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욥8:1-7 |
---|---|
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http://www.whyjesusonly.com/ |
욥은 처음부터 창대했다.
“수아 사람 발닷이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광풍과 같겠는가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네 자녀들이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1-7)
신자가 가진 큰 특권은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믿는 자라곤 자기 외엔 아무도 없었음에도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인간적 열심을 넘어선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래서 성경은 그 후손 이스라엘이 받은 은혜로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롬9:4)을 열거하고 있다. 오늘날의 신자도 주일날 교회의 공적 예배뿐 아니라 개인적 사유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음은 큰 은혜요 축복이다.
그런데 개인적 예배 시에 인도자가 축하하며 기도하는 말로 가장 자주 인용하는 성경구절이 하나 있다. 또 그 구절을 액자로 만든 것은 개업 예배 선물로 특별히 인기가 있으며 신자들 가정에도 많이 걸어 놓았다. 바로 본문의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것이다.
이 구절이 이렇게 애용(?)을 받는 이유는 틀림없이 비록 개업할 초기는 아직 손님이 적을지 몰라도 곧 크게 사업이 번창할 것을 소망하거나 믿는다는 뜻일 것이다. 일반 가정에서 이 액자를 걸어놓는 이유도 마찬가지로 아직 믿음이 연약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못 받고 있지만 앞으로 열심히 말씀을 배우고 기도를 뜨겁게 하고 교회에 성실히 봉사하다 보면 하나님이 크게 축복해주시리라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 구절이 뜻하는 바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
사단을 케이오 시킨 욥
욥기는 아무 이유 없이 당한 환난을 두고 욥이 영적으로 갈등한 내용이 주제다. 사실은 그 원인이 하늘에서 사단과 하나님이 욥의 믿음을 걸고 내기를 했기 때문인지라 그로선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사단은 먼저 그의 아들을 포함한 모든 소유물이 없어지면 욥이 믿음을 버릴 것이라고 장담했고 하나님은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재산뿐 아니라 자식마저 몽땅 잃었어도 욥이 믿음을 버리기는커녕 불평도 하지 않았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1:21,22)
이 고백은 욥의 믿음이 아주 견고했다는 점을 나타낼 뿐 아니라 또 다른 아주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모든 것을 다 잃고도 욥의 믿음의 자세에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기에 그는 결코 소유물 즉 자기가 하나님께 받은 축복 때문에 그분을 경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열심히 믿으면 복을 받고 그 반대면 벌을 받는다는 기복사상은 욥기의 주제가 아니라는 점을 처음부터 명확하게 밝힌 것이다.
일차 내기에 진 사단은 하나님에게 다시 도전했다. 소유물은 욥과는 직접 연관이 없지만 정작 본인에게 큰 고통이 임하면 믿음을 버릴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사단이 그의 생명만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악창이 나게 하는 것을 묵인했다.
이처럼 사단은 사람을 해할 심지어 생명마저 빼앗을 힘은 있으나 모든 일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하지 못한다. 사단에게는 능력만 있지 권세는 없다. 이 우주를 다스리는 절대적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하나님이 사단과 협력 내지 동역은 하지 않지만 사단마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궁극적으로 벗어날 수는 절대 없다. 욥이 겪은 그런 끔찍한 환난도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 가운데서 이뤄졌다는 뜻이다.
이번에는 아내마저 욥더러 하나님을 욕하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비방했을 정도로 그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욥은 또 다시 “우리가 하나님께 욕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2:10)라고 말하며 입술로도 범죄 하지 아니했다. 하늘에서 벌어진 하나님과 사단의 두 번에 걸친 힘겨루기는 사단의 일방적 패배로 끝났다. 하나님은 전혀 직접 간섭하지 않았고 순전히 욥의 믿음으로만 이겼다.
결과적으로 욥이 사단을 무참하게 케이오 시킨 셈이다. 그것도 극심한 고통 속에서 말이다. 바꿔 말해 신자가 이 땅에서 겪는 어떤 환난도 초자연적 영역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욥과 하나님의 씨름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욥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가 평생을 두고 반드시 한 번은 부딪치고 꼭 풀어야 할 신앙상의 난제다. 너무나 큰 불행을 그것도 졸지에 당한 욥으로선 도대체 그 원인이 무엇인지 꼭 알고 싶었던 것이다.
욥기는 42장으로 이뤄졌는데 하나님과 사단의 내기는 처음 2장으로 그친다. 나머지 40장은 이유 없는 환난에 대한 논쟁을 다루고 있다. 이유 없는 환난이란 말 자체가 믿음이 좋은 자에게도 환난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함의(含意)하고 있다. 욥기가 서론 격인 첫 1,2장에서 세상 어느 누구도 겪지 못할 만한 불행을 당했어도 욥이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고 강조한 이유도 믿음과 환난이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밝힌 후에 나머지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욥기는 반드시 이런 전제를 바탕에 두고 해석해야 한다. 욥 본인의 변증, 그의 세 친구와 엘리후의 논쟁, 마지막에 욥을 대면한 하나님의 말씀 모두가 성도에게 생긴 이유 없는 환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각각의 관점을 피력한 것임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 말하자면 아무리 성경적 진리로 보이더라도 일부 구절만 따로 떼어서 강조하거나 이 주제와 연관 되지 않는 해석을 시도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목사의 잘못
먼저 본문에 드러난 발닷의 논지부터 살펴보자. 한 마디로 욥이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또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면 반드시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욥이 아무리 겉으로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지만 하나님만이 아는 숨겨진 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하나님에게 벌을 받아 형편없는 처지로 전락했지만 지금부터라도 철저히 회개하고 새롭게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면 나중에는 더 많은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발닷은 "네 자녀들이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라고 했다. 욥이 아들들이 잔치를 벌인 후에 그들아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범하였을까”(1:5) 염려하여 꼭 번제를 대신 드려준 일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말하자면 “너도 모르는 네 아들들의 죄 때문에라도 하나님이 너에게 대신 벌주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느냐?”라고 다그친 것이다. 또 어쩌면 그런 큰 환난을 당하고도 하나님께 전혀 불평하지 않는 욥의 믿음을 가식적이라고 간주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문제의 성경 구절은 “지금 네 꼴을 보라 얼마나 미약한가? 네가 자랑하던 그 믿음은 어디 갔느냐? 혹시 나중에 다시 원래대로 돌려주실 지도 모르니 지금부터라도 늦기 전에 철저하게 회개해”라는 의미다. 욥의 딱한 처지를 걱정하는 친구로서 진심 어린 충고나 위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비난, 야단, 심지어 조롱의 의미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의 이런 논지는 성경이 환난에 대해 근본적으로 말하는 것과 완전히 배치된다. 성경은 열심과 정성을 하나님께 바치면 반대급부로 하나님이 성공을 보장해준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시편 기자들은 한 결 같이 환난 중에 하나님의 목소리가 왜 들리지 않느냐고 울부짖었다. 그럼 그들이 전부 믿음이 약하고 죄를 지은 자들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도 그 유명한 시편 23편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고 있는 자신의 참담한 심경을 고백했지 않는가? 다윗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겨진 하나님의 궁극적인 사랑을 믿음의 눈으로 발견했던 것이다. 오죽하면 하박국 선지자가 왜 의인이 더 핍박을 받는지 직접 따져보자고 하나님께 덤볐겠는가?
