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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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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이제 우리는 준비 되었습니다.
출1:1-7
*2007년 3월4일의 설교 원고입니다.
말씀집회가 끝나고 난 첫 주일입니다.
원고가 제법 길지만 차근차근 읽으시면 또 다른 신학통찰을 얻게 됩니다.
“준비 됐나요?”
“준비 됐어요!”
아마, 오래전 성암 어린이집이 교회에 붙어 있었을 때 들었던 경쾌한 물음과
화답이었다고 느껴집니다. 선생님이 뭔가를 시작하려고 할 때 아이들을 집중시키고 새로운 학습이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고지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어린이집에서 그런 문답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린이집의 아이들에게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주만물들에게 항상 “준비 됐나요?”하시고 만물들은 “준비됐어요!” 하고 화답한다고 느껴집니다. 소리 없이 찾아 드는 봄기운이 그렇고 얼굴 없이 만물에게 생기를 불러일으키는 봄바람이 그렇습니다.
1945년 플레밍에게 노벨상이 주어지자 사람들은 페니실린을 발견한 게 우연이라고 그를 비웃었습니다. 플레밍의 푸른곰팡이는 그의 실험실 배양접시를 망치게 한 주인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플레밍은 푸른곰팡이가 세균 증식을 방해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결국 페니실린이 된 것입니다. 그걸 사람들은 우연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플레밍은 상을 받고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과학자에게 우연은 없습니다. 우연이 있다면 그것은 준비하고 기다린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기적은 준비된 사람에게만 일어납니다.”
저는 지난 말씀 사경회를 거치면서 3천 2백여 년 전에 활동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모세가 생각났습니다. 아니, ‘아멘’을 외칠 때 마다 두 손을 번쩍번쩍 들고 생명처럼 하늘로 솟구치던 교우들을 보면서, 새벽을 깨우며 달려 나와 은혜에 집중하던 교우들을 보면서, 금식을 하며 찬양을 인도하던 청년들을 보면서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장대한 역사를 이뤘던 ‘출애굽’의 사건이 다시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출애굽 사건을 말할 때 그 중심에 ‘모세’를 두고 시작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영웅이 되기도 합니다. 신앙의 모범으로 탐구되기도 합니다. ‘십계’라든지 ‘이집트 왕자 모세’라든지 하는 영화들이 바로 그런 관점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나타나는 모세는 이집트 왕자가 아닙니다. 그는 고난 받는 히브리 백성 가운데서 태어나, 인간으로서 기본적 권리도 누리지 못한 채 나일강에 띄워진, 버려진 아기일 뿐입니다. 이집트 공주의 자비심으로 그는 극적으로 구출되었지만 그가 바로 왕궁으로 간 것은 아닙니다. 그의 누이가 지혜를 발휘하여 공주에게 모세의 친어머니를 유모로 소개해서, 그는 다 자랄 때까지 친어머니와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왕궁에 이집트 공주의 양자로 들어가긴 했지만, 그가 어떻게 공주의 친아들과 같을 수 있으며, 더욱이 어떻게 이집트 왕자 람세스와 감히 어울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어른이 되었을 때, 어느 날 그는 왕궁 바깥으로 나갔다가 동족인 히브리 사람이 이집트 사람에게 매를 맞는 것을 보고, 격분하여 그 이집트 사람을 처 죽여서 모래 속에 묻어 버립니다. 모세를 새롭게 본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때 모세는 순간적인 실수로 그런 짓을 한 것으로 봅니다. 영화 〈이집트 왕자〉에서도 건축 현장 높은 곳에서 실수로 이집트 병사를 밀어 떨어뜨려서 죽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이 상황을 묘사하면서 분명히 “좌우를 살펴서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를 죽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2:12). 이는 그것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실수가 아니라 마음먹고 결행한 일임을 암시해 줍니다. 상상력을 동원해 본다면, 모세는 왕궁에서 사는 동안에 거기에서 벗어나는 날만을 고대해 왔을지도 모릅니다. 공주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것, 더군다나 히브리 사람의 자식이라는 것 때문에 은근히 멸시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왕궁에서 살기는 하지만 그는 줄곧 이집트 왕자가 아니라 히브리 사람으로 산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어른이 되었을 때 그는 곧 동족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을 죽인 것은 이런 맥락에서 보아야지 우발적인 사고로 볼 수 없습니다.
