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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2:35-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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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기다리고 사모하는 사람의 복
눅 12:35-40
2008. 1월21일 주일 설교 원문
1. 울고 있는 나의 모습 바보 같은 나의모습
환하게 비추는 태양이 싫어 태양이 싫어
누군가 날 알아보며 왜 우냐고 물어보면
대답을 해줄 수 없는 게 너무 싫었어.
*태양을 피하고 싶어서 아무리 달려 봐도
태양은 계속 내 위에 있고
너를 잊고 싶어서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리 애를 써도 넌 내안에 있어
2. 아직도 너의 그 미소 나를 만졌던 그 두 손
그리워하는 게 너무 싫어서 너무 싫어서
많은 사람들 속에서 웃고 얘길 나누면서
잊어보려 했지만 또 다시 눈물이 흘렀어.
태양을 피하는 방법-비 (Rain)
<비>라는 젊은 가수가 부른 ‘태양을 피하는 방법’이라는 노래 말입니다. 이 청년은 태양을 피하고 싶다고 ‘우울’을 권장하고 있지만, 사실 식물들을 길러보면 그들은 하루도 태양이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태양을 향하여 뻗어나가고 햇빛을 받으면서 푸르게 싹과 잎을 내고 꽃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고흐는 이 빛을 사랑해서 온통 노란색으로 햇빛 쏟아지는 들판을 그렸고 해를 향해 서 있는 해바라기를 그렸습니다. 황금 빛 들판 밀짚 위에서 잠을 자는 농부는 비록 비단 옷은 입지 않았어도 가장 행복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자연에서 보는 가장 행복한 모습은 햇볕을 쪼이면서 졸고 있는 고양이, 햇빛 아래 편안하게 누워 있는 강아지 모습이 아닐까요? 그런데 인간만은 햇빛을 피하고 있습니다. 자외선 때문에 일찍 늙는다는 말과, 햇빛의 위험을 강조하는 자외선 차단제 선전 때문에 햇빛은 피해야 하는 어떤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하루 종일 아파트에 살고 출근해서는 빌딩에 살며 해는 블라인드로 가리고 사는 것이 일상적입니다.
이렇게 외면하거나 피하는 사람들이 영혼의 태양과 같은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그들은 햇빛 없는 어둠과 밤거리를 좋아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피하며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울고 있는 나의 모습 바보 같은 나의 모습, 환하게 비추는 태양이 싫어 태양이 싫어.”
이처럼 태양이 싫다고 외치는 것이 멋스럽게 느껴지고, 젊은이들의 정서에 호소력을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밝은 것을 싫어하고 음침하고 우울한 것을 즐기는 요즘의 세태를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어느 식물도 태양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땅 위의 모든 동물들도 태양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만물의 영장인 우리도, 전에 어느 가수가 노래한 것처럼,“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우리가 간직함이 옳지 않겠나”하고 노래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달에 비유한다. 나는 깨어있는 사람에게 들어오셔서 시중을 들어주시는 예수님을 떠오르는 태양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모두에게 은총을 고루 나눠주시는 해와 같은 분입니다.“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고 했습니다(마 5:45).
바로 우리들 삶에 태양과도 같은 예수님을 우리가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빛을 쪼지 못하기 때문에 우울하고 어둡고 절망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해바라기가 태양을 떠나서 잘 될 수 있습니까? 들판의 풀들이 “태양이 싫어”라고 노래할 수 있습니까?
현재 세계의 에너지소비 현황은 석유 33%, 석탄 25%, 천연가스 18.5%, 목재와 목탄 및 바이오매스(biomass, 열 자원으로 사용되는 식물 및 동물 폐기물) 12%, 수력 6%, 원자력 5%, 마지막으로 풍력과 태양에너지는 겨우 0.5%에 불과합니다. 프란츠 알트 <생태주의자 예수>라는 책(109f.)에서 이제는 태양에너지를 활용할 때라고 역설합니다.
“태양은 현재 지구상의 모든 인간에게 필요한 양의 15,000배에 달하는 에너지를 우리에게 공급한다. 태양은 매년 우리에게 35,000×1조 킬로와트시의 빛에너지를 지구에 공급한다. 태양은 우리에게 무상으로 베푼다. 태양은 우리에게 청구서를 보내지 않는다.”
그는 태양의 반지름이 약 70만km인데, 태양 전체 면적 가운데 10제곱미터 정도 면적만으로도 독일의 중간급 발전소가 생산하는 에너지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합니다. 사하라 사막의 10%에 내리는 햇빛 에너지면 서부 유럽 전체가 쓰고도 남는다고 합니다. 이라크 전도 석유 확보를 위한 전쟁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 에너지 때문에 거듭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무궁무진한 태양에너지의 개발과 활용이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이 원고를 작성하는 중에 임 장로님이 전화를 하셨습니다. 한전에서 민간 전력사업을 하는데, 땅 1만평만 있으면 건설비를 한전에서 대고 향후 20년간 생산전력을 한전에서 매입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태양에너지에 의존하지 않고는 안 된다는 의미도 있다 하겠습니다.