예수님도 자기를 따르려는 자들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고 경고했다. 또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6:53)고 하면서,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요6:65)고 덧붙였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연합하여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이라는 뜻이다. 이어서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요6:66) 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주님이 열심히 믿으면 반드시 복을 주겠다고 약속했다면 물러갈 바보가 어디 있었겠는가?
성경의 일관된 뜻과 발닷이 그런 말을 하게 된 배경은 아예 무시한 채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이 구절을 애지중지 하고 있다. 인생의 좌우명이나 사업의 지표처럼 삼고 있다. 그 속마음에 열심히 믿어 크게 창대해지겠다는 소원과 욕심이 자리 잡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믿음이라는 그럴듯한 용어로 포장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마저 신자 스스로 인간적 의지적 노력으로 쟁취해내려는 교만이다.
그런데 잘못은 사실 이런 내용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는 목사들에게 있다. 심지어 개업예배나 심방 때에 설교할 주제 본문으로 삼는 경우마저 있다.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이 잘 믿는 자에게 현실적 축복도 주신다고 약속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어떤 말씀이 완전한 진리가 되려면 언제, 어디, 어떤 경우, 누구에게나 그 말씀대로 항상 실증 되어야 한다. 그러나 당장에 욥이 당한 것처럼 이유 없는 환난이 있고 또 오늘날의 신자도 하박국과 같은 동일한 갈등을 겪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은 오직 스스로에게만 영향을 받으신다. 당신의 전적 주권에 따라서 복이나 벌을 주시지 신자 쪽의 공로, 자격, 능력, 상황, 열심, 정성, 심지어 믿음과도 관계없다. 엿장수 마음대로라고 말하듯이 하나님 당신의 뜻에 달렸을 뿐이다. 예컨대 쌍둥이 중에서 형 에서를 제치고 동생 야곱으로 장자 삼은 것은 당신의 주권적 선택이라는 이유 말고는 인간 이성에 부합한 어떤 합리적 설명도 배제되지 않는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죄에 대한 징계와 믿음의 보상이 분명 있지만 그 때와 방식이 우리의 기대나 예상과는 너무 달라 현실에서 그 연관성을 구분하기가 거의 힘들다. 오죽하면 하나님도 나의 생각과 길이 너희의 것과 다르며 겉으로 재앙처럼 보여도 내 마음은 평안이라고 강조했을까? 신자 스스로 실제 믿음과 상벌의 관계를 잘 분별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하나의 객관적 원리로 다루어선 안 된다.
따라서 신자는 세상에서 무조건 고난을 받게 되어 있다거나, 잘 믿으면 현실적 축복이 당연히 따라 온다는 것은 둘 다 틀린 말이다. 대신에 예수님을 닮아 그분 뜻대로 거룩하게 살 때에는 세상의 흐름을 거슬리는 것이므로 자연히 세속적 형통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도 때로는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룸에 도움이 된다면 현실적 풍요를 누리게 해준다. 바울이 말한 대로 궁핍에 처하거나 부요를 누리거나 하나님 당신의 뜻이 이뤄짐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 뿐이다.
목사는 교인들에게 단순히 잘 믿으면 복 받는다고만 가르쳐선 안 된다. 무엇보다도 신자가 누리는 복의 의미부터 정확하게 설명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잘 믿더라도 현실적 환난을 받을 수 있다고 분명하게 주지시켜서 연약한 신자가 그릇된 기대를 갖지 않게 해야 한다. 작금의 성공 지향적 신학이나 긍정의 힘을 과신하는 신학은 그 내용 자체도 문제가 많지만, 하나님이 믿음이 좋은 신자에게도 당신의 주권으로 환난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아예 가르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성경을 부분적으로 따로 떼어 보면 자칫 다 맞는 말로 보일 수 있다. 본문도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라고 했다. 절대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의인이 환난을 겪는 가운데도 그분의 공의가 드러나는 법이지 그 공의가 신자가 환난을 받는 모습이어선 안 된다는 법은 없다. 그런데도 앞뒤 문맥과 연결하지 않고 특별히 욥기의 주제와 성경의 일관된 뜻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전혀 다른 뜻이 된다. 즉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인간 이성에 합당한 모습으로만 나타나야 한다고 해석해버린다.
다시 말하지만 목사가 맞는 것만 가르치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가르치지 않으면 반쪽 진리밖에 되지 않는다. 믿음이 연약한 신자들로 반쪽 신앙만 붙든 불구자 신자로 자라게 하는 셈이다. 목사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혹시라도 신자로 하나님께 순종케 하기 보다는 고의로 불구로 만들어 자신의 말부터 듣게 하려는 것은 아닐지 두려울 따름이다.
욥이 모년에 받은 축복
그런데도 욥이 모년에 이전보다 두 배의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여전히 이 구절은 많은 신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신앙 양심상 크게 꺼릴 것 없이 “욥을 보라. 잘 믿으면 복을 받는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나중에는 창대케 된다는 말씀 그대로 되었지 않느냐?”라고 가르친다.
욥은 정말 보통 사람이 평생에도 다 겪지 못할 엄청난 환난을 순식간에 당했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 자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큰 기복이 없었다. 그가 갈등하며 괴로워했던 두 가지 사항은 믿음의 본질과는 다른 문제였다. 우선 육신적 고통이 너무 심해 견딜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과 나아가 그런 환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욥의 반론을 보자. “주께서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10:7) 당장 친구 소발에게서 “네 말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의 목적에 깨끗하다 하는구나”(11:4)라는 반발을 샀다. 그래서 욥은 “나도 너희 같이 총명이 있어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니 그 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12:3)라고, 잘 믿는 자가 복을 받는다는 일반적 원리 정도는 자기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바로 이어서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내가 이웃에게 웃음 받는 자가 되었으니 의롭고 순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10:4)라고 친구들의 주장이 반쪽 진리임을 지적했다. 의인도 얼마든지 환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그들에게 “너희는 거짓말을 하는 자요 다 쓸 데 없는 의인이라”(13:4)고까지 반발했다. 말하자면 반쪽 진리만 말하면서 사실 그대로 반쪽 진리라고 밝히지 않거나, 나머지 반의 진리를 의도적으로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이며 아무 쓸모없는 신앙이라고 한 것이다.
대신에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었다. “무슨 일이 임하든지 내가 당하리라.... 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얼굴을 피하며 숨지 아니하오리니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옵시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마옵실 것이니이다.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나로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나의 불법과 죄가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13:13,20-24)
그의 말을 쉽게 풀면 이렇다. “하나님이 나를 죽이시면 차라리 죽겠습니다. 그러나 나를 더 이상 고통스럽게 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그리고 도대체 아무 죄도 없는 나에게 이러시는 이유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내게 혹시 죄가 있다 해도 정말 이런 극한적인 고통을 받을 정도입니까? 아니면 아예 나를 원수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나는 하나님을 전혀 그렇게 대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내 믿음은 정말로 순전했음을 하나님이 더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이유조차 말씀하지 않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런 논쟁의 와중에서도 욥의 생각이, 믿음이 아니라, 조금 변하는 징조는 보인다. “나의 가는 길은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23:10) 자기에게 허락한 환난의 구체적 원인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어서 자신의 믿음을 더 성숙한 단계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짐작한 것이다.