성서는 모세를 인간적인 약점이 없는 영웅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약점을 있는 그대로 상세하게, 반복해서 묘사합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그의 동족을 바로 왕으로부터 구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을 때, 그는 번번이 자기가 감히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느냐면서 뒤로 물러섭니다(3:11; 4:1, 10). 뿐만 아니라 일을 하다가 동족들의 반대에 부딪치자 하나님께 노골적인 불평까지 늘어놓습니다(5:22-23). 못하겠다는 이유도 여러 가지입니다. 어떻게 자기가 감히 바로 앞에 설 수 있느냐고 하기도 하고, 동족들이 자기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염려도 하고, 동족들이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 이름을 물으면 어쩌냐고 하고, 자신은 말재주가 없다고도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와 함께 있겠다면서 격려하기도 하고, 기적을 보여주기도 하고, 말 잘하는 아론을 대안으로 제시하기까지 하시면서, 그를 설득하려고 하십니다.
모세가 위대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고, 그를 쓰시기 때문이지, 그의 능력이 뛰어나거나, 그가 고뇌에 찬 결단을 내려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 모세, 그리고 히브리 백성으로 위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수직관계 속에서 모세를 보는 것은 문제입니다. 이런 수직관계에서 볼 때, 하나님을 대신하여 히브리 백성을 인도한 지도자, 또는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받아서 전달한 예언자로서 모세의 모습만 부각됩니다. 출애굽은 영웅적 지도자 모세의 업적이고, 그밖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의 고기 가마를 그리워하면서 불평이나 늘어놓는 존재들이 됩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결론으로 갖게 됩니다. 과연 이것이 성서가 그리는 모세의 모습이고 출애굽의 진상일까요?
모세를 제대로 보려면, 그런 수직관계가 아니라, 수평관계에서 보아야 합니다. 집회 첫 날을 마친 다음에 제 아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 집회를 기획한 목사님들, 오신 강사들(한충국 권사, 좋은 이웃 선교단, 김동준 목사), 은혜의 강이 되도록 기도하고 준비한 교우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은혜는 이렇게 우리가 준비 되었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가 봅니다.”
저는 그 때 알았습니다.
바로의 압제 아래에서 신음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던 히브리 노예들, 그들의 조상들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그들을 그 압제로부터 구하려고 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가운데서 임무를 수행하는 모세의 삼각관계에서 ‘출애굽’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을 말입니다. 결코 누구 하나의 어떤 능력으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 한 사람의 능력으로 된 일이거나,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저 이 사건 속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할 때 한 번도 사적으로 은밀하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을 외면하고 모세하고만 달랑 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용기를 내어 바로에게 가기까지, 하나님은 세 번 그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데, 모두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3:6-9, 14-15; 6:3-8). 하나님께서 호렙 산에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이제 내가 내려가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하여, 이 땅으로부터 저 아름답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으로 데려 가려고 한다. 지금도 이스라엘 자손이 부르짖는 소리가 나에게 들린다.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학대하는 것도 보인다”(3:6-9).
