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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24:1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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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창인 목사 |
참고 : | 광성교회 - 김창인 목사 제3설교집 <하늘농사꾼/모퉁이돌> 에서 |
붙잡힌 성도 (사도행전 24: 10-23)
우리는 우리들의 생활 주변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종종 봅니다. 그 사람은 제 정신을 가지고도 귀신의 짓을 하라고 돈을 주어도 못 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일단 귀신에게 붙잡히면 누가 돈주지 않아도 잘 하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잘 합니다. 부끄러움도 어떤 체면도 없이 아주 귀신의 짓을 그대로 잘 합니다. 이것은 귀신에게 붙잡혔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누구에게 어떻게 붙잡혀야 되느냐 하는, 영적인 면에서는 같은 내용이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그 전에는 돈주고 누가 하라 해도 못 하던 일을, 누가 권세를 가지고 시켜도 안 하던 일을, 예수님에게 일단 붙잡히고 난 다음에는 예수님의 사람이 되었고, 성령에게 붙잡히고 난 다음에는 성령의 사람이 되어서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아주 자연스럽게 살아 간 사람입니다. 본문에 붙잡힌 성도라고 하는 것은 이런 뜻에서 사도 바울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도 바울과 똑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에게 붙잡히고, 하나님에게 붙잡히고, 성령에게 붙잡힌 사람이 되어야겠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주님께 붙잡힌 성도는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I. 붙잡힌 성도의 변명(10-13절)
1. 예배에 대한 변명(10-11절)
예수님께 붙잡힌 성도는 변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변명이란 말에 대해서 오해를 하면 안 됩니다. 일반적으로 변명이라면 무슨 잘못이나 실수를 저질렀을 때 자기 합리화를 위해, 핑계 대는 말로 생각하기 쉬운데 여기서의 변명이라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정체를 분명히 밝히고 나타내는 것 즉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믿는 사람은 가리거나 숨기고 살 필요가 없습니다.
진열대에 잘 진열되어 있는 물건처럼, 우리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를 나타내 보이며 살아야 한다는 좋은 의미에서의 변명입니다. 11절에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지 열 이틀밖에 못되었고"라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 밝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고국 유대 나라를 떠나, 산 넘고 바다 건너 머나 먼 이국 땅을 드나들면서 선교사의 사명을 감당하는 중에 예루살렘을 찾아 온 것입니다. 천리 만리 머나먼 길을 예배하기 위하여 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길을 예배하러 왔다고 그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이냐 하면, 주의 성전을 찾을 때에는 반드시 예배하는 목적 외에는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오게된 까닭은 분명히 거기에 성전이 있기 때문에 성전에 예배드리러 온 것입니다. 성전이 예루살렘에 없다면 불원천리하고 예루살렘에 올 이유가 없었겠지요. 성전에서 예배하는 사람은 반드시 예배할 목적 외에는 다른 목적으로 모여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의 잘못 생각하고 주일날 성전에 모일 때 사람을 만나러 모이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선보러 모이기도 합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러 모이기도 합니다. 설교를 통하여 어떤 교양강좌식의 유익을 얻고자, 교훈을 받고자 모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전에 모이는 목적과 내용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높이기 위하여 모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전에 모였다 하면 예배할 목적으로 모여야 한다는 것이 예배에 대한 사도 바울의 분명한 태도입니다.
