이 신자의 하나님이자 아버지가 되며 신자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이자 자녀가 되는 것뿐이다.

또 그런 뜻이 당신의 모든 섭리와 사역에 완벽하고도 세밀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백성의 칼에 죽는 것을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보다 더 무서워하자 비록 징벌하긴 하셨지만 정말로 이방 족속의 칼에는 죽게 하지 않았다. 또 극한적인 광야로 내몰았지만 냉난방과 먹고 마실 것은 마련해 주셨다. 당신의 자녀들이 도덕적으로 선해지기 이전에 당신의 품 안에서 순복하며 사는 것을 먼저 원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신자더러 물질로 인해 죄에 빠질 것인지 아니면 죄를 행하지 않을지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고 하지 않는다. 항상 하나님과 신자 자신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신다. 인간이 물질에 넘어가지 않고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다는 보장은 결코 없다. 반면에 바울처럼 부요에 처하든 궁핍에 처하든 자신보다 하나님을 먼저 택할 때라야 죄에서 당당하게 자유할 수 있을 뿐이다.  

기독교 신자 만은 물질을 멀리하고 도덕적 종교적으로 선하고 거룩해지려 신앙 생활을 해선 안 된다.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시든 자기 방식으로 살려는 습성부터 완전히 버리고 자기는 살든지 죽든지 간에 오직 자기를 통해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길 소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다른 말로 비록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만으로도 살아도 진심으로 감사할 것인지, 자기 기분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 의심, 심지어 배교할 것인가 만이 진정한 신자 됨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마음에 안 들어도 신자니까 억지로 감사하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지금 현재 자기에게 허락하신 환경과 그 일어나는 일 모두가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광야라고 확신하며 살라는 것이다. 나아가 삶의 모든 세밀한 구석까지, 또 단 한 순간의 누락도 없이 그 모두가 하늘에서 내려주신 만나임을 믿고 감사해야 한다.   

여러분은 과연 광야 시험을 거치고 이미 가나안 땅에 입경해 있는 신자인가? 아니면 아직도 광야에서 하염없이 그저 구름기둥 불기둥이 언제 어떻게 움직일까에만 관심을 갖는 신자인가? 다른 말로 내 마음대로 안 되면 하나님마저 귀찮고 싫은가? 아니면 하나님 그분이 너무나 좋기에 귀찮고 싫은 일들 가운데서도 그분을 진심으로 찬양할 수 있는가?

12/16/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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