첫 번째 구절은 사두개파 사람들과의 부활 논쟁에서 예수께서 인용한 적이 있다. 예수는 이 구절을 인용한 다음,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하나님이시다” 하고 해석하였습니다(막 12:27). 아주 적절한 해석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사람들이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행동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저 높은 곳에서 원격 조종을 하는 분이 아니라, “이제 내려가서” 그들을 구원하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는” 분이며,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학대하는 것을 “보시는” 분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행동을 개시하시는 결정적 동기는 다름이 아니라 고난 받는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생각을 한 것도, 이스라엘 자손이 고된 일 때문에 탄식하며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2:23-24; 6:5). 모세가 어떤 영웅적 행동을 하거나 하나님께 부르짖어서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오히려 미디안으로 도망가서 그곳에서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살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집트 왕 바로 앞에 섰을 때 나이가 여든 살이었으니, 이미 모세에게서 이집트 사람을 죽이던 때의 혈기왕성함은 사라진 때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나이에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죠. 이런 사실은, 하나님이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라고 명령했을 때, 그가 여러 번 할 수 없다고 한 데서 잘 드러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물음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찌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그런 고통을 당하는 것을 내버려두다가 꼭 그렇게 부르짖을 때에야 행동을 개시하시느냐고. 뿐만 아니라, 행동을 개시한 다음에도 즉시 바로 왕을 격퇴하든가, 아니면 그의 마음을 움직여서 출애굽을 허락하게 하지 않고, 어찌하여 모세가 열 번씩이나 바로를 찾아가 기적을 일으키며 대결하게 하는가. 심지어 하나님이 일부러 바로로 하여금 고집을 부리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 보내지 않게 만들었다는 것(4:21; 7:3)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가?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얻은 해방과 자유는,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실제로 생명의 위협을 받아가면서 칠전팔기의 신앙으로 싸워서 획득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도 당하기 전에 미리 역사에 개입하셔서 출애굽을 시켜주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시는 마법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할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이런 것을 잘 보여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세가 이집트 사람을 죽인 다음날, 그는 히브리 사람 둘이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잘못한 사람에게 “당신은 왜 동족을 때리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대들면서,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단 말이냐? 당신이 이집트 사람을 죽이더니, 이제는 나도 죽일 작정이냐?” 하고 말하였습니다(2:13-14). 이 한마디로 모든 일이 탄로가 났으므로 모세는 미디안으로 도망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히브리 사람이 그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참지 못하여, 동족에게 우호적 마음을 갖고 다가서는 모세를 그런 식으로 고발하여 궁지에 넣은 데서,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출애굽의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억압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 동족끼리 싸우고 억압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그런 한계를 극복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억압을 당하는 가운데 스스로 그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것인지 깨달을 때까지, 얼마나 자주와 독립이 소중한지를 몸으로 깨달을 때까지, 그래서 “때가 차서”(막 1:15a), “이제는 이대로는 도저히 못 살겠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이렇게는 살 수 없다” 하고 부르짖을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것이다. 짐승들도 새끼를 보금자리에서 내쫓아서 강하게 훈련시킨다는데 하나님이 어찌 자기 백성을 훈련시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수직관계에서만 보면 이런 것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수평관계 또는 삼각관계에서 보면 이런 것은 새롭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유라는 개념을 미리 정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를 통하여 주입시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새롭게 계시하시는 것과 이스라엘 백성이 역사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은, 성서에서는 선후관계가 아니라 동시적 사건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 속에서 외치는 부르짖음이 하늘에까지 다다를 때,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것이고, 모세도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의 현장에서, 그 고통의 의미를 찾고 하나님을 새롭게 인식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스스로 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기 전에 자신을 새롭게 계시하셨습니다.
“나는 ‘주’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한 하나님’으로는 나타났으나, 그들에게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알리지 않았다”(6:2-3).
