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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신6:2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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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제사와 예배
신6:20-24
*2007년 2월18일 주일 아침 설교 원문 입니다.
설 날 아침입니다. 오늘 아침을 맞으려고 4 천 만 명이 이리저리 움직여 고향을 찾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찾아가는 고향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차례’라고 하는 제사입니다.
이스라엘도 가장 중요한 제사가 있었습니다.
애급에서 가나안으로 나오던 날입니다. 이른바 ‘출 애급’이라고 하는 그 날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날로 기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날을 기념하는 뜻으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당시에는 ‘예배’라기 보다는 ‘제사’를 했다고 하는 게 맞습니다. 양을 잡고 그 피를 문설주에 먼저 바르고 집 구석구석에 칠한 다음에 고기를 나누어 먹은 것은 ‘예배’라는 말 보단 ‘제사’라는 표현이 가깝죠.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제사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그냥 절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출애급의 사건을 재현하고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양을 잡고 제사하는 것이 자기들의 죄 때문에, 자기들을 대신해서 희생하는 것이라고 발전을 시켜갔습니다.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것은 우리 선조들도 비슷하게 했듯이 악귀를 쫓는 상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여기서 피는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날이 되면 광야생활동안 당한 고난, 먹을 것 못 먹고, 잠자리 불편하고, 늘 찬밥으로 반찬도 없이 살던 때를 생각해서 아무런 양념도 들어가지 않은 떡, 무교병을 먹고 천막을 치고 들판으로 나가 자보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제사를 어디서든지 일 년에 꼭 한 번은 성대하게 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제사>는 과거를 현재화 하는 것으로 정착이 됩니다.
제사란 지나간 때의 일이나 사람을 현재화해서 실감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슬픈 일도 그렇고, 미웠던 사람도 그렇고, 이런 일체의 애환을 되살려 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그렇지만, 26:5~9, 수24:2~13, 시편 136편 등은 제사 때 자기들이 당했던 얘기를 사제가 읽으면 바로 화답하는 내용입니다. 시편 136편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10절-(사제)이집트 사람들의 맏아들을 치셨다=(회중)그의 사랑 영원 하시다
(사제)그 속에서 이스라엘을 구해 내셨다=(회중)그의 사랑 영원 하시다
(사제)억센 손 그의 팔을 휘두르셨다=(회중)그의 사랑 영원 하시다
(사제)홍해를 둘로 쪼개셨다=(회중)그의 사랑 영원하시다
이렇게 화답하면서 자기들의 역사를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다시 재생시켜서 기억에 회생시키는 것입니다. 이 시편의 마지막에 들어가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빼내 주셨다=그의 사랑 영원 하시다
입 가진 모든 것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그의 사랑 영원 하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감사 노래 불러라
이렇게 화답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물을 바치는 것도 결국 출 애급 하는 동안에 희생된 모든 사람들을 생각 하면서 자기 대신으로 양이나 또는 비둘기를 잡아서 제단에 바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사란 이렇게 <그 날>을 다시 재생시켜서 오늘 현재 우리의 삶에 깊숙이 다시 들어가고 그게 살아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했던 제사입니다.
다 잊혀진 것, 오늘 우리를 있게 한 것을 되새겨 기억하고 확인하는 것이 제사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너희 손자들이 묻거든 이런 얘기를 들려줘라 그것입니다. 우린 이렇게 이렇게 살면서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 이것을 대대에 사수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그것을 가능케 했느냐, 우리는 아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현재의 후손들이 경험케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배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오늘 이 시간에 모여서 다시 현재화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란 단순한 경배의 뜻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전체적으로 재생하고 그 과정 속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 속에 깃들었던 통합적이고 전체성의 역사는 사라지고 ‘절’만 남은 것처럼, 그리스도의 탄생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재생하고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 예배인데, 그건 빠지고 ‘경배’와 ‘찬양’과 ‘간구’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제사는 출애급의 역사입니다. 정신입니다. 삶입니다. 그 역사 속에 자신을 적극적으로 참여케 하는 것입니다. 대대로 이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의 역사입니다. 그 사건 속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 은총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대대로 이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온 몸으로 예수를 만나는 것입니다. 가장 확실하고 분명하며, 모범적으로 예수를 만나는 길은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오늘은 설날입니다.
설이 과거의 역사와 사람을 만나 그 속으로 들어가는 날이라면, 우리는 매일의 예배를 통해 십자가 예수의 역사를 재생하고 그의 삶과 고난과 부활과 승리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급의 사건 속에 들어가면 갈수록 출애급의 은총이 임했던 것처럼, 십자가 그리스도의 역사와 사건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만큼 완벽한 축복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것입니다.