2. 화평에 대한 변명(12절)
바울 사도는 자기가 성전 안에서 누구와 논쟁하고 다투고 변론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즉 바울을 송사하고 지금 재판정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 가운데 내가 성전에서 누구와 다투는 것을 본 일이 있는 사람은 이야기하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평생에 성전에서 다툰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논쟁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안식일마다 나가는 회당에서 역시 누구를 선동한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내가 사는 성중 시내 거리에서 누구와 내가 싸우는 일을 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느 곳에 있든지, 어디를 가든지 화평을 도모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 기분에 맞지 않을 때도 있고,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겠지만, 내 주장만 내 세우며 누구와 다툰다든지 원수 맺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이 밝히는 그 태도대로 우리도 그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3. 송사에 대한 변명
바울이 송사를 당하여 벨릭스 총독 앞에서 지금 재판을 받고 있는데 바울이 말합니다. 송사를 한 사람들 중에 내가 고소를 당할 만한 증거를 가지고 있거든 이야기해 보라는 것입니다.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저 사람들이 나에게 공연히 죄를 뒤집어 씌워 죄를 만들고 있다. 즉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주위에서 두 종류의 사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는 문제를 자꾸 만들려는 사람입니다.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문제가 없던 교회에 문제를 자꾸 일으킵니다. 시끄러워 집니다. 문제가 없던 집안에 그런 사람 들어오면 문제가 자꾸 일어납니다. 문제가 없는 직장에 그런 사람이 들어오면 자꾸만 복잡한 문제가 일어납니다. 시끄러워 집니다. 불화가 조성됩니다.
다른 하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일어났다 하면 조용히 풀어 해결 해줍니다. 죄 없는 사람을 공연히 송사하는 사람은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요 바울은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붙잡힌 성도의 태도로서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II. 붙잡힌 성도의 신앙 고백(14-16절)
1. 섬기는 신앙을 고백(14절)
두 남녀가 서로 사랑할 때는 반드시 사랑을 고백합니다. 말이나 눈빛을 통해서, 아니면 어떤 방법으로든지 사랑을 고백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고 우리 믿는 사람, 예수님께 붙잡힌 성도는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그 사랑을, 그 신앙을 고백한다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가 하나님을 섬겼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조상 대대로 섬겨온 귀한 섬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저희가 말하는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서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내가 섬겼다 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내 기분대로, 내 좋아하는 대로, 내 주장대로 내 주관대로 하나님을 섬기면 곤란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는데 나는 저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저런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은 그 섬김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온전한 신앙 고백입니다. 14절 하반절에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의 기록을 다 믿었다고 했는데 율법과 선지자라면 구약 성경을 가리킵니다. 유대 사람들은 지금도 신약이 없습니다. 그들은 구약만 가지고 살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말하는 구약 성경을 구약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이 아예 없기 때문에 구약 성경이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구약성경을 성경이라 그렇치 않고 율법과 선지자라 합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에 기록된 것을 다 믿는다 그런 뜻입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것을 다 믿는 신앙, 이것이 온전한 신앙이며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래도 믿어 섬겨야 합니다.
2. 소망의 신앙 고백(15절)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이 땅에서 축복 받아 그저 부자로 사는 것, 이 땅에서 축복 받아 건강해서 장수하며 오래오래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 목적이 그것이라면 예수 믿을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남의 것 빼앗아 먹고라도 나만 잘 사면 그만일 것인데, 그것이 예수를 믿는 궁극적 목적이라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겠습니다. 우리에게 예수 믿는 궁극적 목적은 부활에 대한 소망입니다.
부활한 몸은 먹고 싶으면 먹고 싫으면 맙니다. 먹고 싶은 재미가 있는 사람은 실컷 먹고삽니다. 그땐 소화불량도 없습니다. 그리고 꼭 없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부활한 다음에도 병들면 곤란합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병들지 않는 몸입니다. 또 늙지를 않는 몸입니다. 죽음이 없는 몸입니다.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합니다. 그 얼마나 좋습니까. 그렇게 때문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몸 그대로 부활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고생도 하고 이것 때문에 예수 믿고 이것이 예수 믿는 근본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가지고 살아 갈 적에 내가 조금 가난해도 괜찮습니다. 조금 병들어 고통스러워도 이겨 나갈 수가 있습니다.
이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괴로우나 즐거우나 승리하는 믿은 생활되기를 기원합니다.
3. 양심적인 신앙을 고백(16절)
양심적인 신앙 고백을 해야 되는데 양심적인 신앙은 세 가지 입니다.