여기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새롭게 계시하시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인식하였음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그런 고난을 겪기 전에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El Shaddai)’으로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집트 사람들의 압제 속에서 고난 받는 가운데 부르짖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로 알려 주신 것입니다. 호렙 산에서 모세를 부르실 때 하나님은 처음으로 ‘여호와’라는 이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이름은 하나님을 부르는 고유명사로서 이름이 아니다. 그 이름은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라는 의미입니다(3:14-15). 이것은 흔히 ‘나는 스스로 있는 자(自存者)다’는 의미로 해석이 되는데, 이것은 오해의 소지가 많은 번역입니다. 이런 번역은, 히브리 성서를 헬라어로 옮길 때, 신을 ‘존재 자체’로 보는 헬라 철학의 영향으로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 이 이름은 어떤 존재를 설명하거나 이름 지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지만, 하나님은 실제로는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고, 자신은 이런 행동을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과 그 뜻이 같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해도,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의 현장을 도외시하고 하나님, 모세,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수직관계에서만 보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난의 현장에서 볼 때, 어찌하여 그들이 하나님을 ‘여호와’로 고백하게 되었는지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 어찌하여 바로의 압제에서 그들을 구해주지 않는지 묻고 또 물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고 항변도 많이 하였습니다. 바로 왕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자신들을 구해 주지도 못하는 무능한 하나님이 아니냐고 항변도 하였습니다. 그런 항변과 부르짖음이 하늘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전능하신 하나님’은 자신들은 가만히 있는데 기적을 펑펑 일으키는 분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스스로 있는 나’로 인식한 것은, 하나님은 그들이 필요에 따라서 요구하고 조종할 수 있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구원의 행동을 하시는 주체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있는 나’라면 그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들은, 이집트 왕이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종들이 아니라, ‘스스로 서는 사람들’이어야 함을 인식한 것입니다.
하우프트(Haupt)와 올브라이트(Albright) 같은 학자들은 ‘나는 스스로 있는 나이다’라는 이름을 3인칭 사역형으로 보아서 ‘나는 존재케 하는 자다’라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김이곤, 『출애굽기의 신학』, 54-56). 이것은, 노예 생활 속에서 한 때 체념으로 살기도 한 그들을 이제 새롭게 일으켜 세운다는 의미에서, ‘나는 스스로 서도록 돕는 나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고난 속에서 체념하지 않고 부르짖는 것과, 그리고 그 고난의 의미를 찾고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는 인식과, ‘전능하신 하나님’을 ‘스스로 서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새롭게 고백하는 것 사이에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것이죠.
이런 이스라엘 백성의 새로운 인식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과 계시의 한 가운데 모세가 있습니다. 모세는 때로 인간적인 약함도 보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준비가 되고, 하나님이 행동을 개시하실 때, 위대한 능력자요 민족의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집트 사람을 죽이던 혈기왕성함으로도 해내지 못한 민족의 지도자 역할을, 팔십이 된 노인인 모세가 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히브리 노예들은 그들의 고난을 그저 감내하거나, 체념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기에서 의미를 찾았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원망하지 않고, 그들을 스스로 서게 하시는 분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즉시 구해 주지 않고,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고 고집스럽게 만들어가면서까지 그들을 고생을 시킬 때도,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들을 훈련시키고 기르기 위해 바로 왕까지도 쓰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그랬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겪은 고난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으리라는 각오로 목숨을 걸고 탈출을 하고, 사막에서 어떤 고생을 할지라도 절대로 이집트로 되돌아가지 않겠다는 투철한 의지를 다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런 새로운 인식과 믿음이 출애굽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그들이 억압받는 광경을 보시고 분노하면서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하나님, 그러나 이스라엘이 준비가 되기까지는 기다리시는 하나님, 그리하여 히브리 노예들을 체념과 굴종 속에 쓰러지게 놔두지 않고 스스로 서게 하시는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3:18)가 계셨기에 출애굽은 가능하였습니다.
인간적인 약함도 갖고 있지만,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믿고, 이집트 왕궁을 탈출하여 광야로 나서고, 신적 권위로 군림하는 바로 앞에 하나님의 지팡이 하나로 나선 모세, 열 번 찍어도 넘어가지 않는 나무처럼 끈질긴 식민지배 세력의 발악 앞에서도 굽히지 않고 투쟁한 모세, 어려움 당할 때마다 원망을 늘어놓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설득하여 인도해낸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있었기에 출애굽은 가능했습니다.
자! 오늘 저의 입을 빌려서 성암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준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일어날 준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 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스스로 있도록 돕는 존재다.” 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그냥 앉아서 하나님의 기적을 기다릴 수 없음도 알았습니다. 모세는 결코 영웅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을 뿐입니다.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유와 승리의 행진이 시작되었습니다.