신6:20-24
*2007년 2월18일 주일 아침 설교 원문 입니다.
설 날 아침입니다. 오늘 아침을 맞으려고 4 천 만 명이 이리저리 움직여 고향을 찾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찾아가는 고향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차례’라고 하는 제사입니다.
이스라엘도 가장 중요한 제사가 있었습니다.
애급에서 가나안으로 나오던 날입니다. 이른바 ‘출 애급’이라고 하는 그 날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날로 기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날을 기념하는 뜻으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당시에는 ‘예배’라기 보다는 ‘제사’를 했다고 하는 게 맞습니다. 양을 잡고 그 피를 문설주에 먼저 바르고 집 구석구석에 칠한 다음에 고기를 나누어 먹은 것은 ‘예배’라는 말 보단 ‘제사’라는 표현이 가깝죠.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제사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그냥 절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출애급의 사건을 재현하고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양을 잡고 제사하는 것이 자기들의 죄 때문에, 자기들을 대신해서 희생하는 것이라고 발전을 시켜갔습니다.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것은 우리 선조들도 비슷하게 했듯이 악귀를 쫓는 상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여기서 피는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날이 되면 광야생활동안 당한 고난, 먹을 것 못 먹고, 잠자리 불편하고, 늘 찬밥으로 반찬도 없이 살던 때를 생각해서 아무런 양념도 들어가지 않은 떡, 무교병을 먹고 천막을 치고 들판으로 나가 자보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제사를 어디서든지 일 년에 꼭 한 번은 성대하게 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제사>는 과거를 현재화 하는 것으로 정착이 됩니다.
제사란 지나간 때의 일이나 사람을 현재화해서 실감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슬픈 일도 그렇고, 미웠던 사람도 그렇고, 이런 일체의 애환을 되살려 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그렇지만, 26:5~9, 수24:2~13, 시편 136편 등은 제사 때 자기들이 당했던 얘기를 사제가 읽으면 바로 화답하는 내용입니다. 시편 136편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10절-(사제)이집트 사람들의 맏아들을 치셨다=(회중)그의 사랑 영원 하시다
(사제)그 속에서 이스라엘을 구해 내셨다=(회중)그의 사랑 영원 하시다
(사제)억센 손 그의 팔을 휘두르셨다=(회중)그의 사랑 영원 하시다
(사제)홍해를 둘로 쪼개셨다=(회중)그의 사랑 영원하시다
이렇게 화답하면서 자기들의 역사를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다시 재생시켜서 기억에 회생시키는 것입니다. 이 시편의 마지막에 들어가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빼내 주셨다=그의 사랑 영원 하시다
입 가진 모든 것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그의 사랑 영원 하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감사 노래 불러라
이렇게 화답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물을 바치는 것도 결국 출 애급 하는 동안에 희생된 모든 사람들을 생각 하면서 자기 대신으로 양이나 또는 비둘기를 잡아서 제단에 바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사란 이렇게 <그 날>을 다시 재생시켜서 오늘 현재 우리의 삶에 깊숙이 다시 들어가고 그게 살아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했던 제사입니다.
다 잊혀진 것, 오늘 우리를 있게 한 것을 되새겨 기억하고 확인하는 것이 제사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너희 손자들이 묻거든 이런 얘기를 들려줘라 그것입니다. 우린 이렇게 이렇게 살면서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 이것을 대대에 사수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그것을 가능케 했느냐, 우리는 아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현재의 후손들이 경험케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배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오늘 이 시간에 모여서 다시 현재화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란 단순한 경배의 뜻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전체적으로 재생하고 그 과정 속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 속에 깃들었던 통합적이고 전체성의 역사는 사라지고 ‘절’만 남은 것처럼, 그리스도의 탄생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재생하고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 예배인데, 그건 빠지고 ‘경배’와 ‘찬양’과 ‘간구’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제사는 출애급의 역사입니다. 정신입니다. 삶입니다. 그 역사 속에 자신을 적극적으로 참여케 하는 것입니다. 대대로 이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의 역사입니다. 그 사건 속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 은총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대대로 이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온 몸으로 예수를 만나는 것입니다. 가장 확실하고 분명하며, 모범적으로 예수를 만나는 길은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오늘은 설날입니다.
설이 과거의 역사와 사람을 만나 그 속으로 들어가는 날이라면, 우리는 매일의 예배를 통해 십자가 예수의 역사를 재생하고 그의 삶과 고난과 부활과 승리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급의 사건 속에 들어가면 갈수록 출애급의 은총이 임했던 것처럼, 십자가 그리스도의 역사와 사건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만큼 완벽한 축복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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