그는 죄 지으면 벌 받고 선행하면 상 받는다는 친구들의 단순한 논리를 처음부터 반대했다. 비록 자신의 의심과 불만이 해소되지는 않았지만 논쟁을 통해 친구들의 기복적인 신앙이 틀렸음을 오히려 더 확신하게 되었다. 친구들의 주장이 틀렸다면 그 반대되는 자신의 의심이 오히려 타당성을 가실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런 기회를 통해 자신의 의심을 씻어주고 믿음도 올바르게 세워주실 것이라고 기대하게 된 것이다. 환난에, 특별히 자기가 겪고 있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경우에도 인과응보의 고리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모든 세상일에 구체적 원인이 있고 그에 상응한 필연적 결과가 따라오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마음을 먹기 바로 직전까지 그는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할 곳을 알꼬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라고 한탄했다. 이 극심한 고통에 대한 이유라도 속 시원하게 말을 해주면 좋으련만 도무지 알 수 없어서 미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리 이유를 알 수 없는 환난이라도 자기를 결국 유익으로 이끌 것이라는 점만은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의 믿음은 오늘날 만연되어 있는 소위 기복 신앙, 성공 신학, 긍정 신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반면에 세 친구는 그에게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면 복 주신다고 끈질기게 타일렀다. 성경이 그 친구들이 틀렸다고 분명히 증언하고 있다는것은 작금 유행하는 예의 신학들이 하나님 당신께서 이미 수천 년 전에 틀렸다고 직접 선포한 셈이다.
하나님과 쟁론할 자 없다.
그러나 여전히 욥이 갖고 있던 근본적 의문, 즉 욥기의 핵심 과제는 풀리지 않았다. 자기의 환난에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고 하나님은 또 그것을 신자에게 밝혀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제 삼의 인물인 엘리후가 홀연히 등장하게 된 까닭이다.
그는 욥을 향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고 말한다고 야단부터 쳤다. 환난의 이유를 끝까지 알아야겠다고 따지는 것은 자기는 고난을 받을 아무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뒤집어 말해 이유 없는 자에게 고난을 주는 하나님이 나쁘다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욥은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의롭다고 주장한 셈이다. 비유컨대 부모는 특별한 잘못이 없어도 먼 장래를 내다보며 자식을 야단치거나 어려움을 허용할 수 있다. 그러나 어린 자식으로선 그 이유를 전혀 알 수 없거나 심지어 설명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야단치거나 어렵게 만든 부모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엘리후가 욥을 견책하는 말을 보라.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하시는 것을 스스로 진술치 아니하시나니 네가 하나님과 변쟁함은 어찜이뇨. ... 주께서 사람에게 평강을 주실 때에 누가 감히 잘못하신다 하겠느냐 주께서 자기 얼굴을 가리우실 때에 누가 감히 뵈올 수 있으랴 나라에게나 사람에게나 일반이시니”(33:12,13, 34:29)
하나님은 당신이 하시는 일의 목적과 이유를 비밀로 할 때가 많다고 한다. 어떤 일이든 오직 당신의 전적인 주권으로 하신다. 그럼에도 인간이 끝까지 그것을 알려는 것은 그분의 잘잘못을 가리려 하는 것과 같다. 만약 하나님이 평안을 주었다면 이유를 따질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환난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환난이라면 신자로선 당연히 감수하면서 그분의 선한 뜻이 드러나도록 믿음과 소망을 품고 기다려야 한다. 만약 하나님이 주신 환난의 이유를 따지려 든다면 그분이 주신 평안의 이유도 따져야 한다. 나아가 아무 이유 없이 평안을 준다면 오히려 받지 않겠다고 거부해야 공평한 태도다.
“너는 하늘을 우러러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35:5-7)
하나님은 모든 일을 당신의 주권으로 할 뿐만 아니라 완벽하게 하신다. 세상의 어떤 것도 그분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오직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움직이신다. 아무리 욥 같이 신실한 신자라도 그분이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고 하지 않고자 하는 일을 시킬 수도 결코 없다. 당신의 영광은 당신께서 스스로 세우시고 유지하신다. 인간의 어떤 경건한 행위로도 그분의 계획과 뜻이 없이는 그분의 역사를 이뤄낼 수 없다. 신자는 그분의 자신을 향한 계획과 뜻 가운데서 그분의 영광에 동참하는 은혜만 누릴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할 즈음에 구원하시며 학대당할 즈음에 그 귀를 여시나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너를 곤고함에서 이끌어 내사 좁지 않고 넓은 곳으로 옮기려 하셨은즉 무릇 네 상에 차린 것은 살진 것이 되었으리라. 이제는 악인이 받을 벌이 네게 가득하였고 심판과 공의가 너를 잡았나니 너는 분격함을 인하여 징책을 대적하지 말라 대속함을 얻을 일이 큰즉 스스로 그릇되게 말찌니라. 너의 부르짖음이나 너의 세력이 어찌 능히 너의 곤고한 가운데서 너로 유익하게 하겠느냐”(36:15-19)
의인도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을 당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때가 되면 반드시 구원해 주시되 더 넓은 곳으로 옮겨 주신다고 했다. “악인이 받을 벌을” 가득 받지만 “대속함을 얻을 일이 큰즉”이라고 했다. 원인 모를 곤고함은 의인으로 더 큰 유익을 주려는 목적이다. 그런데도 신자가 자꾸 불평과 불만으로 차 있다면 스스로 그릇되게 하는 짓이며 하나님이 주실 더 큰 유익마저 막게 된다.
그래서 엘리후는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전능자를 우리가 측량할 수 없으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심판이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마음에 지혜롭다 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느니라.”(37:23,24)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의 공의를 굽게 하는 법이 없기에 인간은 오직 경외함으로만 그분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절대로 완전하고 선하다는 것이다. 신자에게 반드시 합력하여 선으로 작용하게 하신다. 원인 모를 환난도 그분의 완전한 공의에 근거한다. 인간 이성으로는 선한 면이라고는 단 하나 없으며 고통만 안겨주는 불행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은 숨겨져 있다. 심지어 하나님이 신자의 생명마저 당장 앗아가도 당신의 공의와 사랑은 단 한 치의 오류가 없으며 신자에게도 유익이다.
설령 하나님이 사단더러 욥을 죽이라고 한들 당신의 영광에는 전혀 손상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단에게 다른 것은 다 해코지를 해도 그의 생명만은 손대지 말라고 했지 않는가? 참 믿음은 하나님은 항상 무조건 옳으며 신자인 자기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어떤 경우가 닥쳐도 요동치 않고 그분을 경외하며 사는 것이다.
