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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4:1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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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상호 목사 |
참고 : | 세광교회 http://sk8404.or.kr |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
- 은총의 하나님 세상을 변화시키소서! -
눅 4:18-19, 이사야 61:1-2, 빌 1:29
06. 1. 15, 여신도주일설교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눅 4:18-21).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세상에 메시야로 보내신 목적/사명이
다섯 가지라고 했습니다(사 61).
1.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2.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3. 눈먼자, 갇힌 자에게 놓임을 위해 오셨습니다.
4. 눌린자,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기 위해 오셨습니다
5.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첫 번째는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하심이라.(사 61:1)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첫 번째 사명이 무엇인가?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이 소식을 전하는가 하면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기 위해 메시아가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가난이라고 하면 물질의 가난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가난이란 물질의 가난이 아니라, 심령의 가난인데 즉 마음을 비우는 사람을 말합니다. 심령의 가난은 영적으로 빈곤이나 물질적인 빈곤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결핍과 무력한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 자신을 정당히 평가하여 최선의 삶을 노력입니다. 영적으로 빈곤한 것은 영적으로 메마름이지만 물질적으로 빈곤한 것은 재물의 부족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심령의 가난이란 물질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처럼 온유와 겸손의 마음(마 11:29)을 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누구인가? 물질을 가지고도 가난하게 사는 사람은 겸손의 사람이요. 물질이 없음에도 평안하게 사는 사람은 만족의 사람입니다.
부대에서 군목이 사병들에게 빈 병을 하나씩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설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병들은 불평을 하면서 조그만 약병, 박카스 병. 콜라 병. 그런데 어떤 사병은 커다란 됫병을 가지고 왔습니다. 군목은 꿀을 만들어 나눠주면서 그릇을 준비한대로 마음껏 채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꿀보다 더 귀한 말씀을 준비해 놓고 마음껏 그릇에 담으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가난은 깨끗한 그릇, 커다란 그릇, 준비된 그릇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딤후 2:20-21). 그러므로 그릇을 깨끗이 비우듯이 마음을 비우는 것이 가난입니다. 심령을 비운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질그릇 속에 보배로 담아야 합니다. 심령을 비워서 심령이 가난해져야 은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가난'이란 말을 세속에 지배를 받지 말고 부귀에 의존하지 말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을 보는 사람, 하나님을 쫓는 사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마음이 가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가난한 자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영접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목적은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위해 오셨습니다.
전쟁에서 패하여 포로 된 자들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무엇입니까? 포로에서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어려가지 불행한 일로 포로 된 자들이 있습니다.
더욱이 21세기에 들어선 아프카니스탄 전쟁으로 포로 된 자들, 또 우리 한국에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윤리적인 범죄로 포로 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가장 기쁜 소식이 무엇입니까? 포로에서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사는 세상에서 범죄로 포로생활을 하는 사람들보다도 문화와 문명과 언어에 포로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성공에 포로, 물질의 포로, 돈과 명예에 포로, 질병과 허영으로, 근심과 걱정, 또 죄와 사탄의 권세에서 영적인 포로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직접적으로는 바벨론에서 해방으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지만 예언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영적으로 눈이 먼 온 인류를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더 이상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셨습니다(갈 5:1).
갇혔다는 것은 어느 누가 가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올무에 빠져서 갇힘입니다. 즉 선 줄로 생각하다가 넘어졌다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구덩이를 파고, 스스로 올무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평화가 사라지고 색안경을 쓰게되고 불 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이미 죄에서는 해방되었지만 옛날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여전히 죄의 사슬에 매여 있는 영혼들에게 예수님은 갇힌 자의 놓임을 위해 오셨습니다. 즉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에게 다시 보게 함이라(눅 4:18)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의 자유를 주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포로가 아니라 자유인입니다. 죄와 사망의 올무로부터의 참된 해방(롬 6:18, 7:24,25, 히 2:5)의 자유를 주신 예수를 영접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목적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문화와 문명이 발달 될수록 상처를 당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육신의 상처는 최신의 발달된 성형수술로, 또는 발달된 약품으로 깨끗하게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를 입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음의 상처는 육신의 고통보다 더 큰 괴로움이 됩니다. 사회생활, 인간관계, 가정생활 속에서 피해 의식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늘 마음이 편하지 못해 욕구불만, 좌절감, 열등감, 시기와 질투와 의심과 두려움, 불안감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이 많습니다.