첫째로는 하나님께 대한 양심입니다. 예를 들어 십일조라든지 주일 성수라든지 마땅히 지켜야 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양심적인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나 자신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헌금도 잘하고 금식기도, 철야기도, 봉사도 많이 하면서 실제 생활에서는 사람들과 원만치 못하며, 남을 헐뜯고 중상모략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한다면 덕이 되지 않겠지요. 믿는 자로서 본을 보이고 사랑을 나누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는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어야 됩니다. 항상 이라는 것은 어제도 거리낌없어야 되고, 오늘도 거리낌없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김씨에게도 거리낌이 없어야 되고, 박씨에게도 거리낌이 없어야 되고, 항상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신앙 이것이 산 신앙입니다.
III. 성전에서 할 일 (17-23절)
1. 성전에서의 본분
우리가 세상 살아가는 동안 부모로서 자녀로서 또는 자기가 처해있는 자리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붙잡힌 성도로서 특별히 성전에서 해야 할 본분이 있습니다.
성전에서 해야 할 일 중에 구제하는 일입니다. 구제하는 방법에 있어서 사도 바울이 유대 나라 자기 본국을 떠나 이방에서 전도하는 중에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었다 하는 이야기를 듣고 구제금을 많이 모아 가지고 왔습니다. 바울이 구제금을 이집 저집 찾아다니며 직접 전달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고 반드시 주의 성전에서 교회를 통해서 했다는 것인데 이것이 상당히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 하면 어려운 일 당했을 때 내가 쌀가마니 들고 와서 척척 나누어준다면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영광 돌리기 전에 나에게 감사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을 영광 내가 다 받아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교회를 통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제금을 갖다가 교회에 내면 교회 이름으로 구제를 하니 하나님 앞에만 감사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구제할 일은 성전을 통해서 해야지 개인적으로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준법의 본분
이 말은 내가 이 세상 법정 앞에서 재판을 받을 만한 세상 법에 저촉이 되는 일이 있으면 총독 앞에 와서 당당히 고소할 일이요. 내가 만약에 신앙적으로 종교적으로 어떤 잘못을 저질렀으면 공회 앞에서 종교적인 재판을 받게 할 일이지 어떻게 재판도 없이 나를 그냥 길거리에서 때려죽이려는 것이냐 하는 말입니다. 천부장이 아니었다면 길거리에서 맞아 죽을 뻔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붙잡힌 사람이요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하는 사람이라도 세상 법에 저촉됐으면 세상 법에 재판을 받을 것이고 종교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잘못 살으면 교회 법에 재판을 받아서 법을 지키며 살 일이 아니겠느냐 바로 그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 붙잡히고 하나님께 붙잡힌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강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직장에서 규칙과 규례와 법을 지켜가면서 사는 생활 이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법을 무시하면 혼란이 오고 혼란이 계속되면 파멸이 오기 때문입니다.
3. 증거의 본분(21-23절)
바울 사도가 지금 송사를 당하여 재판을 받는 까닭은 '죽은 자의 부활이 있으리라, 즉 죽은 자의 부활이 있었다. 혹은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하는 이 말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가 외국에 나갔을 때에도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유대인 회당 가운데 가서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이것을 증언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에게 붙잡혔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예수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것을 감격스럽게 증거 했다는 것입니다. 체험적인 신앙이 아니면 우리는 증거하지를 못합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사람은 그 사랑을 표현하거나 증거하지 못합니다. 책을 통해서, 또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설명을 들으면 긍정하며 짐작을 합니다. 그러나 체험이 없기 때문에 감격이 없습니다. 어머니 사랑을 뼈 속 깊이 체험한 사람은 '어머니'라는 말만 들어도 벌써 가슴이 찡하고 아련해집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한 자, 바울 사도의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배운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예수님의 능력을 만났습니다. 체험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그는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능력,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거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감격 속에 말입니다. 그래서 붙잡힌 성도 바울은 변명을 했습니다.
예배에 대해서, 화평에 대해서, 송사에 대해서, 그는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섬김의 신앙, 온전한 신앙, 소망의 신앙, 양심적인 신앙 마지막으로는 자기의 본분을 밝혔습니다. 성전에서 할 일과, 법을 지키며 살아야 할 일과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해야 할 일을 밝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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