성암교회와 성암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출1:1-7
*2007년 3월4일의 설교 원고입니다.
말씀집회가 끝나고 난 첫 주일입니다.
원고가 제법 길지만 차근차근 읽으시면 또 다른 신학통찰을 얻게 됩니다.
“준비 됐나요?”
“준비 됐어요!”
아마, 오래전 성암 어린이집이 교회에 붙어 있었을 때 들었던 경쾌한 물음과
화답이었다고 느껴집니다. 선생님이 뭔가를 시작하려고 할 때 아이들을 집중시키고 새로운 학습이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고지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어린이집에서 그런 문답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린이집의 아이들에게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주만물들에게 항상 “준비 됐나요?”하시고 만물들은 “준비됐어요!” 하고 화답한다고 느껴집니다. 소리 없이 찾아 드는 봄기운이 그렇고 얼굴 없이 만물에게 생기를 불러일으키는 봄바람이 그렇습니다.
1945년 플레밍에게 노벨상이 주어지자 사람들은 페니실린을 발견한 게 우연이라고 그를 비웃었습니다. 플레밍의 푸른곰팡이는 그의 실험실 배양접시를 망치게 한 주인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플레밍은 푸른곰팡이가 세균 증식을 방해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결국 페니실린이 된 것입니다. 그걸 사람들은 우연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플레밍은 상을 받고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과학자에게 우연은 없습니다. 우연이 있다면 그것은 준비하고 기다린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기적은 준비된 사람에게만 일어납니다.”
저는 지난 말씀 사경회를 거치면서 3천 2백여 년 전에 활동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모세가 생각났습니다. 아니, ‘아멘’을 외칠 때 마다 두 손을 번쩍번쩍 들고 생명처럼 하늘로 솟구치던 교우들을 보면서, 새벽을 깨우며 달려 나와 은혜에 집중하던 교우들을 보면서, 금식을 하며 찬양을 인도하던 청년들을 보면서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장대한 역사를 이뤘던 ‘출애굽’의 사건이 다시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출애굽 사건을 말할 때 그 중심에 ‘모세’를 두고 시작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영웅이 되기도 합니다. 신앙의 모범으로 탐구되기도 합니다. ‘십계’라든지 ‘이집트 왕자 모세’라든지 하는 영화들이 바로 그런 관점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나타나는 모세는 이집트 왕자가 아닙니다. 그는 고난 받는 히브리 백성 가운데서 태어나, 인간으로서 기본적 권리도 누리지 못한 채 나일강에 띄워진, 버려진 아기일 뿐입니다. 이집트 공주의 자비심으로 그는 극적으로 구출되었지만 그가 바로 왕궁으로 간 것은 아닙니다. 그의 누이가 지혜를 발휘하여 공주에게 모세의 친어머니를 유모로 소개해서, 그는 다 자랄 때까지 친어머니와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왕궁에 이집트 공주의 양자로 들어가긴 했지만, 그가 어떻게 공주의 친아들과 같을 수 있으며, 더욱이 어떻게 이집트 왕자 람세스와 감히 어울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어른이 되었을 때, 어느 날 그는 왕궁 바깥으로 나갔다가 동족인 히브리 사람이 이집트 사람에게 매를 맞는 것을 보고, 격분하여 그 이집트 사람을 처 죽여서 모래 속에 묻어 버립니다. 모세를 새롭게 본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때 모세는 순간적인 실수로 그런 짓을 한 것으로 봅니다. 영화 〈이집트 왕자〉에서도 건축 현장 높은 곳에서 실수로 이집트 병사를 밀어 떨어뜨려서 죽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이 상황을 묘사하면서 분명히 “좌우를 살펴서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를 죽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2:12). 이는 그것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실수가 아니라 마음먹고 결행한 일임을 암시해 줍니다. 상상력을 동원해 본다면, 모세는 왕궁에서 사는 동안에 거기에서 벗어나는 날만을 고대해 왔을지도 모릅니다. 공주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것, 더군다나 히브리 사람의 자식이라는 것 때문에 은근히 멸시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왕궁에서 살기는 하지만 그는 줄곧 이집트 왕자가 아니라 히브리 사람으로 산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어른이 되었을 때 그는 곧 동족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을 죽인 것은 이런 맥락에서 보아야지 우발적인 사고로 볼 수 없습니다.