욥은 처음부터 창대했다.
엘리후의 견책이 끝난 직후 여호와께서 푹풍 가운데로서 나타나 욥에게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라고 직접 말씀하셨다. 이어서 쉴 틈을 전혀 주지 않고 자연계의 온갖 현상에 대해서 그 원인을 설명해 보라고 추궁했다. 욥이 하나님에게 자기가 당한 고난의 원인이라도 알자고 따지니 하나님은 역으로 욥더러 세상만사에 대한 원인을 아는 대로 대보라고 되물은 것이다.
“네는 눈에 훤히 보이는 자연 현상의 원인도 도무지 알지 못하지 않느냐? 아니 그런 것들에 대해선 전혀 따지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일을 알려고 드는데 그럴 자격이 너에게 있느냐? 또 내가 설명을 해준들 과연 네가 알 것 같으냐?” 하나님의 너무나 오묘한 반발(?)이지 않는가?
실제로 하나님이 욥에게 한 질문 중에는 인간의 희로애락에 관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인간보다 열등한 동식물계와 비와 바람과 눈 같은 무생물에 관한 것뿐이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만드셨고 주관하여 다스리신다. 또 인간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 않아도 그 만드신 가운데 당신의 신성이 확연히 드러나 있다.
훨씬 후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들풀의 영광도 솔로몬의 그것보다 절대 못하지 않으며, 참새도 천부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으며, 모든 생물들이 염려 하나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다 먹이신다. 하물며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당신 대신에 만물을 다스리라고 위임한 인간을 당신께서 먹이고 입히지 않겠는가? 얼마나 더 큰 사랑과 자비로 인도하시겠는가?”
하나님이 욥에게 인간에 관해선 단 한 마디도 묻지 않은 이유가 따로 있다. 인간만은 당신의 모든 피조물 중에서 특별한 관심을 베풀 대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느끼는 희로애락, 심지어 고통도 다른 피조물이 갖지 못하는 인간만의 아주 특별한 축복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환난 가운데도 당신만의 뜻과 계획이 있기에 당신을 향한 소망으로 인내하면 반드시 정금 같이 성숙시켜 주신다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당신의 영으로 직접 다스려서 당신만이 주실 수 있는 큰 은혜 가운데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계에서 사단더러 인간을 농락하도록 허용하지만 그 생명만은 절대 손도 못쓰게 제한하시는 하나님이다. 언젠가 당신께서 더 큰 구원으로 인도하실 뜻과 계획이 다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신묘한 이치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 만물 속에 다 숨겨 놓았듯이 인간의 일에는 더더욱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피조물은 몰라도 인간이라면 더더욱 하나님께 경배와 감사만 돌려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서릿발 같은 추궁 앞에 욥은 드디어 지금껏 품고 있었던 불만 내지 의심을 버렸다. 환난의 이유라도 알아야겠다고 하나님께 따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도 교만한 일인 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 주께서는 무소불능(無所不能) 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 하나이다.”(40:4,5 42:2,36)
만약 하나님이 실제로 하늘에서 사단과 벌렸던 내기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면 욥이 이해했을까? 이해는커녕 불평과 의심만 더 늘었을 것이다. 그는 마침내 진짜로 겸비해져서 하나님은 무조건 옳다고 시인했다. “당신이 하신 일의 잘잘못은커녕 이유마저 따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것 자체가 교만이자 죄일 뿐입니다”라고 완전히 항복했다.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림에 완전한 공의 말고는 그 기준이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온전히 시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제대로 인정하여 그분 앞에 엎드리는 자에게는 무한한 사랑으로 대해 주신다는 진리를 항상 소유하는 것이다. 그런 확신 가운데 거함으로써 어떤 일에나, 심지어 욥 같은 환난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신자가 그분의 숨겨진 뜻, 계획, 이유를 아예 따져서는 안 되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욥처럼 얼마든지 따질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그러나 그 따짐이 자신이 연단되어 정금같이 나오며 하나님의 궁극적 영광을 드러내려는 목적에 근거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다른 의도가 있다면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나아가 그런 온전한 믿음을 갖지 못했다고 해서 신자가 아니라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는 뜻도 결코 아니다. 신자가 잠시 믿음에 혼선이 생겼거나 확실한 진리를 잠시 망각한 것을 두고 하나님은 탓하지 않으신다. 대신에 하나님은 신자가 완전한 믿음으로 자랄 때까지 기다려 주신다. 아니 당신께서 키워나가신다. 그것도 욥처럼 말도 안 되어 보이는 극심한 환난을 허락하면서까지 말이다.
바꿔 말해 하나님에게 신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받는 완전한 자녀일 뿐이다. 당신의 독생자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해 주셨는데, 그것도 인간 쪽에서 그럴만한 자격 조건 능력 하나 없고 심지어 당신과 원수 되었을 때에 그렇게 해주셨는데, 조금 믿음이 흔들리거나 죄를 지었다고 그때그때 벌을 준다면 십자가의 죽음이 헛되지 않는가? 신자는 하나님에게 당신의 핏 값으로 사는 순간부터 영원히 천하보다 귀한 존재로 남는다.
그리고 오직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당신께서 신자를 빚어 가신다. 물론 때로는 죄에 대한 징계와 선에 대한 축복도 유용한 수단으로 동원하시지만 매번 그런 것은 아니다. 한 마디로 욥이 죄를 많이 짓고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지 못해 처음에는 미약했다가 나중에는 그 죄를 회개하여서 하나님께 축복을 많이 받아 창대해진 것이 아니다.
성경은 욥이 말년에 창대케 된 직접적 원인을 친구를 위해 기도해주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42:10) 그는 자신의 윤리적 종교적 죄를 회개한 적이 없다. 하나님에게 환난의 이유를 알겠다고 덤빈 것을 철회했을 뿐이다. 나아가 환난이 끝이 나고 복을 받은 상태에서 기도한 것도 아니다. 반대로 친구들의 상태가 나빠진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자신은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도 기복 신앙을 끝까지 붙들고 있는 친구들의 그 미숙한 영적 상태가 안타까웠던 것이다.
다른 종교는 몰라도 기독교에서만은 죄 안 짓고 선행을 한다고 해서 그와 비례해서 믿음이 좋아지고 복을 보장 받는다는 법은 없다. 참 믿음을 가진 자에게 죄를 덜 짓고 참다운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회복된 것뿐이다. 그럼에도 신자가 스스로 노력해 선을 쌓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선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기에 당신께서 신자로 선을 행하게 하실 뿐이다.
욥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전지전능하심과 거룩하심에 대한 믿음 자체에 변함은 없었다. 성경 전체에 욥만한 환난을 그것도 졸지에 당한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그는 입술로도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았다. 그의 믿음은 처음부터 창대했다. 그는 의인도 이유 없는 환난을 당할 수 있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는 그분의 도구가 된 것 뿐이었다. 오늘날 우리도 언제든 그와 같은 쓰임을 받을 수 있는 믿음과 소망을 가져야 한다. 비록 우리는 이 땅에서 극심한 고난을 겪더라도 하늘에선 사단이 하나님께 무참히 패하는 일에 말이다.
