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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는 자들이다.
자기 자신의 의견이나, 아니면 어느 인간의 학설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좋은대로 사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모본을 따라 살기로 작정한 자들이다.
세상을 살기에 편리한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또한 제시하여 주신 길대로 사는 자들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의 길과 세상의 길 사이에는
항상 선한 싸움이 있기 마련이다.
믿는 자들이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드릴 때에는
동시에 예수를 자기의 주인이요, 왕으로 받아드리는 것을 수반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 안에는
예수를 자기 편리한대로, 자기 마음 먹히는대로 믿고 사는
가짜 그리스도인들로 가득 차있는 이상한 시대가 되어 버렸다.
어떤 교회들은 기업이 되어 가는가 하면
어떤 교회들은 사회 친목 단체나 클럽처럼 변신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좌표를 다시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겠다.
과연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어떠한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일까?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 마태복음 7:13,14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말씀이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일이란
참으로 많은 희생이 요구되는 생애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기쁨과 즐거움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는 말씀이다.
마음이 거듭나서 취미와 좋아하는 것들이 바뀌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 생애를 살 수가 없다는 말씀이다.
쉽게, 그리고 편하게 사는 길은
멸망의 길이라고 말씀하신 셈이다.
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 골로새서 3:1-3
세상에서도 재미를 보고 하늘도 가겠다는 태도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결국 멸망의 길을 택하여 걷고 있는 것이다.
구원을 얻는 길에는 중간이 있을 수가 없다.
적당히 믿는다는 사고 방식은 신앙이 아니다.
우리가 물려받은 성경과 진리는 피 묻은 것들이다.
얼마나 많은 선조들이 자기들의 생명을 바쳐가며
신앙과 진리와 그리고 표준을 고수하여 왔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빚진 자들이다.
한번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는데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하였다.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 누가복음 13:23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궁금증은 한결같은 것을 보게 된다.
이에 예수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
즉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란
어떠한 각오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 길인지를
아주 명료하게 설명해 주셨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누가복음 13:24
라고 말씀 하시고는 길을 가시다가 뒤 따르는 수많은 군중들을 향하여
다시 더 자세하게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 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여
다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 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누가복음 14:25-33
예수님의 제자의 부르심은 아주 명백하다.
따르기 전에 먼저 어떠한 댓가를 치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분명하게 제시해 주셨다.
하나님과 부모 형제 사이에 선택하여야 할 입장에 놓이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을 먼저 선택하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다.
자기 자신의 정욕을 부인하고 예수를 따를 때에
자연히 짊어지고 가야할 십자가가 따르게 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길이다.
그 길은 어떤 의미에서 수치스러운 일이다.
옛날에 십자가를 지는 일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또한 주님의 축복 때문에 그것들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재산이나 시간이나 달란트(재능)들은
모두 주님께서 주신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따르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다.
이러한 제자됨의 댓가에 대한 가르침이
타협되거나 가르쳐지지 않고 망각되어 버렸을 때에
교회는 곤두박질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세상 사람들과 교인들 사이를 구분하지 못할만큼 타락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한 청년이 사랑하는 애인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고 한다.
“사랑하는 그대여, 나는 당신을 그리워하오!
내가 당신을 찾아 만나기 위하여서는
에베레스트 산보다 더 높은 산이라도 넘어가겠고
태평양보다 더 넓은 대양이라도 헤엄쳐 가겠오!
오, 나는 당신을 그리워하오!”
그리고는 그 편지 밑에다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 P.S - 오는 수요일날 당신을 만나러 가겠소! 비가 오지 않는다면...”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고 있지 않는가?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하며 믿는다고 말은 하지마는
실상에 있어서는 적은 일들로 하나님을 부인하며 살고 있지 않는가?
자신의 편안함과 세상의 재미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은 욕망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매일 예수를 배반하며 팔고 있다.
그러면서도 교회들은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인양
여전히 십자가를 자기 교회 지붕 위에 높다랗게 달아놓고
선전하며 살고 있지 아니한가!
