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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4: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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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내 안에 주님 계심을 믿는 것
요 14:8-14
*2007년 1월28일 주일 설교 원문
사진은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에버복>수도원입니다.
신부들이 지하 공장에서 포도주며 압셍트를 주조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본문 8절에 보면 빌립이 예수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 때 예수께서 말씀하셨어요.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유명한 수도원이 있었습니다. 하루에도 수천 명의 순례 객들이 드나들었고, 수백 명의 수도자들이 있는 수도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수도 객들이 줄어들더니 아예 사람하나 얼씬하지 않는 그런 수도원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수도원은 당황했습니다. 갑작스러운 퇴락의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고민하던 수도원장이 어느 날, 사막에서 홀로 수도에 전념하다가 하나님과 통한 수도자를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다시 예전처럼 부흥할 수 있는가를 묻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주 적절한 처방을 내려 주었습니다. 수도원으로 돌아온 수도원장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돌아 다녔습니다.
“듣기에, 하나님이 우리 수도원에 내려오셨다고 합니다.”수도원 사람들은 자기 수도원에 내려와 계신 하나님이 누구일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서로에게 깍듯해 졌습니다. 마치 하나님을 대하듯이 그렇게 서로를 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바로 하나님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수도원은 다시 많은 사람들로 가득하게 되었답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곁에 두고도 뭔가 은혜가 되는 것이 없나 하고 밖을 기웃거렸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늘 소중한 것은 나의 밖이나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것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자기 밖으로부터 ‘하나님’을 찾는 빌립의 모습은 오늘 우리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정작 그 예수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해야 예수를 만나는지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면서도 늘 불안하고 공허해서 밖으로부터 행복이나 삶의 변화를 구하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은 빌립과 같은 우리에게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어라”(11). 그리고 계속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20).
이것만 깨닫는다면 놀라운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12).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내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주겠다”(13).
이 약속이, 이 기적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려면, 그리스도 안에 아버지가 계심을 믿을 뿐 아니라, “내 안에” 주님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가능성이 꽃피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나는 잠시 있다가 사라질 육체 덩어리가 아닙니다. 난 그 이상입니다. 주님이 나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일하십니다. 주님의 일 뿐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십니다. 내가 구하는 것은 다 이루어주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 나는 가만히 있어도 기적이 일어납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심을 믿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준비의 전부입니다. 이렇게 내가 준비되면 세상이 열리고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내 안에 주님 계신 것’을 고백할 수 있나요?
전도서를 참고서로 쓰겠습니다.전도서는 아시는 것처럼, 헛되고 헛되다면서 매우 염세적인 분위기로 시작합니다. 전도자는 왕으로서 이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것은 안 해 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세상이 허무하다고 합니다. 마치 세상에서 누릴 것 다 누려보고 난 뒤에 이제는 재미가 없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돈을 벌어서 무엇 하며, 사랑은 해서 무엇하고, 공부는 해서 무엇 하느냐고 하는 듯 보입니다. 악한 사람이 오래 살고 착한 사람이 일찍 죽는데 뭐 하러 착하게 살며, 정의를 외치고 정직을 외쳐 보았자 지나고 나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데 뭐 하러 그렇게 노력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찾으려 하지만 인간이 죽으면 짐승보다 나은 게 무엇이냐면서, 헛되고 헛되다 하고 탄식을 합니다.
그러면 전도서가 그저 세상을 염세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열심히 살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전도서는 우리를 삶의 더 깊은 차원으로 안내합니다.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라고, 허망한 삶을 부정하고 참 삶을 이끌어 내려고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기적들을 끌어내려고 우리를 유도하는 것입니다. 그는 어떠한 형태의 이데올로기나 이념 같은 것이 우리를 구속하여 불행하게 만들 때 그것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 이념이나 이데올로기란 뭡니까?
세상 사람들은 모두 돈만 벌면, 대학에만 가면, 취직만 되면 행복하리라는 마술에 걸려 있습니다. 정치에 목숨을 건 사람은 대통령을 잘 뽑으면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면서 그 일이 지금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한탄하면서 불행 속에 살아갑니다. 이것이 사람을 구속하는 이념이나 이데올로기입니다. 전도서는 그런 것이 행복의 원천이 아니라고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멀리서 자기의 행복을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나를 붙잡고 있는 그런 신념이나 생각이나 삶의 방식들을 놓아버릴 때 오히려 하나님 편에서 새롭게 시작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을 좋게 보아 주시니, 너는 가서 즐거이 음식을 먹고, 기쁜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셔라. 너는 언제나 옷을 깨끗하게 입고, 머리에는 기름을 발라라. 너의 헛된 모든 날, 하나님이 세상에서 너에게 주신 덧없는 모든 날에 너는 너의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즐거움을 누려라. 그것은 네가 사는 동안에, 세상에서 애쓴 수고로 받는 몫이다. 네가 어떤 일을 하든지, 네 힘을 다해서 하여라. 네가 들어갈 무덤 속에는, 일도, 계획도, 지식도, 지혜도 없다”(전 9:7-10).