9/29/2009-->
“수아 사람 발닷이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광풍과 같겠는가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네 자녀들이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1-7)
신자가 가진 큰 특권은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믿는 자라곤 자기 외엔 아무도 없었음에도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인간적 열심을 넘어선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래서 성경은 그 후손 이스라엘이 받은 은혜로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롬9:4)을 열거하고 있다. 오늘날의 신자도 주일날 교회의 공적 예배뿐 아니라 개인적 사유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음은 큰 은혜요 축복이다.
그런데 개인적 예배 시에 인도자가 축하하며 기도하는 말로 가장 자주 인용하는 성경구절이 하나 있다. 또 그 구절을 액자로 만든 것은 개업 예배 선물로 특별히 인기가 있으며 신자들 가정에도 많이 걸어 놓았다. 바로 본문의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것이다.
이 구절이 이렇게 애용(?)을 받는 이유는 틀림없이 비록 개업할 초기는 아직 손님이 적을지 몰라도 곧 크게 사업이 번창할 것을 소망하거나 믿는다는 뜻일 것이다. 일반 가정에서 이 액자를 걸어놓는 이유도 마찬가지로 아직 믿음이 연약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못 받고 있지만 앞으로 열심히 말씀을 배우고 기도를 뜨겁게 하고 교회에 성실히 봉사하다 보면 하나님이 크게 축복해주시리라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 구절이 뜻하는 바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
사단을 케이오 시킨 욥
욥기는 아무 이유 없이 당한 환난을 두고 욥이 영적으로 갈등한 내용이 주제다. 사실은 그 원인이 하늘에서 사단과 하나님이 욥의 믿음을 걸고 내기를 했기 때문인지라 그로선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사단은 먼저 그의 아들을 포함한 모든 소유물이 없어지면 욥이 믿음을 버릴 것이라고 장담했고 하나님은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재산뿐 아니라 자식마저 몽땅 잃었어도 욥이 믿음을 버리기는커녕 불평도 하지 않았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1:21,22)
이 고백은 욥의 믿음이 아주 견고했다는 점을 나타낼 뿐 아니라 또 다른 아주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모든 것을 다 잃고도 욥의 믿음의 자세에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기에 그는 결코 소유물 즉 자기가 하나님께 받은 축복 때문에 그분을 경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열심히 믿으면 복을 받고 그 반대면 벌을 받는다는 기복사상은 욥기의 주제가 아니라는 점을 처음부터 명확하게 밝힌 것이다.
일차 내기에 진 사단은 하나님에게 다시 도전했다. 소유물은 욥과는 직접 연관이 없지만 정작 본인에게 큰 고통이 임하면 믿음을 버릴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사단이 그의 생명만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악창이 나게 하는 것을 묵인했다.
이처럼 사단은 사람을 해할 심지어 생명마저 빼앗을 힘은 있으나 모든 일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하지 못한다. 사단에게는 능력만 있지 권세는 없다. 이 우주를 다스리는 절대적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하나님이 사단과 협력 내지 동역은 하지 않지만 사단마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궁극적으로 벗어날 수는 절대 없다. 욥이 겪은 그런 끔찍한 환난도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 가운데서 이뤄졌다는 뜻이다.
이번에는 아내마저 욥더러 하나님을 욕하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비방했을 정도로 그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욥은 또 다시 “우리가 하나님께 욕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2:10)라고 말하며 입술로도 범죄 하지 아니했다. 하늘에서 벌어진 하나님과 사단의 두 번에 걸친 힘겨루기는 사단의 일방적 패배로 끝났다. 하나님은 전혀 직접 간섭하지 않았고 순전히 욥의 믿음으로만 이겼다.
결과적으로 욥이 사단을 무참하게 케이오 시킨 셈이다. 그것도 극심한 고통 속에서 말이다. 바꿔 말해 신자가 이 땅에서 겪는 어떤 환난도 초자연적 영역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욥과 하나님의 씨름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욥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가 평생을 두고 반드시 한 번은 부딪치고 꼭 풀어야 할 신앙상의 난제다. 너무나 큰 불행을 그것도 졸지에 당한 욥으로선 도대체 그 원인이 무엇인지 꼭 알고 싶었던 것이다.
욥기는 42장으로 이뤄졌는데 하나님과 사단의 내기는 처음 2장으로 그친다. 나머지 40장은 이유 없는 환난에 대한 논쟁을 다루고 있다. 이유 없는 환난이란 말 자체가 믿음이 좋은 자에게도 환난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함의(含意)하고 있다. 욥기가 서론 격인 첫 1,2장에서 세상 어느 누구도 겪지 못할 만한 불행을 당했어도 욥이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고 강조한 이유도 믿음과 환난이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밝힌 후에 나머지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욥기는 반드시 이런 전제를 바탕에 두고 해석해야 한다. 욥 본인의 변증, 그의 세 친구와 엘리후의 논쟁, 마지막에 욥을 대면한 하나님의 말씀 모두가 성도에게 생긴 이유 없는 환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각각의 관점을 피력한 것임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 말하자면 아무리 성경적 진리로 보이더라도 일부 구절만 따로 떼어서 강조하거나 이 주제와 연관 되지 않는 해석을 시도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목사의 잘못
먼저 본문에 드러난 발닷의 논지부터 살펴보자. 한 마디로 욥이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또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면 반드시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욥이 아무리 겉으로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지만 하나님만이 아는 숨겨진 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하나님에게 벌을 받아 형편없는 처지로 전락했지만 지금부터라도 철저히 회개하고 새롭게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면 나중에는 더 많은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발닷은 "네 자녀들이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라고 했다. 욥이 아들들이 잔치를 벌인 후에 그들아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범하였을까”(1:5) 염려하여 꼭 번제를 대신 드려준 일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말하자면 “너도 모르는 네 아들들의 죄 때문에라도 하나님이 너에게 대신 벌주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느냐?”라고 다그친 것이다. 또 어쩌면 그런 큰 환난을 당하고도 하나님께 전혀 불평하지 않는 욥의 믿음을 가식적이라고 간주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문제의 성경 구절은 “지금 네 꼴을 보라 얼마나 미약한가? 네가 자랑하던 그 믿음은 어디 갔느냐? 혹시 나중에 다시 원래대로 돌려주실 지도 모르니 지금부터라도 늦기 전에 철저하게 회개해”라는 의미다. 욥의 딱한 처지를 걱정하는 친구로서 진심 어린 충고나 위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비난, 야단, 심지어 조롱의 의미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의 이런 논지는 성경이 환난에 대해 근본적으로 말하는 것과 완전히 배치된다. 성경은 열심과 정성을 하나님께 바치면 반대급부로 하나님이 성공을 보장해준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시편 기자들은 한 결 같이 환난 중에 하나님의 목소리가 왜 들리지 않느냐고 울부짖었다. 그럼 그들이 전부 믿음이 약하고 죄를 지은 자들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도 그 유명한 시편 23편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고 있는 자신의 참담한 심경을 고백했지 않는가? 다윗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겨진 하나님의 궁극적인 사랑을 믿음의 눈으로 발견했던 것이다. 오죽하면 하박국 선지자가 왜 의인이 더 핍박을 받는지 직접 따져보자고 하나님께 덤볐겠는가?