과연 우리는 진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인지
다시 한번 살펴 보아야겠다.
마지막 주님을 공중에서 영접할 이들이 되기 위하여....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로 눈 앞에 두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예비하는 생활을 살아야 하는 때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선지자 아모스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을 만나기를 예비하라.” - 아모스 4:12
우리는 하늘에서 거룩한 천사들과 이웃이 되어 살아야 할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초림하셨을 때에도 그 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던 선지자 침례 요한도 회개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는 유대인들이 오시는 메시야를 마음속에 받아들릴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들의 삶의 개혁과 부흥을 촉구하는 회개의 복음을 전하였던 것이다.
그의 사명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이렇게 예언해 두었었다.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누가복음 3:4-6; 이사야 40:3-5.
그렇다.
산처럼 높아져 있는 우리의 교만한 마음들이 낮아져야 하겠다.
골짜기처럼 깊숙하게 들어가 있는 음흉한 마음들과
이기심들이 돋아져 평평하게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
타협하며 적당하게 살아가는 굽은 마음들이 곧바로 펴져야 하겠다.
그리고 돌들과 파인 곳들이 많은 길처럼,
거칠고 모나며 세상의 잔재들로 가득찬 성품들이 치워져야 하겠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시는 길이 평탄해지도록 말이다.
침례 요한은 광야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요한이 침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누가복음 3:7-9.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꼭같이,
뒤질새라 유행 옷들을 불신자들 못지않게 걸치고 다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을 단장하는 대신에
더욱 더 예쁘게 보이기 위하여 짙은 화장을 하느라
많은 시간들과 돈들을 낭비하면서도
우리는 과연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자칭할 수가 있을까?
속 사람을 단장하기보다는
값진 패물과 장신구들, 반지, 귀고리, 팔찌, 목걸이,
비싼 시계들로 몸을 치장하고 다니면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세상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가 있겠는가?
파티의 좌석에서 같이 술 마시며 담배를 피우며,
성경이 하지 말라고 분부한 일들을 같이 행하면서
어찌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세상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몸을 흔들게 하는
그러한 유행가를 따라 부르면서 어떻게 우리가
하늘을 가고 있는 성도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몸을 과다하게 노출 시키는 짧은 치마나 상의를 입고서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교회 문을 들어 설 수가 있을까?
그러한 옷 차림들은 예배드리는 자들을 위하여 디자인 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옷차림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세상 사람들이
남자들의 눈을 현혹하기 위하여 만든 옷들이다.
오늘날 교회는
성경의 표준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나와 있다.
우리는 다시 종교 개혁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곧 다시 오시기 때문이다.
제2의 침례 요한의 사역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참된 회개를 촉구하는...
마태복음 13장에는
또 다른 예수님의 호소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마태복음 13:44-46.
보화가 감추인 밭의 값은 얼마였는가?
백만불? 천만불? 아니다.
그 밭의 값은 그 농부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었다.
진주의 값도 마찬가지였다.
진리와 영생의 댓가는,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됨의 댓가는
자기의 옛 생애를 완전히 다 포기하고 예수님의 길에 서는 것이다.
그래서 그 문을 좁은 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길은 가장 즐거운 길이다.
그 길은 가장 보람되고 행복한 길이다.
그 길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쉼을 주는 길이다.
그러나 그 길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워야 하는 길이다.
진리를 발견하려고 헤메던 인간이
창조주요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만나고 나면
과거에 살던 죄된 길이 얼마나 어리석게 보이는지 모른다.
그리고 신기루와 같은 세상이 제시하는
그런 행복에 속임당했던 자신을 후회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죄를 미워하게 된다.
그것이 거듭난 자들의 특징이다.
그리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영생의 길이
그렇게도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 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로새서 1:21,22)
라고 바울은 말씀하고 있다.
사도 베드로도 합세하여 우리들에게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사모하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 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
베드로 후서 3:10-12, 14.
부디 사랑하는 신부님들이여,
우리의 삶이 거룩하고 의로운 예수님의 성품에
합당한 매일매일이 되시길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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