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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1:33-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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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547829 |
하나님 나라의 열매
마태복음 21:33-46, 창조절 다섯째 주일, 2011년 10월2일
모든 성경은 고유한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그 배경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성경을 이해하기 어렵고, 더 나가서 왜곡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마태복음 21:33-46절은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충돌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리스도교가 처음부터 유대교와 충돌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유대교와 가까운 관계에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의 보도에 따르면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인의 기도 습관에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을 정기적으로 드나들었습니다. 바울도 여러 이방 지역에 복음을 전할 때 가능한대로 유대인들이 지키는 안식일에 그들의 종교 집회 장소인 회당을 찾아갔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유대인들의 경전인 구약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사실도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관계가 적대적이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초기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여러 파 중의 하나로, 즉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와 에세네파처럼 나사렛파로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유대교는 아니지만 유대교와 완전히 분리되지도 않은 상태로 있었습니다.
이 관계가 어긋나게 된 시점은 유대전쟁이 끝난 기원후 70년 어간입니다. 유대인들이 로마의 식민통치에 무력으로 저항한 사건이 유대전쟁입니다. 이것은 한반도를 식민지배한 일제에 저항한 우리 독립군의 무장투쟁과 비슷합니다. 로마는 예루살렘을 완전히 초토화시켰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파괴되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유대교의 근간인 제사장 체제는 무너졌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리새파 운동을 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리새파 운동은 성전이나 대제사장들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율법만 있으면 됩니다. 그들은 토라와 할례를 강화했습니다. 나사렛파인 예루살렘의 유대 그리스도교를 향해서도 그런 압력을 행사했습니다. 자신들의 요구를 따르든지 아니면 유대교로부터 떨어져나가라는 주장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초기 그리스도교의 입장이 아주 난처했습니다. 유대교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그리스도교의 특성을 상실할 수 있고, 유대교로부터 벗어나면 정치적인 불이익을 받게 됩니다. 고심 끝에 이들은 유대교의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형제 그리스도교 공동체인 이방 그리스도교를 향해서도 토라와 할례를 지키라고 강요합니다. 이방 그리스도교는 유대 그리스도교의 주장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유대교의 요구를 따른 유대 그리스도는 유대교의 아류로 떨어져서 역사에서 사라졌고, 거부한 이방 그리스도교는 역사에 살아남았습니다. 그 이방 그리스도교가 오늘 모든 그리스도교의 뿌리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이방인 그리스도교가 유대교로부터 독립할 수밖에 없었던 신학적인 이유를 비유의 방식으로 해명한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를 수확하는 계절에 맞춰 소작인들로부터 계약한대로 소작을 받기 위해서 하인들을 보냈습니다. 소작인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주인의 하인들을 죽였다고 합니다. 이런 일은 그렇게 흔하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흉년이 들었는데도 주인이 더 많은 것을 빼앗아가는 특별한 경우에 어쩌다가 일어납니다. 본문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이 천하에 악독한 사람이었다는 말일까요? 이 이야기는 비유라는 걸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주인은 아들을 보냈습니다. 소작인들이 주인의 아들만큼은 마땅한 대접을 하리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했습니다만 결과는 더 나빴습니다. 소작인들은 상속자를 없애겠다는 생각으로 주인의 아들마저 죽였습니다.