예수님도 자기를 따르려는 자들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고 경고했다. 또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6:53)고 하면서,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요6:65)고 덧붙였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연합하여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이라는 뜻이다. 이어서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요6:66) 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주님이 열심히 믿으면 반드시 복을 주겠다고 약속했다면 물러갈 바보가 어디 있었겠는가?
성경의 일관된 뜻과 발닷이 그런 말을 하게 된 배경은 아예 무시한 채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이 구절을 애지중지 하고 있다. 인생의 좌우명이나 사업의 지표처럼 삼고 있다. 그 속마음에 열심히 믿어 크게 창대해지겠다는 소원과 욕심이 자리 잡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믿음이라는 그럴듯한 용어로 포장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마저 신자 스스로 인간적 의지적 노력으로 쟁취해내려는 교만이다.
그런데 잘못은 사실 이런 내용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는 목사들에게 있다. 심지어 개업예배나 심방 때에 설교할 주제 본문으로 삼는 경우마저 있다.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이 잘 믿는 자에게 현실적 축복도 주신다고 약속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어떤 말씀이 완전한 진리가 되려면 언제, 어디, 어떤 경우, 누구에게나 그 말씀대로 항상 실증 되어야 한다. 그러나 당장에 욥이 당한 것처럼 이유 없는 환난이 있고 또 오늘날의 신자도 하박국과 같은 동일한 갈등을 겪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은 오직 스스로에게만 영향을 받으신다. 당신의 전적 주권에 따라서 복이나 벌을 주시지 신자 쪽의 공로, 자격, 능력, 상황, 열심, 정성, 심지어 믿음과도 관계없다. 엿장수 마음대로라고 말하듯이 하나님 당신의 뜻에 달렸을 뿐이다. 예컨대 쌍둥이 중에서 형 에서를 제치고 동생 야곱으로 장자 삼은 것은 당신의 주권적 선택이라는 이유 말고는 인간 이성에 부합한 어떤 합리적 설명도 배제되지 않는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죄에 대한 징계와 믿음의 보상이 분명 있지만 그 때와 방식이 우리의 기대나 예상과는 너무 달라 현실에서 그 연관성을 구분하기가 거의 힘들다. 오죽하면 하나님도 나의 생각과 길이 너희의 것과 다르며 겉으로 재앙처럼 보여도 내 마음은 평안이라고 강조했을까? 신자 스스로 실제 믿음과 상벌의 관계를 잘 분별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하나의 객관적 원리로 다루어선 안 된다.
따라서 신자는 세상에서 무조건 고난을 받게 되어 있다거나, 잘 믿으면 현실적 축복이 당연히 따라 온다는 것은 둘 다 틀린 말이다. 대신에 예수님을 닮아 그분 뜻대로 거룩하게 살 때에는 세상의 흐름을 거슬리는 것이므로 자연히 세속적 형통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도 때로는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룸에 도움이 된다면 현실적 풍요를 누리게 해준다. 바울이 말한 대로 궁핍에 처하거나 부요를 누리거나 하나님 당신의 뜻이 이뤄짐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 뿐이다.
목사는 교인들에게 단순히 잘 믿으면 복 받는다고만 가르쳐선 안 된다. 무엇보다도 신자가 누리는 복의 의미부터 정확하게 설명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잘 믿더라도 현실적 환난을 받을 수 있다고 분명하게 주지시켜서 연약한 신자가 그릇된 기대를 갖지 않게 해야 한다. 작금의 성공 지향적 신학이나 긍정의 힘을 과신하는 신학은 그 내용 자체도 문제가 많지만, 하나님이 믿음이 좋은 신자에게도 당신의 주권으로 환난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아예 가르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성경을 부분적으로 따로 떼어 보면 자칫 다 맞는 말로 보일 수 있다. 본문도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라고 했다. 절대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의인이 환난을 겪는 가운데도 그분의 공의가 드러나는 법이지 그 공의가 신자가 환난을 받는 모습이어선 안 된다는 법은 없다. 그런데도 앞뒤 문맥과 연결하지 않고 특별히 욥기의 주제와 성경의 일관된 뜻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전혀 다른 뜻이 된다. 즉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인간 이성에 합당한 모습으로만 나타나야 한다고 해석해버린다.
다시 말하지만 목사가 맞는 것만 가르치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가르치지 않으면 반쪽 진리밖에 되지 않는다. 믿음이 연약한 신자들로 반쪽 신앙만 붙든 불구자 신자로 자라게 하는 셈이다. 목사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혹시라도 신자로 하나님께 순종케 하기 보다는 고의로 불구로 만들어 자신의 말부터 듣게 하려는 것은 아닐지 두려울 따름이다.
욥이 모년에 받은 축복
그런데도 욥이 모년에 이전보다 두 배의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여전히 이 구절은 많은 신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신앙 양심상 크게 꺼릴 것 없이 “욥을 보라. 잘 믿으면 복을 받는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나중에는 창대케 된다는 말씀 그대로 되었지 않느냐?”라고 가르친다.
욥은 정말 보통 사람이 평생에도 다 겪지 못할 엄청난 환난을 순식간에 당했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 자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큰 기복이 없었다. 그가 갈등하며 괴로워했던 두 가지 사항은 믿음의 본질과는 다른 문제였다. 우선 육신적 고통이 너무 심해 견딜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과 나아가 그런 환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욥의 반론을 보자. “주께서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10:7) 당장 친구 소발에게서 “네 말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의 목적에 깨끗하다 하는구나”(11:4)라는 반발을 샀다. 그래서 욥은 “나도 너희 같이 총명이 있어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니 그 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12:3)라고, 잘 믿는 자가 복을 받는다는 일반적 원리 정도는 자기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바로 이어서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내가 이웃에게 웃음 받는 자가 되었으니 의롭고 순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10:4)라고 친구들의 주장이 반쪽 진리임을 지적했다. 의인도 얼마든지 환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그들에게 “너희는 거짓말을 하는 자요 다 쓸 데 없는 의인이라”(13:4)고까지 반발했다. 말하자면 반쪽 진리만 말하면서 사실 그대로 반쪽 진리라고 밝히지 않거나, 나머지 반의 진리를 의도적으로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이며 아무 쓸모없는 신앙이라고 한 것이다.
대신에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었다. “무슨 일이 임하든지 내가 당하리라.... 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얼굴을 피하며 숨지 아니하오리니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옵시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마옵실 것이니이다.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나로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나의 불법과 죄가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13:13,20-24)
그의 말을 쉽게 풀면 이렇다. “하나님이 나를 죽이시면 차라리 죽겠습니다. 그러나 나를 더 이상 고통스럽게 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그리고 도대체 아무 죄도 없는 나에게 이러시는 이유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내게 혹시 죄가 있다 해도 정말 이런 극한적인 고통을 받을 정도입니까? 아니면 아예 나를 원수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나는 하나님을 전혀 그렇게 대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내 믿음은 정말로 순전했음을 하나님이 더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이유조차 말씀하지 않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런 논쟁의 와중에서도 욥의 생각이, 믿음이 아니라, 조금 변하는 징조는 보인다. “나의 가는 길은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23:10) 자기에게 허락한 환난의 구체적 원인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어서 자신의 믿음을 더 성숙한 단계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짐작한 것이다.