성서는 모세를 인간적인 약점이 없는 영웅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약점을 있는 그대로 상세하게, 반복해서 묘사합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그의 동족을 바로 왕으로부터 구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을 때, 그는 번번이 자기가 감히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느냐면서 뒤로 물러섭니다(3:11; 4:1, 10). 뿐만 아니라 일을 하다가 동족들의 반대에 부딪치자 하나님께 노골적인 불평까지 늘어놓습니다(5:22-23). 못하겠다는 이유도 여러 가지입니다. 어떻게 자기가 감히 바로 앞에 설 수 있느냐고 하기도 하고, 동족들이 자기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염려도 하고, 동족들이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 이름을 물으면 어쩌냐고 하고, 자신은 말재주가 없다고도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와 함께 있겠다면서 격려하기도 하고, 기적을 보여주기도 하고, 말 잘하는 아론을 대안으로 제시하기까지 하시면서, 그를 설득하려고 하십니다.
모세가 위대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고, 그를 쓰시기 때문이지, 그의 능력이 뛰어나거나, 그가 고뇌에 찬 결단을 내려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 모세, 그리고 히브리 백성으로 위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수직관계 속에서 모세를 보는 것은 문제입니다. 이런 수직관계에서 볼 때, 하나님을 대신하여 히브리 백성을 인도한 지도자, 또는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받아서 전달한 예언자로서 모세의 모습만 부각됩니다. 출애굽은 영웅적 지도자 모세의 업적이고, 그밖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의 고기 가마를 그리워하면서 불평이나 늘어놓는 존재들이 됩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결론으로 갖게 됩니다. 과연 이것이 성서가 그리는 모세의 모습이고 출애굽의 진상일까요?
모세를 제대로 보려면, 그런 수직관계가 아니라, 수평관계에서 보아야 합니다. 집회 첫 날을 마친 다음에 제 아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 집회를 기획한 목사님들, 오신 강사들(한충국 권사, 좋은 이웃 선교단, 김동준 목사), 은혜의 강이 되도록 기도하고 준비한 교우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은혜는 이렇게 우리가 준비 되었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가 봅니다.”
저는 그 때 알았습니다.
바로의 압제 아래에서 신음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던 히브리 노예들, 그들의 조상들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그들을 그 압제로부터 구하려고 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가운데서 임무를 수행하는 모세의 삼각관계에서 ‘출애굽’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을 말입니다. 결코 누구 하나의 어떤 능력으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 한 사람의 능력으로 된 일이거나,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저 이 사건 속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할 때 한 번도 사적으로 은밀하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을 외면하고 모세하고만 달랑 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용기를 내어 바로에게 가기까지, 하나님은 세 번 그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데, 모두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3:6-9, 14-15; 6:3-8). 하나님께서 호렙 산에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이제 내가 내려가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하여, 이 땅으로부터 저 아름답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으로 데려 가려고 한다. 지금도 이스라엘 자손이 부르짖는 소리가 나에게 들린다.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학대하는 것도 보인다”(3:6-9).