이 비유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하인은 예언자들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예언자들은 많은 고난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주인의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소작인들이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끌고나가 죽였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이 예루살렘 밖에 있는 골고다 언덕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이 비유의 마지막은 주인이 악한 소작인들을 처리하고 성실한 소작인들을 찾아서 포도원 농사를 맡긴다는 것입니다.(40절) 악한 소작인들은 유대교를, 그리고 포도원을 새로 맡은 농부들은 그리스도교를 가리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이 사실을 43절에서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말씀에 따르면 유대교는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지 못했고, 그리스도교는, 특별히 이방 그리스도교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것으로 그리스도교가 유대교로부터 분리 독립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이 말씀은 거꾸로 그리스도교가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지 못하면 유대교로부터의 독립성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열매와 믿음
하나님 나라의 열매는 무엇일까요? 우선 경건성과 도덕성처럼 보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세상에서 모범적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갈 5:22절은 성령의 열매를 9가지나 열거합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랜 참음 등등입니다. 약 2:17절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특징이 도덕성에 있다는 말은 틀린 게 아닙니다. 당시에 로마의 귀부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유 중의 하나도 그리스도교의 도덕성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으로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와 구별되지는 않습니다. 이런 부분에서는 유대교가 그리스도교보다 더 우월합니다. 율법 자체가 경건성과 도덕성이니까요. 따라서 이걸 기준으로 유대교는 하나님 나라를 빼앗기고 그리스도교가 받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유대교가 하나님 나라를 빼앗긴 이유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이고,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지 못한 사람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그런 인식과 믿음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우리도 그런 인식과 믿음이 있을까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고 있는 사람들일까요? 이런 질문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만 그리스도교가 동일한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삼고 하나님을 믿는 유대교나 이슬람교, 그리고 세상과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하나님 나라(바실레이아 투 데이)가 예수님이 선포한 복음의 알갱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킵니다. 그것이 직접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일어나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그런 현상을 복음서에서 친절하게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치유, 축귀, 사죄선포, 복음전파 등입니다. 여기에 일관된 것들은 삶의 변화입니다. 인간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옥에 갇힌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당신이 그리스도인가?’ 하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 7:22)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속성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습니다. 완전한 일치를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 나라라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약간 의아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예수만 그렇게 산 것이 아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인간 삶의 참된 변화를 위해서, 그 해방을 위해서 투쟁했습니다. 가장 가깝게는 세례 요한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메시아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에 행하셨던 일들을 그대로 행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만을 하나님 나라와 일치한 분이라고, 즉 메시아라고 말할 수 없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습니다. 지금도 유대교는 예수님을 여러 예언자 중의 하나로 인정할 뿐이고, 일반 역사가들도 예수님을 성인의 한 분으로 인정할 뿐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을 생명의 근원으로 경험했습니다. 그것이 곧 부활 경험입니다. 질적으로 새로운, 세상 초월하는, 종말에 완성되나 은폐의 방식으로 역사적 예수님에게 선취된 궁극적 생명 경험입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들처럼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메신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자체인 메시지가 되셨습니다. 이런 인식과 경험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되는 유일한 길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시편 118:22절을 인용한 42절에서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예수님은 생명의 머릿돌입니다. 그 위에 놓이지 않으면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생명을 잃습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44절)
하나님 나라를 받는 사람
이제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야 할 순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일까요?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인들이나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인정하는 그리스도인들이니까 당연히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우리가 유대교인들이나 교회 밖의 사람들보다 어떤 면에서도 나을 게 없는데도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님 나라를 인식하고 믿게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여기서 멈추지 말고 더 분명하게 질문해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세례 받고 교회에 나온다는 것으로 끝나는 질문이 아닙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으로는 영혼에 관한 질문에 충분한 대답이 못 됩니다. 궁극적인 대답은 성령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저는 성경본문에 근거해서 근사한 대답만 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가장 거칠게 대항했던 사람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비유가 자기들을 빗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관심이 무엇인지를 보십시오. 대제사장은 예루살렘 성전의 안녕과 번영만을 생각합니다. 바리새인은 율법만을 생각합니다. 성전과 율법은 당시 유대교의 절대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절대 이데올로기는 생명의 소리를 외면하게 만듭니다. 자신에게 힘이 들어가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성전과 율법에 절대적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를 자신들의 기득권과 안보를 위협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심 없이 예수님을 대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도 각각 어떤 이데올로기에 묶여 있습니다. 사람이 만든 것을 절대화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예컨대 소유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강요와 유혹이 그런 것입니다. 이런데 머물러 있으면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처럼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고유한 구원 통치인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기울일 수 없습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잃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만이 하나님 나라이며, 하나님의 통치이며, 궁극적인 생명 자체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믿는다면 그에게 일어난 일에 마음을 더 기울이십시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열매입니다. 그런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은총으로 받습니다. 지금 말씀드린 것은 마태가 전하는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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