그는 죄 지으면 벌 받고 선행하면 상 받는다는 친구들의 단순한 논리를 처음부터 반대했다. 비록 자신의 의심과 불만이 해소되지는 않았지만 논쟁을 통해 친구들의 기복적인 신앙이 틀렸음을 오히려 더 확신하게 되었다. 친구들의 주장이 틀렸다면 그 반대되는 자신의 의심이 오히려 타당성을 가실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런 기회를 통해 자신의 의심을 씻어주고 믿음도 올바르게 세워주실 것이라고 기대하게 된 것이다. 환난에, 특별히 자기가 겪고 있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경우에도 인과응보의 고리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모든 세상일에 구체적 원인이 있고 그에 상응한 필연적 결과가 따라오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마음을 먹기 바로 직전까지 그는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할 곳을 알꼬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라고 한탄했다. 이 극심한 고통에 대한 이유라도 속 시원하게 말을 해주면 좋으련만 도무지 알 수 없어서 미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리 이유를 알 수 없는 환난이라도 자기를 결국 유익으로 이끌 것이라는 점만은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의 믿음은 오늘날 만연되어 있는 소위 기복 신앙, 성공 신학, 긍정 신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반면에 세 친구는 그에게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면 복 주신다고 끈질기게 타일렀다. 성경이 그 친구들이 틀렸다고 분명히 증언하고 있다는것은 작금 유행하는 예의 신학들이 하나님 당신께서 이미 수천 년 전에 틀렸다고 직접 선포한 셈이다.
하나님과 쟁론할 자 없다.
그러나 여전히 욥이 갖고 있던 근본적 의문, 즉 욥기의 핵심 과제는 풀리지 않았다. 자기의 환난에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고 하나님은 또 그것을 신자에게 밝혀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제 삼의 인물인 엘리후가 홀연히 등장하게 된 까닭이다.
그는 욥을 향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고 말한다고 야단부터 쳤다. 환난의 이유를 끝까지 알아야겠다고 따지는 것은 자기는 고난을 받을 아무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뒤집어 말해 이유 없는 자에게 고난을 주는 하나님이 나쁘다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욥은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의롭다고 주장한 셈이다. 비유컨대 부모는 특별한 잘못이 없어도 먼 장래를 내다보며 자식을 야단치거나 어려움을 허용할 수 있다. 그러나 어린 자식으로선 그 이유를 전혀 알 수 없거나 심지어 설명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야단치거나 어렵게 만든 부모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엘리후가 욥을 견책하는 말을 보라.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하시는 것을 스스로 진술치 아니하시나니 네가 하나님과 변쟁함은 어찜이뇨. ... 주께서 사람에게 평강을 주실 때에 누가 감히 잘못하신다 하겠느냐 주께서 자기 얼굴을 가리우실 때에 누가 감히 뵈올 수 있으랴 나라에게나 사람에게나 일반이시니”(33:12,13, 34:29)
하나님은 당신이 하시는 일의 목적과 이유를 비밀로 할 때가 많다고 한다. 어떤 일이든 오직 당신의 전적인 주권으로 하신다. 그럼에도 인간이 끝까지 그것을 알려는 것은 그분의 잘잘못을 가리려 하는 것과 같다. 만약 하나님이 평안을 주었다면 이유를 따질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환난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환난이라면 신자로선 당연히 감수하면서 그분의 선한 뜻이 드러나도록 믿음과 소망을 품고 기다려야 한다. 만약 하나님이 주신 환난의 이유를 따지려 든다면 그분이 주신 평안의 이유도 따져야 한다. 나아가 아무 이유 없이 평안을 준다면 오히려 받지 않겠다고 거부해야 공평한 태도다.
“너는 하늘을 우러러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35:5-7)
하나님은 모든 일을 당신의 주권으로 할 뿐만 아니라 완벽하게 하신다. 세상의 어떤 것도 그분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오직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움직이신다. 아무리 욥 같이 신실한 신자라도 그분이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고 하지 않고자 하는 일을 시킬 수도 결코 없다. 당신의 영광은 당신께서 스스로 세우시고 유지하신다. 인간의 어떤 경건한 행위로도 그분의 계획과 뜻이 없이는 그분의 역사를 이뤄낼 수 없다. 신자는 그분의 자신을 향한 계획과 뜻 가운데서 그분의 영광에 동참하는 은혜만 누릴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할 즈음에 구원하시며 학대당할 즈음에 그 귀를 여시나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너를 곤고함에서 이끌어 내사 좁지 않고 넓은 곳으로 옮기려 하셨은즉 무릇 네 상에 차린 것은 살진 것이 되었으리라. 이제는 악인이 받을 벌이 네게 가득하였고 심판과 공의가 너를 잡았나니 너는 분격함을 인하여 징책을 대적하지 말라 대속함을 얻을 일이 큰즉 스스로 그릇되게 말찌니라. 너의 부르짖음이나 너의 세력이 어찌 능히 너의 곤고한 가운데서 너로 유익하게 하겠느냐”(36:15-19)
의인도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을 당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때가 되면 반드시 구원해 주시되 더 넓은 곳으로 옮겨 주신다고 했다. “악인이 받을 벌을” 가득 받지만 “대속함을 얻을 일이 큰즉”이라고 했다. 원인 모를 곤고함은 의인으로 더 큰 유익을 주려는 목적이다. 그런데도 신자가 자꾸 불평과 불만으로 차 있다면 스스로 그릇되게 하는 짓이며 하나님이 주실 더 큰 유익마저 막게 된다.
그래서 엘리후는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전능자를 우리가 측량할 수 없으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심판이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마음에 지혜롭다 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느니라.”(37:23,24)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의 공의를 굽게 하는 법이 없기에 인간은 오직 경외함으로만 그분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절대로 완전하고 선하다는 것이다. 신자에게 반드시 합력하여 선으로 작용하게 하신다. 원인 모를 환난도 그분의 완전한 공의에 근거한다. 인간 이성으로는 선한 면이라고는 단 하나 없으며 고통만 안겨주는 불행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은 숨겨져 있다. 심지어 하나님이 신자의 생명마저 당장 앗아가도 당신의 공의와 사랑은 단 한 치의 오류가 없으며 신자에게도 유익이다.
설령 하나님이 사단더러 욥을 죽이라고 한들 당신의 영광에는 전혀 손상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단에게 다른 것은 다 해코지를 해도 그의 생명만은 손대지 말라고 했지 않는가? 참 믿음은 하나님은 항상 무조건 옳으며 신자인 자기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어떤 경우가 닥쳐도 요동치 않고 그분을 경외하며 사는 것이다.
욥은 처음부터 창대했다.