첫 번째 구절은 사두개파 사람들과의 부활 논쟁에서 예수께서 인용한 적이 있다. 예수는 이 구절을 인용한 다음,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하나님이시다” 하고 해석하였습니다(막 12:27). 아주 적절한 해석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사람들이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행동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저 높은 곳에서 원격 조종을 하는 분이 아니라, “이제 내려가서” 그들을 구원하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는” 분이며,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학대하는 것을 “보시는” 분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행동을 개시하시는 결정적 동기는 다름이 아니라 고난 받는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생각을 한 것도, 이스라엘 자손이 고된 일 때문에 탄식하며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2:23-24; 6:5). 모세가 어떤 영웅적 행동을 하거나 하나님께 부르짖어서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오히려 미디안으로 도망가서 그곳에서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살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집트 왕 바로 앞에 섰을 때 나이가 여든 살이었으니, 이미 모세에게서 이집트 사람을 죽이던 때의 혈기왕성함은 사라진 때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나이에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죠. 이런 사실은, 하나님이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라고 명령했을 때, 그가 여러 번 할 수 없다고 한 데서 잘 드러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물음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찌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그런 고통을 당하는 것을 내버려두다가 꼭 그렇게 부르짖을 때에야 행동을 개시하시느냐고. 뿐만 아니라, 행동을 개시한 다음에도 즉시 바로 왕을 격퇴하든가, 아니면 그의 마음을 움직여서 출애굽을 허락하게 하지 않고, 어찌하여 모세가 열 번씩이나 바로를 찾아가 기적을 일으키며 대결하게 하는가. 심지어 하나님이 일부러 바로로 하여금 고집을 부리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 보내지 않게 만들었다는 것(4:21; 7:3)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가?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얻은 해방과 자유는,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실제로 생명의 위협을 받아가면서 칠전팔기의 신앙으로 싸워서 획득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도 당하기 전에 미리 역사에 개입하셔서 출애굽을 시켜주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시는 마법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할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이런 것을 잘 보여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세가 이집트 사람을 죽인 다음날, 그는 히브리 사람 둘이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잘못한 사람에게 “당신은 왜 동족을 때리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대들면서,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단 말이냐? 당신이 이집트 사람을 죽이더니, 이제는 나도 죽일 작정이냐?” 하고 말하였습니다(2:13-14). 이 한마디로 모든 일이 탄로가 났으므로 모세는 미디안으로 도망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히브리 사람이 그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참지 못하여, 동족에게 우호적 마음을 갖고 다가서는 모세를 그런 식으로 고발하여 궁지에 넣은 데서,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출애굽의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억압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 동족끼리 싸우고 억압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그런 한계를 극복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억압을 당하는 가운데 스스로 그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것인지 깨달을 때까지, 얼마나 자주와 독립이 소중한지를 몸으로 깨달을 때까지, 그래서 “때가 차서”(막 1:15a), “이제는 이대로는 도저히 못 살겠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이렇게는 살 수 없다” 하고 부르짖을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것이다. 짐승들도 새끼를 보금자리에서 내쫓아서 강하게 훈련시킨다는데 하나님이 어찌 자기 백성을 훈련시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수직관계에서만 보면 이런 것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수평관계 또는 삼각관계에서 보면 이런 것은 새롭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유라는 개념을 미리 정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를 통하여 주입시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새롭게 계시하시는 것과 이스라엘 백성이 역사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은, 성서에서는 선후관계가 아니라 동시적 사건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 속에서 외치는 부르짖음이 하늘에까지 다다를 때,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것이고, 모세도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의 현장에서, 그 고통의 의미를 찾고 하나님을 새롭게 인식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스스로 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기 전에 자신을 새롭게 계시하셨습니다.
“나는 ‘주’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한 하나님’으로는 나타났으나, 그들에게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알리지 않았다”(6:2-3).