상한 심령이란 근심하는 마음, 무능력해진 마음, 마치 예전에는 달리기를 잘하다가 뼈가 부러진 사람처럼 꺾으신 뼈와 같으므로, 모든 활력을 잃으므로, 피곤해지는 것입니다.
상처 난 마음은 마치 깨지고 부서진 조각과 같습니다. 전쟁으로 성당에 있는 유리가 깨졌습니다. 성도들은 깨진 유리 조각을 이어서 최고의 기술자로 하여금 붙여서 스테인그라스 창문을 만들었습니다. 마음의 상처는 세상에서는 어느 누가 싸매어 주고 감싸주고, 치료해 줄 수 없는 상처요, 세상에서는 고쳐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시 147:3)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나의 행하는 길에 저희가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시 142:3)
하나님께서는 때가 차매 상한 마음을 치유하고 참된 평안을 위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상심하는 자를 고치시고 상처를 싸매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네 번째 목적은 슬픈 자를 위로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슬픔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또 우리가 인간 세상에 살 때에 수많은 슬픔이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사랑하는 가족이 죽음을 당할 때 일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과 사랑하던 친구 요나단이 죽게 되었을 때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이웃이나 사회나 나라가 고통을 당할 때 눈물 흘렸던 선지자들이 또 애국자들이 있습니다. 모르드개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으며 재를 무릅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 통곡하였고 에스더는 유다 민족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다'라는 각오로 금식을 선포하므로 민족을 위기에서 구원하였습니다(에4:1-4).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시면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인류를 위해 슬퍼하시면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6 -3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느헤미아는 백성들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이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8:9, 10)고 했습니다.
시편기자는 노래하기를 하나님은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고 베옷을 벗기고 기쁨의 띠를 띠우시는 분이요(시 30:11).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갑니다(시90:10).
그러므로 베드로는 말하기를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햄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고 했습니다(벧전2:19-20).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마 5:4)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과 근심과 걱정이 많은 세상에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위로와 평안을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슬픈 자에게 꽃으로 만든 면류관을 주고 희락의 기름을 붓고, 찬송의 옷을 입혀주신다고 했습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어떤 공동체라도 하나님께 영광돌리면 땅에 있는 사람에게 평화가 오지만 인간들이 모여서 먹고 마시는 잔치만 하면 근심과 걱정과 불안, 나가서 고난과 고통이 끝이 없습니다.
참된 평화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때 위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교회가 되기 원하면 나에게 재미나 기쁨이나 유익을 주는 교회를 찾기보다 남에게 유익과 기쁨이나 재미를 주는 교회를 만드는 게 오늘 우리, 특히 우리 여신도들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에 행복함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 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소원을 잊어버리고 내가 원하는 교회를 찾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혼구원의 목적을 이루는 교회를 원하십니다. 교회는 인간의 만남이 이뤄지는 곳이지만 사교 클럽이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영적투쟁을 위한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따라서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이 마음이 상한 자가 고침을 받고 포로된 자와 갇힌 자가 영원한 해방이 되고 인생에서 근심과 걱정 모든 슬픈 자에게 참된 위로로 기쁨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서 주의 은혜의 해가 이루어져 은혜스럽고 행복한 교회를 이룩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 : 여신도들과 구원받은 성도들을 통해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교회가 이뤄지고 영원한 기업을 약속으로 보증받고 근심과 걱정에서 해방되어 찬송의 기쁨이 넘치는 성도의 삶이 이뤄지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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