엘리후의 견책이 끝난 직후 여호와께서 푹풍 가운데로서 나타나 욥에게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라고 직접 말씀하셨다. 이어서 쉴 틈을 전혀 주지 않고 자연계의 온갖 현상에 대해서 그 원인을 설명해 보라고 추궁했다. 욥이 하나님에게 자기가 당한 고난의 원인이라도 알자고 따지니 하나님은 역으로 욥더러 세상만사에 대한 원인을 아는 대로 대보라고 되물은 것이다.
“네는 눈에 훤히 보이는 자연 현상의 원인도 도무지 알지 못하지 않느냐? 아니 그런 것들에 대해선 전혀 따지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일을 알려고 드는데 그럴 자격이 너에게 있느냐? 또 내가 설명을 해준들 과연 네가 알 것 같으냐?” 하나님의 너무나 오묘한 반발(?)이지 않는가?
실제로 하나님이 욥에게 한 질문 중에는 인간의 희로애락에 관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인간보다 열등한 동식물계와 비와 바람과 눈 같은 무생물에 관한 것뿐이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만드셨고 주관하여 다스리신다. 또 인간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 않아도 그 만드신 가운데 당신의 신성이 확연히 드러나 있다.
훨씬 후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들풀의 영광도 솔로몬의 그것보다 절대 못하지 않으며, 참새도 천부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으며, 모든 생물들이 염려 하나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다 먹이신다. 하물며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당신 대신에 만물을 다스리라고 위임한 인간을 당신께서 먹이고 입히지 않겠는가? 얼마나 더 큰 사랑과 자비로 인도하시겠는가?”
하나님이 욥에게 인간에 관해선 단 한 마디도 묻지 않은 이유가 따로 있다. 인간만은 당신의 모든 피조물 중에서 특별한 관심을 베풀 대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느끼는 희로애락, 심지어 고통도 다른 피조물이 갖지 못하는 인간만의 아주 특별한 축복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환난 가운데도 당신만의 뜻과 계획이 있기에 당신을 향한 소망으로 인내하면 반드시 정금 같이 성숙시켜 주신다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당신의 영으로 직접 다스려서 당신만이 주실 수 있는 큰 은혜 가운데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계에서 사단더러 인간을 농락하도록 허용하지만 그 생명만은 절대 손도 못쓰게 제한하시는 하나님이다. 언젠가 당신께서 더 큰 구원으로 인도하실 뜻과 계획이 다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신묘한 이치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 만물 속에 다 숨겨 놓았듯이 인간의 일에는 더더욱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피조물은 몰라도 인간이라면 더더욱 하나님께 경배와 감사만 돌려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서릿발 같은 추궁 앞에 욥은 드디어 지금껏 품고 있었던 불만 내지 의심을 버렸다. 환난의 이유라도 알아야겠다고 하나님께 따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도 교만한 일인 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 주께서는 무소불능(無所不能) 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 하나이다.”(40:4,5 42:2,36)
만약 하나님이 실제로 하늘에서 사단과 벌렸던 내기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면 욥이 이해했을까? 이해는커녕 불평과 의심만 더 늘었을 것이다. 그는 마침내 진짜로 겸비해져서 하나님은 무조건 옳다고 시인했다. “당신이 하신 일의 잘잘못은커녕 이유마저 따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것 자체가 교만이자 죄일 뿐입니다”라고 완전히 항복했다.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림에 완전한 공의 말고는 그 기준이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온전히 시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제대로 인정하여 그분 앞에 엎드리는 자에게는 무한한 사랑으로 대해 주신다는 진리를 항상 소유하는 것이다. 그런 확신 가운데 거함으로써 어떤 일에나, 심지어 욥 같은 환난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신자가 그분의 숨겨진 뜻, 계획, 이유를 아예 따져서는 안 되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욥처럼 얼마든지 따질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그러나 그 따짐이 자신이 연단되어 정금같이 나오며 하나님의 궁극적 영광을 드러내려는 목적에 근거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다른 의도가 있다면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나아가 그런 온전한 믿음을 갖지 못했다고 해서 신자가 아니라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는 뜻도 결코 아니다. 신자가 잠시 믿음에 혼선이 생겼거나 확실한 진리를 잠시 망각한 것을 두고 하나님은 탓하지 않으신다. 대신에 하나님은 신자가 완전한 믿음으로 자랄 때까지 기다려 주신다. 아니 당신께서 키워나가신다. 그것도 욥처럼 말도 안 되어 보이는 극심한 환난을 허락하면서까지 말이다.
바꿔 말해 하나님에게 신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받는 완전한 자녀일 뿐이다. 당신의 독생자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해 주셨는데, 그것도 인간 쪽에서 그럴만한 자격 조건 능력 하나 없고 심지어 당신과 원수 되었을 때에 그렇게 해주셨는데, 조금 믿음이 흔들리거나 죄를 지었다고 그때그때 벌을 준다면 십자가의 죽음이 헛되지 않는가? 신자는 하나님에게 당신의 핏 값으로 사는 순간부터 영원히 천하보다 귀한 존재로 남는다.
그리고 오직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당신께서 신자를 빚어 가신다. 물론 때로는 죄에 대한 징계와 선에 대한 축복도 유용한 수단으로 동원하시지만 매번 그런 것은 아니다. 한 마디로 욥이 죄를 많이 짓고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지 못해 처음에는 미약했다가 나중에는 그 죄를 회개하여서 하나님께 축복을 많이 받아 창대해진 것이 아니다.
성경은 욥이 말년에 창대케 된 직접적 원인을 친구를 위해 기도해주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42:10) 그는 자신의 윤리적 종교적 죄를 회개한 적이 없다. 하나님에게 환난의 이유를 알겠다고 덤빈 것을 철회했을 뿐이다. 나아가 환난이 끝이 나고 복을 받은 상태에서 기도한 것도 아니다. 반대로 친구들의 상태가 나빠진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자신은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도 기복 신앙을 끝까지 붙들고 있는 친구들의 그 미숙한 영적 상태가 안타까웠던 것이다.
다른 종교는 몰라도 기독교에서만은 죄 안 짓고 선행을 한다고 해서 그와 비례해서 믿음이 좋아지고 복을 보장 받는다는 법은 없다. 참 믿음을 가진 자에게 죄를 덜 짓고 참다운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회복된 것뿐이다. 그럼에도 신자가 스스로 노력해 선을 쌓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선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기에 당신께서 신자로 선을 행하게 하실 뿐이다.
욥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전지전능하심과 거룩하심에 대한 믿음 자체에 변함은 없었다. 성경 전체에 욥만한 환난을 그것도 졸지에 당한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그는 입술로도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았다. 그의 믿음은 처음부터 창대했다. 그는 의인도 이유 없는 환난을 당할 수 있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는 그분의 도구가 된 것 뿐이었다. 오늘날 우리도 언제든 그와 같은 쓰임을 받을 수 있는 믿음과 소망을 가져야 한다. 비록 우리는 이 땅에서 극심한 고난을 겪더라도 하늘에선 사단이 하나님께 무참히 패하는 일에 말이다.
9/29/2009-->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