여기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새롭게 계시하시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인식하였음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그런 고난을 겪기 전에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El Shaddai)’으로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집트 사람들의 압제 속에서 고난 받는 가운데 부르짖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로 알려 주신 것입니다. 호렙 산에서 모세를 부르실 때 하나님은 처음으로 ‘여호와’라는 이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이름은 하나님을 부르는 고유명사로서 이름이 아니다. 그 이름은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라는 의미입니다(3:14-15). 이것은 흔히 ‘나는 스스로 있는 자(自存者)다’는 의미로 해석이 되는데, 이것은 오해의 소지가 많은 번역입니다. 이런 번역은, 히브리 성서를 헬라어로 옮길 때, 신을 ‘존재 자체’로 보는 헬라 철학의 영향으로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 이 이름은 어떤 존재를 설명하거나 이름 지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지만, 하나님은 실제로는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고, 자신은 이런 행동을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과 그 뜻이 같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해도,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의 현장을 도외시하고 하나님, 모세,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수직관계에서만 보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난의 현장에서 볼 때, 어찌하여 그들이 하나님을 ‘여호와’로 고백하게 되었는지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 어찌하여 바로의 압제에서 그들을 구해주지 않는지 묻고 또 물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고 항변도 많이 하였습니다. 바로 왕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자신들을 구해 주지도 못하는 무능한 하나님이 아니냐고 항변도 하였습니다. 그런 항변과 부르짖음이 하늘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전능하신 하나님’은 자신들은 가만히 있는데 기적을 펑펑 일으키는 분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스스로 있는 나’로 인식한 것은, 하나님은 그들이 필요에 따라서 요구하고 조종할 수 있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구원의 행동을 하시는 주체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있는 나’라면 그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들은, 이집트 왕이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종들이 아니라, ‘스스로 서는 사람들’이어야 함을 인식한 것입니다.
하우프트(Haupt)와 올브라이트(Albright) 같은 학자들은 ‘나는 스스로 있는 나이다’라는 이름을 3인칭 사역형으로 보아서 ‘나는 존재케 하는 자다’라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김이곤, 『출애굽기의 신학』, 54-56). 이것은, 노예 생활 속에서 한 때 체념으로 살기도 한 그들을 이제 새롭게 일으켜 세운다는 의미에서, ‘나는 스스로 서도록 돕는 나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고난 속에서 체념하지 않고 부르짖는 것과, 그리고 그 고난의 의미를 찾고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는 인식과, ‘전능하신 하나님’을 ‘스스로 서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새롭게 고백하는 것 사이에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것이죠.
이런 이스라엘 백성의 새로운 인식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과 계시의 한 가운데 모세가 있습니다. 모세는 때로 인간적인 약함도 보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준비가 되고, 하나님이 행동을 개시하실 때, 위대한 능력자요 민족의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집트 사람을 죽이던 혈기왕성함으로도 해내지 못한 민족의 지도자 역할을, 팔십이 된 노인인 모세가 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히브리 노예들은 그들의 고난을 그저 감내하거나, 체념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기에서 의미를 찾았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원망하지 않고, 그들을 스스로 서게 하시는 분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즉시 구해 주지 않고,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고 고집스럽게 만들어가면서까지 그들을 고생을 시킬 때도,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들을 훈련시키고 기르기 위해 바로 왕까지도 쓰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그랬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겪은 고난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으리라는 각오로 목숨을 걸고 탈출을 하고, 사막에서 어떤 고생을 할지라도 절대로 이집트로 되돌아가지 않겠다는 투철한 의지를 다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런 새로운 인식과 믿음이 출애굽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그들이 억압받는 광경을 보시고 분노하면서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하나님, 그러나 이스라엘이 준비가 되기까지는 기다리시는 하나님, 그리하여 히브리 노예들을 체념과 굴종 속에 쓰러지게 놔두지 않고 스스로 서게 하시는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3:18)가 계셨기에 출애굽은 가능하였습니다.
인간적인 약함도 갖고 있지만,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믿고, 이집트 왕궁을 탈출하여 광야로 나서고, 신적 권위로 군림하는 바로 앞에 하나님의 지팡이 하나로 나선 모세, 열 번 찍어도 넘어가지 않는 나무처럼 끈질긴 식민지배 세력의 발악 앞에서도 굽히지 않고 투쟁한 모세, 어려움 당할 때마다 원망을 늘어놓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설득하여 인도해낸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있었기에 출애굽은 가능했습니다.
자! 오늘 저의 입을 빌려서 성암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준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일어날 준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 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스스로 있도록 돕는 존재다.” 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그냥 앉아서 하나님의 기적을 기다릴 수 없음도 알았습니다. 모세는 결코 영웅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을 뿐입니다.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유와 승리의 행진이 시작되었습니다.
성암교회와 성암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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