그렇게 거창한 목표들 이데올로기들을 다 부수고 나서 대신에 제시하는 것은 무슨 거창한 체계가 아닙니다. 소박한 삶입니다. 이것이 기적을 이루는 기초가 된다는 것입니다.
소박한 삶이란 어떤 것입니까? 먹는 음식이 맛있어야 합니다. 토끼도 다람쥐도 강아지도 얼마나 맛있게 먹는가, 나도 그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 맛있게 먹고 함께 먹고 나누어 먹는 행복을 맛보아야 합니다. 그저 주유소에서 기름 넣듯이 밥을 입에 담아서는 안 됩니다.
입는 옷이 기쁘고 즐거워야 합니다. 원앙이나 청둥오리, 제비나비나 장수잠자리의 색깔을 보세요.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답게 차려 입었나요. 저한테 꼭 맞게 아름답게 차려입었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들의 꽃도 참 곱게 차려 입을 줄 압니다. 명품을 걸치지 않아도 내가 입은 것이 아름답고 나의 표정, 내가 받은 피부, 머리카락 하나까지 고맙게 느껴집니다. 쓰다듬는 것은 사랑의 비결입니다. 내가 나를 쓰다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자꾸 쓰다듬어주어야 합니다. 그가 입고 있는 것이 아름답고 그에게 꼭 어울리기 때문에 칭찬을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뻣뻣하다고 싫어하는 머리카락도 외국 사람들은 부러워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나의 소중한 것을 내가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거기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아내와 다정한 대화를 하고 산책을 자주 하고 쓰다듬고 사랑하는 데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내와 사랑하라고 하면 부끄러워하고 아내 자랑하면 팔불출이라고 하는데 이는 잘못입니다. 남자들이 자꾸 허탈해하고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밖에서 즐거움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나 목회에서 사랑만큼 중요한 게 없고, 부부들이 화목하고 건강해야 가정도 교회도 건강하고 밝은 것입니다. 나 자신이 남녀관계에서 다정하고 평등한 훈련을 해야 하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전도서 말씀대로 아내와(또는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서 즐거움을 누려야 합니다. 그때 진정으로 행복하며, 거기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있는 힘을 다해서 하라고 합니다. 무덤 속에는, 일도, 계획도, 지식도, 지혜도 없다고 합니다. 일하는 것은 살아 있는 이의 특권입니다. 사람들은 일하는 것을 먹고 살기 위해서 할 수 없이 한다고 하고, 고역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이는 믿음 없는 말입니다. 오늘날 그릇된 학부모들은 자녀들이 공부 안 하면 너 뭐가 될래? 하다가 마땅한 대상이 생각이 안 나면, 대개 주변에 있는 힘들여 일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공부 안해서 저렇게 되고 싶어?”라고 말합니다. 일하는 사람들이 공포의 대상이고, 공부하는 목적은 일 안하고 편하게 살기 위해서라고 암암리에 가르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교육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째째하게 살라는 말이냐? 아닙니다. 들어 보세요. “젊을 때에 너는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고생스러운 날들이 오고, 사는 것이 즐겁지 않다고 할 나이가 되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기 전에, 먹구름이 곧 비를 몰고 오기 전에, 그렇게 하여라. 그 때가 되면, 너를 보호하는 팔이 떨리고, 정정하던 두 다리가 약해지고, 이는 빠져서 씹지도 못하고, 눈은 침침해져서 보는 것마저 힘겹고, 귀는 먹어 바깥에서 나는 소리도 못 듣고, 맷돌질 소리도 희미해지고, 새들이 지저귀는 노랫소리도 하나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높은 곳에는 무서워서 올라가지도 못하고, 넘어질세라 걷는 것마저도 무서워질 것이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고, 원기가 떨어져서 보약을 먹어도 효력이 없을 것이다. 사람이 영원히 쉴 곳으로 가는 날, 길거리에는 조객들이 오간다.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그릇이 부서지고, 샘에서 물 뜨는 물동이가 깨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부숴지기 전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육체가 원래 왔던 흙으로 돌아가고, 숨이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네 창조주를 기억 하여라”(전 12:1-7).
“네 창조주를 기억 하여라” 이 한마디가 시작이요 끝입니다. “헛되고 헛되다”라는 탄식은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운을 띄운 것입니다. 우리가 애쓰고 집착하고 있는 일이 나를 옥죄고 숨도 못 쉬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놓아버릴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전도자처럼 그것을 향해서 “헛되고 헛되다” 하고 말하면서, 오직 나의 창조주 하나님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때에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계신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유한한 생이지만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 안에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존재이며 주님의 사명을 받고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일을 이루어가는 자녀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이미 얼마나 많은 은혜와 선물을 받았는지 알며 이미 주님의 기적 가운데 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모든 인생은 준비된 만큼 행복할 수 있으며 주님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내가 건강하게 숨 쉬고, 맛있게 먹고 마시며,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행복을 느끼며, 작은 일들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기서 오직 나의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분께만 희망을 걸고 기도하면서 모든 것을 내맡기기 바랍니다. 이런 믿음으로 살아서, 주님께서 하신 일을 할 뿐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이루는 기적의 주인공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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