나는 이것을 우리 신앙에도 적용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병이 생기거나 하면 의사를 찾아 상담도 하고 치료를 받는데 꼭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이치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의 빛은 태양빛과도 같이 무궁무진하고 다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청구서를 보내시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다만 다가가기만 하면 되고 기도하기만 하면 들어주십니다. 태양에너지는 계발하는 데 기술도 필요하고 투자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데는 그런 선진기술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은유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미 은총을 거저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서 그 가스관이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로 가스관을 연결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은 기도이고 찬양입니다. 예배입니다.
지구상에 사는 식물과 동물이 그러듯이 사람이 생의 복을 누리며 사는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리시는 주님께 잇대어 사는 것뿐입니다. 깨어서 기도하는 이에게 들어오셔서 밥상을 차려 주시는 주님께 잇대어 사는 길뿐입니다.
지금 고흐의 그림은 한 점에 수백 억 원에 팔리고 있습니다. 고흐는 햇빛이 많기로 유명한 프랑스 아를 지방에서 눈부신 햇빛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 햇빛은 지금이나 그때나 공짜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화폭에 담았을 때 그 가치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고흐에게 내리쬐던 햇빛은 지금 우리에게도 비추고 있습니다. 다만 태양이 싫다고 하면서 그것을 피하면서 사는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프란체스코는“오, 나의 자매 달이여, 오 나의 형제 태양이여”하고 노래하였습니다. 태양을 영접하고 환영하는 사람에게 고흐에게 내린 것과 같은 영감이 주어질 것입니다. 주님은 간수나 감사원 직원 같은 분이 아닙니다.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같은 분, 우리에게 무궁무진하게 은총을 베푸시는 분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햇빛 이신 그리스도를 어떻게 쬘 수 있을까요?
35a절에서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있어라”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집안에서는 허리에 띠를 띠지 않고 느슨하게 옷을 입었습니다. 허리에 띠를 띤다는 것은 밖으로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마치 군대에서 5분대기조가 출동을 할 복장을 하고 잠이 드는 것처럼, 어떤 활동이나 봉사를 할 준비를 하고 대기 중인 상태를 말합니다.
35b절에는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고 합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누군가를 기다릴 때는 불을 켜둡니다. 이것은 도착하는 사람에게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와 환영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36절에서,“너희는 마치 주인이 혼인 잔치에서 돌아와서 문을 두드릴 때에 곧 열어 주려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되어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주인의 이미지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이런 이미지는 요한계시록에도 나오죠.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계 3:20).
우리는 종말에 구름을 타고 우주적으로 심판을 하는 인자 상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밤늦게 집의 문을 두드리고, 안에서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밖에서 고생을 할 수도 있는 주인의 모습은 새로운 해석이고 이해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에서는 우리가 문을 열면 그는 들어와서 함께 먹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오늘의 본문에서는 더욱 강조가 되어 나타납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흔히 이렇게 예고 없이 찾아오는 주인의 이미지를 보초들을 순찰하는 당직 장교의 이미지와 같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37절에서 나타나는 주인의 이미지는 매우 파격적입니다. 놀랍게도 그 주인은“허리를 동이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을 들 것이다”(37절)고 합니다. 아무리 종들이 주인을 기다리느라 수고를 했다고 하더라도 주인이 종들에게 시중을 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이것은 상식적인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 신앙으로 사는 신자에게 주어질 파격적인 은총의 선물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곧 종말이 임박했다는 의식으로 살았다면, 그래서 당직사관 같은 모습으로 주님을 그렸다면, 바울보다 30여 년이 늦은 시점에 있는 누가는 종말이 지연된 상황에서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그는 종말의 때가 언제인지 하나님만 아시므로, 오늘 신자는 언제나 종말인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최후의 날에 신자가 공중에서 구름타고 오실 인자를 영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 하루하루의 삶에서, 내 집에 문을 두드리는 부모 같은 주님을 영접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은 무섭게 심판하는 분이라기보다는, 우리가 문을 열고 영접하면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하고, 우리의 시중을 들어주시는 다정하고 고마운 분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의 능력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현재적 은총의 경험입니다.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는 부모가 무서워서 깨어있기보다는, 부모를 사랑해서, 부모에게서 뭔가 기대하면서, 부모를 기쁘게 해주려고 잠을 참으면서 깨어 있는 것입니다. 부모가 와서 문을 열면 부모는 들어와서 가져온 선물을 주고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가 기자가 생각한 신자들에게 임하는 현재적 종말이요, 새로운 시간관입니다.
그렇습니다. 준비하고 기다리며 사모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만납니다. 그들이 영원한 에너지인 태양을 쬐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승리하는 인생을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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